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2주일 2015. 4. 12. 09:00 하부내포성지 도화담 공소
윤종관 하부내포성지주임 겸 만수리공소성당 주임신부
상처 없는 사람은 없다!
상처는 새 삶의 증표!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 28)
오늘 읽는 복음 성경에서 그 절정(Climax)을 이루는 이 구절은 토마스의 부르짖음이자 우리의 신앙고백입니다. 우리의 이러한 신앙고백을 외친 토마스는 어떠한 사람이었습니까? 토마스 사도에 대하여 성경에서는 많은 정보를 제공하지 않고 있습니다만,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토마스의 인물 됨됨이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런 고백을 외친 토마스는 어떤 이였나?
토마스 사도는 예수님의 부활 당일(안식일 다음날, 즉 일요일)의 저녁때에(요한 20, 19) 다른 사도들과 함께 모여 있지 않고 밖으로 나돌았기 때문에, 그 때 오신 부활의 주님을 뵙지 못하였는데(요한 20, 24 참조), 그런 점에서 그분은 오늘날 주일미사에 잘 참석하지 않고 다른 일에 더 마음 쓰는 신자들과 비슷한 인물이었다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토마스 사도는 아마 요즘 흔히 일요일에 혼인 예식장에 인사 가기 위해 또는 골프 친구들이나 벚꽃놀이 가족 나들이 때문에 주일미사를 빼먹는 신자들처럼 어딘가 다녀온 것 같기도 합니다.
토마스는 벚꽃놀이나 골프를 치러 간 거였나?
하지만 그 안식일 다음날 저녁에 유다인들이 무서워서 어떤 집에 모여 문을 모두 닫아걸고 있었다는 다른 사도들과는 달리, 토마스 사도는 예수님을 잡아 죽인 그 유다인들을 겁내지 않고 밖에 나돌아 다닌 것 같습니다. 즉, 다른 제자들처럼 소심하지 않은 분인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사실 토마스 사도는 열정적이면서 나서기를 좋아하는 성격이었던 같습니다. 전에 예수님께서 라자로를 살리러 유다 지방으로 가시려 하자 모든 제자들이 나서서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벼르고 있다면서 가시지 말라고 만류하였습니다만(요한 11, 5∼8 참조), 토마스 사도는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요한 11, 16)하고 말하는 의리의 사나이였습니다.
의리있지만 까다로운 토마스
이렇게 자기 동료들을 부추기면서 앞장서는 토마스였지만, 또 한편 까다로운 성격이기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최후 만찬 때 고별 담화를 하시면서 당신이 가실 길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그 자리의 제자들이라고 말씀하시자(요한 14, 1∼4 참조), 토마스는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요한 14, 5)라고 이의를 제기한 사람입니다. 어느 면에서 그는 합리를 추구하는 면모를 보이기도 한 사람이었지요. 이러한 면모로 보아 토마스는 말을 먼저 하는 사람 같기도 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은 하지 않는 사람 같기도 하고, 이유를 많이 내세우는 사람 같기도 하고, 자기 식대로 행동하는 사람 같기도 합니다. 우리 교우님들 중에도 그런 분들이 많이 계시지요.
자유분방한 토마스
그러한 토마스는 자유분방한 사람 같습니다. 그래서 밖에 나가 돌아다니다가 돌아온 그는 다른 사도들이 겁쟁이들처럼 숨어 있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뵈었다고 말하니 가소롭게 여기면서 자기는 눈으로 직접 예수님의 상처를 확인하고서야 믿겠다고(요한 20, 25 참조) 우겨댄 것 같습니다. 이러한 그에 대하여 제가 추측하기로는, 그는 그 대범한 성격으로 능동적 행동을 하는 사람이었다고 보고 싶습니다. 그러한 성격으로는 아마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겠지요. 그래서 사흘 전에 처형되어 묻힌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있다고 떠들썩하게 나도는 시중의 소문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서 겁내지 않고 밖에 나가 돌아다니며 탐문하다가 과연 예수님의 그 무덤이 비어있는지 가보았을 수도 있습니다.
없는 시간을 낼 줄 아는 신자 토마스
저는 이러한 토마스 사도의 태도가 매우 마음에 듭니다. 소극적으로 물러앉아서 다른 사람들 눈치나 살피고 힘이 드는 일에서는 슬며시 몸을 빼기나 하다가 일이 되는 듯하면 생색이나 내기 위해서 끼어드는 사람들, 또는 세상 돌아가는 일의 더러움에 대해서는 관심 없으면서 그 사태에 대한 정의로운 외침에 손가락질을 하면서도 성당에 나오기만 하면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듯 착각하는 사람들, 그러면서 주일미사에나 겨우 참례하면서 세상에 나가서는 신앙 없는 사람들과 똑같이 행동하는 신자들 등의 소극적이고 비겁한 사람들과는 달리, 실제적인 자신의 노력으로 성경이나 교리를 깨우쳐서 기뻐하는 신자들, 그리고 어려움을 무릅쓰고 몸으로써 봉사활동에 나서고 주일미사에 공동체와 함께 하기 위해서 없는 시간을 낼 줄 아는 신자의 모습을 보여준 분이 토마스 사도였다고 저는 보고 싶습니다. 이 주간에 떠들썩한 성완종 사건처럼, 의혹의 대상자들이 ‘그 성완종에게 돈 받은 일 없다’고 우겨대면서 사실상 자신들의 비겁함을 둘러대는 사람들과는 달리, 자기변명을 하지 않는 사람이 토마스였지요.
토마스만이 보여주었던 감격적인 신앙고백
그러한 토마스 사도는 예수님을 뵙자 다른 사도들과는 달리 저 감격적인 신앙고백을 하였습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하고 말입니다. 다른 사도들은 기뻐서 그저 어쩔 줄 몰라 예수님 앞에서 어떤 행동을 보여드렸다는 보도 내용이 없습니다만, 토마스는 그렇게 즉시 감격적인 신앙고백을 했다고 성경 기자는 강조하여 보도하고 있습니다.
토마스가 올 때까지도 자랑질만 하고 여전이 집안에 머물런 제자들
불안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부활하여 오신 예수님께서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면서 평화를 선사하셨지만, 그리고 그 평화를 전하도록 그들을 내보낸다고(파견한다고) 말씀하시면서 성령을 불어넣어주시고 죄 사함을 세상에 선포하라 하셨지만, 그들은 즉시 밖에 나가지도 않고, 밖에서 돌아온 토마스에게 자랑만 했습니다(요한 20, 19∼24 참조). 그리고 그 후 일주일 동안 무슨 행동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일주일 후(여드레 뒤) 다시 문을 걸어 잠그고 비겁하게 숨어서 모여 있었지요(요한 20, 26 참조). 그 여드레 뒤의 그 자리에 함께 참석한 토마스는 아마 답답한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오신 예수님을 만나는 토마스
그런 자리에 다시 예수님께서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던 그 증표의 상처를 보여주시자 토마스는 거침없이 저 유명한 신앙고백을 합니다. 그 때문에 토마스는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하시는 주님의 질책을 듣습니다만, 그 다음에 이어지는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말씀은 사실 그 자리의 모든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었습니다(요한 20, 29 참조). 왜냐면, 예수님께서 일주일 전에 오셔서 당신의 그 모습을 보여주실 때까지도 예수님 부활하신 것을 확실히 믿지 못하여 불안해만 하다가 그분을 뵙고서야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던 그들이므로 그들 모두는 주님을 보고서야 겨우 믿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일주일 후(여드레 뒤)까지도 불안해서 문을 다 잠가놓고 있었습니다.
그저 우리끼리만 문닫아걸고 습관적으로 미사올리는 건 아닌가
매 주간 일요일에 즉, 안식일(토요일) 다음날(요한 20, 19 참조)에 모이는 오늘날의 우리들도 사실은 전주일 미사에 참례하여 주님을 모신 후 일주일(여드레)(요한 20, 26 참조) 지나고 다시 일요일(주일)에 모여도, 그 지난 일주간 동안 별로 더 나아진 것도 없고, 사회에 나가 신앙 증거와 주님 사랑을 실천한 것도 없이, 그저 우리끼리만(문 닫아걸고) 습관적으로 미사 올리는 것이 아닌가요? 이러한 우리들에게 확실한 신앙고백의 생활을 하라고 깨우쳐주기 위해서 요한복음서의 기자는 초대교회의 신앙고백문안인 저 토마스의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는 외침을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입니다.
토마스의 신앙고백을 상기하는 부활제2주일
이렇게 오늘 토마스의 신앙고백을 상기하는 부활제2주일은 부활주일과 똑같은 날이 되어 그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 신앙을 고백하는 날이기에, 세례성사를 받은 사람들이 오늘까지 흰옷을 입었던 풍속으로 ‘사백주일’이라 불리어집니다. 그래서 오늘 부활제2주일은 그게 여드레만의 날이듯이 일주간마다의 매주일은 주님의 부활을 체험하고 신앙을 고백하는 부활주일의 반복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끼리만 미사 봉헌하고 즉, 문 닫아걸어 체험하고 세상에 나아가서는 신앙인다운 실천이 없이 폐쇄적이고 피동적인 삶이어서는 아니 된다고 오늘 복음서는 우리에게 깨우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토마스 사도가 확인한 예수님의 손과 발의 못 자국과 가슴에 박힌 창의 상처를 우리의 기억에 강렬하게 담아두고 우리의 신앙을 실천으로 고백하는 삶의 길을 가야 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못 박히고 창에 뚫리신 자국이 뚜렷이 남아 있는 그분의 모습이란, 곧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여 오신 분임을 믿게 하여 주었다는 그 사실로 우리도 부활하기 위해서는 많은 상처를, 즉 죽음의 상징을 온 몸으로 얻어가면서 믿음의 길을 가야 한다는 것을 깨우쳐주고 있습니다.
캐롤라인 미스의 명언
여기서 저는 우리 인생의 길에서 얻는 상처란 무엇인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래서 ‘캐롤라인 미스’라는 분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해봅니다.
“상처와 함께 사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통해 앞으로 나아가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피해자의 행동과 생각으로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 피해를 입었다는 감정은 병을 덧나게 할 뿐이다.”(캐롤라인 미스의 《영혼의 해부》중에서)
이 말을 나의 마음에 들려주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저 자신에게 하고 싶습니다. “상처는 행복을 향한 메시지이다.”
상처는 행복을 향한 메시지
그렇습니다. 부활하여 오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죽으실 때 뚫렸던 손과 발과 옆구리의 그 상처를 보여주시는 분이십니다. 그 분을 만나면 저는 무슨 마음으로 대해야겠습니까?
그분은 부활하셨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라도 우리 눈에 당신 자신을 보여주시러 오십니다. 특히 우리가 세상에서 받는 마음의 상처로, 즉 삶의 고단함과 죄악으로부터 오는 불안과 후회로 주저앉아 있을 때, 부활하신 그분은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당신의 그 찬란한 모습 속에는 사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 고난의 증표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시면서 우리가 나아갈 신앙의 길을 알려주십니다. 그러면서 그분은 우리의 상처에 대하여 당신의 대답을 들려주십니다. “상처가 없는 사람은 없단다.”하고 말입니다.
가난한 사람, 병고로 신음하는 사람, 억울함을 호소하는 사람, 멸시와 갈등으로 마음을 상한 사람, 장애에 억눌린 사람, 늙음과 따돌림으로 희망을 잃은 사람, 저버림과 싸움으로 절망하고 있는 사람, 그리고 무엇보다도 죄악 속에 헤매는 사람의 모습…, 이러한 모습은 우리의 모습이요 동시에 예수님 당신 몸으로 얻으신 상처라고 말씀하십니다.
몸의 상처를 지니신 채 부활하여 오신 주님의 뜻은?
오늘 부활하여 오신 주님께서 당신 몸의 상처를 지니신 분으로서 세상에 우리를 내보내시며 세상 모든 죄의 용서(불행의 해소)를 우리 사명으로 맡기신다는 것(요한 20, 21∼23 참조)을 오늘 듣는 복음 말씀의 핵심으로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상처! 그것은 우리 몸에 남아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이제 원망과 좌절에 사로잡히지 않고 새로운 삶으로 이 세상을 바꾸어 나가야 한다는 용서와 평화의 소리 없는 호소, 그것이 우리 모두의 상처입니다. 그래서 그 상처를 받고 부활하신 그분을 향하여 오늘 우리는 신앙을 고백합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하고 말입니다. 세상에서 만나는 상처의 사람들 가운데 주님의 모습을 늘 알아채면서 우리는 그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가톨릭노트 > 신부 윤종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끌려가는 길이 아니다... “내 목숨 내 스스로 바칩니다.” (0) | 2015.04.26 |
---|---|
복음서가 생략한 나머지 이야기는 우리의 이야기 (0) | 2015.04.19 |
149년 전으로의 여행 ... 하부내포성지 도보순례 (0) | 2015.04.06 |
자존심까지 없앤 우리의 처지가 곧 무덤이다 (0) | 2015.04.05 |
광야로 나아가자! ... 2015 사순 제1주일의 메시지 (0) | 2015.02.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