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권고 『복음의 기쁨』 186~188항, 198항
가난한 사람의 외침을 듣는 곳
그 외침을 듣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다
이 글은 프란치스코의 책 『자비의 교회』 제2장.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의 첫 번째 테마입니다. 2장은 다섯 개의 테마로 구성되어 있고, 첫번째 테마는 프란치스코의 책 『복음의 기쁨』에서 따온 내용을 필자가 정리한 것입니다.
교회는 왜 사회에서 버림받는 사람을 염려하고 배려하는가? 그 근원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가 버림받은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가난하였으며,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언제나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때문입니다.
그 믿음을 진정 간직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는 그리스도인 개개인이, 또 그리스도 공동체 모두가 가난한 이들을 위한 하느님의 도구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을 온갖 불평등에서 해방하고 더 나은 삶으로 이끌어 그들이 아무 차별없이 사회 일원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봉사하는 일꾼으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 그래서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사명입니다.
가난한 이들의 외침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사명이기에, 그들을 돕기 위해 나설 수 있도록 언제나 준비되어 있어야 하는 것도 그리스도인의 준비된 자세가 될 것입니다. 좋으신 아버지 하느님은 가난한 이들의 외침을 기꺼이 들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성경에서 줄곧 확인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내 백성이 겪는 고난을 똑똑히 보았고, 작업 감독들 때문에 울부짖는 그들의 소리를 들었다. 정녕 나는 그들의 고통을 알고 있다. 그래서 내가 그들을 이집트인들의 손에서 구하여 ... 내려왔다. 내가 이제 너를 파라오에게 보낼 터이니,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어라”(탈출 3,7~8.10).
더욱이 하느님은 가난한 이들의 간청에 곧바로 응답하십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주님께 부르짖자, 주님께서는 그들을 위하여 구원자를 세우셨다”(판관 3,15).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도구입니다. 그래서 가난한 이들의 외침을 들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이들에게 귀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은 아버지의 뜻과 섭리에서 벗어나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를 두고 성경은 말합니다.
(가난한 이가) “너희를 걸어 주님께 호소하면 너희에게 죄가 될 것이다.”(신명 15,9)
가난한 이들의 외침을 모른 척하는 행위는 하느님과 우리 자신의 관계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칩니다. 이것은, 가난한 이들이 “비참한 삶 속에서 너를 저주하면 그를 만드신 분께서 그의 호소를 들어주시리라.”(집회 4,6)는 말씀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옛날 요한이 제기한 물음을 늘 되새겨야 하겠습니다. “누구든지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 그에게 마음을 닫아버리면, 하느님 사랑이 어떻게 그 사람 안에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1요한 3,17)
억압받는 이들의 외침에 대한 야고보 사도의 강조점도 기억해야 합니다. “보십시오. 그대들의 밭에서 곡식을 벤 일꾼들에게 주지않고 가로챈 품삯이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 곡식을 거두어들인 일꾼들의 아우성이 만군의 주님 귀에 들어갔습니다”(야고 5,4).
우리에게 참된 자유를 주시는 하느님의 은총이 가난한 이들의 외침을 들으라고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이 점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가난한 이들의 외침을 듣는 것은 몇몇 그리스도인에게 국한된 사명이 아닙니다. ‘교회는 정의를 갈망하는 이들의 외침을 듣고 온 힘을 다해 그 외침에 응답하고자 합니다.’ 동일한 맥락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요구합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르 6,37). 궁극적으로 가난의 구조적 요인을 제거하고 가난한 이들이 모든 면에서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도록 협력하는 것은 물론, 우리가 마주치는 현실적인 빈곤 앞에서도 단순하면서도 날마다 반복되는 연대를 실천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연대’라는 말은 다소 진부할 수 있고 잘못 해석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쩌다 한번씩 실천하는 관대한 행위보다 가난한 이들과의 ‘연대’가 훨씬 더 많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몇몇 사람을 위한 부와 행복이 아니라 공동체의 관점에서 모든 사람이 생명의 삶을 먼저 생각하는 새로운 사고를 지녀야 합니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선택은 교회에게 문화적, 사회적, 정치적, 또는 철학적 범주 이전에 신학적 범주에 속한 일입니다. 하느님이 ‘당신의 우선적 자비’를 베푸신 대상은 가난한 이들이었습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호의는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필리 2,5) 간직하라고 부르심 받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와 같은 하느님의 호의에 고무된 교회는 가난한 이들을 선택하는 것, ‘교회의 전통이 증명하고 있는 것처럼 사랑을 실천하는 그리스도교에서 최우선의 특별한 형태’의 사명으로 인식하고 이를 일차적인 과제로 삼았습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가르쳐 주신 것처럼, 이 선택은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가난으로 우리를 부유하게 하고자 스스로 가난하게 되신 하느님에 대한 믿음, 곧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제가 바라는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입니다. 우리는 가난한 이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들은 뛰어난 신앙감각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고통을 통해 고통받는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우리는 모두 가난한 이들에 의해 복음화되어야 합니다. 새로운 복음화는 그들의 실존에서 구원의 힘을 재발견하고 그들을 교회여정의 중심에 세우라는 초대입니다. 우리는 그들에게서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그들의 정당한 권익을 위해 앞장서 목소리를 내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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