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책 『인권』을 읽고 정리한 노트필기를 기반으로 나름대로 정리한 내용입니다.
자연법 사상의 철학적 발전
인권은 자연법에서 나온 자연권이다. 자연법이란 고대 사상가들의 저작을 통해 알 수 있는데,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체계화 작업을 통해 그 모습을 파악할 수 있다.
자연법이란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인권이 만일 자연법에 따라 당연한 권리로 주어진 게 아니라면, 그것은 인간이 만든 가공의 창조품이 되고 만다. 즉 인간의 한계(생로병사)에 따라서 인권도 흥망성쇠의 길에 놓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세상의 이치가 되려면 그것은 자연에서 흘러나오는 것이어야 한다. 이러한 자연법(Natural Law) 사상이란 근대적 인권과 시민권의 철학이자 사상이며, 원칙과 관념을 이루는 토대로 작동했다.
그리고 이러한 토대가 되는 자연법은 고대로부터 내려온 것인데, 고대 사상가들의 여러 생각을 체계적으로 구분한 사람은 바로 아리스토텔레스(BC 384~322)였다. 그는 자연법의 자연적 정의(正義)와 법적 정의(正義)를 구분했다. 그런데 그 둘은 항상 일치하는 게 아니었고, 우선권은 늘 자연에 있었다. 즉 자연법이 실정법보다 우선한다는 것이다. 자연법이란 말 그대로 자연의 이치이므로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세상의 이치가 된다. 고대의 자연법이란 자연 또는 신이 정해진 인간사회의 질서이기에 그렇다.
참고로, 근대에 와서 자연법이란 인간의 이성을 통해서 인식됨으로써 존재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자연법 사상은 "모든 인간이 자유로우며 동일한 지위와 권리를 가지는 것이 자연스럽고 정당하다."는 선언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다만,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의 '모든 인간'이란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모든 인간'과는 차이가 있다. 그 시절의 고전적 시민권이란 도시국가의 성원이며, 군대에 복무한 남성을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살던 곳는 작은 도시국가였다. 그리고 시민의 자격은 도시의 남성들에 한정된 것이었다. 여성이나 노예 또는 외국인은 시민의 자격이 없었다. 그리스는 폐쇄적인 도시 국가였으며, 심지어 아테네에서는 부모 중 한 명이 외부인이라면 그 자식은 시민이 될 수 없었다. 그러나 기원전 3세기 경 헬레니즘 문명에 등장한 스토아 학파는 훨씬 더 큰 세상에 걸맞는 입장을 펼쳐나갔다. 세상의 정치적 국가적 단위는 이미 그리스의 도시국가 규모를 훨씬 넘어서고 있었다. 그리스의 도시국가 체제는 붕괴되었고, 그리스의 사상이 가진 보편적 성격들은 세계시민적 성격으로 탈바꿈하는 데 이 시기를 일컬어 헬레니즘 시대라고 한다. 이 시기에 스토아 학파는 로마라는 나라가 지중해를 중심으로 다양한 문화와 민족을 포괄하는 제국으로 성장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스토아 학파의 창시자는 기원전 3세기의 철학자 제논(Zenon, B.C. 335~263)이고, 그 뒤를 이어 스토아 철학회의 2대 회장에 클레안테스(B.C. 331~232), 3대 회장 크리시포스(B.C. 279~206)로 이어진다. 이들 스토아 철학자들은 로마제국의 다양성을 하나로 묶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특히 세네카(Seneca, BC 6 ~ AD 64), 노예였던 에픽테토스(Epictetos, 50 ~ 135),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121~180) 등이 대표적인 스토아 학파의 인물들로 꼽힌다. 특히 기원전 230년에 3대 회장이 된 크리시포스(2대 회장 클레안테스의 제자)는 스토아 사상을 체계화한 인물로, 『법률에 관하여』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법은 신과 인간의 모든 행동을 판가름하는 척도이다. … 법은 그 자연적 본성상 사회의 모든 생명체에게 해야 할 바를 가르치고 해서는 안 될 일을 금지한다.
스토아 학파는 이 세계가 이미 정해진 자연의 질서에 따라 미리 예정대로 진행된다는 결정론적 입장(Determinism)을 표방했다. 결정론이란 피하거나 거부할 수 없는 운명과도 같은 것이다. 오이디푸스의 운명도 바로 그런 것이었다. 그러나 스토아 학파는 결정된 삶이라도 포기하거나 도망가면 안 된다고 보았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이 거대한 자연의 질서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이러한 헌신적 자세를 공동체는 물론이고 전 인류에로 넓혀가라고 주장했다. 그것이 바로 이 세계가 만들어진 목적에 맞는다는 것이다. 이처럼 창시자 제논부터 아우렐리우스에 이르기까지 스토아 학파는 기원전 3세기부터 기원 후 2세기까지 활동하면서 앞선 그리스 시대의 자연법 사상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로마 사회에 적용하는 데 큰 족적을 남겼다. 그리고 스토아 학파가 강조한 자연법의 보편성은 기원전 3~2세기 로마의 만민법을 만드는 토대가 되기도 했다.
고대 로마의 법률가이자 정치인 키케로(BC 106~BC 43)는 자연법 사상을 가진 공화주의자였다. 공화주의란 자연법 사상에서 자연스럽게 파생된 개념이며, 그가 만민법 성격의 자연법을 지지한 것은 당시 범신론적 세계관에서 신의 섭리를 주장한 스토아 철학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래서 키케로에게 법은 자연법과 일치해야 하며, 자연의 기준에 따라 선악을 판단해야 하는 것이었다. 키케로는 그의 저서 『공화국에 관하여』 (또는 『국가에 관하여』, 『국가론』(De re publica) 이라고도 함)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실제로 존재하는 단 하나의 법은 올바른 이성이라는 법이다. 이 법은 자연과 일치하며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고 불변하며 영원하다. 이 법은 그 명령을 통해서 인간이 자신의 의무를 수행할 것을 요구하며, 그 금기를 통해서 그릇된 행위를 규제한다. … 모든 시대에 모든 인민을 구속하는 하나의 법이 존재할 것이다.
참고로 기원전 8세기 건국된 로마는 원래 로마 시민에게 적용하는 시민법(ius civile)을 가지고 있었다. 이른바 12표법(十二表法)은 기원전 451년과 449년의 두 번에 걸쳐 제정된 로마법의 기초를 이룬 성문법이다. 일명 십이동판법이라고도 하는 이유는 열 두 장의 동판에 민사 소송법, 사법, 형법, 제사법, 가족법, 상속법 따위를 포괄적으로 새겨서 공시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로마는 카르타고에 승리하면서 지중해를 무대로 하는 국제적인 중심국가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포에니 전쟁(라틴어: Bella Punica)은 기원전 264년에서 기원전 146년 사이에 로마와 카르타고가 세 차례에 걸쳐 120년간 벌였던 전쟁을 말한다.
약 1세기에 걸친 포에니 전쟁이 끝나면서, 로마는 지중해 세상의 최강자가 되었다. 영토는 확장되고 카르타고(리비아, 튀니지, 알제리 등)의 영토는 물론 스페인, 그리스와 마케도니아, 그리고 현재의 터키가 있는 소아시아 지역까지 로마의 영토가 되었다. 당시 강대국이던 시리아와 이집트는 물론 동쪽의 아르메니아(와 시리아), 그리고 북 아프리카의 (이집트와) 누미디아, 마우리타리아(현재 모리타니) 등은 동맹국이 되었다. 이처럼 로마는 지중해 세계의 국제적인 중심국가이자 상업국가로 변모하였고, 그들의 영토 안에서 많은 이민족들을 지배하게 되었다.
결국 지중해 세계의 대제국으로 발전한 로마에는 많은 이민족들에게 적용할 법이 필요해졌다. 즉 로마 시민들에게만 적용되는 시민법과 달리, 시민이 아닌 자들에게 적용할 대외법인 만민법(ius gentium)이 탄생한 것이다. 이것은 널리 로마제국 내의 이민족에 적용하기 위하여 제정된 것이었으며, 세계 어느 곳에서나 적용될 수 있는 합리적인 원리가 내포되어 있었다. 그러한 연유로 로마법은 세계 각국에 다양한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다.
2020년 4월 26일 일요일 저녁 8시 27분. 며칠 전 서재로 탈바꿈한 안방 내 책상에서
키워드: 로마, 시민법, 만민법, 키케로, 크리시포스, 스토아 학파, 아리스토텔레스, 자연법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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