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4 14일 성 바오로 대성전에서 하신 부활 제3주일 미사강론


하느님 말씀 전하기

구체적 삶의 증거없이 복음을 선포할 수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이 보여준 용기는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예수님 언급 금지명령을 내린 당대의 사법당국에 대해서 그들은 분명하게 의견을 밝혔던 것입니다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것이 더 마땅합니다"(사도 5,29). 


그것은 선포이며 증거였습니다. 진정한 선포였고 증거였기에 그들을 막아낼 심한 매질, 모욕, 감금도 소용이 없었던 것입니다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속한 삶의 현장에서 하느님 말씀을 전달할 능력이 있습니까? 가정에서, 일상에서, 만나는 이들에게 그리스도에 대해서, 우리의 신앙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습니까?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선포를 통해 굳건해집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충실함은 말로만 구성된 것은 아닙니댜. 그것은 삶 전반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전적인 변화를 겪었습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충실함은 그들의 삶 전반에 영향을 끼친 것이고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기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삶으로 믿음을 증거하고 그리스도를 선포했습니다요한복음서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세번씩이나 당신의 양떼를 잘 돌보고 당신의 사랑으로 보살피라고 당부하면서 이렇게 예고하십니다.

 

"늙어서는 네가 두 팔을 벌리면 다른 이들이 너에게 허리띠를 매어주고서,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요한 21,18). 


이것은 무엇보다도 사목자에게 해당됩니다. 가기 싫은 곳이라도 하느님 뜻에 따라 이동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양떼를 돌본다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아무 조건없이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아무 계산없이 그 무엇까지도 아끼지 않고 생명까지도 내어놓을 자세로 우리 자신을 내어주는 선물로 그리스도를 증거할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이것은 모든 신앙인에게 전부 다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질문을 던져보겠습니다.

 

"내 신앙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처럼 하느님께 순종하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한 것을 생각하고 선택하고 실천할 용기를 지니고 있는가?"

 

크고 멋진 그림 속에는 다양한 색상과 명암이 있고, 눈에 띄지 않는 작은 것들까지 온갖 요소가 중요하듯이, 신앙을 증거하는 방식도 다양하며 모든것이 다 중요합니다. 하느님의 커다란 그림 속에서도 작은 부분 하나까지 다 중요합니다. 드러나지 않는 증거까지도 중요합니다드러나지 않는 숨겨진 성인들은 우리 일상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들을 일컬어 '중간층 성인'이란 표현이 가능합니다. 이것은 교회에서 공적으로 성인품에 오른 이들 못지 않게 충실하고 깊은 신앙생활을 하는 그리스도인 계층을 말합니다.

 

또한 이 세상 곳곳에는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처럼 복음때문에 고통을 겪는 사람들도 있고, 그리스도께 충실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쳐 피로써 그분을 증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구체적인 삶의 증거가 없이는 복음을 선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다른 이들이 내가 하는 행동, 내가 하는말들 그런 것들을 보고 들으면서 우리가 선포하려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알아듣기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영광을 하느님께 돌려야 합니다!

 

이제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이 형제에게 해준 조언을 들려드립니다.

 

"여러분, 복음을 선포하십시오. 만일 필요하다면, 말로도 복음을 선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과 그 증거로 복음을 선포하십시오."

 

목자와 평신도가 말과 행동, 생각과 삶의 방식에서 차이를 보인다면 교회에 대한 신뢰는 약해지고 맙니다. 올바르고 참된 선포와 증거는 예수 그리스도를 제댜로 알아야만 가능합니다. 그분이 우리를 부르셨고, 당신의 길로 나아가라고 파견하셨으며, 우리를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선포하고 증거하는 일은 우리가 그분과 가까이 있을 때에만 가능합니다. 베드로와 요한과 다른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의 곁에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그분 곁에 있어야 제댜로 선포하고 증거할 수 있습니다.

 

복음사가 요한은 "제자들 가운데에는 '누구십니까?'라고 감히 묻는 사람이 없었다. 그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요한 21,12)라고 강조했습니다.

 

우리에게는 예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것, 곧 그 분이 '주님'이심을 알아볼 수 있게 그분과 친밀한 대화를 나누고 친밀한 삶을 사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요한묵시록은 우리에게 이 경배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천사의 무리와 모든 피조물과 생물과 원로가 하느님의 어좌와 살해된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경배했습니다. 살해된 어린 양은 영예와 영광과 찬미를 받기에 합당하신 그리스도이십니다(묵시 5,11-14).

 

여기서 자문해봅시다,

"저와 여러분 모두 주님을 경배하고 있나요?"

"우리는 무엇인가 청하거나 받은 은혜에 감사하기 위해서만 주님을 찾나요?"

 

그렇다면 하느님을 경배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하느님의 현존이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이 가장 참되고 제일 좋고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느끼면서 하느님과 함께 있는 것, 그 분과 대화하기 위해 머무는 것, 하느님을 경배함은 이런 것을 배운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삶의 중요한 순서를 매깁니다. 주님을 경배한다는 것은 그에 합당한 자리를 내어준다는 것입니다. 그 합당한 자리란 그 자리에 올려놓아야만 그것이 진정한 의미를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삶을 참된 길로 인도하시는 그 분을 경배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단순히 말로만 그 분을 경배한다고 하지 말고, 내 삶으로 입증해야 할 것입니다. 그 분만이 유일한 우리 삶의 하느님, 우리 역사의 하느님, 우리 모두의 유일한 하느님이심을 그 분 앞에서 확신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주님을 경배한다는 것은 우리 삶에서 구하려고 했던 온갖 피난처들을 모두벗어난다는 것을말합니다. 어떤 피난처들이 우리의 삶 곳곳에 있습니까? 그 피난처에서 우리는 온갖 종류의 우상에 빠져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야망, 출세, 성과주의, 자기중심주의, 남보다 높아지려는 성향,스스로가 삶의 주인이 되려는 오만함, 여러가지 죄 등 다양한 우상을 마음 깊은곳에 드러나지 않게 숨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질문합니다.

"내 삶 깊숙한 곳에 숨겨진 우상은 없는가?"

"나에게는 주님을 경배하지 못하게 만드는 우상이 없는가?"

 

주님을 경배한다는것은 겉으로 드러난 우상 뿐만 아니라 가장 깊은곳에 숨겨진 우상까지 모두 떼어내버리고 주님을 모든 것의 중심으로, 곧 우리 삶의 여정에서 가장 중요한 길로 선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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