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6주일, 농민주일, 2013년 7월21일 10시
만수리 공소 윤종관 신부
왜 다른 사람을 걸고 넘어지느냐?
진짜 필요한 것, 나의 참 좋은 몫!
어느 우화집에서 읽은 이야기 하나를 패러디하여 소개합니다.
수도자가 되고 싶은 한 여인이 수도원을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찾아가는 수도원마다 그 여자를 거절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녀가 너무 예뻐서 얼굴 가꾸는 일에 마음을 써 수도 생활에 큰 지장이 있으리라는 우려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생각다 못해 자신의 예쁜 얼굴을 불로 지져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그녀가 수도원을 찾아가니 비로소 받아주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 몇 년의 어려운 수련기간을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 수련은 자신의 마음을 다스릴 만한 경지에 이르기까지 기도와 노동으로 단련하는 과정입니다. 하루의 일과를 끝내고 취침 시간이 되면 다른 수도자들과는 달리 그 여자는 더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습니다. 그 시각에는 하루를 지낸 피곤에 짓눌리면서 어서 자리에 눕고 싶어지는 몸의 유혹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각자의 방으로 잠자러 들어가는 다른 수도자들의 발걸음 소리를 들으면서 수련생인 그 여자는 선배 수도자들이 다음날 새벽에 세면할 수 있는 물을 길어 와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매일 밤의 마지막 소임으로 물을 깃기 위해 대나무로 만든 큰 물동이를 가지고 우물가로 나가던 어느 가을 밤, 중천에 둥그렇게 떠오른 밝은 보름달은 문득 그 여인의 마음을 애달픔에 젖게 하였습니다. 두레박으로 퍼 올린 물을 대나무 동이에 가득 담고 허리를 굽혀 들어 올리려는 순간, 찰랑찰랑 흔들리는 물위에 둥근달이 또한 애잔한 미소로 흔들리며 떠있는 것입니다. 한참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니 흔들리던 물이 잔잔해지면서 밝고 고요하게 물에 잠긴 둥근달의 아름다운 얼굴 위로 문득 그녀 자신의 그 흉측한 얼굴이 얼비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녀 스스로 바라본 자신의 얼굴에 순간 소스라친 그녀는 마음이 한없이 슬퍼졌습니다. 그 아름다운 보름달과 같던 자신의 예쁜 얼굴이 그렇게 흉측하게 망가져 수련의 세월 속에 일그러져가고 있음이 너무너무 슬펐습니다.
그 슬픈 마음을 떨쳐버리려고 얼른 물동이를 들어 올리려는 순간, 이게 웬 일입니까! 밑바닥이 빠지면서 물동이가 부서지고 그녀의 온몸에 물이 쏟아지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작은 탄식이 우물 속에 메아리로 잦아드는가 싶더니 문득 교교한 달빛을 타고 밤하늘에 퍼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여인아, 너의 탄식은 무엇이냐? 물동이에 잠긴 둥근 달을 잃었음이냐? 혹은 영혼 닦는 세월 속에 일그러진 너의 얼굴 때문이냐?
여인아, 하늘의 달을 바라보아라! 초승에서 보름으로 둥그렇게 채워온 달이 아니더냐? 하지만 보름달은 조금씩 깎이면서 하승으로 잠겨갈 거란다.
여인아, 지금 잃어버린 물동이 속의 보름달, 그것을 네가 그렇게 쏟아버렸음을 하늘의 보름달은 서러하지 않는단다.
여인아, 그렇듯 서서히 하승으로 향하면서 내 얼굴이 일그러져 갈 것임을 나는 이렇게 맑은 웃음으로 밤하늘에 채운단다.
여인아, 너의 탄식 그것은, 예쁘던 네 얼굴이 아직도 버릴 수 없는 미련 속에서 그렇듯 흉물로 찌들어가는 그 서러움 아니더냐?
여인아, 네 마음 닦아야 할 세월을 그렇게 서러하면, 맑은 얼굴 둥그렇게 하늘에 띄울 날은 언제일거냐? 둥근 달은 그러나 그믐을 서러하지 않기에 다음 보름을 맑은 미소로 채운 얼굴이 된단다.
허나 여인아, 보름달은 그래도 또 그래도, 잃어가며 다시 채우기를 반복하는 닦음으로, 지고 뜨고 지고 뜨고 끊임없이 그렇게 맑고 맑은 한 달 한 달 뜨고 지고 뜨고 지고 또 다시 뜬단다.”
그렇습니다. 자신의 참 모습을 찾아 나서기로 수행의 길로 들어섰음은 자신을 부단히 깎아 없애면서 애절한 몸부림으로 가는 길입니다. 그 길은 가지고 있는 나 자신을 내세우기보다 나 자신에게서 떠남으로써 참 나를 채우는 길입니다. 그러한 길을 가라고 깨우치는 메시지를 오늘 복음 성경에서 듣게 됩니다.
귀한 손님으로 맞이한 예수님을 향하여 마르타와 마리아는 그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모습을 보입니다. 마르타는 자신을 내세워 자기가 하는 일로 자신을 채우고 있습니다만, 마리아는 자신을 비우고 예수님의 말씀으로 채우고 있습니다. 이 두 여인의 태도 가운데 참 그리스도 제자의 태도란 마리아와 같은 것이어야 함을 오늘 복음서는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카 10, 42)
이러한 마르타는 성경 해설가들에게서 간혹 비판을 받습니다만, 사실상 그녀는 자기 처지에서 참 좋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오신 손님을 접대하기 위해서 혼신의 정성을 다 하는 태도입니다.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손님이나 나그네를 지극정성 맞이하는 환대(Hospitality)의 아름다운 태도를 우리는 오늘 복음서의 마르타와 제1독서(창세 18, 1∼10 참조)의 아브라함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아브라함과 마르타는 자기 집에 오신 손님을 주님으로 모셨습니다. 그렇듯이 우리는 나그네와 방문객을 주님으로 나의 집에 모셔드리는 태도로 대함으로써 사랑의 환대를 할 줄 아는 참 그리스도인다운 습성을 몸에 익혀야 할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 교우님들 가운데 식당업이나 숙박업을 운영하시는 분들이 계시다면 그렇듯 아브라함과 마르타의 태도를 귀감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서에서 그렇듯 지극정성으로 주님을 모시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마르타를 질책하시듯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까닭은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의 그 질책성 타이름은 마르타의 그 정성을 문제 삼은 것이 아니고 그녀가 뱉은 말 때문입니다. 시중드는 일로 경황이 없던 마르타가 예수님께 불평조의 항의를 했습니다.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루카 10, 40) 마르타의 이 불평이 문제이지요. 한번 상상해봅시다. 마르타는 이 말을 하기에 앞서서 얼마나 눈을 흘겼겠습니까? 그것도 자기 동생 마리아에게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 말입니다. 아마 마리아와 예수님께 번갈아 흘기던 마르타의 눈은 상당히 째졌을 것입니다.
이러한 상상 속에서 저는 20년 전 쯤에 제가 당한 일이 기억납니다. 대전 시내의 성당에 있을 때의 어느 날 일어난 일입니다. 교구의 여성연합회 측이 판매용 젓갈을 한 트럭분 가지고 와서 본당의 몇 명 부인회원들과 함께 젓갈 통을 트럭에서 내려 창고로 옮기고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마침 상담 차 찾아온 교우분과의 대화를 마치고 배웅하러 마당에 나갔습니다.
그러자 교구 여성연합회장님께서 저에게 쏘아붙이는 것이었습니다. “신부님, 다른 본당에서는 그곳 신부님이 몸소 팔 걷고 도와주시던데, 여기는 신부님이 거들떠보지도 않고 방에서 다른 사람과 이야기만 하다가 나오시네요.” 그 여성연합회장님의 이 핀잔 말씀을 듣고 성질 못된 제가 뭐라고 대답했겠습니까? “아니, 뭐라고요? 사제가 사목적인 일을 제쳐두고 그런 젓갈 장사의 일꾼 노릇이나 하라는 겁니까?”하고 뱉어버렸지요. 그러자 알 수 없는 말로 입속말을 하며 저에게 눈을 흘기시던 연합회장님의 빨개진 얼굴이 지금도 저의 눈에 밟힙니다. 오래 전의 일이지만 그때의 그 자매님 마음을 상해드린 것이 마음에 걸리고 저의 너그럽지 못한 성질이 부끄럽습니다. 그렇듯이 예수님께서도 마르타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르타는 그 후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오늘 복음 성경에 설명이 없습니다만, 아마 자기 할 일을 팽개치지 않고 마음을 다잡아 열심히 하여 예수님을 모셨기에 교회가 그분을 성녀라 일컫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내일(7월 22일)은 그 동생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의 축일이고, 그 일주일 후(7월 29일)에 그 언니 마르타 성녀의 축일을 기념하는 게 그런 까닭인 듯합니다.
하지만 자기 동생 마리아와 예수님까지 싸잡아 비난하던 그런 마르타 같은 사람들을 요즘 우리는 정치권에서 많이 보고 있습니다. 지난 대선 정국에서 여론 조작을 위해 모사를 친 국가정보원에 대한 여야 간의 싸움, 그리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NLL을 포기했느니 아니니 하면서 죽은 사람 놓고 혓바닥 칼로 부관참시하며 싸우다가 남북정상회담 기록물 열람 찬반으로 치고받더니, 이제는 정작 그 대화록 기밀 문건이 없어졌다면서 책임공방으로 ‘죽은 사람 탓’ 그리고 오로지 ‘네 탓’만을 부르짖는 작태는, 자기들이 국민 앞에 수행해야 할 고유한 책임의 몫은 저버리고 싸움질들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속된 표현으로 말하자면 그야말로 ‘개싸움’ 구경에 국민들은 할 말을 잃을 지경입니다. 자기들 해야 할 일들이나 양심대로 성심을 다해 수행해도 모자랄 판에 똥개들처럼 싸우고 있어서 동네(나라)가 시끄럽고 이웃 집(북한과 다른 나라들)에게 창피할 뿐입니다. 주인(국민) 앞에서 본연의 책무 수행에도 늘 시간이 부족하다면서 양심껏 일해야 할 공복(국민의 머슴)들이 오로지 ‘네 탓’만 내세워 싸우는 게, 도무지 잘못 먹여 키운 똥개들의 싸움만 계속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 탓을 하면서 일을 하는 사람은 자신의 임무에 열중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러한 태도를 버려야 함을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잘 깨달아야 합니다. 쉬운 말로 좀 속되게 표현하자면, “왜 다른 사람을 걸고넘어지느냐?” 하는 뜻이 예수님 말씀에 들어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나아가 “지금 너의 그 일이 너를 위해서냐? 아니면 다른 사람을 위해서냐?” 라고 묻는 뜻도 있습니다. 마르타의 그 항의는 자기 일을 도와주지 않는다는 불평이었습니다. 그렇게 불평하려면 예수님을 “주님”이라 부르지나 말 일이지, “주님”이라 부르고나서 예수님을 자기 하는 일의 심부름꾼처럼 여기면서, 또한 여수 떨고 앉아있는 마리아의 꼴이 보기 싫을 뿐만 아니라, 그 여수(?) 같은 마리아와 환담하시는 예수님의 꼴(?)까지 보기 싫어서 그런 비난을 퍼부은 것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여기서 “필요한 것”(루카 10, 42)은 자기를 방문하신 주님께 대한 진정 순수한 마음의 환대이지, “많은 일거리로 마음을 빼앗기는 것”(루카 10, 41 참조)이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 실제로 “필요한 것”이란 다만 한 가지 “좋은 몫을 선택”하는 것입니다(루카 10, 42). 그 “좋은 몫”이란 주님의 마음을 나의 마음에 담는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점을 명심하기 위해서 우리는 오늘 복음 말씀을 들으려고 일어서면서 전에 예수님께서 ‘씨 뿌리는 비유’로 말씀하신 것을 상기합니다.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하느님 말씀을 간직하여 인내로 열매를 맺는 사람들은 행복하여라.”(오늘의 복음 환호송 : 루카 10, 42)고 말입니다. 그런 사람만이 진정 행복하게 참 좋은 몫을 택한 그리스도의 참 제자입니다. 우리 마음을 밭으로 삼아 당신 생명의 말씀을 뿌리시는 주님 발치에 마음 가까이 다가간 제자로서 마리아처럼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루카 10, 39 참조)이 진정 “좋은 몫”(루카 10, 42)인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연중 제14주일부터 루카복음서 10장에서 당신의 참 제자가 되는 길을 가도록 당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3주간 째 듣고 있습니다. 자기를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면서(연중 제14주일의 말씀), 동시에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할 줄 아는 ‘착한 이웃’이 되는(연중 제15주일의 말씀) 것이 예수님 제자의 길입니다. 그렇다면 무엇보다도 주님의 말씀을 듣고 간직할 줄 앎으로써만 진정 열매를 맺는 제자로서의 참 좋은 몫을 다하리라는(오늘 연중 제16일의 말씀) 것을 오늘 주님은 강조하십니다.
그리고 오늘 마침 ‘농민주일’을 맞이하여 농민들의 모습에서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이 찌는 듯한 삼복더위의 계절에(내일 '중복'임), 도시민들의 여유로운 피서휴가행렬을 바라보면서도, 그에 괘념치 않고 묵묵히 논밭에 엎드려 조물주의 섭리에 따르는 값진 땀을 흘려가며 계절의 열매를 바라보는 농민들의 그 성실성은 그들의 ‘좋은 몫’입니다.
그렇습니다. 자기의 어려운 처지에서 불행한 얼굴로 일그러지는 삶이 아니라, 기울고 채우고 또 비우고 다시 담는 달의 아름다움을 본받아야 할 수행의 길을 깨닫게 된 여인처럼, 우리는 자신의 주장으로가 아니라 주님의 말씀으로 삶의 좌표를 삼는 것만이 진정 주님의 참 제자가 걸어가는 행복한 길임을 오늘 깨달아야겠습니다.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38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년 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년 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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