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도 선교지인가요?
예수는 정말 부활했을까?
이제민 에드워드 신부, 마산교구 밀양 명례성지 주임
전민동성당 2016.4.13(수) 저녁 7:30~9:30 미사와 특강
미사 중 강론
부활! 믿습니까? (교중에서 크지 않게, 네~~) 진짭니끼? 부활을 믿는다는 건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시면 어떨 것이며, 부활을 안하셨으면 또 어떻습니까? 살아가면서 그것이 우리에게 정말 중요합니까? 그게 그렇게 실생활에서 중요하게 느껴집니까?
부활을 믿는다는 건 무슨 말인가?
정말 부활이 느껴집니끼? 전 잘 모르겠어요. 우리가 예수님 부활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이유는 나도 예수님처럼 부활의 삶을 살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부활의 삶을 살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눈을 감고 나서 제가 다시 "믿습니까?"라고 다시 물으니까 답이 적어졌습니다. 내 모습, 부활한 내 모습을 보십시오. 내가 부활했습니다. 내가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을까요? 지금 보는 사람과 부활한 후 사람이 똑같을까요? 달리 볼 수 있을까요?
도망쳤던 제자들은 왜 돌아와 예수님은 부활하셨다고 알렸을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때 제자들은 다 도망쳤습니다. 그런데 도망쳤던 제자들이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알렸던 겁니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던 그 처참한 모습을 보세요. 바오로 사도는 남녀노소를 망라하고 다 감옥에 쳐넣었던 사람이죠. 그런데 그렇게 도망가던 제자들이 돌아와서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알리는 겁니다.
예수님의 고통에 귀를 기울일 때 비로소 생명을 읽는다
군중은 필리포스의 말을 듣고, 모두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십자가에 처참하게 죽으신 바로 그 모습에 귀를 기울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제자들은 처음에 도망을 쳤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서의 죽음이 당신의 삶을 다른 사람들을 위해 내어준 것이란 깨달음이 생겼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중에 알고보니, 저 분의 삶과 죽음이 다른 사람을 위한 삶이었다는 것이겠죠. 예수님은 항상 다른 사람을 위하여 자기자신을 희생제물로 바치신 겁니다. 그런 예수님의 고통에 귀를 기울일 때 생명을 읽을수 있습니다.
너의 어머니는 어떠한가?
내 어머니가 어떻습니까? 사랑을 느끼게 해주시죠. 그 사랑의 원천은 무엇입니끼? 당신 자신을 위해 사는 게 아니라 나를 위해 당신을 희생하시는 것입니디. 그 희생에서 우리는 사랑을 느낍니다. 제자들은 십자가에서 도망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에 다시금 귀를 기울인 것이죠. 그래야 부활의 삶을 살 수 있는겁니다.
너는 빵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하는가?
우리가 빵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합니끼? 내가 먹을 빵, 내 배를 불릴 빵. 나를 위한 빵. 그런데 빵에 대해 귀를 기울인 적 있습니까? 예수님의 성체에 귀를 기울이듯이 말입니다. 한 알의 밀알이 바람과 태양을 맞이하여 싹을 틔우기까지 농부들은 또 얼마나 땀을 흘렸겠습니까? 그리고 한 알의 밀알은 어느덧 바수어지고 짓이겨져서 빵이 되었습니다. 빵이란 자기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부수고 바순 것입니다. 그런 빵에 귀를 기울인다는것은 그빵이 나에게로 오기까지 농부의 땀과 자연과 태양과 바람의 노력들괴 생명에 귀를기울이는 것이 됩니다. 게다가 빵을 쪼갭니다. 빵을 한차례 더 희생시키는 것입니다.
부활의 삶을 산다는 것
빵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과 빵을 보며 빵이 있기까지 모든 역사를 다 사랑하게 된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빵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서 부활의 삶을 살지 않는것이죠.
토마스에게 상처를 보여준 까닭은
토마스에게 상처를 보여준 것은 그 상처에로 사람들을 초대한 것입니다. 그 상처를 보면서 처음에 다 도망갔던 사람들이죠, 그래서 진정 부활의 삶을 산다는 것은 죽음 다음에 다시 살아서 영원히 산다든 게 아니라, 진정 부활의 삶을 살려면, 예수님처럼 자신을 희생 제물로 내놓을 줄 알아야 합니다.
단식과 자선을 똑바로 해라
우리는 사순설에 단식히고 자선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굶는 것을 단식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오늘은 금육이니까 고기만 안 먹으면 된다? 고기 대신 더 비싼 회를 먹으면 되는걸까요? 이게 뭐 장난치는걸까요? 아닙니다. 단식한 몫을 내어주는 것이 바로 단식의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고기를 안 먹는 대신에 비씬 회를 먹는다면 그게 무슨 소용일까요? 오늘 금육이라고 해서 고기를 먹지 말라고 하니, 대신 회를 먹는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고기를 먹지 못하는 이들에게 고기를 내어주는것이 단식입니다. 그래서 단식이나 금육이나 자선이란 내 주변의 아픈 사람들의 고통을 내 고통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게 산다면 부활을 체험할 수 있겠습니다. 여러분 사순절 시간에 그런 삶을 살았습니까? 가난한 사람들에게 귀를 기울였습니까? 그런 걸 묵싱해봅니다.
2016.4.13 저녁 7:30 미사 @대전교구 전민동성당
이제민 마산교구 신부 강론 끝
한국도 선교지인가요?
2016.4.13 저녁 8:30 @대전교구 전민동성당
이제민 마산교구 신부 미사 후 특강 시작
힌국은 선교지일까요? 이 질문은 선교가 무엇이며 선교 대상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이 됩니다. 본당 마다 선교분과가 있어요. 그러면 누가 선교사일까요? 예비신자를 모집하는 사람들일까요? 한국도 선교지일까요? 한국도 선교가 필요할까요? 한국도 선교사가 필요합니까? 예수님도 선교사입니까?
'이떼'는 '여러분 가십시요'란 뜻
그런데 선교란 단어 말고, 평상시에 미사에서 파견할 때 뭐라고 하나요? 선교를 미션이라고 하는데요. 혹시 미션이란 영화 보셨나요? 미션과 똑같은 겁니다. 미션은 파견도 되고. 보내지는 것이기도 해요. 그런데 우린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라고 합니다. 라틴어로 이떼 미사 에스뜨(Ite missa est)입니다. 여기서 이떼는 '여러분 가십시요'란 뜻입니다. 이떼 다음에 미사가 나옵니디. 보내진다는 수동태에요
파견된다는 것은 사절단으로 떠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선교는 미사입니다. 우리의 미사가 끝나면 여러분은 파견되어집니다. 파견된다는 건 무슨 뜻이죠? 사절단을 보내는거죠? 그러면 뭔가 전할 내용이 있죠? 만일 미국에 사절단을 보낸다면 미국 대통령에게 뭔가 전할 내용을 가지고 가는 것이죠? 그것이 바로 선교의 내용이 되겠죠. 보내졌으니까. 보내진 내용이 있을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제 막 미사를 드렸어요. 그리고 <미사 끝났으니 가십시요> 합니다.
무엇을 갖고 파견되는 것일까?
무엇을갖고 가나요? 미사에서 드린 내용을 갖고 보내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보내어진 세상안에서 미사의 내용을 전하라는 겁니다. 즉 미사의 내용이 곧 파견의 내용입니다. 세상에 파견되었다는 건 세상에 들어가서 잘 보고 있다가 이런 사람, 저런 사람을 낚아오라고 하는 것보다는 미사, 즉 성찬례, 성체 성사의 미사를 거행했으니, 이것을 미사 때만 기억하고 없애는 게 아니라, 미사 때 체험한 걸 가지고 일상으로 들어가자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그걸 내 몸으로 보여줘야 하는겁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미사 때 무엇을 보았으며, 무엇을 체험했습니까? 미사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궁극적으로 여러분은 무엇때문에 미사에 오십니까?
미사 참례에 빠졌다는 건 성체를 못 모신 것
2십여년 냉담한 사람이 고해성사를 합니다. 죄 고백하라고 하면 <미사 참례를 20년동안 안했어요.>라고 고백합니다. <다른 죄 없나요?>라고 물어보면, <네 없습니다.>라고 답합니다. 성체성사, 곧 미사 참례가 그만큼 중요한 이유가 뭐죠? 성체를 받아 모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미사 참례에 빠졌다는 것 성체를 못 모신 겁니다. 그러면 미사 때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복음을 선포하지만, 제자들은 끝가지 못 알아 듣습니다. 그러면서 예루살렘에서 돌아가시는 때에도 제자들은 못 알아듣죠. 예수님이 그 때 몸으로 보여주신 게 바로 최후의 만찬입니디.
최후의 만찬은 단순한 마지막 식사였을까
그것은 단순한 마지막 식사가 아닙니디. <이것은 내 몸이다. 받아먹어라> 이러죠, 그 말씀을 들으며 무슨생각이 드나요? <내 몸이다 받아먹어라> 하던 예수님의 마음을 느껴 보셨나요? <내 몸이다 받아먹어라> 그러면서 빵을 쪼개시죠. 너무 빵이 커서 한 입에 안 들어갈 것 같아서 그 빵을 쪼개는 거였나요? 아니죠. 그것도 의미가 있는 겁니다. 예수님은 <내 몸이다 받아먹어라>하고 쪼갭니다. 무엇을 쪼갭니까? 당신의 몸을 쪼개신 겁니다. 난 널 위해 내 몸을 쪼갠다는 겁니다. 난 널 위해 내 몸을 희생시킨다. 널 위해서.
예수님이 내 몸 안에 들어오신 이후, 우리는 무얼 하나
그런 빵을먹으면 어떻게 되나요? 예수님이 내 몸 안에 들어오셨습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이제 내 몸 안에 예수니을 간직한 채로, 예수님을 내 몸 안에 가둬놓은 상태로, <예수님, 안 아프게 하주세요! 돈 많이 벌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성체가 그냥 내 몸 안에 계시나요? 녹아서 사라집니디. 이것은 사건입니다. 여러분을 위해 당신 몸을 사라지게 녹아서 없어집니다. 예수님은 이를 수많은 비유로 설명하신 바 있습니다. 한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끝까지 씨앗으로 남아있으면 열매를 맺을수없다고 하셨어요.
내 몸을 사라지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게 부담스럽나?
그렇다면 성체를 모시는 이유는 무엇입니끼? 예수님께 내 소원을 아뢰기 위해서 입니까? <예수님 미안합니다. 저는 여태껏 제 구원 만을 위해 살았습니디. 그저 제 소원을 들어주는, 날 위한 존재로만 생각했어요. 미안합니다. 저도 예수님 당신처럼 내 몸을 쪼개게 해주시고. 내 몸을 사라지게 해주십시요.> 이렇게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요? 제 말씀이 너무부담스럽나요?
진정한 인생의 목표
실제로 그리스도의 몸을 받아모시는 것은 내 몸을 그리스도 몸으로 변화시키려는 겁니다, 내 인생의 목표는무엇입니까? 내 몸을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화시키는 것입니디. 성체를 모시는 과정에서 그런 변화가 일어납니다. 미사는 <내 몸이다 받아먹어라.> 할 때, 그것은 내 몸을 쪼개고 희생시키는 것입니다. 미사에서 사용되는 용어 중에서 <하느님의 어린양>이란 게 있어요. 그런데 어린양은 살해되었습니다. 되풀이되어 말해지는 것이 바로 이 쪼개지고 살해되는 어린양에 대한 이야기이고, 바로 이런 순간들에 사랑을 느끼는겁니디. 그래서 미사는 희생제사라고 부릅니다.
미사는 희생제사이며 감사제
미사를 드리는 것은 희생제를 올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제는 감사송을 읊습니다. 미사를 감사제라고도 불러요. 왜일까요? 예수님께서 날 위해 당신 몸을 희생시켰어요. 그래서 더 이상 내 몸을 희생시키지 않아도 되는 것을 감사하는 것일까요? 과연 예수님께서 온 인류를 위해 당신의 몸을 희생 제물로 바치셨습니까? 아니면 이러한 사실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는 믿는 이들을 위해서만 당신의 몸을 내어놓으셨던 것일까요? 다르게 표현하자면, 유다 같은사람을 위해서는 내놓지 않았다고 볼 수 있는 걸까요?
배신자 유다를 위한 희생은 아니었던 걸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온 인류를 위해서 목숨을 내어놓으시고 십자가에서 돌아 가신 겁니다. 그래서 난 희생히지 않아도 될까요? '우릴 대신해서 돌아가셨기에 난 이제 희생하지 않아도 된다?' 실제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 많습니다, 그런데 감사제란 나도 예수님처럼 내 희생을 하며 살아가는걸 감사하는 것입니다. 드디어 다른 이를 위해 내 몸을 희생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주님 감사합니다.> 그런 역설적인 의미가 포함된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감사입니다.
사랑과 희생과 감사는 따로 떼어놓을 수 없다
사실 예수님이 성찬례를 거행하셨던 것은 다른이들이 저마다 자신만을 위해 잘 살려고 하니,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신 겁니다, 실제로 우리는 일상생활을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어머니들을보세요. 자식을 위해서 모든것을 내어놓고 살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본심은 내 자식만 잘되면 내 몸은 쪼개지고 사라져도 좋다는 마음입니다, 그 마음 때문에 쪼개지고 사라지는 마음이 뭔지를 압니다. 그건 사랑입니디. 그래서 시랑과 희생과 감사는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가 없어요. 모두가 시랑에 감사하며 실죠. 어머니의 사랑은 희생이며 우린 그런 사랑을 감사하며 삽니다.
다치고 들어온 자식을 대하는 어머니처럼
아무리 어머니가 <이제부터는 내 인생 살겠다!>라고 말하는 세상이라도 그건 말만 그런 겁니다. 만일 자식이 다치고 왔다고 생각해보십시요. 어머니는 가만히 있지 읺습니다. 미사는 그런 겁니다. 예수님은 온 세상 대해 어머니와 같은 마음으로 사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희생제이며 감사제가 되는 것입니다. 미사 때 우리는 그걸 체험하는 겁니다, 그래서 성체를 받아모시며 희생과 사랑을 체험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에 대한 감사를 체험합니다, 그렇다면 우린 어떻게 해야 합니까? 파견되어져, 미사 때 체험한 것을 그대로 행동하는 겁니다. 그래서 선교란 다른사람을 위해 자기자신을 희생시키는일이기도 합니디. 그래서 우리말 번역이 잘 된 겁니다. <가십시오. 복음을 전하십시오.>
세례를 받는 다는 것
그다음은 세례입니다. 선교를 통해서 사람들이 성당에 새롭게 오고 그들에게 세례를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먼서 (마르코 복음의 마지막 장인 16장의 15절에서)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마르 16,15)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16,16)
그렇다면 믿는다는 것은 무엇입니끼? 세례란 무엇입니까? 로마서 6장 3절에서 바오로 사도는 <세레를 받는 우리는 모두 그 분과 하나되는 세레를 받았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우리가 모두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로마서 6,3) 과연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6,4)
입문성사 - 세례, 견진, 성체성사
세례를 받는 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 삶으로 초대받는 것입니다. 세례는 입문성사라고도 해요. 세례성사,견진성사,성체성사는 세례를통해 그리스도교에 입문한다는 의미가 있어요. 그것은 과연 어떤 의미의 입문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나는 이제 더 이상 나를 잘 살게 하는게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내 자신을 희생시키며 살아야지 하는 그 삶에 입문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입문성사는 엄청난 일입니디. 그래서 세례나 미사는 거의 같은 뜻으로생각해볼 수가 있어요
선교와 세례는 같은 것이다
그래서 선교와 세례는 같이 생각해보게 되는 겁니다. 세례는 궁극적으로 내가 천주교이며 그리스도교로 사람들을 초대했다면, 시람들에게 성체성사로 초대하는 성사가 됩니디. 세례를 받게 히고자 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성체를 받아모시게 하는 것이기에 그래요. 그래서 성찬례에 초대하기 위해서 세례를 받게 하는 겁니다.우리도 궁극적으로 내 몸을 그리스도 몸으로 변화시키려고 성체성사를 하며 세례를받습니다. 나를 희생하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세례를 괜히 받았다, 잘못 받으셨다고 생각하나요?
초대에 진짜로 응하는 방법 - 나 자신을 희생제물로 바쳐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어떻습니까 너무나 너무도 자기만을 위해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례성사와 성체성사는 자기자신을 희생하는 삶으로 초대 받았다는 것은 알아야 합니다. 누가 초대받은 것입니까? 모두 다입니다. 모든 이가 선교의 대상입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았음에도 불구히고 내 몸을 희생제물로 내어놓지 못했다는것은 진정한 초대에 응하지 못한 게 됩니다.
희생하는 존재임을 감사하는 존재로 변화시키는 것
제일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미사를 드리고 세례를 받는다는것은 내 존재를 다른 이를 위해 희생시키는존재로, 거기에 대해 감사할 수있는 존재로 변화시키려는겁니다. 그래서 선교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어디에 필요하니요? 힌국에서는 필요 없나요? 힌국사람들은 다들 자기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다른 이들을 위해 희생시킬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일까요? 어쩌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압니다. 알면서도 그렇게 살기 어렵기에 우리 그리스도인은 선교대상 1 호입니다. 매일 성체를 받아모시면서도 아직까지 성체로 변화되지 않았다면 말입니다.
기쁜 소식이란 무엇인가?
미사와 세례성시에 대해 말씀을 드리면서 미사와 세례성사에 대해 느닷없이 나온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성체성사를 세우시기 전에 끊임없이 복음을전파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잘 알아 듣지 못합니다. 그러면 복음은 무엇입니까? 기쁜 소식이죠. 그러면 기쁜소식은 무엇입니끼?
복음은 인생을 기쁘게 사는 비결
우리는 머리로는 알아듣습니다. 세상을 복음화해야 한다고 생각하죠. 세상을 예수님의 복음으로 변화시키는일이 세상의 복음화입니다. 그러면 복음의 내용을 알아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 내용은 무엇입니까? 구체적으로 예수님이 무엇을 선포하셨습니끼? 시간이 많이 걸리니 답부터 말씀드리면, 복음은 기쁜 소식이죠. 인생을 기쁘게 사는 비결입니다. 노하우입니다. 예수님의 노하우를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겁니다.
예수님이 가르쳐준 노하우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노하우가 무엇입니까? 그걸 모르면서 어떻게 선교할 수가 있을까요? 비결은 사실 우리가 잘 아는 겁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겁니다. 물론 우리는 건성으로 듣고 있어요. 느낌이 오나요? 그런데 우린 동문서답을 합니다. <예수님은 왔다고 하시고,우린 갈거다.> 라고 합니다. 그러면 하느님의 나라는 어디에 있나요? 오는겁니까? 가는 겁니까? 그건 아직도 내 몸을 희생 제물로 바치지 못하기에 그런 겁니다.
가까이 왔다는 손 안에 있다는 뜻
가까이 간다고 하는데, 그게 아니고, 신약성경에서 그리스말로 <가까이 왔다.>는 말은 <손 안에 있다.>는겁니다. 하느님 나라는 손 안에 있다는 겁니다. 하느님 나라가 내 손아네 있다는 것은 하느님 나라는 내 손이 닿는 곳에 와있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왜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하느님의 나라의 기쁨과 행복을 말합니다. 그것이 우리 손에 닿는 곳에 와있다고 하지만, 우린 어떤 습성을 가지고 있니요? <저 놈 보기 싫다! 어제 저 놈이 내게 싱처를 줬다. 그런데 저 놈 또 나타났네? 안 나타나면 좋겠는데...> 그러면서 우린 잘 맞지 않는 사람들은 내 밖으로 밀어냅니다. 예컨데 나병환자들은 소외당하는 것이겠죠. 그래서 나병환자가 지나가면 소리를 칩니다 비켜 가려는 겁니다. 가난하다고, 힘이 없다고, 이방인이라고 자꾸 밀어내는 게 너무익숙합니디. 우린 안그렇습니끼? 성당? <아니, 저거 또 나타나서 자꾸 ...> 예수님을 밀어내고 다 밀어내면 본당이 기쁨으로 형성될 것 같죠? 그런가요? 여러분 기쁜 공동체로 다 밀어내면 될까요? 실제로는 안 그렇다는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무엇입니끼. 다가갑니다. 다가가라고합니디. 예수님은 복음을 선포하시면서 항상 다가가서 손을내밀고 손을잡습니다. 마르코복음에서 예수님이 복음을선포하시면서 제자들을 모읍니다. 그리고 제일 처음으로 시몬 베드로의 장모 집에 갑니다. 장모가 열병에 들었죠. 듣고는 가십니다,
시몬의 병든 장모를 고치시다 (마태 8,14-15 ; 루카 4,38-39)
29 그들은 회당에서 나와,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곧바로 시몬과 안드레아의 집으로 갔다. 30 그때에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어서, 사람들이 곧바로 예수님께 그 부인의 사정을 이야기하였다. 31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다가가시어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이 가셨다. 그러자 부인은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 (마르코 1,29~32)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다가가시어>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그러자 부인은 그들의 시중을 들었습니다. 여기서 보면, <다가가시어>라고 되어 있습니다. 손을 잡으시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손이 닿지 않는 곳은 없습니다. 그리고 복음화라는 것은 모든 것 안에 하느님을 전하는 운동입니다, 그래서 내 손에 닿지 않는곳이 아무곳도 없고 모두가 다 복음의 대상이 되는것입니다.
모든 곳이 다 복음의 대상이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시며 어떻게 하셨는지를 마르코 복음으로 살펴보았어요. 그 동사들을 눈여겨보세요. <장모의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이 잦았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마르코 1,40~45에서도 보면,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대시며 말씀을 하시죠.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해져라.>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우리가 예수님께 손을 댈 때마다
그분께서 많은 사람의 병을 고쳐 주셨으므로,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은 누구나 그분에게 손을 대려고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마르코 3,10)
마르코 복음 3장 10절을 보면,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은 누구나 손을 대려 하고 있습니다. 또한 야이로 회당장은 예수님을 찾아와서 죽어가는 자신의 어린 딸에게 손을 얹어달라고 간청합니다. 또 야이로 회당장의 집으로 가는 중에 열두 해동안 하혈하던 여자는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합니다. 그런데 정말 손을 대니까 치유가 됩니다.
야이로라는 한 회당장이 와서 예수님을 뵙고 그분 발 앞에 엎드려, "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 하고 간곡히 청하였다.(마르 5,22~23)
그 가운데에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는 여자가 있었다.(5,25) 그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군중에 섞여 예수님 뒤로 가서 그분의 옷에 손을 대었다. (5,27) 과연 곧 출혈이 멈추고 병이 나은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5,27)
그런데 마르코복음 6장 5절에 와서는 (고향 나자렛에서 무시를 당하셔서) 예수님이 화가 나셨는지, 몇몇 병자에게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주십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 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마을을 두루 돌아다니며 가르치셨다. (마르코 6,4-6)
복음화란 손을 내밀고 어루만져 주는 것
이렇게 손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그러면 복음화란 무엇일까요? 복음화란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손을 내밀고 어루만져 주는 겁니다. 복음 안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많이 나옵니다, 우리가 가난한 이들에게 힘없는 이들에게 다가간다는 것은 모든 이들에게 다가 가는 겁니다. 내가 가난한 이들에게 다가가지 않는다는 건 모든 이에게 다가갈 마음이 없다는 겁니다.
마르코 복음 6장 7절부터 13절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다>에서는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길을 떠날 때 지팡이 말고는 아무 것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는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이것은 소유욕에서 벗어나라는 겁니다. 자신을 완전히 죽이고 희생시키라는 것이기도 합니다. 지신을 희생시키는 마음없이 그리스도인이 되기는 어려운 겁니다.
그러면서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 (마르 6,8~9)
그러면 궁극적으로 우리가 신앙을 찾으며 예수님을 찾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종합적으로 말한다면, 선교라는 것은 미사와 관련된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화란 사람들에게 내 손이 닿지 아니한 곳이 없이 다가가는 모든 곳에서 기쁨과 희망이 있을 것이란 것이겠죠. 더 나아가 한가지 더 말씀드리면, 세례로 자신이 복음화되었다고 생각한다면 잘 이해해야 하는 게 있습니다.
세례받은 이는 선교대상이 아닐까
정말 내가 보내진 건가? 정말 내가 다른 이들에게 가서 하느님을 만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줄 수 있는가라는 물음으로 연결시켜야 하는 것이죠. 신자가 아닌 사람을 선교 대상으로 여기면서, 우리는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므로 더 이상 선교 대상이 아니라고 보는 것은 복음에 대한 오해입니다. 미사에 참례하는 순간에도 그러한 의미를 깨닫지 못한다는 것은 그리스도교가 지난 날로부터 빠져있는 우월주의적 생각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소금은 녹아 없어진다
<너는 세상의 소금이다.>라는 말이 있어요. 그런데 소금이란 살아가며 꼭 필요한 물건이잖아요. 없어서는안될 물건이죠. "복음이 내 맘과 똑같아, 모든사람들이 세상 평화를 위해 꼭 필요한 존재들이야"하면서도 우리는 싫어하거나 불편한 사람들을 밀어내려고 할 때가 많아요. 그들을 내 손이 닿지 않는곳으로 밀어내려고 하죠. 그런데 그렇게 한다고 우리의 마음이 평화로워지지는 않습니다. 모든 세상 사람들이 하느님을 다 필요로 한다는 걸 인식할 때 우리는 평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소금맛인가, 김치맛인가
그리고 소금은 짠 맛입니다. 그런데 김치는 소금맛이 나야합니까? 김치맛이 나야합니끼? 소금을 뿌렸는데 소금은 사라지고, 배추 속으로 절여 들어갑니다. 그러면서 배추를 맛있는 김치로 만듭니다. 자기자신을 희생하며 소금은 사라져버리고, 맛있는 배추 김치가 만들어집니다. 그리스도는그런 존재입니다. 그렇게 자신이 사라지는 존재입니디.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희생제물로 쓰는 겁니다. 소금같은 존재라는 것이죠. 그렇게 똑같은 논리입니다.
당신을 위하여 녹는 소금이 되겠습니다
이제 옆에 있는 분들과 서로 인사를 한번 해보세요. 그러면서 <당신을 위하여 녹는 소금이 되겠습니다.>라고 말해보세요. 선교는 그렇게 녹아 들어가는 겁니다. 그래서 녹아 들어 간다는 건 결국 가난하고 힘든사람들의 고통 속으로 녹아 들어가는 것이며,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것이 선교입니다.
부활에 대해서
미사 때도 말씀을드렸는데, 여러분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걸 믿습니까? 부활을 믿는다는 건 우리가 예수님과 같은 부활의 삶을 살아간다는겁니다. 언제 살아갑니까? 사순절에 단식, 금육, 자선을 하는데 그게 먼 훗날 부활의 삶을 살려고 하는 겁니까? 지금 단식하는건 지금 부활의 삶을 살려고 하는겁니다.
금육이니까 회를 먹을까?
그런데 내가 지금 단식, 금육, 자선을하면서도 부활의 삶을 못 느낀다면 그 이유는뭡니까? 왜 단식도 하고, 금육도 하고 자선도 했는데 왜 그럴까요? 간단합니다. 잘못 단식한 겁니다. 잘못 금육했고, 잘못 자선한 겁니다. 정말 단식을 하면서 배고픈 사람들을 생각했나요? 금육을 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했습니까? 오늘은 금육해야 하니까 회를 먹을까 그걸 생각하나요? 자선을 하며 그저 동전 한닢 던져주는 것으로 생각을 하셨습니까?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일화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교황이 되기 이전, 호르헤 마리오 베르고글리오 신부님 시절의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어떤 남편이 아내와 싸워서 이렇게 와서 고백을 하였다고 합니다. "화해도 안되고, 용서도 안됩니다." 그러자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어떻게 조언을 했을까요? 그래도 "참아라 용서해주어라."라고 말하면 용서가 과연 될까요?
호르헤 마리오 베르고글리오 신부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길거리를 가다가 거지 본 적 있나요?>라고 물으면 대부분 본 적이 있다고 답하고, 그들에게 다시 자선을 해본 적이 있냐고 물으면 대체로 "예"라고 한답니다. 우리가 2차 헌금을 하듯이요. 그런데 이 때 다시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겁니다. <자선을 하면서 거지의 눈을 보면서 주었습니까, 보지 않고 주었습니까?> 그러면 거의 답변을 못한 답니다. 그냥 한 닢 던져준겁니다. 마음을 준 것이 아닙니다. 부활도 마찬가지입니디. 부활이 내가 죽은 다음에 묻히고 다시 어딘가에서 살아나서 영원토록 산다는 것으로 아는 경우가 있습니다.
거지의 눈을 보면서 주었습니까
그러나 지금 부활의 삶을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은 지금 부활의 삶을 체험하지 못하는 사람은 죽었다가 살아난다고 해도 그건 부활의 삶이 아닙니디. 지금 부활의 삶을 살지 못하면 영원히 부활의 삶을 살지 못합니다. 우린 그렇게 믿는 것입니다. 지금 부활의 삶을살지 못하면 영원히 부활하지 못한다는 것... 그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자선하고 지금 희생하지 아니한 사람은 영원하 사랑의 삶과 감사의 삶과 부활의 삶을 살 수 없다는 겁니다.
희생없는 부활이 가능할까
우리 그리스도인의 가장 큰 잘못은 어떻게 희생하지 않고 부활의 삶을 살 수 있을까 하는 태도를 갖는 것이겠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웃을 위해 조금도 희생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부활을 희망하죠. 그것은 잘못된 부활에 대한 생각입니다. 신약 성경의 내용 전부가 그런 것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토마스가 보기 전에 나타나셨는데, 토마스가 그분의 상처 보지 읺고 못믿겠다고 그러자 흔쾌히 상처를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은 당신의 상처를 보여주시면서, 그 상처로 사람들을 초대한 것입니다. 그냥 부활하셨다고 말씀하셨던 것이 아니라 보여주셨으며 그 보여주심으로 초대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처럼 다른사람을 위해 상처를 낼 수 있는 사람만이 부활을 체험할 수 있다는겁니다. 그러나 우린 십자가 없는 부활을 <그낭 믿습니다.>라고 하면서 십자가의 사건을 먼 과거로 묻어 버리며 살려고 합니다. 여러분 천당 갈 마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십자가가 없는 천당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삶 그걸 통해서 우린 부활을 체험합니다. 십자가 없는 천당이란 공상이며 상상의 세계입니다.
부활의 빛이 발한다는 것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을 보며, 우린 부활을 믿는겁니다. 처참하게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을 보면서 영원한 생명을 보게 되었음을 믿는 겁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내가 죽은 다음에 살아날 것인가 아닌가 하는 이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주력해야 할 일들은 정말 다른 사람의 상처를 매만지고,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하는 삶을 살 때 내 몸에서 부활의 빛이 발할 것이란거죠.
부활절에 우리는 초를 밝힙니다. 그 초가 어떻습니까? 소금이 녹는것과 똑같은 원리입니다. 초가 타면서 빛을 발합니다. 타는 것은아픔입니다. 내가 아프지 않으려고 타지 않으려고 한다면 빛도 발하지 않습니다, 어머니가 자신의 고통을 조금도 당하지 않으려고 한다면 사랑의 빛을 발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빛이며 소금입니다. 또 성체성사의 빵입니다. 쪼개지고 희생시키고 녹고 사라지는 그곳에 영원한 생명이 깃듭니다. 부활도 그렇게 바라봐야 합니다.
(2016.4.13 저녁 9시23분 강의종료)
* 이후 몇 차례의 질의응답이 있었으나 기록하지 않음
위 기록은 이제민 에드워드 신부님의 말씀을 편집 정리한 것으로, 실제 말씀과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하느님 자비 복음의 종 선교회 열린학교 (2016.4.13) 이제민 에드워드 신부 초청 특강 @ 전민동성당
사진출처. 하느님 자비 복음의 종 선교회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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