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축일

2013년 12월 29일 만수리공소에서 사랑하는 교우님들의 가정에 보내는 이야기

만수리 공소 윤종관 신부


저는 가정을 과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과일 먹고 나서 그 씨를 버리지 맙시다!



주님의 성탄 대축일을 지낸 우리는 오늘 그 강생하신 주님께서 이루신 나자렛의 가난하고 거룩한 가정을 경축합니다. ‘성탄 대축일을 지내고나서 그에 따라오는 주일에 우리는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즉 나자렛의 거룩한 주님 가정을 경축합니다. 주님의 성탄과 더불어 주님의 가난한 가정을 경축하는 것은 우리 신앙인의 의식으로 아주 자연스런 일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우리의 각 가정을 은총으로 채워주시기를 오늘 성가정의 주인공이신 아기 예수님께 기도합니다.


저는 사제로서 우리 모든 그리스도 신자들의 가정과 그리고 세상의 모든 가정을 위해서 기도하면서 모든 집안의 가족들이 자기 가정을 마치 향기 나는 하나의 작은 과일처럼 생각하자고 말하고 싶습니다. 가정을 작은 과일처럼 생각하자면서 제가 특별히 좋아하는 과일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봅니다.


과일은 어느 것이든 다 좋아합니다만, 저는 살구와 매실, 그리고 복숭아를 특히 좋아합니다.


십 여년 전에 허준이라는 TV 드라마를 아마 모든 국민이 보았을 것입니다. 그 드라마 덕분으로 우리 국민들이 매실에 대하여 폭발적으로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평이 있습니다. 몸에 좋은 것이라면서 모두들 매실 음료를 찾더니, 최근에는 산 복숭아의 풋열매가 더 좋은 거라면서 늦은 봄의 산을 헤짚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드라마 허준을 시청하지 않았습니다만, 사실 그 드라마 방영보다 오래 전부터 저는 매실의 좋은 점에 대한 전도사(?) 같은 홍보를 하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복숭아 풋과실을 술에 담가 즐기기도 했습니다. 갖가지 상표의 과일 음료 이전에 저는 우리 조상들이 여름에 갈증 풀기 위해서 만들어 마시던 전통적인 매실 음료 제조법에 대해서도 교우님들께 많이도 홍보했었습니다.


제가 성지를 가꾸기 시작하던 초기의 해미 성지에 매실 나무 묘목을 심기도 했고, 전임지 성당마다 매실과 살구 묘목을 부지런히 심었습니다. 그리고 여기 만수리 공소에 와서 살면서 하부내포 지역의 성지를 발굴하는 가운데 도앙골에 산복사 나무(속칭 개복숭아 나무)를 많이 심었습니다. ‘도앙골이란, 도원곡(桃園谷) 혹은 도화곡(桃花谷) 즉 복숭아가 많은 골짜기라는 뜻의 계곡 명칭을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 합니다. 실제로 도앙골은 봄철에 골짜기에 산복사 꽃이 가득 핍니다.


저는 과일을 먹게 되면 그 과일의 씨를 버리기가 죄스럽습니다. 그 씨를 발아시킬 영양분으로 과일육질이 싸여있는데, 그걸 사람들은 먹어치우고 씨를 아무렇게나 버립니다. 저는 과일을 먹고 나서 그 씨에게 미안한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그걸 모아두었다가 어디 심을 만한 곳에 심는 버릇이 있습니다. 전에 백두대간을 구간종주하면서 배낭에 넣어가지고 간 복숭아나 자두를 먹고 나서는 등산로 주변에 그 씨를 심어주곤 했습니다. 제가 걷던 백두대간의 어딘가에는 아마 그 복숭아와 자두의 씨가 발아하여 15년 정도 지난 지금 산에 꽃이 피는 나무로 자랐을 것이라는 상상을 하면 혼자 생각으로 즐겁습니다


그렇듯이 지금도 그런 과일을 먹으면 그 씨를 여기저기에 심어둡니다. 복숭아를 먹고 그렇게 산에 심으면 아마 산복사가 되어 봄에 꽃을 피우리라 믿고 그렇게 합니다. 저 나름으로 나만 아는 작은 희망을 여기저기에 간직해둔다고 생각하여 마음이 즐거워집니다. 그런 식으로 제가 지나온 성당들엔 그 나무들이 자라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그 나무들이 봄에 서로 앞 다투어 꽃을 피우게 될 것을 상상하면, 그곳을 다시 가 볼 수 없다 하더라도 봄마다 일찍 피는 매화와 살구꽃 복숭아꽃을 바라볼 사람들을 상상해보면 너무너무 흐뭇하지요. 그런 상상으로 즐거워지는 까닭은 매화와 살구꽃과 복숭아꽃이 우리네 한국인들의 정서로는 벚꽃 보다 훨씬 친근한 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과일꽃들에 대한 이야기를 여기서는 길게 할 수 없군요.


오늘 그런 과일과 꽃 이야기를 하면서, 사실은 그 씨에 대하여 강조하여 성가정 축일의 복음 내용을 묵상하고 싶습니다. 꽃 피우고 열매를 맺는 큰 나무로 자랄 생명의 씨앗! 그것을 묵상하고 싶습니다. 생명을 품고 있는 과일과 같은 것이 나자렛 예수님의 가정이고 우리의 가정임을 말하고 싶은 까닭입니다. 그런 과일들은 우리에게 향기로운 먹이가 되어 영양을 주고 씨를 던져 땅에 생명을 싹틔우고 큰 나무되어 꽃이 피게 하고는 또 열매를 맺는 위대함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 가정들이 또한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 과일들은 항상 공중에서 위태롭게 영글고 익습니다. 위험 중에 생명을 품는 것입니다. 우리네 가정들 또한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오늘 마태오 복음서는 성가정이 휩싸인 위기 상황을 전해주고 있나 봅니다. 이 성가정의 중심이신 아기 예수님의 목숨이 위태로워집니다. 세상 권력이 증오의 세찬 바람으로 아기 예수님과 인근의 어린 목숨들을 쓸어버리려 합니다(마태 2, 1318 참조). 그래서 성가정은 비극적 유랑의 길을 떠나 이집트 사막의 모래바람 속에 이주하여 숨어살게 됩니다. 그 이집트는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들이 노예사리를 하던 곳, 즉 치욕의 땅입니다. 그러한 치욕의 땅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던 이 성가정의 운명은 몇 년 후 본국으로 돌아와서도 마음 놓고 드러난 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멸시받는 사람들이나 사는 갈릴래아 지방으로 가서 가난한 나자렛 사람들 속에 섞여 사는 가정이 됩니다. 그곳에서 뭐 별다른 인물이 나오랴 싶은 그 가난뱅이들의 오지 마을은 그래서 기껏 나자렛 사람’(마태 2, 23 참조)이라고 예수님을 일컫게 되는 그분의 고향이 됩니다. 임금이 태어난다는 예언의 땅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분이 이제는 못난이들의 마을에 묻혀버린 가정에서 무명의 소년으로 성장하는 신세가 됩니다. 작은 씨앗처럼 말입니다.


이러한 오늘 복음 성경(마태 2, 1323)의 소개와 같이, 세상에 오신 하느님은 그 위대함을 이 세상의 가장 잊히어진 곳에 감추시는 분입니다. 즉 우리들이 사는 이 사회의 변두리에 숨어서 가장 버림받은 사람들 가운데 계시고자 하시는 분이 우리의 구세주입니다.


그리고 더욱 그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서도 멸시를 받는 가정의 아들로 성장하는 소년이 그분이셨습니다. 왜냐면 본래 그 나자렛 마을의 처녀(루카 1, 2627 참조)였던 마리아가 요셉과 함께 호적 신고하러 떠났다가(루카 2, 17 참조), 객지에서 낳은 어린애를 몇 년 만에 데리고 돌아와 사는 것을 동네 사람들이 고운 눈으로 보았을 리 만무하지요. 그런 모습으로 피난 생활에서 돌아온 그 가정을 나자렛 마을 사람들 어느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보잘것없는 가정에서 성장하는 그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는 삶을 사시는 분이십니다. 땅에 묻힌 씨앗처럼 말입니다.


우리의 구세주께서 그렇게 멸시받는 마을의 가장 가난하고 알려지지 않은 가정의 아들이라는 점이 오늘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가정을 가장 본질적인 면에서부터 생각하게 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이 세상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가정 안에 계시다는 점을 생각해야겠다는 것입니다. 말을 바꿔 말하자면,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가정의 본질적 모습이 무엇인가 생각해보자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가정이란 우선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가정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아드님께서는 고관대작의 가정이나 부잣집에서 탄생하여 성장하신 분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그런 상류층의 가정은 사람들이 부러워하며 바라보는 가정이기 때문에 세상에 다 알려지기 마련입니다.

우리 한번 세상의 유명한 가정을 상상해봅시다. 대통령의 가정, 대재벌의 가정, 어느 유명한 연예인의 가정, 또는 우리 지역 사회에서 내로라하는 가정을 상상해보세요. 그런 가정에 대해서는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진 것이 많습니다. 그래서 그런 유명한 가정의 가족들은 개인적 삶이란 것이 세상의 시선에 다분히 노출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던지는 시선의 침범을 당하는 가정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가정이 아니고 가장 알려지지 않은 가정을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택하셔서 당신께서 세상에서 하시고자 하는 일을 묵묵히 시작하셨음을 우리는 오늘 성가정 축일에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게 알려지지 않고 멸시받으며 가난한 가정에서 세상을 구원하실 소년이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성장하십니다. 이 점이 곧 우리가 오늘 우리의 가정들을 보면서 깨우쳐야 할 나자렛 성가정의 위대한 점인 것입니다. 보잘것없는 그 가정에서 세상을 바꿀 분(구세주)의 탄생과 성장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구세주의 나자렛 성가정을 보면서 우리의 가정도 그러한 위대함을 지녀야 할 것입니다.

가정이란 세상이 알아주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정이란 작고 은밀한 처소입니다. 그 작고 드러나지 않은 가정에 세상 변혁의 위대한 씨가 감춰져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가정이란 그렇듯 생명을 씨앗처럼 간직한 작은 과일과 같습니다. 생명을 품기 위해 한 알의 열매로 형성된 것이 가정입니다. 그러한 가정이 세상 권력의 증오로부터 보호받아야 하겠기에 하느님께서는 이집트의 사막에 그리고 멸시받는 마을에 감춰두신 것입니다. 그 감춰진 가정 속에 더 은밀히 생명의 구세주가 계셨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 가정들이 세상의 평판에 휘둘려서야 되겠는가 우리 자신들에게 물어봐야 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우러름을 받을 목적이 우리 가정을 이룬 이유일 수 있습니까?

우리 아이들 즉 우리 가정의 생명을 세상 풍조로 깎고 다듬어서야 되겠습니까?

사실, 부부의 비밀스런(공개할 수 없는) 사랑으로 시작된 것이 가정이듯이, 우리네 가정은 국가로부터도 사회로부터도 최우선적으로 가족들만의 은밀한 행복이 보장되어야 하고, 그래서 가정이 낳고 키우는 생명(자녀들)을 책임지고 보호할 수 있도록 세상은 울타리를 쳐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큰 외침으로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 세상한테 침해받는 가정의 실상을 대변해서 말입니다어째서 가정일보다 사회 활동이 더 중요한가무엇 때문에 가정에서보다 세상에서 더 인정받으려 하는가무슨 목적으로 남녀는 부부로 만났기에 각자는 가정에 얽매이면 세상에서 쳐진다고 생각하는가아빠 엄마는 자기 자녀를 가정교육보다 학교(학원)교육과 사회(가정밖매체)교육에다가만 내맡기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렇다면, 자녀는 왜 낳았는가! 한 마디로 물어봅시다! “가정이란?” 필요 없는 겁니까왜 이런 심한 말을 하느냐구요? 사회만 있고 가정은 없어도 된다이란 ‘house’일뿐, ‘family’가 아니라고과일을 먹고 그 씨를 아무렇게나 버리듯이, 가정을 소홀히 하고 아이들을 아무렇게나 세상에 내보내도 되는 것입니까? 그 씨를 버리지 말아야지요!


그래서 오늘날 사람들은 가정을 하숙집처럼 잠자러 들어오고 밥 먹고 나가는 곳으로만 여기고 있나 봅니다. 과일이 바람에 떨어져 버렸지요하느님께서는 성가정 지키기 위해 비겁하실(?) 정도로 피난시키셨는데! 세속 권력의 폭풍에 그 과일 떨어질까 겁이 나셔서그런 비겁하신(?) 하느님께 아쉬운 것 없어서, 에서는 가족들이 모여 하느님께 기도하는 시간 없다나요!?!? 그리고가족들 사이에 하루에 한 번만이라도 서로를 찾고 부를 수 있다면그게 얼마나 큰 행복인지, 아래 웹 주소를 클맄해서 느껴봅시다.


http://videofarm.daum.net/controller/video/viewer/Video.html?vid=v2e3chvGuAAGKGJ0QtkGkJK&play_loc=undefined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65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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