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세례축일
2014년 1월 12일 9시 @ 도화담 공소
만수리 공소 윤종관 신부
청와대의 전화를 받는다면
"예, 제가 여기 있습니다."하고 대답할까?
정부에서 장관직이나 고위 공직인사 발표가 있을 때마다 이러쿵저러쿵 말들이 많지요. 이즈음에 서울 대교구의 보좌주교 2명이 임명되었다는 뉴스도 있었지요. 새로 장관이 임명되었다는 정부 발표나 또는 우리 교회에서 어느 주교가 입명되었다는 뉴스를 듣게 되면 저는 야릇한 생각을 한번 쯤 해봅니다. 그러한 영예로운 임명을 받게 된 인사들은 아마 사전에 그 수락 여부를 묻는 전갈을 먼저 받았을 것인데, 그 때 뭐라고 대답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는 것입니다. 아마 각양각색의 대답을 했을 것으로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겠는데, 결국 그 임명을 수락했기에 확정 발표되었을 것입니다.
하늘이 쪼개지는 일이 있을지언정 저에게 장관이나 주교 임명의 전갈이 올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만, 천만분지 일의 확률로라도 혹 그런 청와대의 전갈이나 주교 임명을 받는다면 글쎄요…, ‘웬 떡이냐’하는 식으로 저도 덥석 그걸 수락할 지도 모를 일이지요. 왜냐면, 영예로운 일이니까요! 고위직에 취임한 사람들은 모두 청와대의 전화가 걸려왔을 때 기다렸다는 듯이 즉각 “예!” 하고 대답했을 것으로 추측 됩니다.
저의 절친한 친구 한 사람은 행정 관료로서 정부의 모 부서 차관까지 역임하였습니다. 지금의 대통령보다 3대 전의 대통령으로 정권이 바뀌던 때였는데, 저의 그 친구는 정권 바뀌는 바람에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그 새로운 집권당의 정치인이 그 장관 자리를 차지하는 바람에 저의 그 친구는 차관 직을 끝으로 퇴임하고 말았습니다. 그 후로 그 친구는 혹 개각(改閣)의 징후가 느껴질 때마다 혹 청와대에서 전화가 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나도록 자기를 장관으로 불러주지 않자 정당에 가입하고 고향에서 국회의원 출마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그 지방의 유리한 정당공천을 받지 못하여 다른 정당으로 출마했지만 낙선하고 말았습니다. 그때 저는 그 친구에게 충고했습니다. 장관 자리란 정권을 차지한 사람들이 나눠먹는 자리 아니냐면서, 그런 정치적 장관직을 노리는 것보다는 오래도록 공직자로서 쌓아온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사회 저변의 작은 봉사를 하는 새로운 길을 간다면 깨끗하고 아름다운 모습일 것이라는 저의 충고였습니다. 그러나 정치 집단에 선을 대보려는 마음을 버리지 못한다는 소식이 들리더니 지금은 어디서 무얼 하며 사는지 모르겠습니다.
국무총리나 장관으로 임명 받은 사람들이 국회 청문회나 여론의 곤혹스런 검증 과정에서 부적격 시비에 휘말리면서도 그 자리에 앉으려고 추접스럽게 안간힘을 쓰는 모습들을 우리는 수없이 보아왔지요. 교회에서 주교 임명을 받은 분들의 소감 피력의 경우에도 일반적으로 무겁고 두려운 십자가를 지게 되었노라 하면서 덧붙이기를 그게 하느님의 뜻이기에 받아드렸노라고 말합니다.
정부 각료나 교회 고위직에 임명 받은 분들이 대개는 그렇게 자신의 그 불림 받은 사실에 대하여 형식적(?) 겸양을 둘러댑니다만, 정작 그 직위에 올라서서는 자신이야말로 그에 가장 능력을 갖춘 사람인 듯이 처신합니다. 그래서 그 임명 전갈을 받던 순간의 공개되지 않은 반응에 대하여 호기심 어린 추정을 하게 됩니다. 부름에 대한 그 응답이 과연 어떤 것이었나 하는 것이 몹시 궁금한 것입니다.
그러데 저는 그러한 부름에 대하여 공개 석상에서 당당하게 “예, 저 여기 있습니다.” 하고 즉각적인 대답을 한 적이 있습니다. 마치 불러주기를 오랫동안 기다렸다는 듯이 큰 목소리로 대답한 것이었지요. 더욱 그 부르심을 받을만한 자격을 제가 지니고 있다는 식으로 벌떡 일어나서 대답한 것이었습니다. 사제서품식에서 그렇게 “예, 저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한 것입니다. 사제서품식에서 후보자를 호명하면 옛적에는 라틴어로 “Adsum.”(앗쑴) 하고 대답하는 것이 서품식 전례의 순서였습니다. “Yes, I'm here.” 라는 말로써 “나는 사제될 자격을 갖추었습니다.” 라는 뜻이라 할 수 있겠지요.
대통령으로부터 국무총리나 장관 등 고위직에 임명 받았던 사람들이 국회 청문회에서 결격 사유가 드러나고 낙마한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아마 그런 사람들은 청와대의 전화를 받던 순간에 “예, 저 여기 있습니다.” 하고 즉각적인 대답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저는 해봅니다. 자격 시비로 사회 여론의 비난을 받는 가운데서도 그 떳떳치 못한 사실을 숨기기에 급급하면서 덥석 취임했다가 며칠 만에 결국 창피한 모습으로 물러나며 국민들의 마음에 상처만 남겨놓은 사람들도 있었는데, 더욱 그 자신이 부끄러워 할 줄도 모르는 사람이었다는 점 그것이 우리네 이 시대의 평범한 국민들의 마음을 화나게 하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더욱 이 시대에 어른 노릇 해야 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젊은이들 앞에 얼굴을 들지 못하게 만든 꼴이 아닌가 하는 슬픈 생각이 드는 까닭은, 가르치는 직위에 오래도록 몸담아온 교수 출신의 사람들이 그렇게 두꺼운 얼굴을 지니고 있다는 점인 것입니다.
10여 년 전 TV의 “투명한 사회, 부패한 선진국은 없다.”(‘대한민국 혁신 프로젝트’)라는 프로에서 청소년들의 순박한 눈에 비친 사회 부패상의 부끄러운 현실지적을 듣게 되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과연 이 시대에 이 사회에서 어른 노릇을 하고 있는 사람 중의 한사람으로서 저는 뭐라 말할 수 있는가 하는 부끄러운 생각을 했던 기억입니다. 그러나 10년이 지났어도 오늘의 현실은 더욱 추악한 어른들의 시대인 것 같습니다. 국민의 선택을 받았노라 자처하면서 나선 대통령이나 집권당 실력자들일수록 더욱 추악한 거짓말을 일삼고 있습니다. 날이 갈수록 그 추악함은 짙어갑니다. 권력에 맛을 들여 나이 먹은 사람들일수록 더 심합니다. 늙은 사람들일수록 인간으로서 더욱 본받을 것이 없는 모습들인 것 같습니다. 부끄러워 할 줄도 모르는 늙은이들이 어른으로 자처하니 더욱 추하기만 합니다. ‘노년은 곧 지혜이다’라는 라틴어 격언(Senectus sapientia est)이 있습니다만, 오늘의 우리 한국사회에서는 ‘<늙음>은 곧 <헐음>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 지경입니다.
젊었던 제가 사제 수품에 앞서 호명을 받고 “Adsum(예, 저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여 사제로서의 길을 걸어왔지만, 늙어가는 입장에서 과연 그러한 대답을 할 만한 자격을 지금 지니고 있는가 하는 반성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늙어가면서 저의 삶이 헐어가는 것은 아닌지…, 오늘 ‘주님 세례 축일’은 저로 하여금 그러한 반성을 하게 하는 축일이라 생각 됩니다.
사람들의 앞에 나선 사람을 두고 그 자격이 있다는 말은 하늘에서 들려오는 말이어야 합니다. 나 스스로 사람들 앞에 나설 자격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나는 오로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을는지 그것을 두려워하면서 하늘의 뜻을 살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세례를 받은 모습이 바로 그러한 자세였습니다. 스스로 죄인들의 대열에 들어가 죄의 씻음을 받는 자세가 그분의 태도였습니다.
그분은 당신께 세례를 받아야 할 처지라는 것을 실토하는 요한에게 오히려 세례를 신청하였습니다(마태 3, 13∼14 참조). 그분이 그렇게 하신 까닭은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마태 3, 15) 하기 때문에 죄인의 모습으로 물에 들어가신 것이었습니다.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할 일”이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이제 그분이 걸어가실 고난의 길을 통하여 그 일이 시작 될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얻을 영예의 길이 아니라, 몸을 바치고서도 돌아오는 것이란 배신뿐이며, 그 배척을 당하며 걸어가서 결국 죽음에 처해짐으로써 이루어질 하느님의 뜻인 것입니다.
오늘 그러한 분의 걸어가실 고난의 길목에 이제 들어서는 출사표가 곧 세례인 것입니다. 복음 성경은 본래 예수님의 죽으신 과정을 우리에게 알려주기 위해서 편집된 책입니다. 그러한 점을 오늘 우리가 읽는 제2독서의 사도행전에서 베드로 사도가 증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요한이 세례를 베풀던 때 이후 예수님께 일어났던 것에 대한 선포가 곧 복음인 것입니다(사도 10, 37 참조).
그러한 의도로 원복음서는 예수님의 수난기를 엮어 전해주는 것으로서 그분의 부활사화로 그 결론을 맺는 것일 뿐이었는데, 나중에 그분의 출생에 관해서도 알고 싶어 하는 신자들의 요구에 의하여 그분의 탄생설화와 유년설화가 간단하게 복음서의 앞에 붙여졌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서의 본래적 주제와 관심사는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에 관한 선포일 뿐입니다. 그러한 수난에로 향하는 그분의 발걸음이 어디서부터 시작 되었는가를 말해주는 것이 오늘 우리가 읽는 그분의 세례 기사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난 2주간 동안 지낸 성탄절의 복음 기사는 원복음보다 나중에 덧붙여진 것이라 할 수 있고, 오늘 우리가 보는 예수님의 세례 사건으로부터 복음서는 예수님의 삶을 본격적으로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전례력은 오늘 ‘주님 세례 축일’을 지내면서 연중 시기를 시작합니다. 그러한 오늘 축일의 메시지는 우리 자신들도 이 세상 죄악의 현실 속을 걸어가면서 예수님의 길을 함께 가라고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분처럼 죄에 죽고 하늘의 기운인 성령의 인도로 살도록 세례를 받은 사실이 곧 예수님과 공동의 길을 가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 길은 오늘 죄인들 속에 묻혀 세례를 받으신 그분께 하늘이 열려 성령이 내려오셨듯이(마태 3, 16 참조), 세례로써 성령을 받고 걸어가는 우리의 길인 것입니다.
그분이 걸어가시는 길은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아들”(마태 3, 17)이자 ‘하느님께서 선택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정의(공정)를 펼칠’(오늘의 제1독서 이사 42, 1 참조) 길인 것입니다. 그 길은, 멸시를 받으면서도 소리치지 않고, 고독의 속내 사정을 밖에다 대고 호소하지 않으면서, 삶의 좌표가 꺾이고 흔들린다 하더라도 가는 길을 포기하지 않으며, 불의와 세상의 썩은 명리에 합류하지 않고 끝까지 성실하고 바르게 가야 할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길인 것입니다(이사 42, 2∼4 참조). 옛적의 우리 신앙 선조 순교자들께서 또한 그 길을 갔습니다. 그렇듯이 우리가 우리의 세례 받은 사실을 되새기면서 예수님과 함께 가는 길을 다짐하는 날이 오늘 ‘주님 세례 축일’입니다.
그래서 이제 세례를 받고 고난의 길에 들어서는 예수님과 함께 갈 다짐으로 “예, 제가 여기 있습니다.”하고 그분께 말씀드릴 수 있는 우리가 진정 그러한 다짐으로 성실히 걸어가는 길에 새로운 세상의 정의와 평화의 빛이 비추일 것입니다.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68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년 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년 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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