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노트/복음과사도행전

[공관복음연수1] 복음은 그 자체로 새로운 문학형태였다

편집장 슈렉요한 2015. 8. 22. 20:00

공관복음과 사도행전 제1강의


복음은 그 자체로 새로운 문학형태였다


제목: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강의 1교시

일시: 2015/8/22 토 오전 9:00~9:45

장소: 가톨릭교리신학원 지하강당(서울 혜화동)


가톨릭교리신학원 통신신학교육부 2단계 1학년(3학년)의 하계연수가 2015년 8월 22일(토) 서울 혜화동 가톨릭교리신학원 지하강당에서 열렸다. 연수는 선택에 따라서 토요일과 일요일 중 하루를 참석하면 되는 과정이다.



새로운 형태의 기록들이다


우리가 가장 먼저 생각해봐야 할 것은 '새로운 형태의 기록들'이란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공관복음이란 것에서 【'복음(福音)'이란 말이 어떻게 시작되었는가?】에 관한 부분입니다. '복음'이란 말이 오늘날 우리에게는 그다지 생소한 단어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미사 때마다 복음서를 읽고, 개인적으로도 읽기 때문에, '복음'이란 말 자체가 생소하지 않은 것이죠. 그러나 아마도 복음서가 기록되었을 당시 사람들에게 '복음'이란 단어는 생소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4개의 복음서가 등장하기 이전에 '복음'이란 단어를 찾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복음'이란 단어를 통해서 초대 교회의 신자들이나 기록자들이 하고자 했던 것은 예수님의 말과 행적들을 함께 모아놓은 책을 엮기 위해 '복음'이란 말을 사용했을 것이고요. '복음서'가 기록되었을 당시에 '복음'이란 말은 생소했다고 보는 겁니다. 그래서 '복음'이란 말을 그 시절에 시작했다고 보는 겁니다. '복음'이라는 사람들에게 생소한 말이 그렇게 시작된 것입니다.

'복음'은 그 자체로 새로운 문학형태이며 양식이었다

그 흔적을 예전 기록에서 칮아본다면, '유스티노 순교자'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분은 기원후 100년 초중반, 그러니까 2세기 초중반에 살았던 호교론자이며 순교자였습니다. 유스티노(Justin) 성인은 "사도들은 그들 안에 기원을 갖는, 일부는 복음이라 불리는 기억할만한 것들을 우리에게 전해주었다."라는 말을 기록해 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들이 자신들이 전해받은 것들을 기록하기 시작했는데, 그 중 일부 책들은 사람들이 '복음'이라고 불렀다는 겁니다. 그래서 저 때에 비로소 '복음'이란 말이 시작되었다고 보는 거죠. 그래서 복음이란 말은 그 안에 담긴 내용을 살피기 전에, 이미 그 말 자체로 당시에는 하나의 새로운 문학형태를 일컫는 표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문학형태나 문학양식이란 무엇일까요? 우리가 서점에 가보면 책꽂이에 꽂혀있는 책들을 구분하는 표지같은 게 있죠. 이를테면, 시, 에세이, 소설, 역사책 등으로 구분되어 있는데요. 쉽게 말하자면 그런 게 문학양식이겠죠. 신약성경을 예로 들면, 바오로 사도의 글들은 대부분 다 편지입니다. '편지'라는 형태를 통해서 우리에게 메시지를 전해주는 것이죠. 또 구약성경을 보면, 대표적인 게 「시편」입니다. 「시편」은 시(詩)의 모음이고요. 

「시편」을 읽을 때는 시(詩)를 읽듯이

학생 때 우리가 시와 시조를 배웁니다. 그런데 시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바로 함축성, 운율, 박자 등을 갖고 있다는 것이죠. 일반 우리가 쓰는 글과는 다르죠. 그렇게 시(詩)에는 여러가지 함축적 표현들이 있습니다. 「시편」도 마찬가지로 시(詩)가 지닌 그런 특징을 대부분 갖습니다. 그래서 「시편」을 읽을 때는 "이것은 시(詩)구나!"라는 생각을 갖고 읽는 게 이해하는 데 더 좋습니다. 다만 새로 번역된 성경을 보면 「시편」이 시(詩) 답지 않습니다. 내용을 정확히 하다보니까 '시의 특징'이 많이 사라졌습니다. 정확성을 추구하면서 시적 특징이 덜해졌다고 볼 수 있는데, 과거에 간행된 공동번역성경이 오히려 시적인 특징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시」나 「소설」처럼 「복음」도 그 당시에 새롭게 시작된 하나의 문학형태라고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 '공관복음'이라고 하나?

그러면 「복음」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 있을까요? 우선 신약성경 안에는 4개의 복음서가 있습니다. 그리고 신약성경이 아닌 곳에서도 여러가지 복음서가 있어요. 그런데 마태오, 마르코, 루카, 요한 복음 등 4개의 복음서가 있는데, 그 중에서 「요한복음」을 제외한 3가지 복음서를 【공관복음】이라고 합니다.  【공관복음】이라는 말이 시작된 것은 매우 단순한 것이었습니다. 1700년대의 어떤 출판업자가 복음서를 읽으면서 계속 의구심이 들었답니다. "왜 비슷한 내용의 복음을 하나로 묶어놓으면 될텐데, 굳이 3가지로 나누었을까?"라는 궁금증이었죠. 그래서 어떤 교수에게 부탁을 합니다. "왜 복음서들이 비슷비슷한데 하나로 해놓으면 어떤가?" 그렇게 출판된 책이 바로 3개의 복음서를 함께 볼 수 있도록 병렬로 나란히 실어서 한눈에 쉽게 보는 책을 출판하였고, 이름을 【공관복음】이라고 붙인 것이죠. 

공관(共觀)은 함께 본다는 뜻

'공관(共觀)의 한자는 '같은 시선으로 본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세가지 책이지만 동일하게 하나의 시각을 가지고 복음서를 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의 시각을 가지고 예수님 삶을 우리에게 전해주는 책이라는 것이죠. 【공관복음】안에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이 담겨있습니다. 예수님 말씀하신 것만을 전해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어떤 일을 했고, 누구를 만났고, 어디에 가셨는지에 대한 내용까지 함께 담아주고 있는 책이 【공관복음】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공관복음서에 포함되지 않은 「요한복음」 역시 내용에 있어서는 동일합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은 이 【공관복음】은 예수님 삶을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여정으로 보았다는 공통된 특징이 있다는 것입니다.  

1년에 한번은 꼭 예루살렘 성전에 갔어야 했다

우리 가톨릭 신자에게는 일정한 의무가 있습니다. 주일미사를 가야하고, 최소힌 고해성사를 1년에 한번 부활절 때 봐야할 것이고, 교무금을 내고, 금육과 단식을 지킬 의무가 있습니다. 이처럼 여러가지의 의무를 지니고 있는데, 그것은 유다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특히 그리스도인에게는 달랑 열개의 계명이 있다고 한다면, 유다인의 율법에는 600개의 조항이 넘었다고 합니다. 619개의 조항이 있었다고 흔히들 이야기 하는데, 그 율법을 지켜야 했고, 이스라엘 성인남성이라면 1년에 한번은 꼭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해야 했습니다. 그것이 의무였습니다. 

공생활 3년동안 예루살렘 방문을 고작 1번 했을까?

그렇다면, 예수님이 태어나셔서 흔히 말하듯 30년을 가족들과 함께 살고 3년을 공생활을 했다고 이야기하죠. 그런데 예수님은 유다인이고 남성이었고 성인남성이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 몇 번을 갔을까요? 단순하게 생각해서 공생활을 3년간 하셨다고 보면, (공관복음서가 공생활에 대한 기록이므로 그 3년의 기간에) 적어도 3번 이상은 예루살렘 성전에 갔어야 맞습니다. 그러나 공관복음서를 읽어보면,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단 한번 간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단 한번 가셨을까요? 바로 이것이 【공관복음】의 시각입니다. 반면 요한복음에서는 예루살렘에 자주 갔다 왔다 합니다. 그러나 공관복음이 가진 하나의 시각은 단 한번 갔다는 것이다. 언제 가셨고 왜 가셨죠? 바로 돌아가시기 위해서 가셨습니다. 그래서 【공관복음】은 예수님의 삶을 실제적으로 올해는 무얼 했고, 다음 해에는 무엇을 했는지를 시간의 순서로 전해주는 책이 아니라는 겁니다. 예수님의 삶을 마치 예루살렘에서 벌어지는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과 부활이란 목적에 맞게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공관복음】은 마태오이든, 마르코이든, 루카이든, 예수님의 삶은 전적으로 우리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돌이가시는 삶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단 한번 예루살렘에 도달하기 위한 여정을 그린 공관복음서

그래서 【공관복음】안에서 예수님은 먼저 갈릴래아라는 공간 안에서 활동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갈릴래아에서의 활동이 끝난 이후 예루살렘을 향해 떠납니다. 떠난 후에는 다시 갈릴래아로 돌아가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계속 예루살렘을 향해서 가는 것이죠. 그래서 【공관복음】이 지닌 공통적인 시각은 예수님의 삶을 예루살렘을 향한 여행처럼, 그곳에 도달하기 위한 여정으로 소개한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결국 공괸복음이 전해주는 이야기는 <예수님의 드라마>입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활동하고 누구를 만났고 또 어떤 일을 보여주는 하나의 여정 드라마인데, 그 여정을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까지 이어지는 여행길 안에서 소개가 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공관복음】이 지닌 시각만 보더라도, 가장 중요하게 전해주고 싶어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을 향해 가셨고, 거기에서 십자가에 못박히고 돌아가시고 부활하셨다는 것을 전해주는 이야기가 【공관복음】이 담고 있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 비슷한 내용의 복음서가 3개나 있을까? 

그러면 왜 비슷한 내용의 책을 하나만 쓰지 왜 3개만 썼을까? 이렇게 비슷한 내용을 담은 복음서가 3가지인 이유는 독자들 때문에 그렇습니다. 각각의 복음서는 지향하는 것이 다릅니다. 이 복음서가 가장 처음에 누구를 위해서 쓰여졌는지 그 목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전적으로 드러난 것은 바로 마태오와 루카에서 그 차이가 많이 드러납니다. 「마태오복음서」는 유다교를 믿고 있던. 즉 다른 말로 하느님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쓰여진 복음서」입니다. 반대로 「루카복음서」는 흔히 이방인 출신의 신앙인들 위한 복음서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이방인 출신이라는 뜻에 담긴 것은 그들이 하느님이 누구인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을 모르는 사람들이라는 거죠. 그러니까 「마태오복음서」의 독자들은 구약성경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태오복음」은 실제로 어떤 형태의 내용을 담고 있냐면, "야! 너 이사야 예언서 읽어봤지? 여기 이런 글이 있는데, 이게 바로 이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하는 식으로 설명을 한다는 겁니다. 이처럼 독자들이 서로 다르기때문에 지금 우리는 3가지 복음서를 갖고 있게 된 것입니다. 

실제로 역사적으로 일어난 걸 기록한 것인가 

그러면 【공관복음서】가 전해주는 내용은 실제로 역사적으로 일어났던 일들을 기록한 것일까요? 아니면 그것과 상관없이 복음서」저자들이 우리에게 전해주고 싶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일까요? 무엇이 맞을까요? 둘 다 입니다. 그것을 가장 쉽게 알 수 있는 것은 복음서의 기적이야기 같은 겁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기적 이야기들을 보면, 기적이 어떻게 일어났는가에 대한 설명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지나가시다가 눈 먼 사람을 만납니다. 그래서 눈 먼 사람을 고쳐줍니다. 그게 끝입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고쳐주셨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가장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이 침뱉고 눈에 바르고 못에 가서 씻으라는 하는 게 길다면 긴 이야기입니다. 많은 경우 눈먼이의 눈을 뜨게 해주셨다는 게 기적이야기의 끝입니다. 

기적이 어떻게 일어났는가에 대한 설명이 없는 까닭

그런데 기적이야기는 매우 길게 나옵니다. 복음서에서 실제로 기적이 일어나는 순간, 그것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 이후의 반응들입니다. 그 기적을 보고서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가 많은 기적 이야기에 담겨있습니다. 그러니까 기적이 일어났다는 실제적 사실이 포함이 되어있기는 하지만 그 기적을 통해서 지금 기적을 일으킨 예수라는 사람이 '하느님의 아들이다.'라는 신학적 내용을 적은 책들이 복음서라는 것이다. 그래서 복음서 안에는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해서 당시 사람들이 지녔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함께 표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들이 바로 복음서들이 가진 특징인 것입니다.  

주제에 따라서 이야기를 묶어놓았다

우선 세가지의 【공관복음서】는 이러한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동일한 틀을 갖고 있습니다. 즉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 안에서 이해될 수 있다는 겁니다. 또 많은 경우에 【공관복음서】는 주제에 따라서 이야기를 묶어놓았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마태오복음 5장에서 7장까지를 보면, 『산상설교』라고 부르는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5장부터 7장까지는 통째로 예수님이 제자들이나 군중에게 가르친 내용을 묶어놓았습니다. 그리고 마태오 복음 10장은 비유에 대한 이야기만 묶어놓았습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3박4일동안 5장부터 7장까지를 이야기를 했을까요? 그렇지 않았을 것으로 보는 겁니다. 나중에 제자들이 예수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그 말씀들을 묶어서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는 것이죠. 【공관복음서】는 그러한 공통된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똑같은 표현들은 '말'이 아닌 '글'로 된 원전이 있다는 뜻

그리고 꼼꼼하게 읽어보면【공관복음서】안에는 동일한 문장들이 있습니다. 아예 똑같습니다.  그런 것 역시 공관복음의 한 특징입니다. 이렇게 【공관복음서】는 동일한 틀을 갖고 있고, 예수님의 말씀을 묶어서 전달하고, 심지어 똑같은 문장들이 등장한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굉장히 중요한 특징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앞자리에 계신 분에게 한 문장의 표현을 알려드리면 그것이 전달에 전달을 거치면서 저 끝에 계신 분에 이르러서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될 수 있을 수 있어요. 불과 열명이 이야기를 전달해도 똑같이 전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서가 똑같은 표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 정도로 똑같은 표현이 가능하려면, 그것이 말로써는 전혀 되지 않습니다. 어떤 경우에만 가능할까요? 글로 전달이 되어야 똑같은 표현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마르코에는 예수 탄생 이야기가 없다 ... 공관복음의 차이점

이렇게【공관복음서】의 공통점과 함께 차이점을 살펴보겠습니다. 비슷한 내용을 다루고 있고 동일한 틀을 가지고 있지만 그 안에서도 서로 차이가 있다는 겁니다. 우선 굉장히 많은 공통된 내용과 함께 각 복음서들에는 독창적 내용들이 있습니다. 그 내용을 아주 쉽게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탄생이야기』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마르코복음서에는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없다? 없습니다. 마르코에서는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그냥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합니다. 「마태오 복음서」는 탄생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헤로데 임금과 동방박사가 등장하는 이야기이죠. 

세례자 요한의 탄생 이야기가 담긴 루카복음

또 「루카복음서」역시 예수님의 탄생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태오와는 좀 다릅니다. 루카에 등장하는 탄생이야기의 주된 인물은 엘리사벳과 즈카르야가 등장한다는 겁니다. 즉, 세례자요한의 탄생 이야기가 함께 담겨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똑같이 같은 시각을 가진 복음서」이지만, 마태오가 전하는 예수님의 탄생과, 루카가 전하는 예수님의 탄생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마르코는 탄생이야기가 없습니다. 이처럼 탄생에 대한 서로 다른 이야기에서 복음서가 가진 독창성을 발견히게 됩니다. 

각 복음서」들은 공통된 어떤 자료를 갖고 있기도 하였지만, 그 외에 자기들만 아는 전승도 갖고 있었을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통된 내용과 함께 자신들만 아는 이야기 역시복음서」 안에 포함시킨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단적인 사례가 바로예수님의 탄생이야기』이야기입니다.  

공관복음서 문제 ... 왜 같으면서 다른가

그리고 동일한 내용을 전하고 있는 부분인데, 거기서 벌어지는 실제 사건의 순서가 다른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제자들을 부른 이야기인데, 그 앞뒤에 있는 사건들이 서로 다른 것입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마르코나 마태오나 루카나 똑같은 사건을 전달하고 있는데 거기 담긴 표현이 서로 다른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처럼 공통점이 있으면서도 왜 이런 차이점들이 생겨났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그 질문들을 한데 묶어서【공관복음서 문제】라고 교재에는 써 있습니다. 

이출전설(二出典說)

【공관복음】이라는 책이 어떻게 우리에게 전해지게 되었는가를 연구한 문제들을 '공관복음의 문제'라고 하는 겁니다. 간단하게 이출전설(二出典說)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공관은 크게 두가지 출전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공관복음서들은 아마도 그들이 복음서를 기록하기 이전에 아마도 두가지 자료를 가지고 있었고, 그 자료들을 가지고 자신들이 아는 고유내용과 함께 복음서를 썼을 것이란 내용입니다. 그중 많은 이들이 언급하는 두가지 원천 중의 하나는 「마르코 복음서」입니다. 

「마르코 복음서」와 「예수님 어록집

아마도 마태오와 루카는 「마르코 복음서」를 알고 있었을 것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안다'는 것은 기록된 형태의 무엇을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부분은 마태오와 루카에서 마르코복음에 담긴 내용을 빼보았습니다. 그러면 남은 부분은 거의 다 예수님의 말씀 부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행적 부분은 많은 경우 대체로 「마르코 복음서」와 유사했습니다. 그런데 마르코의 부분을 빼고, 마태오와 루카에 있는 내용만 보아보니, '예수님의 말씀' 부분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그 결과를 가지고, 복음서」가 이렇게 세가지로 이루어지기 전에 「마르코 복음서」와 예수님 말씀만 모은 「예수님 어록집이 있었을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출전설입니다.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 어록집(Q문헌)

지금까지 연구된 결과를 보면 그렇게【공관복음】은 두가지 출전을 가지고 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하나는 「마르코 복음」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 말씀만 모은 「예수님 어록집」이 있었을 것으로 보는 거죠. 그러면 지금 이 예수님 어록을 모아놓은 책이 있는가? 현재는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세가지 복음서를 가지고 연구한 결과에 따르면 이렇게 가정해야만 설명이 가능하다는 겁니다. 



마태오도 알고, 루카도 알았을 것이다

아마도 예수님에 대한 내용을 전해주는 초기 교회의 전승은 하나는 「마르코 복음」이었고, 다른 하나는 지금 우리는 가지고 있지 않지만 예수님 말씀만 적어놓은 책이었을 것이다. 즉 「예수님 어록집」(Q문헌)이 있었을 것으로 보는 거죠. 그래서 마태오는 이 두가지 내용을 모두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르코 복음」도 가지고 있었고, 「예수님 어록집」(Q문헌)도 가지고 있었을 겁니다. 그래서 이 두가지를 가지고 자신이 알고 있는 예수님의 삶을 우리에게 전해주면서, 자기만이 알고 있는, 다른 어떤 누구도 모르는, 루카도 모르는 고유한 전승들을 거기에 포함시켰을 겁니다. 

반대로 루카도 마찬가지입니다. 루카 역시 마태오처럼 「마르코 복음」과「예수님 어록집」을 알고 있었을 것이고, 자신이 아는 고유한 전승과 함께 우리가 현재 보는 「루카 복음」를 작성했을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위의 표는 단순해보이지만, 굉장히 많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마태오와 루카는 서로 알았을까?

그러면 마태오와 루카의 관계는 어떤 관계였을까요? 아무 관계도 없었습니다. 서로 둘은 알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림에 선이 없잖아요. 아마도 마태오나 루카는 각자 복음서를 갖고 있거나 쓰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설명해야 지금 우리가 가진 이 책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중에서「마태오 복음」과 「루카 복음」보다 「마르코 복음」과 「예수님 어록집」은 시간적으로 빨라야만 합니다. 그래야 설명이 가능한 것이죠. 마르코가 먼저인지 예수님 어록집이 먼저인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이 두가지가 「마태오 복음」이나 「루카 복음」보다는 빨라야 하는 겁니다. 그리고 마태오와 루카는 서로 알고 있지는 못했다고 이야기되는 것이 바로 【이출전설】의 내용입니다. 그래서【공관복음서】의 내용들은 이런 관계에 의해서 쓰여졌을 것이라고 보는 겁니다. 

가톨릭교리신학원 통신신학교육부 2단계 1학년(3학년)의 하계연수가 시작되기에 앞서서 촬영한 사진. 2015년 8월 22일(토) 서울 혜화동 가톨릭교리신학원 지하강당. 오전 8시34분 촬영. 강의실은 좁고 답답했다. 이곳에서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8교시의 수업이 진행되었는데, 좁고 불편했다. 


마태오 복음서의 상징이 '사람'인 까닭

이제 개별적인 복음서」들의 특징을 살펴보겠습니다. 예전에 聖 이레네오(135~202)라는 교부가 복음서를 4가지 상징으로 이야기했습니다. 4가지 상징은 구약성경「에제키엘서에 나오는 것과 신약성경의 「요한묵시록나오는 '생물'이란 것에 착안해서 한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현재까지 각 복음서를 상징하는 것으로 쓰입니다. 우선「마태오복음서」의 상징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왜 '사람'일까요? 왜 '사람'을 상징으로 사용했을까요? 그것은 마태오가 지닌 내용과 관련이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의 첫 시작은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1,1)' 이것이 시작입니다. 그러면서「마태오복음」은 예수님의 족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굉장히 많은 사람들은 「마태오복음」은 가장 처음에 예수님의 육적인 족보를 전해준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마태오복음서」는 사람을 상징으로 나타내게 된 겁니다.

파피아스와 이레네오 교부는 뭐라고 말했나

「마태오복음서는 예전 교부들의 의견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가 있습니다. 우선, 파피아스 교부는 이렇게 기록을 남겼습니다. "마태오는 말씀들을 셈족어(히브리어 또는 아람어)로 정리했고, 그가 했던 것처럼 각자는 그 말씀들을 번역하였다." 라고 이야기해줍니다. 또 이레네오 교부는 "베드로와 바오로가 로마에서 설교하며 교회를 세우고 있는 동안 마태오는 히브리인들 기운데 머물러 있으면서 그들의 말로 복음서를 기록하였다."라고 전해줍니다. 여기서 파피아스와 이레네오 주교는 다 2백년 이전에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 전해지는 「마태오복음」에 대한 가르침 중에 가장 첫번째 가르침입니다. 

마태오 복음서의 저자는 '마태오'일까

이렇게 초대 교부들의 의견을 따르면「마태오복음서」를 기록한 사람은 마태오입니다. 우리 교재에는 마태오가 썼다고 되어 있나요? 물론 우리가 아는 것처럼 「마태오복음서」의 저자는 '마태오'이고, 「마르코복음서」의 저자는 '마르코'이고, 「루카 복음서」의 저자는 '루카'가 될 것이며, 「요한복음서」의 저자는 '요한'일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전통적인 생각이죠. 그리고 이러한 전통적인 생각은 주로 초대교부들의 이야기에서 비롯됩니다. 「마태오복음서」역시 파피아스와 이레네오 주교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가 아는, 복음서에 나오는 세리였던 마태오가 저자일 것으로 보는 겁니다. 그런데 요즘 학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 잘 맞지 않는 경우가 있기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냥 「마태오복음서」의 저자는 '마태오'라고 생각해도 될 것 같습니다. 

마태오 복음서가 말하고 싶어하는 것

「마태오복음서」는 구약성경을 알고 있는, 이미 하느님을 알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복음서를 썼다고 했어요. 그래서 당연히 굉장히 많은 구약성경에 대한 인용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복음서」들이 말하고 싶어한 가장 큰 내용은 나자렛이라고 하는 곳에서 살았던,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인 예수라고 하는 청년이, 그냥 단 한명의 청년이 아니라, 하느님의 아들이고 그리스도이시다라는 걸 전하고 싶어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마태오 복음서」는 그 내용을 전해주기 위해서 많은 구약성경을 인용하고 있는 겁니다. 실제로 「마태오 복음서」에 등장하는 예수님은 이스라엘을 위해서, 즉 유다인들을 위해서 이 세상에 파견된 것처럼 이야기되어집니다. 15장 24절을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그제야 예수님께서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마태 15,24)

이 표현은 여러가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처음에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이란 표현이 나온다면,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유다인이 아닌 사람들은 배제되는 것입니다. 오로지 하느님을 알고 있던, 오로지 아브라함의 자손이었던, 오로지 유다인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마태오 복음서」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이렇게 처음에 이해를 한다는 겁니다.

마태오가 예수를 모세와 연관지은 까닭은 무엇일까?

또 「마태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을 어떤 모습으로 그려주고 있냐면, 구약성경의 가장 중요한 인물인 모세처럼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다는 겁니다. 그 대표적 사례가 바로 이집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마태오 복음서」안에는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루는 동방박사 세명이 헤로데 왕을 찾아왑니다. 와서 뭐라고 합니까? "우리가 별을 보았는데, 너희 나라에 왕이 태어났는데, 그 왕은 어디있는가?" 이것은 참 바보같은 질문입니다. 지금 왕한테 가서 새로 태어난 왕이 어디있냐고 묻는 거죠. 당연히 헤로데 왕은 화가 날만큼 나게 됩니다. 자기 권력을 위협받는 이야기인 겁니다. 새로 왕이 태어났다는 것은 머지않아 자신이 죽고 다른 이가 왕이 된다는 이야기죠. 그래서 헤로데가 말하죠. '그러면 여러분들이 가서 찾아보고, 혹시 가서 찾게되면 알려달라'고 하죠. '나도 가서 경배하겠다'고 말하죠. 이 박사들은 별을 보고 찾아 찾아서 예수님이 태어나신 곳을 찾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예수님을 경배합니다. 그리고 이 박사들은 헤로데 왕에게 가지 않고, 천사들이 집에 가라고 알려주자 그냥 집으로 갑니다. 그래서 박사들을 기다리던 헤로데 왕은 궁금해집니다. 올 때가 되었는데 오지 않는 거죠. 그래서 자신의 점성술사를 시켜서 그 별의 위치를 찾고, 그 당시에 태어난 아기를 찾습니다. 그런데 누구인지 모르니까 두 살 이하의 아이들을 모조리 죽여버립니다. 이렇게 되자,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을 보호하기 위해서 이집트로 갑니다. 그리고 이집트에서 헤로데의 집정이 끝날 때까지 거기 머물렀다가 다시 나자렛으로 돌아갔다고 되어 있습니다. 

마태오가 굳이 모세와 비교해서 전해주려고 한 것은?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마태오 복음서」에서 이야기하듯이 예수님이 이집트에 가고 피난생활 한 것을 어떻게 비교하냐면,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종살이 한 것처럼 묘사합니다. 그것은 마치 예수님의 모습을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처럼, 그리고 그 백성을 대표하는 모세의 모습처럼 우리에게 전달해준다는 겁니다. 

또 한가지 모세와 같은 모습 중 하나는 바로【산상설교】입니다. 마태오 5장에서 7장까지를 보면,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시어 사람들에게 말씀하시기 시작하니다. 거기에서 행복 선언 같은 진복팔단에 대해 말씀하시죠. 그것은 탈출기 등을 보면, 모세가 처음에 하느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은 다음에 그것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렇게 선포합니다. 시나이 산에 서서 사람들에게 "이 계명을 너희에게 지켜라!"라고 얘기하죠. 그래서 5장에서 7장에 나오는 모습은 마치 「탈출기 에 나오는 모세의 모습과 비슷하다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마태오복음서의 주된 독자는 유다인들

이것이 바로 모세와 비교되는 모습이고, 왜 예수님을 굳이 모세와 비교해서 전해주려고 하는 것인가? 그것은 바로  「마태오 복음서」의 대상들이 바로 유다인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잘 알고 있는 인물을 통해서 예수님의 모습을 조금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마태오 복음이 가진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질의응답
복음서는 4개만 있었나?

(복음서는 4개만 있었나?) 복음서는 약 20개 정도 됩니다. 그 중 4개만 정경으로 인정합니다. 정경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교회에서 신자들이 읽고 따라도 큰 문제가 없다고 정한 것입니다. 그러나 나머니 16개는 왜 안정해졌을까요? 내용이 굉장히 편파적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복음이 정경에 포함되지 않은 까닭은?

(질문. 으뜸이라고 하는 베드로복음은 왜 정경에 포함이 안 되었나에 대해서) 그 당시에 사람들이 글을 쓸 때 가장 유행했던 것 중 하나가 '차명'입니다. 우리가 잘못 이해하면 '가짜'로 생각하지만, 당시 글을 쓰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훨씬 더 유명한 사람들의 이름을 가져다 썼습니다. 그게 가장 유행하던 시절이 1세기와 2세기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들어갔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베드로가 직접 썼다고 보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서점에 가면 【외경】들이 있습니다. 한번 읽어보세요. 사람들이 왜 복음서가 많다는 데 4개만 했을까를 궁금해 하는데, 그 내용을 보면 편파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서  「토마 복음 을 얘기해보면, 예수님이 바닷가를 거닐고 계십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이겠죠. 호숫가를 조용히 산책하시는 데, 새들이 날라옵니다. 한 마리, 두 마리, 수십마리가 날라옵니다. 그런데 짹짹거리며 너무 시끄러우니까 하늘에서 불을 내려서 '참새구이'를 해버렸습니다. 물론 그것으로 묵상을 할 수도 있지만 정경에 있는 내용이 훨씬 더 좋습니다. (9:52 1교시 끝)


가톨릭교리신학원 2단계 1학년(3학년) 하계연수
2015-8-22 토요일 서울 혜화동 교리신학원 지하 강당

공관복음과 사도행전(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오전 1교시(9:00~9:45)

허규 베데딕토 서울대교구 신부. 1999년 7월 7일 사제 수품, 뮌헨 루드비히 막시밀리안 대학교에서 성서신학 박사학위를 받고,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신약성서 교수로 요한 묵시록과 희랍어 등을 가르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