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노트/복음과사도행전

신약시대 유다교 내의 종교 집단들

편집장 슈렉요한 2015. 3. 10. 23:30

제1장 신약성경의 형성과 그 배경사



구약성경과 비교를 하자면, 신약은 그 배경이 되는 시대가 아주 짧다. 오로지 나자렛 예수의 삶에서부터 시작하여 신약성경이 완성되기까지 전승의 여러 단계가 모두 이루어졌다. 신약 성경도 다양한 문학형식을 보이고 있는데 그 양식을 통해서 단계들을 비교적 정확히 알아 볼 수 있다. 



4. 신약시대 유다교 내의 종교 집단들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마태 16,6)


유다교 내의 대표적인 3대 종교집단


신약성경은 유다교만을 문화적, 종교적 배경으로 형성된 게 아니다. 신약에 포함된 여러 책들을 깊이 이해하려면, 그리스와 로마의 신화와 종교와 철학, 그리고 영지주의 등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도움이 된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특히 유다교 내의 종교집단들을 살펴본다. 복음서를 보면 특별히 사두가이와 바리사이가 자주 언급된다. 그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자주 그들의 주장과 대비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의 책들을 이해하려는 것도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배경을 파악하는 차원에서도 이들을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요세푸스가 언급한 3개 집단, 사두가이, 바리사이, 에세네파


당시 대표적 종교집단들로서는, 플라비우스 요세푸스(Flavius Josephus)가 그의 <유다 고사>(Antiquitates Iudaicae)에서 언급한 3개의 집단 <바리사이>, <사두가이>, <에세네파>를 주목할 수 있다.

많은 유다인들이 이 세 집단에 속했던 것은 않았을 것이고, 이들 외에도 다른 무리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들을 중심으로 당시의 흐름을 파악할 수는 있겠다.


4-1. 사두가이

예루살렘 사제 귀족, 사두가이들


주로 사제들로 구성되어 있는 자들이 사두가이파였다. 이들은 기원후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면서 몰락했다. 그래서 성전 몰락 후에 이들에 대한 기록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사두가이라는 명칭은 솔로몬 시대의 대사제 차독의 이름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두가이들이 실제로 차독의 후손이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모든 사제들이 사두가이였던 것도 아니다.


지방의 사제는 바리사이들이었다


지방의 사제들은 오히려 바리사이에 속한 자들이 많았다. 사두가이들은 주로 예루살렘 귀족계층의 사제들이었다. 예루살렘에서 대사제는 산헤드린의 의장이었고, 일부 사제들은 귀족으로서 게속 정치에 개입하고 지배계층을 형성하고 있었다.


백성 지지를 받지 못하던 사두가이들


정치적인 면에서 그들은 백성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비록 그들이 종교적인 면에서 율법을 철저히 지키고 전통에 충실하고자 하였으나, 야손 이래로 뇌물을 주고 대사제로 임명된 이들이나, 하스몬 집안 출신의 대사제들은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으며, 또한 로마가 지배하던 시기에 사두가이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지키려고 쉽게 로마와 야합했던 것도 그들의 권위를 떨어지게 했다.


구전을 거부하고 기록된 율법만 중시


교리적인 면에서 보면, 그들은 바리사이들이 중시했던 '구전전승'을 거부하고, '기록된 율법'만을 존중했다. 그리고 죽은 이들의 부활을 믿지 않았다. 신학적으로는 보수적이면서 정치적인 면에서는 현실적이었기에 모순적으로 보일 수 있는데, 내세를 인정하지 않는 그들의 신학이 그만큼 더 형세를 중시하게 만들었다고도 이해할 수 있겠다. 그들이 중시했던 것은 오직 예루살렘에서 성전 예배를 유지하는 것이었고, 이를 통해 기득권을 보전했다. 어쨌든,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면서 그들은 기반을 완전히 잃었다. 신약성경에서 그들이 바리사이들에 비해  드물게 언급되는 것은, 신약성경이 형성되던 시기에 이미 그들이 영향력을 잃은 상태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4-2. 바리사이


'바리사이'는 '분리하다, 가르다'란 뜻



바리사이라는 명칭은 '분리하다, 가르다'라는 히브리어와 아람어 동사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된다. 이 이름은 아마도, 하스몬 왕조가 점점 더 세속화되어감에 따라 바리사이들이 그들을 멀리하고 그들에게서 떨어져 나왔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 사두가이들과 달리 이들은 성문 율법 외에도 구두로 전해진 율법도 존중했다. 죽은이들의 부활과 영혼의 불멸, 천사와 마귀의 존재 등을 믿었고, 다윗 왕국을 다시 세울 메시아에 대한 희망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사두가이들에 비해 현세에 큰 비중을 두지 않았고, 세속화되지 않았으며 경건하게 살려고 했다.


구전전승까지도 열정적으로 받아들였던 바리사이


이들의 특징은 바로 구전전승을 포함한 율법에 대한 열성이었다. 이를 이해하려면 헬레니즘 시대 이래로 많은 유다인들은 전통적인 가르침을 버리고 그리스 문화와 종교를 따라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바리사이들을 처음부터 위선자라고 생각하는 것은 올바른 이해가 아니다. 그들은 말로써만이 아니라 실제 생활로도 율법을 준수하려고 노력했고, 그것이 하느님께 충실한 삶이라고 믿었다. 


예수님 시절, 가장 영향력이 있던 종교집단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하시던 기간에 팔레스티나에서 가장 영향력있던 종교집단이 바로 바리사이들이었다. 실제로 그들은 많은 이들에게서 존경을 받았으며, 그럴 이유도 있었다. "복음서는 자주 바리사이들을 위선적이고 냉혹한 율법주의자들로 제시한다. ... 그러나 복음서들에서 나타난 바리사이들의 모습은 부분적으로는 그리스도인들과 유다인들 간의 계속된 후대의 논쟁에서 영향받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교황청 성서위원회, <그리스도교 성경 안의 유다 민족과 그 성서>, 서울,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2009, 170쪽)


바리사이는 왜 예수와 대립했나?


율법 그 자체는 긍정적 가치를 지닌다. 그러나 율법에 대한 이러한 열성이 오도되어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이들을 배척할 때, 그리고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거나 인간적인 관습에 매이게 될 때, 오히려 율법의 근본정신을 거슬러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사랑을 손상시킬 수 있다. 이런 요인들 때문에 결과적으로 신약 성경에서는 예수님과 바리사이들 사이의 대립이 자주 나타난다.



4-3. 에세네파


신약에서 언급되지 않는 '에세네파'


신약 성경에는 에세네파가 직접 언급되지는 않는다. 요세푸스와 필로가 이들을 전해줄 뿐이다. 그들은 바리사이나 사두가이보다 더 당시의 정치와 사회를 멀리했다. 그들의 기원은 마카베오 항쟁에 참여했던 "충실한 이들" (1마카 2,42, 히브리어로 '하시딤')에게서 찾을 수 있는데, 이들은 처음에는 마카베오 집안과 함께 했으나 기원전 152년에 차독 계열이 아닌 유다 마카베오의 동생 요나탄이 대사제가 되면서부터 요나탄과 시몬에게 배신감을 느끼고, 그들이 이끄는 성전의 체제에 반발하며 그들과 상종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율법에 더 충실한 삶을 살고자 했다.


2천년의 세월이 흘러 발견된 에세네파


이들에 대해 더욱 상세히 알게 된 것은 1947년 사해 근처 쿰란 동굴이 발굴되었기 때문이다. 쿰란에 살던 공동체가 에세네파에 속했다는 증언은 없지만, 그 발굴의 결과를 보면, 그들의 생활상이 에세네파에 대한 고대의 기록들과 많은 점에서 일치하고 있기때문에, 쿰란 공동체가 에세네 파에 속했을 가능성은 높다.


쿰란 동굴 발굴의 의의


쿰란의 발견은 신약 성경의 배경사로서뿐만 아니라, 성경 본문의 전승에 대한 연구에서도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 쿰란은 사해 근처의 언덕인데, 수천 년동안 아무도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볼려고 들어간 적이 없었다. 그런데 1947년에 한 목동이 잃어버린 염소를 찾으려고 동굴 안에다가 돌을 던졌다가 항아리 소리를 듣게 되어 발굴이 시작된 것이다. 모두 11개의 동굴이 발굴되었고, 그 안에서 많은 구약 성경 두루마리들과 그 밖의 자료들이 발견되었는데, 이들은 1세기의 것들로서 지금까지 알려진 구약성경 사본들보다 수백년 또는 천년 이상 오래된 것들이기 때문에 구약성경의 원문을 찾으려고 하는 이들에게 매우 큰 관심거리가 된다. 


구약성경의 사본은 기원후 1,008년 경의 레닌그라드 사본


보통 구약성경의 번역 대본으로 삼는 레닌그라드 사본이 1008년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그보다 천년이나 앞선 사본들이 갖는 중요성은 불문가지의 일이 된다. 오래된 사본을 발견한 학자들은 이를 통해서 성경 본문을 둘러싼 많은 궁금증을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게다가 오랜 전승과정에서 손상된 성경의 원문을 찾는데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엄청나게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쿰란에서 지금까지의 사본들과 차이가 나는 수많은 두루마리들이 발견되면서, 성경 본문의 역사는 생각보다 더 복잡한 것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래서 묵혔던 문제들은 풀리고 정리되었지만, 또 다른 문제들이 나타나고 상황이 더 복잡해진 측면이 있는 것이다. 


흠없이, 빛으로 살아가던 쿰란 공동체



또한 쿰란에서는 성경에 속하지 않는 다른 문헌들도 여럿 발견되었다. 예를 들어 공동체의 규칙서와 같은 것도 있어 그들의 사상과 삶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겉으로 보이는 쿰란 공동체의 모습을 본다면, 철저하게 율법을 지키며 부정을 타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점이 눈에 띈다. 이들은 바리사이들보다 훨씬 더 엄격하게 율법을 준수했고, 공동체 규율을 어기는 이들에 대해서 매우 엄한 처벌을 가했다. 그런데 이렇게 눈에 보이는 모습 아래에 깔려있는 사상은 묵시문학적 역사관이었고, 그들의 삶은 종말을 앞두고 빛의 자녀들과 어둠의 자식들 사이의 마지막 전쟁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온 세상을 빛과 어둠으로 구분했던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의 사제들과 바리사이들 등을 어둠의 자식들이라고 보면서, 그들 스스로는 빛의 자녀로서 흠없는 삶을 살아감으로써 종말을 준비했다. 


아울러 그들에게서는 메시아의 희망도 강하게 나타난다. 쿰란 공동체는 기원 후 68년 로마군의 공격을 받았다. 로마군이 다가올 때에 그들은 전쟁이 끝난 다음에 두루마리들을 다시 찾을 수 있도록 항아리 속에 조심스럽게 숨겨두었으나, 공동체가 완전히 파괴되면서, 그 두루마리들은 20세기까지 그대로 동굴 안에 감추어져 있게 되었다.


4-4. 마무리


바리사이들의 영향력이 가장 컸다


사두가이, 바리사이, 에세네 파 이외에도, 율법학자들, 열혈당원들 등이 있었으나, 신약성경이 형성되던 시기에 가장 중요했던 종교집단들은 위의 3대 집단들이었다. 그 가운데 특히 바리사이들의 영향력이 가장 컸다. 따라서 예수님의 공생활 시기뿐만 아니라 교회가 형성된 초기에도 그리스도인들은 바리사이들과 대립해야만 했다. 또한 이 3대 집단과 예수님의 관계를 본다면, 일단 예수님은 사제나 귀족 계층에 속하지 않았고 사두가이들의 믿음을 공유하지 않았으며, 육신의 부활이나 종말에 대한 믿음은 오히려 바리사이 또는 에세네파에 가까웠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이 쿰란 공동체나 당시의 다른 조류에 속한 이들이 기다렸던 메시아상에 부합되는, 정해진 틀에 맞는 바로 그 메시아였던 것도 아니다. 


근래에 나온 연구서나 아니면 영화에서는 예수님을 당시의 랍비, 열혈당원, 에세네파 등의 모습으로 그려내기도 하였지만, 신약성경에서는 예수님을 그 어떤 특정집단과 연결짓지 않는다. 이는 예수님 안에는 그 모든 범주들을 깨뜨리는 새로움이 있었기때문이라고 이해할 수 있겠다. 바로 그 새로움이 많은 이들이 나중에는 그분을 버리고 떠나가는 이유가 될 것이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요한 6,67)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6,68)




가톨릭교리신학원 통신신학교육부 제2단계 1학년(3학년) 봄학기

가톨릭신학연구실 편찬교재 [신약1(공관복음.사도행전)]

제1장 신약성경의 형성과 그 배경사 ④ 신약시대 종교집단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