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봉의 책「행동하는 사랑」1장 햇발처럼, 교회개혁 - 밑줄긋기
한상봉의 책 「행동하는 사랑」 01
햇발처럼, 교회개혁
가톨릭은 교황의 종교인가 13
15
교황이란 '로마의 주교'를 지칭하는 말인데, 바오로와 다르게 베드로는 디아스포라 '유대인'을 대상으로 선교에 나섰던 인물로 로마인들의 주교였던 적이 없다. ... 베드로는 갈릴래아 어부 출신의 유대인이었다. 다만 로마에서 죽었다고 알려져 있을 뿐이다. 이런 점에서 로마 주교인 교황이 왜 '어부의 반지'를 손가락에 끼는지 납득하기 어렵다.
16
사실상 제국인 로마가 가톨릭교회를 삼켜버렸기 때문에 로마의 주교가 교황이 되었다고 보는 게 옳다. ... 그러나 역사적으로 가톨릭 교회의 중요한 교리들은 대부분 로마가 아니라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선포되었다.
17
가톨릭 교회는 본질적으로 지중해 동부 연안의 종교였다. ... 특히 안티오키아는 '그리스도인(Christian)'이란 말이 처음 사용된 곳이다. ...
18
시몬 베유는 적절하게도 그리스도교를 '노예들의 종교'라고 불렀다. ... 가톨릭 교회는 지난 2000년 동안 '교황 군주제'를 고집해왔다. 세계 교회의 모든 주교들의 임명권은 교황에게 집중되었고, 교황은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치에서 흔들린 적이 없었다.
19
교회는 마땅히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가 되어야 한다. ... (프란치스코) 교황의 몇 마디가 교회를 바꾸지 못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20
생각이 다른 이를 설득하기는 힘들어도 경멸하기는 쉽다.
21
중요한 것은 교황이 아니라 '복음'이기 때문이다.
22
이태석 신부와 김수환 추기경은 한국교회의 '브랜드'에 지나지 않았다.
출퇴근하는 교황, 교구청 떠나는 주교 23
숙소를 교구청 바깥에 마련하고 출퇴근한다면 얼마나 많은 이들의 얼굴을 보게 될 것이며 ...
아직 '쏘울'이 없으신가요? 28
(프란치스코 교종은) 최신식 자동차를 몰고 다니는 사제나 수녀를 보면 마음이 아프다. 그래선 안 된다. ... 부디 좀 더 소박한 차를 선택하기 바란다. ... 만일 화려한 자동차가 좋다면 얼마나 많은 어린이들이 굶주려 죽어가고 있는지 생각해 보라.
사업가로 내몰리는 사제들 33
가톨릭교회의 복지사업과 수입사업에 관련해 발생한 스캔들은 ... 인천교구에서 운영하는 국제성모병원은 2015년 2월부터 의료급여 부당청구 혐의로 ... 서울시는 2015년 6월 10일 장애인복지시설인 '기쁜우리월드'의 대표이사를 맡고 있는 박성구 신부를 (횡령, 회계부정 등 혐의) 해임하였습니다.
4,000명이나 수용하고 있는 꽃동네와 같은 대형시설은 수용자의 인권을 보호하고, 장애인들의 자립생활을 추구하는 시대정신에도 어긋납니다. 1999년에 개정된 '사회복지법'에서는 복지시설의 최대 수용인원을 300명으로 제한하고 있습니다. … 자신감있게 활보하는 오웅진 신부가 한국 교회의 상징이라면 하늘 아래 낯부끄러운 일입니다.
가난한 이를 위한 가난한 교회 41
우리 교회가 점점 공무원사회가 되어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의구심입니다. 독일의 유명한 신학자 카를 라너는 성직자들을 '종교 공무원'이라고 말했다고도 하는데
형제와 친구들 사이에서는 이해관계가 끼여들 여지가 별로 없습니다. 거래와 흥정이 없는 관계가 형제이며 친구입니다. … 현실 속에서의 교회는 흥정과 거래의 상업주의가 깊숙이 배어 있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를 위한 청사진이 제시되어야 합니다. … 가장 구체적인 사례를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낳은 원주교구의 초대교구장 지학순 주교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 지학순 주교는 사제들에게는 사회과학과 사회교리를 학습케 하고, 각 본당과 공소에서 평신도 지도자를 양성했으며, 이 평신도들이 지역문제를 신앙 안에서 해결하도록 방법을 찾았습니다. 그 결과 교회는 신자뿐 아니라 그 지역사회 자체에 복음이 되게 한 것입니다. 생활협동조합운동이 원주에서 뿌리내리고 이 힘으로 원주를 한국민주화운동의 메카가 되도록 했던 것입니다.
봉사하는 교회, 봉사하는 주교 49
절판된 지 오래된 이브 콩가르(프랑스 도미니코회의 추기경)의 『봉사하는 교회, 가난한 교회가 되기 위하여』라는 책이다. 이브 콩가르가 1973년에 이 책을 출간했으니, 한국교회가 곧바로 직수입해서 번역(1974년 가톨릭출판사 번역출간)한 셈이다. 여기서 당시 한국교회가 공의회 정신을 얼마나 스펀지처럼 흡수하고 있었는지 가늠할 수 있다. 1974년은 지학순 주교가 민청학련 사건과 관련해 구속된 해이면서, 이른바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젊은 신부들이 유신정권에 맞서 싸우던 때다.
서로 상좌(上座)를 차지하려는 제자들을 예수는 꾸짖는다. 예수가 전하는 으뜸자리는 '심부름꾼'의 자리다. 사람들을 위해 노고를 아끼지 않는 '노예'의 길이다.
오직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만 그리스도인들과 사제들은 스스로를 '종'이라 불렀다. 이들은 그리스도에게 완전히 사로잡힌 종이며, 예수처럼 다른 모든 형제들의 종이 될 것을 서약하고 봉사함으로써 주님과 온전히 결합된다고 믿었다.
(한국교회의 현실) 교구장 주교 아래 줄을 서 있는 측근들의 호가호위(狐假虎威)하는 문제는 더 심각하다. 야망이 있는 사제들은 저마다 이해관계에 따라서 교구장의 마름 역할을 자임하고 나서고 ...
지배만 남고 봉사는 종적을 감춘다
(안동교구 초대 두봉 주교를 존경하는 맥락에서) 평사젣ㄹ의 뜻을 모아서 사목지표를 정하는 기풍은 아직 안동교구 밖에 없다.
공동체 없이 주교 없다 56
요한 바오로 2세와 베네딕토 16세 교종이 강요했던 수직주의에 가장 실제로 저항해 왔던 것은 라틴 아메리카의 기초공동쳉ㅆ으며, '아래로부터 탄생하는 교회'를 부르짖던 레오나르도 보프가 교황청의 심문을 받아야 했던 것처럼 '수평주의'는 '사실상' 억압되었다.
한 사람의 성향과 노선과 사목정책이 전체 교회의 향방을 결정짓는다는 것은 참으로 위험하고도 안타까운 일이다. … 일단 교구장에 '착좌'하면 그분의 말씀이 곧 법이 된다. 중세기의 영주처럼
어머니이신 교회가 나를 박해한다 62
2015년 6월 22일 이탈리아 토리노에 있는 발도파 교회를 방문해서 용서를 청한 사건을 … 발도는 종교개혁 이전인 12세기 후반에 청빈운동과 교회개혁을 주장하다가 파문당했던 가톨릭 신자였기 때문이다.
"나를 박해한 것은 어머니이신 교회였다."라는 것이다. 신앙심이 깊은 선배일수록 다가오는 슬픔은 더욱 컸다. 약 800년 전 발도파 사람들도 그렇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네메슈헤지이 신부가 『하느님을 찾아서』(분도출판사 1975)에서 프랑스 신학자 로랑탱의 저서를 인용해 다섯가지 유형으로 가톨릭신자를 분류한 것은 의미가 깊다. 이들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전으로 교회를 복귀시키려는 '보수적 그리스도인'(Conservative Christian),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교회당국의 승인을 얻어 교회를 쇄신시키려는 '진보적 그리스도인'(Progressive ~), 복음대로 살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교회를 이루기 위해 헌신하면서도 제도교회의 관행에 항의하는 '급진적 그리스도인'(Radical ~), 교회의 제도와 활동에 실망해 교회를 떠났지만 여전히 가톨릭 신앙을 고백하고 있는 '개인적 그리스도인'(Individual ~), 기성교회에 대한 불만을 품고 대안교회를 세우려는 '지하교회 그리스도인'(Underground ~)이다.
네메슈헤지이 신부는 "교회개혁은 급진적 그리스도인의 예언자적 행동에 자극을 받아서 진보적 그리스도인이 용기있게 추진하는게 바람직하다."고 말한다.
(발도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사제였던 베르나르 이드로와 안사의 스테파노를 고용하여 복음서와 교부들의 어록을 프랑스어로 번역한 것이다. 그리고 추종자들을 둘씩 짝지어 거리와 촌락으로 파견해 '가난한 이들을 위한 복음'을 설교하도록 했다. 위협을 느낀 리옹의 주교가 평신도는 신앙문제에 대해 언급할 수 없다는 이유로 설교를 금지시켰다. 그러자 발도는 "사람들의 말을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하며 주교의 조치에 순종할 것을 거부했다.
결국 하느님 앞에서 교회 권위의 명령을 상대화한 것이 화근이 되었다. 발도파는 2명의 회원은 1179년 제3차 라테라노 공의회에 보내 자신들의 생활방식을 승인해줄 것과 설교할 자격을 달라고 알렉산데르 3세 교황에게 간청했다. 그리고 자신들이 번역한 프랑스어 성경을 교황에게 선물했다. 토리노 발도파 교회가 프란치스코 교종에게 프랑스어 성경을 선물한 것은 여기서 유래된 것이다. 복음서를 프랑스 민중에게 되돌려 주려는 발도파의 생각을 교황은 동의하거나 거부할 수 있었다. 당시 교황의 반응은 아예 복음서를 성직자 외에는 읽지 못하도록 엄금시킨 것이다. 교회에서 성경이 평신도에게는 '금서'가 된 것이다.
교황은 1197년 발도파에 대한 화형포고령을 발동했다. 리옹에서 추방된 이후 발도파는 계속된 박해로 이탈리아, 독일, 보헤미아, 폴란드, 헝가리, 스위스로 흩어졌다. 1380년에는 발도파 169명이 역설적이게도 프란치스코 수사들에게 화형당했고, 1645년에는 스위스 가톨릭 군대가 발도파 마을 22개를 전멸시켜 약 4,000명 가량이 죽었다. 1560년에는 스페인에서 2,000명이 화형당하고, 1,600명이 투옥되었다.
발도파는 현재 4만 5,000명 가량이 이탈리아, 우루과이, 아르헨티나 등에 남아있다.
네델란드 출신의 에라스무스(Erasmus, Desiderius, 1466~1536). 인문주의자이며 가톨릭 사제였던 에라스무스는 칼뱅과 루터에 의한 종교개혁의 광풍이 부패한 가톨릭교회의 머리 위에 쇠망치가 되어 두드리고, 결국 유럽이 두 동강이 나던 때에 '유럽의 일치'를 위한 교회개혁을 주장했다 그래서 양측에서 모두 비난의 화살을 받았던 고독한 종교개혁자였다. … 에라스무스가 영국에 있는 친구 토머스 모어의 별장에서 쓴 『바보예찬』은 익살스럽게 그러나 명쾌하게 당시의 종교적 상황을 풍자하고 있다.
에라스무스는 복음의 원천으로 되돌아가 '독단적 교리 아래 숨어 있는 그리스도를 끄집어내' 형식에 질식당하고 있는 교회를 정화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루터나 츠빙글리, 칼뱅처럼 교회의 문제를 일거에 쓸어버리는 격한 방법을 택하지 않았다. … 그러나 종교개혁의 불길이 치솟아 오르면서 유럽인들은 교황파 아니면 루터파가 되도록 강요받았다. 가톨릭 교회 안에서 복음과 교회생활을 화해시키려던 에라스무스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간 셈이다. 그러나 에라스무스는 가톨릭교회의 편에도 종교개혁자의 편에도 서지 않았다. 둘 다 의미 있는 존재이지만, 둘 다 광신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신교도들은 그에게 저주를 퍼붓고, 가톨릭교회는 그의 모든 책을 금서목록에 올렸다. 에라스무스의 견해를 따르지 않았던 유럽세계가 치른 대가는 참담했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는 비교적 안전한 길을 선택했다. 교회 권력에 대한 저항이라는 직선을 선택하지 않고, 교도권이 수락하는 범위 안에서 스스로 가난을 선택함으로써 '복음적 청빈'의 모델을 제시하는 '정세개벽'(靖世開闢)을 요청했다. … 발도파는 교도권의 강제에 저항하며 복음적 청빈을 올곧게 살아가고 주장함으로써 교회 권력의 박해를 불러오고, 결국 '게토화'되거나 개신교회에 합류한 경우이다.
한국천주교유신론을 기다린다 73
불교적 정서는 ... 우리 민족의 유전 인자 속에 두루 각인되어 있는 듯하다.
어머니 자궁에 있듯 숲에 편안하게 들어앉은 절간에도, 항상 고요하게 수행정진하는 스님들만 있다고 믿었던 불교에도, 갈등과 반목이 자리잡고 이권을 둘러싼 더러운 패싸움이 난무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한참 뒤였다.
엄격하게 수행에만 전념하는 이판승의 비율은 전체 승려 중 고작 10퍼센타 가량이라니 놀랄 만하다. … 계율대로라면 승려들은 세 벌의 옷과 밥그릇 하나를 일컫는 '삼의일발'(三衣一鉢)만을 소유할 수 있었다.
사람의 마음을 덮어 어리석게 하는 것은 애착과 탐욕이 있기 때문이다. (불경)
교회개혁과 관련해 주목해야 하는 한국교회 신학자 몇 분이 있다. 정양모, 서공석, 이제민 신부다. 이분들은 1998년 강연 내용과 글에 대한 교황청의 제동 때문에 천주교회 안에서도 제법 잡음이 많았다. 이분들의 글은 대부분 로마 중심의 중앙집권적 교회와 가부장적 성직주의 등에 대한 비판적 견해를 담고 있었다.
천주교회의 비공개주의, 마녀재판식의 밀실주의와 상관있다고 본다. 그 과정에서 희생자는 여전히 외롭고 가해자의 품위는 전혀 손상되지 않는다.
인사권을 쥐고 있는 주교에게 복속된 사제 신학자들에게 교회개혁을 위한 냉엄한 신학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인지 모른다. 그렇다면 '파문'의 효과마저 무색해진 세속화된 교회 안에서 가장 절실한 것은 '평신도 신학자'다.
접동 접동 아우래비 접동 86
사제가 된다는 것은 제도권에 편입되는 것이고, 제도는 한 인간의 결단보다 막강하다는 것을 알았다.
한국천주교회사는 서글픈 과목이었다. 한국교회의 역사는 1970년대 이후 일부 사제들에 의해 주도되었던 민주화 운동을 빼고 나면, '가난한 이들에게 전해진 복음'과 그다지 상관이 없었다. 그래서 우린 것을 '한국제도교회사'라고 불러야 옳다. 일제강점기의 영악한 교회 ...
예수는 유대교의 토양에서 성장하였지만 유대교에 얽매이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우린 가톨릭교회의 토양에서 성장하였지만 가톨릭이라는 제도 종교의 처분에 사사건건 얽매일 필요는 없다.
로메로 대주교는 "여러분이 교회"라고 말했다. 교회의 모든 영적 유산은 만인의 공동유산이다. 어떤 신분이나 권위에 의해 독점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가 부랑자였고, 떠돌이였다는 사실을 그들은 너무나 쉽게 망각한다.
16세기 천재 화가 라파엘로는 궁정화가의 아들로 태어나 그림으로 엄청난 부를 누리고 방탕한 생활을 즐겼다. 그는 '천박한' 갈릴래아의 예수 대신에 영광의 그리스도만을 그렸다. 라파엘로가 누린 행운의 비밀은 하느님과 성자 에수와 성인들의 초상을 그릴 때 이탈리아의 지배계급을 모델로 삼았기 때문이다. … 르네상스 이후 모든 금욕과 자취는 교회에서 사라져 가고 있다.
살림이 넉넉한 시민들에게 종교는 색다른 문화적 요구를 채워줄 뿐이다.
엘살바도르의 순교자,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 … 돔 헬더 카마라 대주교 … 관건은 언제나 진리에 대한 '정직함'에 있었다.
한상봉의 책「행동하는 사랑」'1장. 햇발처럼, 교회개혁' 밑줄긋기
(리북 | 2015-09-25 | 정가 14,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