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노트/복음과사도행전

[공관복음연수4] 루카가 강조한 것은 이방인의 구원

편집장 슈렉요한 2015. 8. 22. 21:30

공관복음과 사도행전 제4강의(끝)


루카복음과 사도행전에 담긴 구원의 보편성


제목: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강의 4교시

일시: 2015/8/22 토 오전 11:45~12:30

장소: 가톨릭교리신학원 지하강당(서울 혜화동)



루카복음과 사도행전은 한꺼번에 읽는 게 좋다


이제「루카 복음」과「사도행전」을 이야기하겠습니다. 한꺼번에 봅니다. 다 아시는 것처럼, 한 사람의 작품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루카 복음」 다음에「요한 복음」이 있고 그 다음에「사도행전」이 나오는데,「요한 복음」을 빼고, 루카와 사도행전을 함께 읽어도 잘 어울립니다. 


루카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 루카는 의사


우선「루카 복음」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이레네오 교부는 이렇게 말했는데, "이 복음서 저자는 바오로의 동반자였던 루카였다." 그리고 이 견해에 근거하여 성경의 여기 저기를 찾아보면, 바오로의 동반자로 의사였던 루카라는 사람이 있었따고 콜로새서에서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루카 복음」의 저자는 의사였던 루카라고 말하는 것은 콜로 4,14에서 근거로 삼는 겁니다.


사랑하는 의사 루카와 데마스가 여러분에게 인사합니다. (콜로 4,14)


「루카 복음」과「사도행전」, 두개의 작품은 모두 [테오필로스]라는 사람에게 보내진 책처럼 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루카 복음」을 봐도 그렇고「사도행전」서문(1,1)에서도 "테오필로스 님, 첫 번째 책에서 저는 예수님의 행적과 가르침을 처음부터 다 다루었습니다."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아마도 테오필로스라는 사람은「루카 복음」과「사도행전」라는 두 책을 기록할 수 있도록 도움준 사람으로 추정됩니다. 먼저 살펴봐야 할 것은「루카 복음」의 서문입니다.「루카 복음」1,1-4는 매우 중요합니다.  


머리말 (루카 1,1-4)

우리 가운데에서 이루어진 일들에 관한 이야기를 엮는 작업에 많은 이가 손을 대었습니다. 처음부터 목격자로서 말씀의 종이 된 이들이 우리에게 전해 준 것을 그대로 엮은 것입니다. 존귀하신 테오필로스 님, 이 모든 일을 처음부터 자세히 살펴본 저도 귀하께 순서대로 적어 드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는 귀하께서 배우신 것들이 진실임을 알게 해 드리려는 것입니다.


이것이「루카 복음」처음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이「루카 복음」서문은 상당히 중요한 내용을 많이 담고 있습니다. 우선 '우리 가운데 이루어진 일들'이란 표현은 바로 예수님에 대한 여러가지 일들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엮는 작업에 많은 사람들이 손을 대었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을 통해서 우리는 복음이란 게 최소한 하나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러 사람이 예수님에 대한 일을 엮고 기록했다고 이해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처음부터 목격자로서 말씀의 종이 된 이들'는 누구인가? 바로 열두 사도입니다. 그리고「루카 복음」은 열두명의 제자 외에 더 많은 이들이 있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 중에는 여인들도 있었을 겁니다. 


목격자는 곧 열 두 사도가 아니겠는가


어찌되었든 열두명의 제자들이 바로 목격자들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함께 있었기 때문이죠. 그렇게 예수님과 함께 살고 활동했던 이들이 전해준 것을 기록한 것이 복음서라고 이해할 수 있는 겁니다. 그렇게 함께 그 일을 지켜본 저역시 그것을 적어서 보여드린다고 루카는 시작합니다. 우선 루카는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아주 잘 쓰여진 복음서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아마도 루카는 문학과 신학에 뛰어난 소질이 있고, 충분히 교육받은 사람으로 보여집니다. 마태오나 마르코에 비해서「루카 복음」은 실제로 원문으로 보면, 굉장히 아름답고 잘 쓰여져 있습니다. 별다른 오류가 없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루카라는 사람 역시 유다교 출신이라기보다는 그리스어를 모국어로 쓰던 이방인일 확률이 높다고 보통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앞서서「마르코 복음」은 몇가지 히브리어를 그리스어로 설명해주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에파타!"라고 쓰고 이것이 "열려라!"란 뜻이라고 했는데,「루카 복음」은 아예 히브리어를 빼버립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라뿌니"라는 말인데,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님을 부를 때, "라뿌니"라고 부르죠. 선생님이라는 뜻인데「루카 복음」은 그 단어를 아예 "퀴리오스"(주님)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루카복음의 독자는 철저히 이방인 중심


그러니까 「마르코 복음」보다 훨씬 더 이방인에게 뿌리를 둔 것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루카 복음」은 저자도 이방인이었지만, 전해빋는 이들도 이방인 출신 신앙인들이었고. 그들에게 쓰여진 이 복음서는 약 90년경에 쓰여졌을 것으로 봅니다. 그리고「사도행전」은 조금 늦은 시기인 90년에서 100년 시기로 보고 있습니다. 



루카의 구조 역시 마르코 복음을 따른다


루카복음의 구조를 보면 이렇습니다. 처음에는 서문이 등장(1,1-4)합니다. 그리고 유년기(1,5-4,13)가 등장하고 그 다음으로는「마르코 복음」과 유사하게 나옵니다. 갈릴래아에서 활동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그리고, 그 다음에는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 여정 안에서의 예수님의 모습을 그리고 마지막에는 예루살렘에서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다루고 있는 것이죠. 결국「마르코 복음」이 전하는 구조와 동일한 것입니다. 이「루카 복음」은 마태오나 마르코에 비해서 조금 특별한 생각을 전하고 있습니다.


루카의 가장 큰 특징, 구원의 보편성


가장 먼저 생각해볼 것은 구원의 보편성입니다. 그것을 쉽게 말하면, 누구나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유다인이건 아니건 다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구원의 보편성]이라고 말하는 것이죠. 그리고 이와 함께 '새로운 이스라엘'이란 표현이 등장합니다. 


마태오는 생각이 바뀐 것이지만, 루카는 처음부터


앞서서「마태오 복음」은 처음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이스라엘의 길잃은 양들을 위해서라고 복음서에 기록해 놓았다고 했어요. 이랬던 마태오의 생각이 바뀌기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 수난하고 돌아가셨을 때입니다. 마태오의 생각은 무엇이냐면, 원래 예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위해 파견되었지만, 그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수님을 거부하면서부터 하느님은 새로운 백성을 이끌어가신다는 게 미태오의 생각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이스라엘인들이 중심이었지만, 앞으로는 믿는 모든 이들이 새로운 이스라엘이 된다는 생각인데, 「루카 복음」은 처음부터 그런 생각을 가지고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우리는 【새로운 이스라엘】, 또는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느님의 백성이었다면 이제 신약성경에 나오는 믿는 이들은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런 걸 잘 나타내는 게 바로「루카 복음」에 등장하는 족보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에게도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아담에까지 이르는 하느님의 창조로부터 시작되는 하느님의 구원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루카 복음」의 내용이 됩니다. 


나자렛 회당의 희년 선포가 갖는 의미


이것을 가장 잘 나타내는 것은 나자렛 회당에서의 희년선포입니다. 설명이 필요한 내용인데,【공관복음서】안에서 예수님의 가장 중요한 가르침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가르치신 것 중에 핵심은 무엇이죠? 구원인가요?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선포한 핵심이 무엇이죠? 바로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이 공생활을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했던 것이 "하느님의 나라와 왔다. 그러니 회개하고 믿어라." 이것이 첫번째 선포였는데, 마태오와 마르코는 예수님의 첫번째 선포가 바로 그 내용입니다. 그런데 루카에는 그 내용이 없습니다. 미태오와 마르코의 그 자리에「루카 복음」에서는 【나자렛 회당에서의 선포】가 있습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말 대신에 루카가 선택한 것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제일 먼저 뭘 하시죠? 세례를 받죠. 그리고 나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는데, 그 자리에「루카 복음」은 "때가 차서 하느님 나라가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라는 내용 대신에, 나자렛 회당에 가서 이사야서 두루마리를 읽은 내용이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루카 복음」이 생각한 나자렛에서의 예수님의 모습은 마르코와 마태오가 선포한 모습과 같은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자라신 나자렛으로 가시어,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성경을 봉독하려고 일어서시자,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가 그분께 건네졌다. 그분께서는 두루마리를 펴시고 이러한 말씀이 기록된 부분을 찾으셨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루카 4,16-19)


나자렛 회당에서의 선포 역시 같은 거다


그러니까「루카 복음」이 생각한 나자렛 회당에서의 예수님 모습은 같은 모습인 겁니다. 하느님 나라에 대한 선포와 같은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나자렛 회당에서의 이야기는 이런 것입니다. 예수님이 회당에 들어가셔서 두루마리를 받아서 읽습니다. 이사야서 61장을 읽습니다. 하느님의 희년을 선포할 때가 왔다는 표현을 합니다. 그 내용이 바로 다른 복음서에 나오는 [하느님 나라의 선포]와 똑같다는 겁니다. 이제 그런 현실이 이 땅에서 시작될 것이라고 선포한 내용이기때문에 그렇습니다. 


뿔난 예수님이 하신 말씀


25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삼 년 육 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 온 땅에 큰 기근이 들었던 엘리야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엘리야는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파견되지 않고,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되었다. 또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 (루카 4,25-27)


그런데 그 뒷부분에 재미있는 내용이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선포하자 동네 사람들이 뭐라고 하죠. 고향이잖아요. "저 애 요셉 아들 이잖아?" 그런 식이었죠. 그러자 예수님이 뿔이 나셨는지 두가지 이야기를 하시는데 그것이 상당히 심합니다. [사렙타의 과부]와 [시리아 사람 나아만]의 이야기를 하는 건데, 이 두 사람 모두가 구약에 등장하는 이들입니다.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았지만, 하느님은 사렙타에 있는 과부에게만 보냈다고 합니다. 또 그 당시 이스라엘에는 나병환자가 많았지만, 엘리야는 유독 시리아 이방인이었던 나아만에게만 보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렙타와 나아만을 선택한 까닭


예수님은 왜 이런 얘기를 했던 것일까요?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해서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그 나자렛 사람들에게 구약성경의 이야기처럼 하느님의 구원은 이방인에게도 열려있다는 걸 말하는 것이 바로 나자렛 회당에서의 선포 부분입니다. 그러자 화가 난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절벽에 끌고 가서 떨어뜨려 죽이려고 합니다. 


루카가 강조한 것은 이방인의 구원


그러니까 더이상 이스라엘 사람만이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구원의 문이 열려있다는 것이「루카 복음」이 전해주는 가장 첫번째 예수님의 선포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내용은 다른 복음에 나오는 하느님 나라의 선포와 같은 내용이고 거기에는 이방인의 구원이란 주제가 들어있습니다. 그래서「루카 복음」은 특별히 이방인들의 구원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게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이야기입니다. 이 비유는 오직「루카 복음」에만 등장하고, 다른 복음서에는 없습니다. 


오직「루카」에만 등장하는 착한 사마리아인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다인들과 철천지 원수입니다. 실제로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과 접촉하지 않았어요. 함께 식사하지도 않았습니다. 심지어 사마리아 사람들의 땅에는 발도 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런 철천지 원수 사이인데, 예수님의 비유 내용을 보면, 사제들도 그냥 지나쳐 가고, 율법학자도 그냥 지나쳐 가고, 레위인도 그냥 지나쳐 가는데, 사마리아 사람 한 명이 길가에 쓰러져 죽어가는 사람을 데려다가 치료해주고 그런 다음 가도 착한 것인데, 어떻게 될까봐 여관에 맡겨놓고 여관주인에게 부탁을 합니다. "내가 2~3일 어딜 갔다 올테니, 그 때까지 이 사람이 잘 쉴 수 있도록 보살려 달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너의 이웃이 되어 준 것은 누구냐?" 결국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서 실제로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것은 혈통이 아니라 그렇게 하느님 뜻을 실천하는 것임을 전해주는 부분입니다.


나병환자 10명 중 감사를 표한 단 한 사람 역시 사마리아인


「루카 복음」17장에는 나병환자 열사람 비유가 등장합니다. 예수님은 나병환자 열명을 고쳐줍니다. 그런데 그 중 한 사람만 돌아와서 "예수님 감사합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게 어떤 사람이에요? 바로 사라미라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의 지도를 보면, 갈릴래아 호수와 사해의 모습이 보입니다. 갈릴래아 호수를 주변으로 예수님 활동은 갈릴래아 호수 주변이 주무대였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을 향해 여정을 시작합니다. 


왜 예루살렘에 '올라간다'는 표현을 쓸까


우리는 서울에 갈 때 "올라간다"는 표현을 씁니다. 성경에서도 예루살렘은 "올라간다"는 표현을 씁니다. 그게 수도여서 그런 걸까요? 예루살렘은 실제로 해발 600미터에 있고, 갈릴래이 호수는 해저 200미터에 있습니다. 800미터 이상, 차이가 납니다. 실제로 고도의 차이가 천미터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예루살렘이란 도시가 산 위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예루살렘에 올라간다'는 표현을 쓴 겁니다. 어찌되었든 예수님이 갈릴래아를 떠나서 예루살렘을 향해 갑니다. 그런데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은 직선도로일 겁니다. 그런데 당시 사람들은 사마리아를 피해가려고 구불구불 길을 돌아 갔습니다. 


최단 직선로를 선택하지 않은 까닭


그래서 갈릴래아 남쪽에서 사마리아가 시작되는 지점에서 요르단강을 건너 갑니다. 그리고 요르단 강을 따라서 주욱 남쪽으로 가다가 다시 사마리아가 끝나는 지점에서 다시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오는 데, 그 동네가 바로 예리고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 거의 모든 사람은 이 예리고라는 도시를 거쳐서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광야를 지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갔습니다. 집으로 갈 때도 똑같이 갈 정도로 사마리아 사람들을 싫어했다는 겁니다. 그렇게 철천지 원수였던 사마리아 사람인데, 「루카 복음」에서 사마리아 사람이 강조되고. 선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루카 복음」이 지닌 이방인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부와 가난'에 대한 관심이 컸던 루카


특히「루카 복음」은 공관복음서 중에서도 부와 가난에 대해서 관심이 컸습니다. 그래서「마태오 복음」에 나오는 [산상설교]와 같은 부분인 <행복과 불행 선언>에 보면 차이가 있습니다. 진복팔단의 첫번째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그것과 똑같은「루카 복음」의 구절은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무슨 차이가 있나요? 가난한 것은 그냥 가난한 것입니다. 그런데 재물은 좀 가지고 있지만, 마음이 가난할 수 있습니다. 「루카 복음」이「마태오 복음」보다 훨씬 더 직접적이고 강조를 해주고 있습니다.



참행복 [루카 6,20-23] (참조. 마태 5,1-12)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며 말씀하셨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 그리고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불행 선언 [루카 6,24-26] 

“그러나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 불행하여라,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 너희는 굶주리게 될 것이다. 불행하여라, 지금 웃는 사람들! 너희는 슬퍼하며 울게 될 것이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거짓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부자들의 어리석음에 대한 비유


그리고 비유 중에서 부자들의 어리석음에 대한 비유를 사용합니다. 바로 12장 13절부터 21장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첫번째는 탐욕의 경계와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가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사람이 농사를 열심히 지어서 엄청난 수확이 났습니다. 그러다가 엄청나게 좋은 생각이라고 곳간을 크게 지으려고 합니다. 그러자 하느님은 하느님은 그날 저녁에 그 사람의 목숨을 불러갈 것이라고 이야기되는 부분입니다. <어리석은 부자의 이야기> 이런 비유를 통해「루카 복음」이 하고 싶은 이야기는 뭘까요? 우리가 곳간이 없으니까 어려운데, 예를 들어 통장에 100만원 이상의 저금이 안된다고 가정을 해볼까요? 그런데 130만원을 벌었으면 100만원을 저금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차명을 쓸까요? 대포통장을 만드나요? 그런 것입니다. 30만원을 어디에 넣어두지? 라고 고민하지 말고 나누라는 것입니다. 곳간이 꽉 차서 어떡하지?라고 고민하지 말고 나누라는 것입니다. 


열매맺지 못하는 무화과 나무는 유다인을 빗댄 것


또 열매맺지 못하는 무화과 나무의 비유(13,6-9)가 있습니다. 열매맺지 못하는 무화과 나무는 유다인들에 대한 비유입니다. 아무리 하느님이 그 긴 역사동안 구약의 시대에 별 예언자들을 다 보냈지만, 아직도 믿음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유다인들을 비꼬는 이야기입니다.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


또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16,19-31) 이야기가 있습니다. 현실에서 아주 부자로 살았던 사람과 그 집앞에서 병이 들어서 구걸하던 라자로라는 인물의 이야기입니다. 이들이 죽어서 하늘나라에서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살아갈 것이란 점을 전해주는 이야기입니다.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


또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18,9-14)도 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성당 맨 앞에 가서 남들이 잘 보이는 곳에 가서 우렁차게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세리는 저 구석진 곳에 가서 조용하게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세리의 기도가 하느님 뜻에 더 맞는 기도라고 말해주는 대목입니다.


루카는 함께 나누고 살자고 말하고 있다


이렇게 부와 가난의 문제, 그리고 당시 주류를 이루던 사람들과 주류를 이루지 못한 이들의 이야기를「루카 복음」은 많이 이야기합니다. 이것을 많이 하는 이유는 그만큼 함께 나누면서 살라고 요구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내용은「사도행전」에 가면 더 잘 나타납니다. 2천년전으로 돌아가자고 우리도 말하는데, 그 때 인용하는 내용은「사도행전」2장과 4장의 내용입니다. 초기공동체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을까요? 함께 기도하고 가르침받고 마지막으로 한 것 하나는 공동소유였습니다. 재물을 다 내어놓고 필요할 때 가져다가 쓰는 겁니다. 그런데「루카복음」에서 언급하는 부와 가난에 대한 이야기와「사도행전」에서 말하고자 하는 초기 공동체 모습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루카가 나눔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눔에 대한 가톨릭의 공식 가르침


나눔에 대한 가톨릭의 공식적인 가르침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나눠야 할까요? 가톨릭 신자들은 "이렇게 나누고 삽시다."라고 이야기하는 게 있습니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 비용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내가 필요한 것을 하고 남는 게 있으면 나누자.'는 겁니다. 물론 여기에는 매우 추상적 인 표현이 있습니다. 어디까지나 나에게 필요한 것인가에 대한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필요한 것이란 무엇일까요. 그러나 다만 쌓아두는 게 필요한 것이 아니란 건 분명합니다. 우리의 일반적인 가르침은 내가 하고도 남은 것은 나누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상당히 설득력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2006년에 가구비율이 100프로를 넘었습니다. 무슨 이야기일까요? 우리나라에는 집이 모자르지 않습니다. 이미 2006년에 필요한 집의 숫자를 넘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저는 집이 없습니다. 어떻게 된 거죠? 제 친구도 집이 없어요. 그러면 누군가 집이 없지만. 누군가는 2~3채의 집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히 살지 않는다


그리고 전세계에서 생산하는 식량을 따져보면 모두 배가 터져서 죽어야 합니다. 그렇게 식량이 남아 돌지만 아프리카에선 10초에 한명씩 굶어죽는다고 합니다. 없어서가 아니라 남는 데 나누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막 억압하고 협박해서 돈을 뺏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필요한 것 하고 남는 게 있으면 그걸 나누자는 게 우리의 가르침입니다. 마찬가지로「루카복음」역시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가지고 있는 것을 나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왜죠? 우리가 여기서 영원히 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전해진 그것이 나의 노력에 따른 것이기도 하겠지만, 그것은 하느님이 마련해주신 것이란 생각이 바탕에 깔려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루카복음」과「사도행전」은 나눔에 대해 많은 걸 전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나눔을 실천하면서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다고 본 것이 루카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은「사도행전」을 보면 가장 잘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삶을 사는 만큼 실제적으로 우리의 삶 안에서 드러나는 것을 루카가 표방한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사도행전은 루카 복음서의 제2부에 해당


여기서「루카복음」과「사도행전」은 한 명에 의한 작품입니다. 그래서 그 내용은 비슷하고, 조금 늦은 시기인 90년에서 100년 사이에「사도행전」이 기록되었을 것으로 봅니다. 우리는 모든 공관복음의 공통된 틀에 대해 말하면서,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모든 공관복음서의 특징입니다. 그렇다면 「사도행전」은 어떠할까요? 「사도행전」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온 세상으로 향해가는 이야기이다. 그래서「루카복음」을 1부라고 한다면, 「사도행전」은 2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열두 사도의 복음 선포 과정


「루카복음」이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열두 사도들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라면,「사도행전」은 이제 열 두 사도를 중심으로 교회가 어떻게 발전해 나갔는지, 열 두 사도들을 중심으로 복음을 어떻게 선포해 나갔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바로「사도행전」의 모습입니다.


본격적인 박해와 갈등이 시작되었다


그래서「사도행전」은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그 예루살렘으로부터 이제 열두 사도와 바오로 사도가 온 세상에 예수님에 대한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이야기해주는 책입니다. 그리고「사도행전」은 본격적으로 박해라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유다인들로부터, 또 다른 사람들로부터 더이상 신앙을 마음대로 펼치지 못하고 복음을 마음대포 펼치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그런 박해 상황에서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나누고 함께 사랑하고 기도하는 좋은 모습 뿐만 아니라, 초대 교회가 겪어야만 했던 여러가지 갈등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줍니다. 


갈등 중에 대표적인 것


그리고 그 갈등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은「사도행전」의 15장에 나오는 <예루살렘 사도회의>라는 것입니다. 이제 유다인들이었다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던 사람들이 첫번째입니다. 왜냐하면 갈릴래아에서 예수님이 활동을 시작했기 때문이죠.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사도들이 활동하면서 이방인들이 더 많아집니다. 훨씬 더 큰 지역인 그리스와 소아시아에서 예수님을 믿기 시작했던 것이죠. 그래서 이들 사이에서 갈등이 생깁니다. 유다인 출신들은 이방인 출신들에게 이야기한다. 너희들 이거 하려면, 똑같이 해라. 할례받고 율법 공부해야 한다. 그러자 이방인은 "그건 유다인들 것인데 그걸 내가 왜 해?" 그래서 사도들이 모여서 회의를 합니다. 거기서 결정된 것은 '율법은 강요하지 않는다.' 단 몇가지 피를 먹지 말라거나 우상숭배하지 말라거나 등을 지키면 신앙인으로 살 수 있다고 결정을 내려준 겁니다. 그런데 이런 결정이 내려질 때까지 갈등이 있었다고 보는 겁니다. 그래서 좋은 초기 공동체의 모습도 있지만 그런 갈등도 살짝 엿보게 되는 겁니다. 


사도행전의 내용 요약


「사도행전」의 내용을 간단하게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처음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유다 자리를 메우는 마티아 사도를 선출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11명이 되었던 빠진 부분을 보충한다는 것은 새롭게 무엇인가를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비었던 자리를 채워서 새로운 시대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실제로「사도행전」의 구성을 보면, 1장부터 8장까지느 주 무대가 예루살렘 공동체입니다. 예루살렘에서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어떻게 살았는지를 이야기해주는 게 첫번째 입니다. 그리고 이후 8장부터 11장까지는 유다와 사마리아. 다시 말하면 예루살렘 근처 지역들에 복음이 선포된 이야기들을 전해줍니다. 이미 여기에서 사마리아에도 복음이 선포되었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이제 더 이상 예수님을 믿는 시람들은 유다교와 달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인들이 가졌던 사마리아인들에 대한 적대감을 갖지 않았던 것입니다. 


세상의 중심 로마에까지 선포되었다는 것


그런 다음에 11장부터는 아주 길게 바오로 사도를 중심으로 한 그리스 지역과 소아시아 지역의 이방인을 향해서 행한 복음선포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바오로 사도가 간 곳은 로마였습니다. 원해서 간 것이 아니라 마지막에는 잡혀서 수인의 몸으로 갔습니다. 결국「사도행전」이 전하는 이야기는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된 복음선포가 그 지역에 이루어지기 시작하고, 그리고 그리스 지역과 소아시아 지역을 거쳐서 결국은 세상의 중심이라고 하는 로마에까지 선포되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게 「사도행전」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복음서가 예루살렘까지의 여정, 죽음과 부활까지의 여정이었다면, 「사도행전」은 그 이후에 특별히 사도들을 통해서 주위의 교회들을 통해서 복음이 선포되고 예수님의 활동이 지속된 이야기를 전해주는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2:30 종료. 공관복음과 사도행전 강의 종료)




가톨릭교리신학원 2단계 1학년(3학년) 하계연수
2015-8-22 토요일 서울 혜화동 교리신학원 지하 강당

공관복음과 사도행전(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오전 4교시(11:45~12:30)

허규 베데딕토 서울대교구 신부. 1999년 7월 7일 사제 수품, 뮌헨 루드비히 막시밀리안 대학교에서 성서신학 박사학위를 받고,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신약성서 교수로 요한 묵시록과 희랍어 등을 가르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