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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경전의 배경, 알렉산드로스 대왕부터 바르 코시바까지

편집장 슈렉요한 2015. 3. 9. 23:30

제1장 신약성경의 형성과 그 배경사



구약성경과 비교를 하자면, 신약은 그 배경이 되는 시대가 아주 짧다. 오로지 나자렛 예수의 삶에서부터 시작하여 신약성경이 완성되기까지 전승의 여러 단계가 모두 이루어졌다. 신약 성경도 다양한 문학형식을 보이고 있는데 그 양식을 통해서 단계들을 비교적 정확히 알아 볼 수 있다. 


3. 신약 경전 배경사


"때가 차서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시어" (갈라 4,4)


3-1. 마카베오 항쟁과 하스몬 왕조


구약의 마지막 부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


먼저 구약 역사의 마지막 부분을 되짚어보자. 마케도니아의 임금 알렉산드로스는 넓은 제국을 건설하고 그리스 문화를 여러 지역에 전파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로 인해서 그리스, 페르시아, 이집트 등의 문화들이 서로 만나 형성된 거대한 문화권은 이후의 역사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리스도교가 팔레스티나에서 아람어를 말하던 예수님과 그 제자들에게서부터 전파되었는데도, 신약성경이 그리스어로 기록되었다는 것만 보아도 이미 그 강력한 영향력을 알아볼 수 있다. 


알렉산드로스 사후


알렉산드로스 사후에는 그의 장군들이 제국을 분할하여 통치했다. 그 장군들 틈에서 세력다툼이 있었고, 그 사이에 끼어있던 팔레스티나는 처음에는 이집트를 다스리던 프톨레마이오스 라지드 왕조, 나중에는 메소포타미아와 시리아를 다스리던 셀레우코스 왕조의 통치를 받았다. 바로 그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 4세가 유다교를 박해하고 그리스 종교와 문화를 강요하였다. 당시에는 외세의 지배자들뿐만 아니라 유다교의 지도자들도 백성을 올바로 이끄는 역할을 하지 못했다. 대사제 오니야스 3세의 동생 야손은 셀레우코스 왕조에 뇌물을 바쳐 형 오니야스 3세를 몰아내고 자신이 대사제로 임명되었으며, 그 후 3년이 지난 다음에는 다시 메넬리오스가 야손보다 더 많은 뇌물을 바쳐 다시 대사제직을 빼앗았다. 대사제직의 권위는 유지될 수 없었고, 외세에 대한 반발은 점점 더 강해지다가 결국 마카베오 항쟁이 일어났다. 마카베오 집안의 지도자들은 다음과 같이 계승되었다.


마카베오 집안의 지도자 승계


  • 기원전 166년  마타티아스

  • 기원전 166-160년 유다 마카베오 (마타티아스의 셋째 아들)

  • 기원전 160-143년 요나탄 (마타티아스의 다섯째 아들)

  • 기원전 143-134년 시몬 (마타티아스의 둘째 아들)

  • 기원전 134-104년 요한 히르카노스 1세 (시몬의 아들)

  • 기원전 104-103년 아리스토불로스 1세 (히르카노스 1세의 아들)

  • 기원전 103-74년  안내우스 (아리스토불로스 1세의 동생)

  • 기원전 76-67년   살로메 알렉산드라 (부인)

  • 기원전 67년, 63-40년 히르카노스 2세(아들), 동생 아리스토불로스 2세와의 세력다툼

  • 기원전 67-63년 아리스토불로스 2세 (히르카노스 2세의 동생)

  • 기원전 40-37년 안티고누스 (아리스토불로스 2세의 아들)

  • 기원전 35년 아리스토불로스 3세 (히르카노스 2세의 손자)


유다 마카베오의 성전 정화


마타티아스의 셋째 아들 유다 마카베오가 항쟁을 이끌던 기원전 164년에는 이교인들이 모독했던 성전을 다시 정화하여 봉헌하였다. 성전 정화는 대단히 의미가 깊은 일이었다. (마카베오기 하권 참조) 그러나 완전한 독립을 얻은 것은 아니었으며 항쟁은 계속되었다.


군사적·종교적 지도자를 겸한 요나탄


유다의 뒤를 이은 것은 마타티아스의 다섯째 아들 요나탄이었는데, 그는 셀레우코스 왕조로부터 대사제로 인정을 받음으로써 군사적, 종교적 지도자를 겸하게 되었다. 그 후에는 마타티아스의 둘째 아들 시몬이 대사제직과 함께 세습되는 지배권을 받아 왕조가 시작되었다. 이렇게 하여 실질적으로 주권을 되찾게 되었지만, 모든 이들이 이들을 지지한 것은 아니었다. 다윗 집안도, 대사제 집안도 아니면서 종교적, 정치적 권력을 지니게 된 하스몬 왕가는 사실 많은 반대를 받기도 했고, 쿰란 공동체와 같이 율법에 충실하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과 사제들을 멀리하여 광야로 물러가는 이들도 생겨났다. 시몬은 기원전 134년에 살해되었지만, 그의 아들 요한 히르카노스 1세가 통치권을 계승하였다. 이후로 마카베오 집안이 분열과 부패를 겪게 되면서 하스몬 왕조에 대한 지지는 더욱 악화될 것이었다.


하르카노스 1세의 영토확장


이후로 마카베오 집안의 역사는 매우 복잡해진다. 요한 히르카노스 1세는 사마리아와 이두매아 등을 공격하여 영토를 확장하였다. 그 다음에는 그의 아들 아리스토불로스 1세가 집권했는데(기원전 104년), 본래 요한 히르카노스 1세는 부인에게 통치를 맡기려 했었으나 아리스토불로스 1세가 어머니를 몰아내고 세 동생을 가둔 것이었다. 그는 임금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기원전 103년에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으며, 이에 그의 아내 살로메 알렉산드라는 남편의 동생인 알렉산드로스 안내오스를 감옥에서 풀어주고 임금이 되게 한다.


알렉산드로스 안내오스의 억압통치


그는 바리사이들을 억압하였고 백성들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다음에는 그의 아내가 되었던 살로메 알렉산드라가 통치했는데(기원전 76-67년), 실권은 자신이 갖고 있었으나 여성으로서 대사제가 될 수는 없었기때문에 대사제직은 아들 요한 히르카노스 2세에게 맡겼다. 그녀의 통치는 이전과 이후의 임금들에 비하면 그래도 신중한 편이었다.


살로메 알렉산드라 사후에는 일단 큰 아들 히르카노스 2세가 임금이 되었지만, 그의 동생 아리스토불로스 2세가 사두가이파의 도움으로 에루살렘을 공격하고 그를 몰아내었다. 그후에 히르카노스 2세는 이두매아의 안티파테르의 도움을 청했고, 또한 안티파테르의 권고를 받아 나바테아인들의 많은 지원도 청하여 예루살렘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 상황 속에서 히르카노스 2세와 아리스토불로스 2세는 각각 막강한 힘으로 팽창하고 있던 로마의 지지를 얻으려고 했는데, 기원전 63년에 아리스토불로스 2세가 군사력을 움직이자 폼페이우스는 예루살렘을 공격하였다. 그는 지성소까지 들어감으로써 성전을 모독하였으나 성전을 파괴하지는 않았다. 히르카노스는 다시 대사제로 임명되었지만, 이제 팔레스티나는 로마의 식민지가 되었다.



3-2. 로마 지배 하의 팔레스티나


로마에서 처음 개입한 이는 '폼페이우스'


로마에서 팔레스티나에 처음 개입한 것은 폼페이우스였고 그가 히르카노스 2세를 지지해준 것이었다. 그러나 로마의 정치 변동 속에서 히르카노스 2세와 그의 신하 안티파테르는 카이사르에게 돌아서서 필요한 때에 그를 돕고는 그 보답으로 팔레스티나에서 실권을 장악했다. 티파테르는 로마의 행정관(procurator)으로 임명되었고, 두 아들 파사엘과 헤로데(미래의 헤로데 대왕)를 각각 유다와 갈릴래아의 영주로 임명하였다. 


헤로데의 아버지, 안티파테르의 정치수완


이후에 로마의 정치상황은 끊임없이 변해갔고 팔레스티나에서는 아리스토불로스 2세의 아들 안티고노스의 무력봉기로 상황이 매우 혼란스러웠으나, 그 속에서도 안티파테르의 아들 헤로데는 로마로 가서 안토니우스의 지지를 얻는 데에 성공하고 기원전 40년에는 유다와 사마리아의 임금으로 임명되었다. 실제로 그 때에는 아직 안티고노스가 지배하고 있었지만, 기원전 37년에는 헤로데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왕위에 올라 기원전 4년까지 통치했다.


잔인한 헤로데의 통치


헤로데의 통치는 정략적이고 잔인했다. 로마의 지지로 권력을 잡았던 그가 손해들을 감수해가면서도 로마의 호의를 잃지 않으려고 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뿐 아니라 이두매아 출신이었던 그는 유다인들의 환심을 사려고 성전을 크게 개축하기도 했다. 그러나 충실한 유다인들은 그를 미워했고, 오히려 그리스 문화를 받아들인 유다인들이 그를 지지했다. 그는 사마리아를 '세바스테'라는 이름으로 재건하고 항구를 건설하여 '카이사리아'로 명명했다. 또 한편으로 히르카노스 2세의 손녀 마리암네와 결혼하기도 했지만 결국은 하스몬 집안을 경계하고 미워하여 마리암네와 아들 알렉산드로스를 죽이고 말았다. 마태 2장에 나오는, 자신의 왕권이 위협받는 것을 두려워하여 베들레헴의 아기들을 죽이라고 명하는 헤로데의 모습 역시 이러한 배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헤로데 사후, 세 아들이 3분할 통치


헤로데 사후에는 그의 세 아들들이 왕국을 나누어 통치했다. 아르켈라오스는 그의 세 아들들이 왕국을 나누어 통치했다. 아르켈라오스는 유다와 사마리아를 다스렸는데, 폭정에 불만을 품은 관리들이 로마의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 폐위를 요청하여 결국 아르켈라오스는 기원 후 6년에 쫓겨났고, 그가 다스리던 지역은 로마 총독에게 맡겨졌다(그 총독들 가운데 하나가 기원 후 26-36년에 다스렸던 본시오 빌라도이다). 


예수님 수난에 등장하는 헤로데는 둘째 아들 헤로데 안티파스


둘째 아들 헤로데 안티파스는 갈릴래아와 베로이아를 통치했고, 복음서들에서 예수님이 수난 때에 등장하는 헤로데가 바로 이 헤로데 안티파스이다. 그는 아버지 헤로데 대왕처럼 건축사업에 관심을 기울여 티베리아스를 건설했다. 이복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와 결혼하여 세례자 요한에게 비난을 받은 것이 바로 그인데, 그는 39년에 칼리굴라 황제에 의하여 갈리아로 유배되었다. 셋째 아들 필리포스는 갈릴래아 호수의 북동쪽 지방을 다스렸다.


아그리파스 1세의 통치


필리포스가 세상을 떠난 후 시리아에 귀속되었던 그의 영토와 헤로데 안티파스가 다스리던 영토는 결국 헤로데 대왕의 손자인 아그리파스 1세에게 넘어간다. 로마 황제 클라우디우스가 그의 왕권을 인정하고 로마 총독이 다스리던 사마리아, 유다, 이두매아 땅까지 그에게 주었으므로, 그는 결국 헤로데 대왕이 다스리던 지역 전체의 임금이 된 것이었다(41년). 아그리파스 1세 자신은 그리스 문화를 받아들인 사람이었지만 유다인들의 지지를 얻으려고 노력하였고, 바로 그런 이유로 예루살렘의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여 야고보를 죽이고 베드로를 체포하였다. 그는 44년에 세상을 떠났다.


66년, 제1차 유다항쟁


44년 이후 유다, 사마리아, 이두매아는 66년까지 계속 로마 총독이 통치했고, 전에 필리포스가 다스리던 영토와 아빌레네 정도만을 아그리파스 2세가 다스렸는데, 이 시기에 로마에 대한 유다인들의 반감이 커지다가 66년 제 1차 유다항쟁이 일어났다. 로마 점령군들과 특히 총독 플로루스의 강압적인 태도가 유다인들을 자극했을 뿐만 아니라, 플로루스가 성전 금고에서 17달란트를 꺼내간 사건까지 발생하자 유다인들의 폭동이 시작되었다.


유다 반군의 마싸다 등 요새 점령 ... 처음엔 잘 나갔다


반군은 처음에 마싸다를 비롯하여 여러 요새들을 점령했지만, 조직이 부족하고 내분이 일어 어려움이 많았다. 로마의 네로 황제는 베스파시아누스를 파견하였고, 그는 아들 티투스와 함께 갈릴래아를 공격하여 평정하고 예루살렘을 포위했다. 이 상황에서 네로가 자살하고 로마의 정국이 매우 불안해져 로마군이 공격을 중단하기도 하였으나,


70년, 예루살렘 파괴, 성전은 불길 속으로


결국 70년에는 예루살렘이 파괴되었고 성전도 불탔다. 이 때에 일부 반군은 마싸다로 가서 끝까지 항거했는데, 73년에는 마싸다도 함락되었다. 구약 시대 끝무렵에도 이미 많은 유다인들은 팔레스티나를 떠나 여러 곳에 흩어져 살고 있었는데(디아스포라의 유다인들), 예루살렘이 파괴된 이후에는 더 많은 유다인들이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시리아의 안티오키아, 로마 등지로 흩어져 갔다.


132~135년, 제2차 유다항쟁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 치세 때인 132~135년에는 다시 제2차 유다항쟁이 일어났다. 이 시기에 대해서는 역사기록이 부족한테, 항쟁이 일어나게 된 원인은 하드리아누스가 할례를 금지했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아니면 그가 예루살렘 폐허에 새 도시를 짓고 성전 자리에 유피테르 신전을 세우려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항쟁 지도자 바르 코시바에게 붙은 별명은 '별의 아들'(바르 코크바)


항쟁의 지도자는 바르 코시바였는데, 랍비 아키바가 그를 민수 24,17에 예언된 메시아라고 하였기 때문에, '바르 코크바'(별의 아들)가 그의 별칭이 되었다. 그러나 결국 반란은 로마인들에게 진압되었고 바르 코시바는 전사하였으며  랍비 아키바는 로마인들에게 처형되었다. 이후에 유다인들은 예루살렘에 들어갈 수 없게 되었, 땅을 빼앗기고 완전히 흩어지게 되었다. (끝)



가톨릭교리신학원 통신신학교육부 제2단계 1학년(3학년) 봄학기

가톨릭신학연구실 편찬교재 [신약1(공관복음.사도행전)]

제1장 신약성경의 형성과 그 배경사 ③ 신약경전 배경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