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봉의 책「행동하는 사랑」2장 사제들의 거리 - 밑줄긋기
한상봉의 책 「행동하는 사랑」 02
2. 사제들의 거리
사제는 가난합니다. 하느님께 모든 것 내어주었으니, 사제는 나를 접고 그분을 입어 빈 몸으로 세상을 건너갑니다. 사제는 형제이며 자매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세상을 위한 종입니다. 사제는 세상에 나를 넘기고 너에게 갑니다. 너에게 가서 온전한 기쁨이 됩니다. 사제는 그분을 만납니다. 거리에서, 성당에서, 지성소에서
주님에 대한 사랑은 벗에 대한 사랑이다 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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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들의 권위주의는 갑작스레 나타난 것도 아니고, 가톨릭교회의 콘스탄티누스 전환 이후 권력화된 교회 안에서 수시로 출몰하는 유령같은 것이었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은수생활과 수도전통이 발생하고, 아시시 프란치스코를 따르는 탁발 수도회도 출현했다.
실상 사제들의 권위주의는 복음적 열정의 상실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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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직자 권위주의의 문제는 복음에 대한 민감성의 문제다. 복음에 대한 민감성이 부족한 사제들은 '자기중심적 태도'에 머문다. 유아처럼 '엄마'이신 성모마리아에게 중요한 결정에 대한 처분을 맡기면서, 아이들처럼 '누릴만한 권리'에 집착한다.
사목직분이 이들에게는 '대장놀이'를 행하는 일종의 '놀이터'가 된다. 아니면 기본직무만 수행하고, 카메라와 오디오 앰프와 자동차와 골프 등 취미생활에 몰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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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가 사제가 아니라 평신도였다는 점은 다행스런 일이다. 유대종교에서나 교회에서나 사제는 본인의 의식과 상관없이 신분상 '권력'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는 치유자에 머물지 않고 상처의 본질로 전진했으며, 그 본질의 중심에 '하느님 없는 권력의 무자비함'이 놓여있음을 발견했다. 그래서 그는 마지막 고행의 길로 예루살렘 성전으로 향했으며, 거기서 무력함으로 무력한 자들을 섬기는 최고의 형식, '죽음'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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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들의 사목적 태만이 수도자는 물론 신자들에게 '복음화'라면 무조건 입교자들을 늘이고 본당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으로 여기게 만들었다. 용산참사가 발생했을 때, 강정에 해군기지가 들어선다고 소란할 때, 밀양에 송전탑이 들어설 때, 노동현장에서 해고노동자들이 줄줄이 무덤으로 들어갈 때, 세월호에서 아이들이 떼로 수장될 때에도 교회는 '대체로' 안녕했다. 차별과 배제, '무관심의 세계화'가 교회 안에서 고스란히 관철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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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안팎의 악마적 세력은 세상의 가난한 이들에게 문을 닫은 제 가슴을 치는 대신에, 세상을 위해 투신하는 이들의 발목을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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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은 현실 앞에서 '중립'적이지 않다. … 사제란 '족음적 진정성' 안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해야 하며, 신자들의 동의를 반드시 구할 필요도 없다. 중요한 것은 신자들의 생각이 아니라, 복음적 명령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섬겨야 할 분은 하느님이지, 신자가 아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의지에 '복종'하기로 작심한 '하느님 백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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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에게 기도하시는 하느님 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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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심판 때에 모든 인간은 세상과 교회가 부여한 온갖 계급장을 떼고 하느님 앞에 벌거벗고 나서야 한다. 미켈란젤로는 시인 단테가 "네가 너 자신을 황제, 너 자신의 교황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 것처럼, 세속과 교회 권위에 종속되지 않고 고독하게 은자처럼 자신의 길만을 따라 걸었다. 그리고 도미니코회 수도자 피렌체의 사보나롤라(G. Savonarola, 1452~1496)의 영향을 받아 '최후의 심판'을 그렸다.
The Last Judgement, Michelangelo, via Wikimedia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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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보나롤라는 성직자들 대부분이 그리스도교적 삶을 장려하기보다 파괴하는 데 적당한 사람들이라며, 그들이 진정한 하느님의 예배를 소멸시켰다고 비판했다. 심지어 성직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오늘 다시 로마에 오신다면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을 사람들"이라고 비판했다. 당시 교황 알렉산데르 6세는 이 예언자를 파문하고, 붙잡아 공공장소에서 교수형에 처한 뒤 시신을 불살라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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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는 사보나롤라를 통해 예언자를 발견했다. 그에게 예언자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깨어나 일어선 사람들, 마음 가장 깊은 곳에서 소용돌이쳐 온 힘으로 백성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 싸운 사람들"이었다. 미켈란젤로는 단테의 『신곡』에 따라서 「최후의 심판」을 그려 과거와 현재의 인류와 교회를 심판했다. 이 그림에서 수염이 없는 그리스도는 위협적인 몸짓으로 천둥같은 심판을 거행한다. … 그가 교황이든 주교든 할 것 없이 모두가 벌거벗은 채 그리스도 앞에 노출되어 있었다. 속내가 다 들여다보이는 모습이 당대의 성직자들을 불쾌하고 만들었고 반발을 일으켰다. 이 그림을 본 교황의 의전관이 "거룩한 장소에 상스럽게 온몸을 드러내는 나체가 웬말이냐. 이것은 교황의 성당이 아니라 목욕탕이나 음식점에 어울릴 그림"이라며 흠을 잡았다. 화가 난 미켈란젤로는 의전관이 나가자마자 그를 지옥에 있는 미노스의 얼굴로 그려넣었다. … 결국 이 그림이 논란이 되어 훗날 트리엔트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벌거벗은 몸은 모두 옷으로 덧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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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는 은수자처럼 살며 자신이 직접 이 그림을 그렸으면서도 "최후의 심판 때 나는 넘어지지 않고 견딜 수 있을까?" "그날에 오른편에 서기 위해 나는 무엇을 행해야 하는가?" 고심했다고 한다. 「최후의 심판」에서 바르톨로메오가 들고 있는 벗겨진 살가죽에 미켈란젤로의 자화상이 그려져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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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무상 필요'가 아니라면, 소박한 소유는 그 인간의 영혼을 자유롭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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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세속화란 "신앙심의 외양 뒤에, 심지어 교회에 대한 사랑의 겉모습 뒤에 숨어서 주님의 영광이 아니라 인간적인 영광과 개인의 안녕을 추구하는 것" (복음의 기쁨 93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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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직무를 교회 안에 가두려는 '전통적 사제'들은 복음이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 관심이 없는 성직자들이다. 이런 사제들은 복음화율(지역주민 대비 신자율)은 강조하면서 '복음화' 자체는 관심이 없다. 오히려 성지순례와 신심행사, 회식과 번잡한 회합, 본당 관리 업무로 바쁜 일상을 보낸다. 카를 라너는 이런 사제들을 두고 '종교 공무원'이라고 비판한 바 있다. 이들은 자신을 복음선교를 위한 사목자로 인식하기 보다, 주교로부터 위임받는 본당의 '관리인'이라는 신원의식에 사로 잡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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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는 먼저 신자들을 위해 자신의 시간을 내어 놓은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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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세속화에 물드는 사제들) '성령운동'과 관련된 사제들이 많은데, 대중적 열광주의에 기대어 추종자들을 모으고 자신의 '왕국'을 건설하려는 사제들도 있다. 이들은 피정시설과 수용시설, 연구소 등 다양한 내용과 방식으로 토지를 매입하고, 대형 건축물을 짓고, 대대적으로 후원자를 모집하면서 공적 사업을 사실상 '사유화'한다. 이들은 공적 위계 안에서 권력화되는 길을 포기하고, 공적 교회 체계 밖에서 개인적 능력을 발휘해 '우상'으로 군림한다. 이 안에는 은퇴 이후를 대비하는 재테크 개념도 일부 포함되어 있다. 여기서 복음은 실종되며 종교는 상품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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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들은 주임사제가 되고서야 안도한다. 파란만장한 구비들을 용케 견디었구나, 스스로 다독인다. ... 대부분 교회 안에서 '독립적인 지휘관' 역할을 수행한다. ... 본당 안에서는 '리틀 주교'(little bishop)로 기능한다. ... 교종은 이처럼 '깊은 영적 세속성'의 늪에 빠진 교회를 두고 "선으로 포장된 끔찍한 타락"이라고 탄식
가난한 사제들을 변호함 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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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 같은 번영신학을 선포해야 반기는 신자들이 많다면, 복음은 '교회 밖에서' 오히려 반가운 악수를 나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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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안에서도 뜻있는 사제들과 신자들의 연대가 필요하다. 그래서 하느님 이름으로 맘몬을 섬기는 기득권층의 포로가 된 교회를 해방시켜야 한다.
삶이 없는 신앙은 얼마나 무모한가 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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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성직자 권위주의'를 타박했지만, 요즘은 성당에서 '복음' 자체가 실종된 것처럼 보인다. 따지고보면, 교회가 신자들에게 '복음'의 사회적 의미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은 탓이 크다. 한국교회는 지난 수십 년동안 '성장'하는 데만 몰두해 있었다. 아파트 단지가 들어설 때마다 성당을 새로 지어야 한다는 즐거운 비명을 지른 사람들이 교구장 주교와 사제들이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이라는 사회교리의 명제는 교회 성장에 늘 걸림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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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 나오라고 해!"라는 할머니의 발언은 '잘 나가는 교회'의 속사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우리 돈으로 교회가 이만큼 좋아졌는데, 이제 와서 신부들이 딴소리 하고 있다."는 게 '잘 나가는' 부유한 천주교 신자들의 불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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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주장 주교들) 입에 올리던 정의와 평화를 몸으로 실천하는 사제들을 교회 안에서 '왕따'로 만들어 왔던 교구장 주교들이 충분히 반성하고, 자식같은 사제들을 따뜻한 눈빛으로 끌어안아 주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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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 나오라고 해!"라고 외마디를 지른 할머니의 발언에 대한 책임을 그 할머니에게 물을 수 없다. 그분은 오래전부터 "교회에서는 정치활동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사제들에게 들어 왔다. 교회에서 마음의 평화를 찾아야 하고, 우리 죄를 대신해서 돌아가신 예수님께 감사드리며 봉헌하고, 기도와 참회 안에서 살아야 한다는 개인주의 신앙을 배워 왔다.
교회 전통은 언제나 복음의 시선으로 세상을 읽으라고 권하고 있다. 교회가 교회 전통을 배신한다면 누가 교도권을 따를 것인가?
해방의 요람, 정의구현사제단 148
148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1974~)이 창립된 지 40년이 넘었다. … 사제단이 창립된 계기는 한 주교의 구속이었다. 원주교구 지학순 주교가 민청학련 사건과 연루되어 중앙정보부에 연행되고, 뒤이은 '양심선언'으로 유신헌법의 무효를 주장하면서 감옥에 갇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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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종은 방한 기간 중에 정의구현사제단을 만나지 않았으나, 사제단이 만났던 사람들을 모두 만났다. 해방신학을 공개적으로 지지한 적은 한 번도 없지만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을 누구보다 분명하게 실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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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의 서정길 대주교와 경갑룡, 정진석, 김남수 주교 등이 교회의 사회참여를 가로막고 정권 친화적 태도를 유지해온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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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안의 권위주의와 관료화, 사제 줄세우기와 성직이 직업이 되는 현상, 상업주의와 출세주의, 남녀차별주의, 장애인 배제사목 등 사회문제만큼 심각한 것이 교회 문제다. 다만 개신교처럼 이러한 문제들이 노골적으로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 교회가 투명하고 민주적이라면 교회는 신자들에게 '민주주의를 배우는 학교'가 될 것이다.
권리와 범죄 사이, 여성사제 155
155
여성사제 문제에 대해 '동등자 제자직'을 요구하는 여성신학자 엘리사벳 피오렌자나, 『예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돋을새김, 2006)라는 책으로 한국에 알려진 평신도신학자 게리 위스같은 경우에는 신랄한 어조로 교황청의 여성사제 금지의 이유에 대해 공박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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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아퀴나스는 오로지 남성만이 하느님 모습으로 창조된 까닭에 신성한 사제직분은 남성들만 받을 수 있다고 했으며, 둔스 스코투스는 여성은 인류를 타락하게 만든 하와의 후계자이므로 인간의 구원을 담당하는 공직자가 될 수 없다고 했다. … 테르툴리아누스는 여자는 "악마가 들어오는 통로"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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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가대는 모두 남성만으로 구성하는 게 원칙이었다. 그 결과 소프라노는 남자를 거세하는 방법으로 얻어냈다. 바티칸 성가대는 이 점에서 유명했는데, 남자는 불구라도 여자보다는 덜 불결하다는 논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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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가부장적인 로마질서에 편입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던 해방된 자의식과 고유한 길을 벗어났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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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차별적인 그리스와 유대교의 사상을 통해 공동체 주역에서 여성을 배제하며 여성에 대한 편견을 심어 왔다.
예수께서 여성들에게 주신 '자유'를 교회가 도로 빼앗아 가두어서는 안 된다.
한상봉의 책「행동하는 사랑」'2장 사제들의 거리' 밑줄긋기
(리북 | 2015-09-25 | 정가 14,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