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의 성모마리아 대축일, 세계평화의 날 

2014년 1월 1일 10시 만수리 공소 윤종관 신부


사람들 사이에 사람이 보이지 않아... 

짐승들 사이에 버려진 하느님의 아들


새로운 한 해를 다시 시작하는 오늘 우리는 성탄 축제의 여드레 되는 성탄 8<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을 맞이합니다. 이러한 오늘 또한 우리 교회는 바오로 6세 교황님께서 1968년에 정하신 바에 따라 <세계 평화의 날>이라 일컬으면서 이 새해 첫날을 맞이합니다.


시간으로는 24시간 전이라 할 수 있는 어제 한 해를 마감했습니다. 지난 한 해를 우리 동양권에서는 계사년(癸巳年)이라 불렀습니다. 그런데 하루가 지난 오늘은 갑오년(甲午年)이라 일컬으면서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합니다. 60년 마다 같은 이름의 해를 맞이하는 우리 동양권의 정서는 어쩌면 시간(年代)을 순환적인 것으로 인식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같은 이름의 해가 60년 만에 돌아오면 그 옛적에 대한 역사적 성찰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혹여 그 옛적의 좋지 않았던 일이 회상되면 어떤 금기 사항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리고 앞날의 안전을 위해서 그 금기(터부)에 대한 미신적 대처로 점쟁이를 찾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한 태도는 다분히 운명론적(결정론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상 과거는 반복되어지는 것도, 반복되어서도 아니 되는 것입니다. 앞으로 나아갈 길에 있어서는 나 자신과 우리 모두의 의지에 따라 그 방향이 좌우되는 것입니다.


물론 과거라는 것이 업보처럼 우리를 괴롭히거나, 또는 아름다운 추억처럼 우리의 힘이 되어줄 수 있습니다. 우리를 괴롭히는 업보라면 과감히 단절해야 합니다. 그러나 아름다운 추억이라면 그것을 거울삼아 미래의 희망으로 연계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새해맞이 사자성어로 교수신문이 이번에 선택한 전미개오’(轉迷開悟)라는 말은 우리 스스로가 앞날에 대한 주도력을 지니고 있음을 깨우치고 있습니다. 미혹을 떨쳐내고 깨우침에 이르라는 뜻이랍니다. 불교의 용어랍니다만, 지난 2013년 내내 시끄럽던 정치적 사안들을 척결하고 우리 모두가 ! 이게 진짜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어서, 들끓었던 의혹들을 걷어내어 2014년은 거짓이 아닌 진실을 찾는 한 해가 되기를 소망해야겠습니다.


어제까지의 지난해는 뱀띠의 해라는 계사년이었지요. 뱀은 교활함의 상징을 지녀 눈에 뜨이면 섬뜩하지요. 거짓은 누구나 싫어합니다. 그러나 갑오년이라는 말띠의 해인 새해는 청마(靑馬)의 해랍니다. 신선한 기상으로 희망을 싣고 달려오는 푸른 말의 해가 시작되었답니다.


이러한 새해맞이로 교우님들께 건네고 싶은 덕담이라면 저는 기꺼이 생각에 있어 깨달음이 있어야 삶에 힘을 얻는다.’라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깨달음이란 무엇입니까? 그건 옳고 그름을 확실히 앎을 뜻합니다. 사람이 거짓에 둘러싸여 있으면 행동에 있어 떳떳하지 못합니다. 늘 참됨을 찾는 사람은 행동에 있어서 당당합니다. 진실을 실천하는 사람은 늘 힘이 있습니다.


오늘 새해의 첫날을 세계평화의 날이라 하는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의 새로운 한 해는 우리 모두(세계)가 평화롭게 사는 해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새해 첫날은 그러한 평화를 기원하는 날입니다. 우리의 지난 삶에서 그러한 평화를 이룩하지 못했다면 그 까닭은 무엇이었겠습니까? 그것은 사람들 사이에 서로가 거짓으로 대했기 때문입니다. 서로의 거짓 때문에 분란이 일어납니다. “네가 나를 속이고 있지 않으냐?”라고 묻는 순간 싸움이 일어납니다. 서로의 사이에 진실만이 통한다면 싸울 이유가 없지요. 권력(정권)을 거머쥔 사람들이 백성 앞에 거짓을 내세워 힘을 쓴다면 누가 따르겠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진실 즉 참됨을 어디서 찾아야겠습니까? 참됨이라는 것은 우리 자신의 깊은 내면에 있습니다. 밖에서, 즉 모두가 다른 사람에게서 참됨을 찾으려 한다면 그 자체로 자신을 거짓됨의 주인공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은 나 자신의 마음속에서 볼 수 있습니다. 정신병자가 아니고서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 마음에 무엇이 있는지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모른다면 사람이 아니지요.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올바른 생각을 요구한다면, 사람 사이에 어떻게 믿고 살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 사회의 현실은 힘 있는 사람들 치고 다른 사람들에게 생각을 강요하는 판국의 정치상황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약한 사람들의 입장을 대변하면 곧 빨갱이혹은 종북주의자라고 몰아세웁니다. 그러면서 약한 국민들을 위한 정치를 하겠다는 말을 한다면 진실일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 모두는 자기 자신 속의 마음을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자기가 스스로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새해 첫날을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로 경축하면서 복음 말씀 가운데 다음의 구절에 각별히 묵상의 초점을 맞추어야겠습니다.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루카 2, 19)


오늘의 이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이란 예수 성탄 대축일강생 신비를 만 1주간 축제로 고백하는 날입니다. 그것은 곧, 인간이 되어 오신 하느님께서 분명코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 오셨음을 한 여인 마리아의 아들로 태어났음에서 깨닫는 강생 신비에 대한 고백의 축제일인 것입니다. 그것은 강생 신비에 대한 인간들의 인류사적 확인인 것입니다. 그러한 강생 신비의 역사적 확신을 우리가 한해의 시작으로 그 새해 첫날에 고백한다는 것은 참으로 의미가 있습니다. 강생이란 우리 인간의 세상과 인간의 시간에 하느님께서 친히 들어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의 세상에 오셨다는 것은 우리의 살아가는 시간 속에 그분이 들어오신 분이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살아가신다는 것입니다. 그 사실에 대한 깨달음을 마리아가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는 오늘의 복음 말씀을 우리 자신에게 해당시켜 묵상하면서 새해를 시작해야겠습니다. 우리의 한해가 우리와 함께 살아가시는 하느님과의 한해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곧 강생의 신비를 우리의 것으로 만드는 일입니다.

그러한 강생 신비를 이렇게 우리가 한해라는 우리 인간의 시간매듭과 더불어 고백할 수 있다는 것이 결코 우연의 것이 아니라는 점을 저는 강조하고 싶습니다. 2천 년 전의 유다 지방에서 추위를 피할 수 있는 어느 한 곳 어느 한 사람의 처소마저도 얻을 수 없이 베들레헴 동리 밖 짐승들의 마구간 구유에 눕혀진 하느님 아들의 모습이 곧 오늘날에도 우리들 사이에 발견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사회의 많은 사람들, 우리가 한 백성이라고 일컫는 이 나라의 많은 국민들, 그리고 우리가 한 민족이라고 부르는 북한의 백성이 우리들의 관심 밖에 잊히어진 사람들이라면, 저 마구간에 눕혀진 하느님의 아들처럼 사람들 사이에서 버려지고 짐승들 사이에다 던져져있는 존재들이라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관심에서 멀리 버려진 사람들과 우리 자신은 어떤 사이인가에 대해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서로 마음 아파할 줄을 모르는 사이로 전락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 사이에 딱한 사정을 마음 아파하지 못할 정도로 비정하게 되었다면 그게 어찌 사람들 사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어느 노숙자가 길에서 얼어 죽었다는 사실보다는 오직 주가가 1-2포인트 떨어졌다는 것이 더 큰 뉴스로 보도되는 우리의 세상이라고 교황님은 개탄하십니다. 그렇듯 비정한 오늘의 세상은 그게 모두 잘못 된 경제 시스템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라고 교황님은 지적하십니다. 사람들 사이에 진짜 사람은 보이지 않을 지경이 된 우리의 세상임을 뜻하는 말씀입니다. 사람들 사이에 사람이 살고 있지 않는 듯합니다. 사람들 사이에 돈만 보입니다. 그래서 모든 정치적 행위가 오로지 경제적 이유를 들어 집중된 현실을 교황님께서는 이 시대의 새로운 독재 체제라고 일컬으면서 그게 바로 오늘의 자본주의라고 꼬집어 말씀하십니다. 이 시대 그 모든 것의 중심에 이 우상처럼 군림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현실에서 모든 정치는 결국 사람을 보지 않고 자본 중심의 경제 시스템에 그 주장만이 있을 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람답게 사람을 볼 줄 아는 사람의 마음을 되찾아야 합니다. 그래서 짐승들 사이에 던져져 짐승들의 먹이 그릇인 구유에 눕혀있는 하느님의 아들을 보아야 합니다. 그 하느님의 아들이 곧 아무런 힘도 없는 사람으로 오신 분임을 마구간에서 마리아가 확인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무런 힘도 없는 가난한 목동들과 함께 그 아기의 현실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고 오늘 복음 성경이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마음속에 그 깨달음을 조용히 전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런 깨달음으로써 이 새해를 시작해야겠습니다.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66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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