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십자가 현양축일(연중 제24주일)
2014년 9월 14일 09시 도화담공소
CROSS, 모순의 표지
그러나 십자가, 그건 모순을 사라지게 한다
<매일미사>에 안 나오는 중요한 내용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인 오늘은 ‘9월 14일’입니다. 제가 이렇게 오늘의 축일 명칭과 더불어 그 날짜를 새삼스럽게 말하는 게 좀 엉뚱하게 여겨질 수 있습니다. “아니, 우리를 달력도 볼 줄 모르는 사람 취급하는 거요?” 하고 불쾌해 하실 교우님이 계실 수도 있습니다.
한국천주교 주교회의에서 발행하고 있는 <매일미사>의 9월호에서 오늘 펼쳐야 하는 페이지(94쪽)의 서두에는 오늘 축일의 유래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못 박히시어 돌아가신 그 십자가 진품을 찾아낸 전승에 대한 이야기와 더불어 그 기념성당 건축의 사연 및 축일을 정한 역사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9월호 <매일미사> 책에 제시되지 않은 아주 중요한 내용을 저는 말하고 싶습니다.
<주님의 거룩한 변모축일>로 부터 40일 후
우리는 지난 8월 6일에 아주 중요한 축일을 지낸 일이 있습니다.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이었습니다. 그 <8월 6일>로부터 만 40일이 되는 날이 오늘 <9월 14일>입니다. 오늘의 축일은 지난 40일 전의 축일과의 연장선상에서 의의를 지니는 축일인 것입니다. 우리가 부활절을 맞이하기 위해서 40일(사순절)을 지내는 것처럼, 진정 오늘의 축일을 알아듣기 위해서는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로부터 계획된 9월 14일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이 전례력에 표기되고 있다는 점을 주시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난 8월호의 <매일미사> 책 8월 6일자 전례 안내에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습니다. “‘성 십자가 현양 축일’(9월 14일)의 40일 전”을 언급하면서, “교회의 전승에 따라,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40일 전에 일어난 사건이라고 이해하기 때문이다.”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매일미사> 8월호 55쪽).
오늘 우리가 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는 죽음과 부활을 예고한 ‘주님의 거룩한 변모’와의 연장선상에서 이렇게 이해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듯이 이미 8월 6일의 그 축일에서 우리는 ‘십자가의 영광’에 대한 메시지를 들었습니다. ‘십자가의 영광’에 대한 예고는 거룩한 변모의 현장에서 다니엘 예언서 7장(8월6일의 제1독서)의 내용처럼 묵시적 체험이었고, 실제로 그 체험을 했던 베드로 사도가 후에 확인 고백한 것입니다(8월6일의 제2독서). 예수님께서 “하느님에게서 영예와 영광을 받으셨음”을 그 거룩한 변모 현장에서 보고 들었다고 베드로 사도는 실토하고 있습니다(2베드 1, 16∼19 및 마태 17, 1∼9 참조).
40일 전의 묵시적 체험
이렇게 40일 전의 묵시적 체험에 의해서 바라보기 시작한 예수님의 수난과 영광의 실제를 오늘의 축일에 우리는 확신에 이른 깨달음으로 고백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십자가란 모순의 실제’라는 깨달음인 것입니다.
‘십자가의 모순’은 이렇습니다. ‘들어 높임’과 ‘깊이 낮춤’이 십자가의 사건이기에 그것은 모순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오늘 독서 민수기 21,4∼9에서, 그리고 필리피서 2, 6∼11에서 보게 됩니다. 이러한 십자가의 모순에 대한 통찰을 ‘십자가 신학’이라 합니다. 그 ‘십자가 신학’을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에게 천명하신 바를 오늘 요한복음 3, 13∼17에서 우리는 듣게 됩니다. 이렇게 제가 말씀드리고 보니, 매우 어려운 신학 강의를 하는 것 같지요. 좀 쉽게 표현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예를 들어 말씀드리겠습니다.
85세 어르신에 얽힌 일화
제가 현재 살고 있는 마을에서 가까운 곳에 사시는 85세 잡순 어르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분은 인근 사찰의 불교신자회장을 역임하신 분입니다. 그리고 지역의 불교문화위원입니다. 수년 전에 저와 친분 있게 지내던 인근 사찰의 J스님이 말기 암으로 돌아가시기 직전에 제가 그 스님을 방문한 일이 있습니다. 그 자리에 마침 그 사찰의 불자회장이신 그 어르신이 오셨습니다. 저와 담소를 나누고 있던 중환자 스님 앞에 그 어르신은 정중한 3배를 올렸습니다. 그러자 스님도 맞절로 응수하였습니다. 얼마 후 그 중환자 J스님이 입적(사망)하셨습니다. 그 스님의 다비 후 부도(浮屠) 안치식에 갔습니다. 거기에도 그 어르신이 오셨습니다. 그 어르신은 거기서 저의 귀에 대고 속삭이듯이 말씀하셨습니다. “J스님 참 훌륭한 분이었지요. 겸손하셨지요.”
그리 말씀하던 그 어르신이 지난 몇 달 전에 많이 편찮으셔서 노인 요양병원에 들어가셨는데, 조금 계시다가 못 견디고 퇴원하셨습니다. 퇴원하신 이유에 대해서 그 부인이신 할머니께서 저에게 말씀하시는데, 거기 요양병원에서 옆에 만나는 다른 노인들이 너무너무 무식해서 함께 어울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처럼 많이 배운 노인들이 아니고 모두 무식한 늙은이들이라서 벗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 어르신을 보면서 생각했습니다. 옛적의 J스님처럼 자기에게 공손하게 대하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함께 어울릴 수 없는 유식(?)하신 어르신이구나 하는 생각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보다 수준 이하를 벗으로 사귀고 싶지 않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시골에서 혹 예비자 하나라도 발굴해볼 수 있을까 해서 마을 노인 몇 사람들과 한 달에 한 번 만나 점심 식사하는 모임에 참가하고 있습니다. 5년째 그리 하고 있으나 예비자 한 사람도 낚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모임의 식사 자리에 갈 때마다 곤혹스런 일이 많습니다. 좀 친해졌다 해서 함부로 말을 걸어오는 것까진 참겠는데, 거북하게 상스런 대화를 큰 소리로 떠들어대니 음식점의 옆자리 손님들 눈에 나도 똑같은 사람으로 인식될 거라는 기분 때문에 그 모임에 함께 하는 걸 후회하고 있습니다. 한 마을 길에서 자주 만날 그 사람들인데, 그 모임을 탈퇴할 수도 없고 해서 아주 난감한 처지입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든 신분상승은 바람직한 것이지만, 천한 자리로 내려가는 신분하강이란 내가 택할 길이 아닌 것입니다. ‘상승’으로 가는 삶이어야지요. 삶이 ‘하강’해서야 그게 어찌 말이나 되는 일이겠습니까!
제가 여기서 예를 든 이야기가 딱 적중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십자가란 ‘상승’과 ‘하강’을 동시적으로 예수님께서 보이신 그분의 삶 자체입니다.
민수기에서 본 모세의 구리 뱀
오늘 민수기에서 본 모세의 구리 뱀과 같이 들어 올려 십자가에 달려계신 예수님을 모든 성당의 제대 전면에 바라보면서 미사성제를 올리는 우리는 과연 광야에서 불 뱀에 물려 죽게 된 사람들처럼(민수 21, 9 참조), ‘생명을 얻게’(요한 3, 15) 됩니까?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 16)고 당신 자신을 일컬어 천명하신 예수님은 사실상 십자가라는 높은 장대위에 달려서 죽은 모습으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분의 그런 모습이란 처참한 멸시 속에 죽은 모습입니다. 그런 그분을 바라보고 구원을 얻게 한다? 말도 되지 않는 것이지요! 그래서 십자가는 그 자체 모순입니다.
걸림돌과 어리석음
십자가의 그러한 모순을 지적할 첫 상징은 ‘걸림돌’과 ‘어리석음’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다음과 같이 지적했듯이 말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들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1코린 1, 23) 그렇습니다. 십자가형이란 노예들에게만 내려지던 형벌이며(오늘의 제2독서 필리 2, 8 참조), 거기 달린 죄수의 주검이란 접촉하면 부정을 타기 때문에 가급적 빨리 치워버려야 할 시체일 뿐만 아니라(요한 19, 31 참조), 저주를 받은 표(갈라 3, 13)입니다. 거기에 무슨 구원이 있습니까? 스캔들(걸림돌)이지요. 그걸 바라본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어리석은 짓입니까!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에는 그렇듯 처참한 죄의 단죄(로마 8, 3)와 더불어 힘 쓸 줄 아는 사람들의 권세를 벗겨 버리고(콜로 2, 15), 세상에 죄로 인한 분열을 사라지게 하여 평화와 일치를 회복시키는 그 분의 주검(에페 2, 14∼18)이 달려있습니다. 그래서 그 분(당신을 죽이는 사람들을 용서해주시라고 기도하시면서 죽으시는 그분 : 루카 23, 34 참조)은 당신의 죽음으로 세상의 모든 죄를 무력화 시킵니다(에페 2, 14∼18). 그 십자가에서 세상의 죄에 대하여 한 없는 용서를 보여주셨기에 그렇습니다. 오늘 본래 연중 제24주일을 지낸다면 복음으로 읽는 내용(마태 18, 21∼35)처럼 예수님은 그렇게 십자가에서 세상을 용서하십니다. 세상의 모순을 십자가의 모순으로 상쇄시킨 것입니다. 즉, 세상의 죄악과 우리 구원의 사이에 경계선이 예수님의 십자가가 서 있는 곳입니다. 이러한 사실이 정말 사실로 증명되었던 것입니다. 그 분을 단죄하여 찌른 사람들은 자기들이 죽인 그 분을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요한 19, 37 참조). 우리가 지은 죄를 보고 깨닫게 해주는 창이 우리 자신의 가슴에 꽂히는 것입니다(요한 19, 34 참조). 그 때 우리 구원의 물이 흘러나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 분은 당신 자신을 온전히 비우신 분(오늘의 제2독서 필리 2, 7 참조)으로 우리 눈이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우리라면 그 분을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필리 2, 11) 되었습니다.
각자 지고 따라라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도 각자 지고 당신을 따르라 하신(마태 16, 24 / 마르 8, 34 / 루카 9,23)‘우리의 십자가’란, 자기 자신에게 죽고 세상에 죽으면서 모든 자연적인 인연을 끊어버리고(마태 10, 34∼39 / 루카 12 ,51∼53), 박해까지도 수락하는(마태 23, 34) 표징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을 얻는 영광의 선취를 알려주는 표지가 곧 십자가입니다(요한 12, 26 참조). 그렇기 때문에 바오로 사도가 확언하듯, 우리 또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와 같이 세상에 대해서 죽음으로써 세상이 우리한테 패배한다는 것(갈라 6, 14 참조)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이 곧 죽음으로써 참으로 살게 하는 십자가의 길입니다.
십자가란 과연 무엇인가?
그러면 ‘십자가’란 과연 무엇입니까? 예수님처럼 한없이 내려가는 ‘자기 비움’으로써 구원에로 올라가는 ‘영광의 길’을 십자가가 우리 앞에 하늘 길의 다리로 세워져 있는 것입니다. 내려가야 올라가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우리에게 있어, 동양식 표현으로 막대기 두 개가 교차하여 숫자 10을 표현하는 +의 표식이기에 앞서, 엇갈림의 길에서 만난 사람들의 만남으로 보아야 합니다. 사람끼리의 만남에서 십자가가 생깁니다. 그것도 사랑하는 사에서라야 십자가가 생깁니다. 그 십자가란, 어려움 - 고통 - 부딪침 - 희생입니다만, 동시에 이질성의 합 - 상호 인정 - 양보 - 사랑입니다. 모순의 상징이면서 모순이 이렇게 사라지는 그 한가운데 예수님이 매달리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Cross라는 말이 십자가의 적절한 이름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Cross가 우리에게 영광이 되는 까닭이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십자가를 현양합니다. 모순의 상징이면서 모순을 사라지게 하는 십자가이기에…!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113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년 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년 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가톨릭노트 > 신부 윤종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광야로 나아가자! ... 2015 사순 제1주일의 메시지 (0) | 2015.02.22 |
---|---|
순교, 그것은 과거의 일이 아닌 오늘의 삶이어야 (0) | 2014.09.21 |
[한가위명절] 우리는 세상의 떠돌이들 (0) | 2014.09.08 |
희망은 믿는 사이에서! ... 우리 사이에 하느님 계셔야 (0) | 2014.09.07 |
신앙생활? 그것은 불편한 삶! (0) | 2014.08.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