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기동성당 2015년 3월 11일 저녁 8시부터 10시까지 열린 사회교리학교 2주차 강의 모습
알아듣는다는 것
어떤 할아버지가 신문을 보고 계시는 데, 노화의 단계가 5 미터에서도 못 들으면 심각하고, 3 미터에서도 못들으면 더 심각하고, 1 미터에서도 못들으면 그건 엄청 심각한 상태이다. 그래서 '내 할멈은 어떤가?'하는 생각이 들어서 "할멈 뭐 해?"라고 물었더니, 못 들으시더래요. 그래서 3 미터 뒤로 다가가서 "할멈 뭐 해?"라고 하는 데도 대답이 없으시더랍니다. 그래서 1 미터 뒤에 가서 "할멈, 뭐해?"라고 하는데도 아무 대답이 없으신 거예요. 그래서 뒤에서 꼭 끌어안으시면서, "할멈! 그동안 내가 고생만 시키고 너무 무심했구나. 할멈! 뭐~해?" 그러니까 할머니가 뭐라고 하셨을까요? "수제비 만든다고 세번을 얘기했어, 세 번을!"
대화가 안 통한다고 생각할 때, '저 사람이 내 말을 못 알아 듣는다!'라는 생각이 들 때, 사실은 내가 못알아 듣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 섭리에 대한 말슴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말씀을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 이야기로 풀어볼 수 있죠. 창세기 37징부터 50징까지 나오는데, 야곱의 아들이 몇 있었죠? 열 두명 있었어요. 여기서 잠시 동영상 3분 30여초 짜리 하나 보고 얘기를 계속 하겠습니다.
스티브 커츠(Steve Cutts)라는 만화가의 <MAN>이란 작품입니다. 유튜브에서 <MAN>을 검색하면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스티브 커츠 홈페이지. http://www.stevecutts.com/)
사랑받아서 생긴 요셉의 비극
오늘날 우리가 복음적으로 신학적으로 성찰하지 않을 때 우리가 오늘날 편리하게 생각하는 '과학기술 어디로 가고 있는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영상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섭리에 대해서 말씀드리면, 야곱의 아들은 열 두아들인데, 그 열 두아들 중 누굴 편해했나요? 요셉이죠. 거기서 비극이 시작된 것입니다. 요셉이 꿈을 꾸었는데, 형들의 곡식단 일어나서 요셉의 곡식단에게 절을 한 겁니다. 그 꿈을 누구한테 가서 얘기했나요? 형들한테 가서 한 겁니다.
"형들, 한번 들어보세요. 제가 이런 꿈을 꾸었지 뭐에요."
안 그대로 지금 형들이 심기가 불편한데, 굳이 그런 얘기를 형들한테 한 걸까요. 그들에게는 엄마가 네 명이었습니다. 야곱의 레아와 라헬이 있었고, 몸종들이 있어서 엄마가 넷이 있었고, 그래서 열 두 형제가 안그래도 사이가 안좋은데, 야곱이 그런 얘기를 하니까 형들이 죽여버리려고 했죠. 그런데 그 때 르우벤이 나서서 "우리가 아우의 피를 봐서 좋은 게 뭐냐!" 또 유다가 "죽이지는 말자!"리고 해서 구덩이에 넣어 가뒀다가,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팔아넘겨서, 이집트까지 팔려갔죠.
이집트로 갔는데, 그곳에서 포티파르라는 파라오의 신하의 시종 곧 하인으로 살았는데, 거기서 포티파르의 아내가 유혹을 해요. "나와 함께 자요!" 그런데 요셉이 안 졸려가지고, 안 졸립다고 하니까, 오히려 포티파르의 아내는 요셉을 '성폭행 미수'로 누명을 씌워서 감옥에 갇힙니다. 전자팔찌도 찼겠죠. 그런데 거기서 꿈을 풀이해주거든요. 감옥에 갇혀있던 또 다른 시종들의 꿈을 풀이해주는데, 그 시종들 꿈이 정말 맞았습니다. 그런데 그 중 한 명은 사형을 당하고, 한 명은 복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파라오가 괴상한 두 가지 꿈을 꿉니다. 그래서 그 시종이 "아! 맞다." 3년 전에, 그러니까 3년 만에 생각난거에요. 은혜를 잊지 않겠다고 하고 3년 만에 생각이 납니다. 시종은 파라오에게 감옥에서 자신의 꿈 풀이를 해주었던 히브리 총각 요셉을 기억하게 됩니다. 그래서 파라오가 데려오라고 하죠.
그런데 요셉은 말하기르 전 세계에 앞으로 가뭄이 들 것이니 식량을 비축해 놓아야 한다고 말하고, 그 꿈대로 식량을 비축해 놓았는데, 정말 기근이 들어서 오랫동안 지속이 됩니다. 결과적으로 이스라엘 지역에도 먹을 것이 없어서, 야곱의 다른 아들들이 곡식을 꾸러 이집트까지 오는데, 요셉을 못 알아 본 것입니다. 파라오의 재상이 되어 있는 요셉을 못알아 보죠. 요셉은 알아보았는데 말이죠.
내가 요셉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형들을 알아보았지만, 굉장히 갈등에 시달리다가, 굉장히 드라마틱한 장면입니다. 그 요셉의 이야기는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요셉은 나중에 밝힙니다. 울면서 형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요셉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저를 팔아넘겼다고 해서 형님 자신을 미워하지도, 형님 스스로에게 화를 내지도 마십시요!."
요셉이 깨달았던 것
이것은 엄청난 얘기입니다. 용서라는 것은 '다신 그러지 마!'라고 하는 게 아니고, 스스로에게 화를 내지도 말고 미워하지도 말라고 말합니다. '우리를 여기로 보내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우리를 살리시려고 나를 파라오에게 보낸 것입니다.' 요셉이 그걸 깨닫고 형들을 용서합니다. 그래서 요셉의 이야기를 통해서 하느님의 섭리를 알 수가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섭리가 무엇인가? 형들에게 나쁜 마음을 줘서 요셉을 죽이려고 한 게 하느님의 섭리인가? 또는 포티파르의 아내에게 나쁜 마음을 주게 해서 요셉을 감옥에 가두려고 한 것이 하느님의 섭리인가? 우리가 보통 하느님의 섭리라고 생각할 때, 나쁜 일도 하느님의 섭리라고 하는데, 사실 하느님은 죄나 악을 조장하지 않으신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여기서 하느님의 섭리를 발견할 것인가?
하느님의 섭리는 발견해야
인간이 저지른 악도 선으로, 그 악조차도 끊임없이 이용해서 선으로 바꾸는 것이 바로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적어도 요셉의 이야기에서는 르우벤이 '죽이지 말자! 피를 봐서 우리가 좋을 게 무어냐!", 유다도 "우리에게 무슨 이득이 있겠느냐?"라고 말합니다.
창세기 37,21~22) 21 그러나 르우벤은 이 말을 듣고 그들의 손에서 요셉을 살려 낼 속셈으로, "목숨만은 해치지 말자." 하고 말하였다. 22 르우벤이 그들에게 다시 말하였다. "피만은 흘리지 마라. 그 아이를 여기 광야에 있는 이 구덩이에 던져 버리고,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는 마라." 르우벤은 그들의 손에서 요셉을 살려내어 아버지에게 되돌려 보낼 생각이었다.
창세기 37,26) 그 때 유다가 형제들에게 말하였다. "우리가 동생을 죽이고 그 아이의 피를 덮는다고 해서, 우리에게 무슨 이득이 있겠느냐?
이처럼, 죽이지 말자는 르우벤과 유다를 통해서 생명의 하느님이니까 그렇게 섭리를 하신 것입니다. 요셉에게 지혜를 줘서 감옥에서 꿈풀이를 하게 하신 것이 그런 섭리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나쁜 일까지 다 알아서 하는 것은 아니란 겁니다.
잘못된 신앙을 고백하고 있는 건 아닌가
예를 들어서 세월호 사건이 일어나도록 계획을 해 놓으시고, 몇 월 며칠에 빠지도록 한다는 사고방식, 그것을 하느님의 섭리로 이해하는 것은 굉장히 큰 일 나는 일입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일제 식민지도, 남북 분단도 모든 게 하느님의 섭리라고 주장할 수 있게되는 위험한 생각입니다. 그게 아니고, 일제 치하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것이 하느님의 섭리이고, 남북의 분단 상황 안에서도 끊임없이 통일운동을 하게 만드는 것이 하느님의 섭리인 것입니다. 나쁜 것을 하느님이 일부러 만들었다고 얘기를 하면 우리는 잘못된 신앙을 고백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류가 한 가족으로 모여서 평화롭게 살아가시길 원하시는 것이지, 그 사이에서 벌어지는 인간들의 잘못들. 앞서서 동영상에서 보신 것처럼, 하느님께서 그 모든 일, 유전자 조작 같은 것을 섭리하셨는가?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의 역사가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에 대해서, 구약에서는 예언자를 통해서, 의인을 통해서 개입을 하셨고, 오늘날에는 공동체를 통해서 교회를 통해서 개입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사회교리라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이세상에 개입하시길 원하는 걸 깨닫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사회교리의 목표
예전에는 사회와 가정이 심각하게 복잡하지 않아서, 개개인을 통해서도 그런 개입이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가령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백성들에게 모세를 파견하여 데리고 나오신 것이라면, 오늘날 그런 모세의 역할을 어떤 추기경님이 하실 것인가? 그게 아니라 그게 이제 교회공동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알아 듣는 것이 사회교리의 목표가 됩니다.
<주님의 기도>의 공동체적 차원
아까 산상설교 말씀에서 주님의 기도를 말씀드렸는데, 이 주님의 기도를 개인적 차원에서 바칠 수 있지만, 공동체 차원에서도 주님의 기도를 볼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는데, 이것을 '기쁜 소식'이라고 하는데, 마태오 사가가 산성설교에서 요약을 했고, 주님의 기도는 산상설교의 중심에 자리를 잡고 있다. 이것은 가톨릭교회 교리서 2763항(제4편 제2부 주님의 기도 제1절. 1. 성경의 핵심)에 나오는 말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여기서 '우리'는 아무도 제외하지 않는다.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는 아무도 제외하지 않고, 우리의 기도는 '폭넓은 사랑'까지 확장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교리서 2792~2793항에 나오는 말입니다. 먼저 제2792항을 요약해서 보면, '주님의 기도 첫 머리에 나오는 "우리"와 마지막 네 가지 청원"의 저희는 아무도 제외하지 않는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개인주의를 극복하는 표현입니다.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2793항에서 보면, 우리의 기도에는 국경이 없고... 우리의 기도는 아직도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 그런 폭넓은 사랑으로까지 확장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어요.
피조물의 찬가
성 프란치스코
프란치스코 성인이 계시지요. 그 프란치스코 성인을 좋아한다고 하면서, 이 4대강과 강정의 파괴에 눈을 감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요즘 사자방 비리에 대한 얘기가 세상에 나오고 있는데, 그런데 4대강 건설 시기에 김종수 주교님까지 해서 공주에서 모두 다 걸었습니다. 그런데 공사를 다 했고 지금 망가졌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소명을 더 적극적으로 하지 못한 뉘우침이 매우 큽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한번 다 같이 읽어볼까요? 우리는 "아버지의 이름이 '우리 안에서' 거룩히 빛나소서."라고 가려서 말하지 않고, 그 이름이 모든 사람 안에서 빛나시기를 청하는 것입니다. (교리서 2814항 중 일부)
그 다음에 아버지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고 완성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이 구절은 이 세상에서 정의와 평화에 투신하기 위해서 창조주께 받은 힘과 수단을 유용하게 활용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알아서 오실 거니까 우린 아무 것도 안해도 된다는 게 아니고,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통해 세상에 개입하시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나라가 오신다는 것은 내가 아버지의 나라가 오도록 협력을 해야 합니다. 나와 우리 교회 공동체가 그렇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정치적으로는 하느님 나라는 제국주의와 관련이 있습니다. 제국주의의 뿌리는 깊습니다. 바벨탑도 사실은 바빌론 제국을 비판하는 것이죠. 창세기가 씌어질 당시에. 우리는 일본 식민지배를 통해서 제국이란 다른 나라를 언어적으로 문화적 통일하면서 다른 나라에 대해서 식민지배를 통해 관여하는 것으로 생각하죠. 경제적으로 자본주의, 문화적으로 신자유주의를 거슬러서, 광야에서 예수님이 빵의 유혹 권세의 유혹 그리고 자신의 뜻을 거슬르게 하는 시험의 유혹을 받으셨는데, 거기에 대해서 우리가 복음 삼덕(청빈, 정결, 순명)으로 이겨내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유혹들은 예수님 뿐만 아니라 모든 인류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수도자들의 복음 삼덕이고 우리가 초대받는 3덕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청빈하게 살게 하는 것일까요? 잠언에 그런 말이 나옵니다.
잠언 30,8) 허위와 거짓말을 제게서 멀리하여 주십시오.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저에게 정해진 양식만 허락해 주십시오.
알맞게만 청하고 있는데, 오늘날 세상은 그런 게 아니라, 점점 더 많이, 미국의 백만장자, 하워드 휴즈라는 백만장자에게 인터뷰를 했다고 합니다. "행복해지려면 얼마만큼 돈이 필요할까요?" 그러자 대답을 했어요. "A little bit more!" 조금 더 많이. 그 사람이 돈이 엄청나게 많은데, 행복해지려면 조금 더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을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소비주의와 개인주의를 하느님 나라를 거스르는 것이고, 이게 해악이라고 복음의 기쁨에서 프란치스코 하고 계신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손수 만드신 것이 좋았다고 말씀하시면서, 복음으로 주님의 기도로 살아가도록 하느님께서 초대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오늘날 소비주의 자본주의 사회는 더 많이, 더 좋은 것, 더 남과 다른 것을 조장합니다. 특히 광고에서, 요즘 너무 많은 대출광고들, 일주일에 20시간 평생 TV를 보면 13년간 TV를 보는 셈이랍니다. 그런데 27%가 광고라서 평생 3년간 광고를 보는 것이라고 합니다. 인생을 짧은 것인데, 평생 3년간 광고를 본다는 것이죠.
광고를 통해서 계속해서 내가 갖고 있는게 얼마나 구제품인지, 그래서 계속 내가 갖고 있는 것에 대한 불만족, 내 외모에 대해서 불만족 성형광고, 내 몸매에 대해 불만족 다이어트 광고, 계속해서 우리 자신에게 불만족하게 만들면서, 영원한 불만족의 굴레로 몰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그래서 하느님의 섭리에서처럼, 이세상에 잘못된 것이 다 하느님의 뜻이라고 바라보면 안되는 겁니다. 세상에서 오류가 추방되고, 진리가 넘치며, 악습이 퇴치되고, 덕이 다시 번성하며, 땅이 더 이상 하늘과 다르지 않게 되기를 바라시는(교리서 2825항 후반부) 것이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의 뜻입니다.
그러면 무력침공과 군사기지 건설이 아버지의 뜻인가요? 강정 마을의 행정대집행이 있었고, 2천 800일 넘게 주민들이 고생을 하고 계시는데,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이 거기서 보상금 더 얻으려고 그런다는 것?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 지금 중국이 21세기에 미국의 경제력을 압도할 것이라고, 아니면 이미 넘어섰다고, 그런데 미국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침공했습니다. 그런데 미국의 일부 학자들은 그것을 중동 지역에서 중국으로 가는 파이프라인을 차단하겠다는 의도가 있을 수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표면적으로 화학무기를 찾겠다거나 빈 라덴을 찾겠다거나 하고 공격을 하고 민간인들도 많이 죽고는 했습니다만, 그런데 화학무기는 찾지 못했어요. 하지만 미군이 주둔하면서, 중국으로 가는 송유관을 미국이 관리를 하겠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육로로 그렇게 차단을 했으면 이제 바다에서도 견제할 곳이 필요한데, 우리나라에서 제주도를 쓰시라고 제주도 강정이 그런 의미도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처음에 그랬습니다. 제주 강정기지는 북한을 막기 위해서 있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연평도나 서해 5도에 있어야지 왜 제주도 강정에 해군기지가 있어야 할까요? 그것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것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그 가정이 사실이라면, 앞으로는 중국과 미국의 사이가 안 좋아질 때, 중국이 어딘가를 공격한다면, 미군 기지를 공격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절대 우리나라의 안전을 지켜주는 게 아니고, 그것은 굉장히 위험한 화약고가 될 수도 있습니다.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여기서 이 양식은 물질적이고 영적인 합당한 모든 재화를 얘기하는 데, 이와 관련해서 가톨릭교회 교리서 2830항과 2831항을 살펴보겠습니다. 교리서 2831항에서 '양식이 없어서 굶주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이 청원의 또 다른 깊은 의미를 일깨워준다.' 일용할 양식을 하느님께서 주신다는 것인데, 그것을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바로 '우리에게', 다시 말해서, 너희에게도 아니고 '오늘 저희에게' 그러니까 내 주위에 굶고 있는 사람은 없는가?
2830 "저희의 양식."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아버지께서 삶에 필요한 양식과, 물질적이고 영적인 '합당한' 모든 재화를 주시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예수님께서는 산상 설교에서 우리 아버지의 섭리에 협력하는 이 자녀다운 신뢰를 강조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수동적으로 만드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온갖 불안과 걱정에서 우리를 해방시키고자 하신다. 그리고 이것이 하느님의 자녀들이 자녀답게 의탁하는 일이다.
하느님 나라와 하느님의 정의를 찾는 사람들에게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곁들여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과연 모든 것은 하느님의 것이니, 하느님을 모시고 있는 사람에게는, 그 자신이 하느님을 버리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부족할 것이 없습니다.
2831 그러나 양식이 없어서 굶주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이 청원의 또 다른 깊은 의미를 일깨워 준다. 세상에 굶주림의 비극이 있다는 것은, 진실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개인적인 처세에서나 인류 가족인 그들과의 연대에서나, 자기 형제들에 대한 실질적 책임을 다하라고 호소하는 것이다. 주님의 기도에 나오는 이 청원은 거지 라자로의 비유나 최후의 심판의 비유와 뗄 수 없다.
<강우일 주교와 함께 걷는 세상>이란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여러 기고문들을 모아서 내셨는데요. '구제역 사태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성찰'이란 글이 있는데, 구제역 파동을 그리스도인의 시각에서 어떻게 보아야 할지를 논한 강론이 있고요. 이 책을 한번 소개해드리고 싶고요.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세계 도처에서 굶주리는 아이가 5초에 한 명씩 죽어가고 있습니다. 세계 인구의 9명 중 한 명이, 만성적인 영양실조에 걸려있습니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와 국제농업개발기금(IFAD), 세계식량계획(WFP)이 2014년 9월 16일 공개한 '2014 세계 식량 불안 상황(SOFI)' 보고서에 따르면 2012∼2014년 전 세계의 기아 인구가 8억530만명이라고 AFP 통신 등이 전했다.)
그런데 세계곡식 총 생산량의 47%가 가축 사료, 소, 돼지, 닭이 먹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선진국 사람들이 먹어야 하기 때문에, 그걸 먹고 각종 성인병, 고지혈증 등에 걸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식습관을 바꾸려고 해도, 지금 시스템이 굉장히 어렵게 되어있는데, 어렸을 때보다 고기 너무 많이 먹습니다. 너무 너무 많이 먹습니다. 그리고 너무 너무 많이 팔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치킨산업 10년전 비해서 9배 성장했다고 합니다. 월드컵 지내면서 '치맥', 드라마에서 '치맥', 그렇게 닭도 많이 먹게 되었습니다.
닭이 치킨이 안돼고 늙어 죽을 때까지 살면
닭의 수명은 어떻게 되는지 아세요? 닭의 평균 수명에 대한 통계를 쉽게 찾을 수 있지만 여기 저기 좀 다릅니다. 그게 늙어서 죽을 때까지 닭은 놔두지 않아서 그런 것일 수도 있는데, 닭의 수명이 20년이란 자료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먹는 치킨은 얼마를 사는 것일까요? 45일을 삽니다. A4 크기 종이보다 더 작은 공간에서 태어나자 마자 45일만에, 그 시기가 제일 야들야들하다고 합니다. 그 때 잡는 겁니다. 그래서 태어나자마자 둘 중에 하나가 됩니다. 거기에 후라이드가 될 것인지, 양념이 될 것인지, 그렇게 두가지 가능성만을 지닌채 한달 반 밖에 살지 못하고 우리가 먹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밖에 못 살아요? "너무 잔인하잖아요!"라고 할 수 있는데, 왜 그럴까요? 우리가 먹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우리는 그렇게 먹고 다시 성인병에 걸리고, 그 사이에 가축 사료로 곡식이 쓰이고 있기 때문에, 아프리카에서는 굶어죽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프리카에서 굶어죽고 있는 것은 과연 누구의 책임인가? 선진국의 식습관 책임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도 곡식이 남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미국 곡물협회에서 태평양에 버린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아프리카까지 운송하는 운송료, 그리고 곡물가격의 하락을 감안한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고 기도할 수 있는걸까요?
함께 살자 농성촌
이게 2013년 9월 현재 전국 함께 살자 농성촌 현황입니다.(신부님은 농성촌이 표기된 한반도 지도 를 보여주었는데, 이를 시사IN의 기사로 대신함)
여기서 콜트.콜텍 2391일이 되었는데, 지금 거기서 한 500여일 정도를 더해야 합니다. 강정마을이 2300여일, 그 다음에 수많은 사람들, 이미 굴뚝 쌍용자동차 노동자 두분 한분 오늘 내려오셨습니다. 그런데 댓글들 보니까 가슴이 아프더라고요. "쌍용차가 얼마나 좋은데면 저렇게 하냐"면서 마치 귀족노조라는 비아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쌍용차 사태 이후로 벌써 23명이나 돌아가셨습니다. 가족까지 포함해서요. 그 아픔들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 것인가? 교황님께서는 일자리 없으면 인간 존엄성도 없어지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돈의 우상"이란 말씀을 강조하셨는데요.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국가별 핵무기 보유현황을 말씀드리면, 이것도 몇년 지난 자료인데요. 러시아가 1만1천개입니다. 그리고 미국이 8,500개 가량입니다. 프랑스가 300개, 중국이 240개, 영국이 225개, 이스라엘 80개, 파키스탄 105개, 인디아 90개, 북한 10개. 무엇보다도 북한은 핵무기 개발해서는 안됩니다. 당연히 안되죠. 그런데 다른 나라는 해도 되나요? 과연 1만 1천개를 갖고 있는 나라나 8천5백개를 가진 나라는 그걸 쏘지 않을거니까 갖고 있어도 되는 걸까요?
제가 탈핵 강의를 듣는데요. 강의하시는 분 말씀이, 이스라엘이 핵무기는 있는데, 핵 발전소, 곧 원자력 발전소가 없답니다. 그 분 말씀이 핵무기보다 원자력 발전소가 더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만약 북한과 전쟁이 났을 때 우리나라 23개 원자력 발전소 중 하나만 폭발해도 그것으로 끝이 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발전소를 갖고 있지 않다고 합니다. 오늘이 후쿠시마 4주기 되는 날입니다. 여태까지 핵 사고가 4번이 있었습니다. 최근이 후쿠시마(2011), 체르노빌(1986), 미국의 스리마일섬(1979) 그리고 최초인 히로시마(1945)는 고의적 핵사고였어요. 이것이 엄청난 재앙을 가져다 주고 있습니다. 후쿠시마의 그것이 태평양으로 퍼졌고, 몇년 지나면 전 세계의 바다가 오염될 것이라고 합니다.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아까 '쌍용차' 말씀을 드렸는데, 폭력진압했고, 더 안타까운 건, 공장 안에 있는 노동자들한테, "너희도 안 잘리려면, 해고당하고 싶지 않으면, 저들을 내쫓으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게 눈 빛만 봐도 알죠. 어제까지만 해도 한솥밥 먹던 동료들이었는데, 그들이 쇠파이프를 휘두르고 해서 그게 너무 충격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살자를 포함헤서 스물 세분(23명)이 돌아가셨는데, 그 폭력진압이 경찰청 우수사례로 선정되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악마를 내쫓고 질병을 고치셨는데, 신약성경 시대는 모든 병을 악마에게서 유래한다고 봤는데, 정말 그 때는 악마들이 병으로 활동한 건지 아닌지 모르겠으나, 예전에 병에 걸리면 그 사람이 죄를 졌다고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오늘날 어디 교통사고 난 분을 병문안 가가지고, "아니 도대체 무슨 죄를 지어서 이렇게 교통사고를 당하고 다치신 겁니까?"라고 묻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아픈 건 이제 의술이 치료합니다. 그러니까 만일 악이 활동한다면, 병에서는 더 이상 횔동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전에는 병을 통해서 어떤 사람이 죄인 취급을 당하고 공동체가 분열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공동체에 대한 효과적 분열은 병이 아닙니다. 신자유주의, 소비주의 개발논리, 생태 파괴 등입니다. 국가간 불평등, 언론장악, 전쟁협박, 언론문제도 굉장히 심각합니다. 진리를 보도해야 하는 것인데요. 세월호 사고가 난 2014년 4월 16일 수요일 석간 문화일보는 "대형 참사 날 뻔했다"라고 보도하고 있습니다. "단원고 학생 338명 전원 구조", 언론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굉장히 잘못된 정보를 전달했습니다. 심지어 MBC에서는 과연 보험금이 얼마나 될까? 휴대폰도 20만원 보상해준다는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그 순간 학생들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저런 보도를 접하면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누가 보험으로 검색해보면 수많은 기사들이 나왔습니다. 세월호에 대해서 이것이 국가인가? 등등 세월호를 안타까워하는 주간지들의 보도가 있었지만, 어떤 주간지는 생뚱맞게 "이래도 수학여행 가야하나?" 굉장히 독특한 시각인 것 같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를 찾는 것은 첫번째 하느님 말씀에서, 두번째는 교회 안에서 즉 성사와 전례에 참여하면서, 그리고 세번째 작은 이들을 위한 봉사에 참여함으로써, 이것이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말씀 안에서, 두번째 고해성사, 전례 등에서 세번째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서,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죠. (마태오복음 25,35~36)
35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36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그 말씀은 예수님이 굶주리고, 예수님이 목마르고, 예수님이 헐벗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굶주린 사람이 나다. 헐벗은 사람이 나다. 그래서 우리가 말씀에서만 예수님을 찾는다고 하면 개신교이고, 성사와 전례에서만 찾으면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의 가톨릭이고, 사람들에서만 찾으면 휴머니즘이라고 할 수도 있죠. 그런데 이 세가지를 늘 신앙 안에서 조화롭게 해야 하겠습니다.
기쁨과 희망, 슬픔과 고뇌, 현대인들 특히 가난하고 고통받는 모든 사람의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제자들의 기쁨과 희망이며 슬픔과 고뇌이다.
프란치스코 교황님 방한의 영성적 의미
마지막으로 교황님 방한의 영성적 의미 중 일부분만 짧게 소개해드리겠습니다. 교황님께서 한국에 오셔서 많은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이 말씀들을 이해할 때 첫번째로 교회가 '열린 마음을 가진 어머니'가 되어야 하고, 두번째로 '가난한 이들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것, 그리고 세번째는 '사회교리의 중요성'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교황님이 계속 하시는 말씀입니다. 교회의 문을 열어놓아라. 이것은 두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성사의 문을 더 열어라. 그러니까 교회에 더 많은 이들이 들어와서 성사를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고요. 두번째는 정말로 성당 문을 열어놓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복음의 기쁨 46항) '출발하는 교회는 문을 활짝 열어놓은 교회입니다.' 그리고 (49항) "자기 안위에만 신경쓰고 폐쇄적이며 건강하지 못한 교회보다는 거리로 나와 다치고 상처받고 더렵혀진 교회를 저는 더 좋아합니다."
신학적 자기 도취
이걸 교황님이 말씀하신 게 아니고, 어떤 신학자가 말했다면 난리가 났을 지도 모를 말씀이십니다. 교황님 말씀이십니다. 상처받고 더럽혀진 교회를 원합니다. 왜냐하면 교황님께서 (2013년 3월) 선출받기 전에 콘클라베가 추기경단 회의이죠. 그 때, 선출되기 전에, 추기경님들이 한 분씩 말씀을 하시는 데 교황님이 그 때 저 말씀을 하셨다고 합니다. A4용지 절반 정도 내용으로요. 그러면서, "교회가 자신의 목소리에만 집중하며 '신학적 자기도취'(narcisismo teológico)에 빠져 있다." 나르시스가 자기 얼굴 보다가 빠져 죽죠. 교회가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겁니다.
자신 안에서 자신에 의해 자신을 위해서 살아가는 세속적 교회가 아니라, 자신으로부터 나오는 복음적인 교회가 되어야 한다. 이것도 2013년 3월 콘클라베에서 선출 전에 하신 말씀입니다.
“자신 안에서, 자신에 의해,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세속적 교회
(la Iglesia mundana que vive en sí, de sí, para sí)
가 아니라,
자신으로부터 나오는 복음적인 교회
(la Iglesia evangelizadora que sale de sí)
가 되어야 한다”
안과 밖, 무엇이 더 복음적인가
그런데 우리는 거꾸로 생각할 수 있어요. 교회가 세상 일에 관여를 하면 안되고, 교회 문제에만 관여를 해야 복음적이라고 생각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교황님은 반대로 말씀을 하셨죠. 자기 안에 갇혀 있는 것이 세속적이고, 세상 밖으로 나가는 것이 복음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차기 교황은 교회가 자기 밖으로 나가는 것을 돕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차기 교황은, 교회가 자기 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도울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런 말씀을 하시니까, 추기경님들이 "그럼 당신이 하시라"고 한 겁니다. 그렇게 교황님이 선출이 되신 겁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러한 말씀들은 교황님 개인의 메시지가 아니고, 저런 말씀을 하신 추기경님을 다른 추기경님들이 교황으로 선출하도록 성령께서 이 시대에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겁니다. 이 교회를 통해서 우리에게 성령께서 하시는 말씀으로 이해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 안에서 주님을 뵙는다는 것은 조금 전에 말씀을 드린 바와 같이, 그리스도를 찾는다는 것은 영성생활에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말씀을 충실하게 묵상하는 것과 교회의 거룩한 신비들에 적극 참여하는 것, 그리고 또한 '작은 이들'에게 사랑으로 봉사하는 것입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현대의 사제양성 46항). 위에서 언급한 바 있죠.
지킬 의무로서의 사회교리
사회교리는 지킬 의무가 있습니다. 교회의 사회교리는 교회의 도덕적 가르침에 속하는 만큼 이와 동등한 위엄과 권위를 지닌다. 이는 참된 교도권으로 신자들은 이를 지킬 의무가 있다.(간추린 사회교리, 80항) 그런데 우리는 사회교리가 부록처럼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것처럼 이야기를 하지만, 이것은 교리입니다. 그래서 이제 예비자 교리서에 사회교리에 대해서 더 많은 부분을 할애하기로 교리교육위원회에서 얘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복음의 기쁨> 185항에서, 이 문서 <복음의 기쁨>은 우리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모든 사회 문제를 세부적으로 다룰 자리는 아닙니다.... 그러한 여러 주제에 관한 성찰에 알맞은 도구들은 '간추린 사회교리'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책을 공부하고 활용할 것을 강력히 권고합니다."(복음의 기쁨, 185항)
여기서 교황님은 '강력히' 권고한다고 쓰셨습니다. '강력히'라는 단어는 이 때만 쓰셨다고 하는데요. 그리고 지난 8월 14일 한국 주교님들에게 하신 말씀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연대는 복음의 중심에 있고, 그리스도인 생활의 필수 요소로 여겨야 합니다... 교회의 풍부한 유산인 사회교리를 바탕으로 한 강론과 교리 교육을 통하여 신자들의 정신과 마음에 스며들어야 하며, 교회 생활의 모든 측면에 반영되어야 합니다.(8.14. 한국 주교들과의 만남 중 하신 말씀)
그러니까 앞으로 교리교육과 강론 때 사회교리 공부를 시키라는 말씀이십니다. 가난한 이들과의 연대를 말씀하십니다. 2004년 출간된 <간추린 사회교리>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 응우엔 반 투안 추기경 님. 베트남 추기경 님이신데, <지금 이 순간을 살며>, <지금 이 순간을 사랑하며> 라는 책으로 유명하신데, 공산 치하에서 13년간 감옥에 계시면서 혼자 미사드리고 하신 분인데, 이 분을 교황청 정의평화위원장으로 임명을 하셨습니다. 그리고나서 사회교리 집대성을 맡기셨고, 2002년 선종하시면서 후임 레나토 마르티노 추기경님이 완성을 한 것이 <간추린 사회교리> 책자입니다.
교황님께서 하신 말씀방한기간 중 많이 사용하신 단어들은 평화, 가난, 사회, 화해, 정의, 연대, 자유 등이란 단어를 많이 쓰셨는데, 특히 전임 교황님들에 비해서 '가난'이란 단어를 가장 많이 쓰셨다고 해요.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가난한 이들, 취약계층,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이들에 대한 특별한 관심의 중요성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지난 방한 때, 공직자들이 만남에서나 주교들과의 만남 등에서 '가난한 이들의 절박한 요구를 충족시켜주는 것과 인간적이고 문화적으로 향상되도록 도와야 한다고 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