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5주일
2014년 7월 13일 9시 도화담공소
대한민국 수호를 위해 복음을 교회울타리 안에 가두어두자?
나는 하늘나라 신비를 알아듣는가?
오늘 연중 제15주일부터 다음주일과 또 그 다음주일인 연중 제17주일까지 3주간 동안 마태오복음서 13장에 따라 우리는 예수님의 유명한 하느님 나라에 관한 일곱 가지 비유 말씀을 주일복음으로 봉독합니다. 그 일곱 가지 비유 말씀 중에 오늘은 그 첫 번째인 ‘씨 뿌리는 비유’(마태 13, 1∼23)를 봉독하고, 다음 연중 제16주일에는 그 두 번째에서 네 번째까지의 ‘가라지의 비유’와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등 세 가지 비유를 봉독하고(마태 13, 24∼43), 그 다음 연중 제17주일에는 나머지 다섯에서 여섯 일곱 번째의 ‘보물과 진주와 그물의 비유’를 봉독합니다(마태 13, 44∼52).
일곱 가지 비유를 구체적으로 생각해보기 전에 우리는 마태오복음서가 그 13장에 이 유명한 하늘나라 비유 말씀을 수록하고 있는 배경을 먼저 알아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일곱 가지 비유 말씀을 하시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기 위해서 우리가 지난주일 즉 연중 제14주일에 봉독한 마태오복음서 11장 25∼30절의 내용을 회상해야 합니다. 그 예수님 말씀의 요지는, 어린이와 같이 순진한(여린 마음의) 사람만이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그런 말씀을 하셨겠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지난 연중 제11∼13주일에 연이어 봉독했던 마태오복음서 10장의 예수님의 ‘제자 파견 설교’와 더불어 11장과 12장의 내용을 먼저 회상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하늘나라 선포를 위하여 제자들까지 파견하시며 그 선포의 행동 지침을 상세하게 시달하셨습니다. 그렇게 파견된 제자들이 복음 선포를 하는데도 당시 기득권층이었던 바리사이 등 세상 사람들이 복음을 알아듣기는커녕 배척하기만 합니다(마태 11장과 12장 전체 내용 참조).
이러한 배경에서 예수님께서는 배를 타고 다른 곳으로 떠나시는 자세로 호숫가의 배에 오르셔서 백사장에 모여온 군중을 향하여 강론을 하시는데 그 내용이 곧 그 유명한 마태오복음서 13장의 하늘나라에 관한 일곱 가지 비유입니다. 기복신앙처럼 기적만을 요구하며 모여 온 사람들에게 수수께끼와도 같은 비유로 말씀하시는 까닭에 대해서는, 오늘 우리가 읽는 ‘씨 뿌리는 비유’의 내용과 그 설명 그리고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오늘의 ‘씨 뿌리는 비유’에서 우리 각자는 어떤 씨앗에 해당되는 입장입니까? 길바닥에 떨어진 씨…?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진 씨…? 가시덤불 속에 떨어진 씨…? 좋은 땅에 떨어진 씨…?
이 네 가지 파종의 경우에서 우리 자신은 어느 경우에 해당되는지요? 이러한 질문에 대답하려면 곤혹스럽습니다. 왜냐면, 이 ‘씨 뿌리는 비유’에서 내세우는 주제가 무엇인가 하는 의심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그런 식으로 씨를 뿌리는 법도 있는가?” 이렇게 반문할 수도 있고, 또 한편 “여러 군데 떨어진 씨들의 운명이 누구의 책임인가?” 하는 항변을 해봄직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의 초점이 무엇이란 말인가 하는 반문이 제기될 수도 있습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태도를 문제 삼자는 것인가? 떨어진 씨앗들의 운명을 알아보자는 것인가? 여기서 가지각색의 토질이 문제라는 말인가? 아니면 거듭된 세 가지 경우의 실패적 파종 후에 성공적 최후 파종을 강조하기 위함인가?
이러한 여러 가지 의아심에 대한 해답은 한 마디로 <하늘나라의 사정>입니다. 그것은 실패 속에서 자라는 하늘나라의 모습인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지방의 농사 방법이 그렇습니다. 오늘날 우리 농촌에서 봄에 먼저 땅을 갈아 거름을 주고 곱게 이랑을 친 다음 씨를 뿌립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서는 10월 말경이나 11월 초순 첫 비가 내릴 때 보리와 밀을 심습니다. 사실 우리나라에서도 밀과 보리의 파종 시기는 늦가을이지요. 이스라엘 지방에서는 봄에 밀과 보리를 수확한 다음에 10월까지 여름의 건기 동안 밭을 묵혀둡니다. 그러면 그 동안에 사람들이나 가축이 밭을 질러 다녀서 길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지방의 밭이란 겉으로는 흙이지만 그 흙 속에는 돌들과 바위 덩이가 대부분을 이루고 있는 박토입니다. 그런데 건기에도 그러한 박토에서 가시 돋친 잡초들이 무성하게 자랍니다. 가시덤불이란 그런 잡초들을 말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 시대 사람들은 먼저 밭갈이해서 잡초를 없애고 흙을 고른 다음 파종하는 게 아니라, 그 반대로 먼저 씨를 뿌린 다음에 밭을 긁어 주어서 씨가 묻히게 하는 파종법을 썼습니다. 이러한 박토의 경작방법으로는 낭비되는 씨앗들이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위와 같은 척박한 토지는 이 세상일 것입니다. 척박한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는 선포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이라는 밭을 갈아엎기 위해서 오시지 않고 이 밭에 하느님 나라의 씨앗을 심으러 오신 분이십니다. 하느님 나라의 씨앗에게 있어서 이 세상이 척박한 토지라는 것은 우리가 앞서 이 마태오복음서의 11∼12장에서 짐작할 수가 있었습니다. 말씀과 기적으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지만 결과는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배척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파견 받아 세상에 나아가서도 몰이해와 배척을 당하리라는 예고 말씀을 그분의 파견 설교에서도 들었습니다. 그렇듯이 오늘 우리 시대의 세상도 우리가 전하는 예수님의 복음에 대해 몰이해와 배척을 합니다.
그러나 이 ‘씨 뿌리는 비유’에서 예수님께서는 거듭되는 실패 속에서 하느님의 나라는 성장한다는 신념과 희망을 전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거듭 될 실패의 불길한 전조를 보면서도 확실한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또한 내다보고 있습니다. 이러한 믿음과 희망을 지니고 있었기에 이 마태오복음이 전해지던 초대교회는 유다인들의 배척을 당하면서도, 그리고 몰이해와 박해와 같은 이 세상의 척박한 현실에 부딪치면서도, 결국에는 풍성한 결실과 같은 하느님 나라의 성공을 내다볼 수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정은 오늘의 세상에 처한 교회 즉 우리들의 현실에서도 똑같이 체험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씨앗에게 세상은 척박한 현실이지만, 그 씨를 뿌리는 장본인이신 하느님께서는 그 보이지 않는 하늘나라의 씨가 그 목적적 결과를 달성하리라고 오늘 제1독서 이사야 예언서를 통해 예고하고 계십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하느님의 의지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 “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그리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 하여,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는 이에게 양식을 준다. 이처럼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이사 55, 10∼11)
이러한 예언의 본의를 확신할 수 있는 우리는 오늘 제2독서 로마서 8장 18절에서 말씀하신 바오로 사도와 같이, “장차 우리에게 계시될 영광에 견주면, 지금 우리 시대에 우리가 겪는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씨 뿌리는 비유’의 내용에 대해서는 마태오복음서 13장 18∼25절을 읽어보면 더 이상의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을 만큼 잘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 친히 자세하게 설명하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에 관하여 다른 사람들에게는 비유로써 말씀하시는 반면 제자들에게만 친히 그 비유에 대한 설명을 해 주신 마태오 복음 13장 10∼17절을 읽어보면 잘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군중과는 달리 제자들에게만 그 자세한 설명을 해주시는 내용을 오늘 우리도 들을 수 있는 입장이어야 합니다. 제가 강론이랍시고 설명을 할 필요가 없지요. 문제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깨달음을 넣어주시고 계실 만큼 우리 자신들이 그분의 제자인가, 이점이 오늘 복음의 주제라는 것입니다. 신앙인인 우리는 이미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터득할 자격이 있는가?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가서 “왜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하고 묻자,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너희에게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마태 13, 10∼11)
여기서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질문해볼 수 있습니다. 하늘나라가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 알아들을 수 있도록 오늘날 누구에게 허락되어있는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허락되어있고 외교인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우리들은 과연 하늘나라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가?
우리 가톨릭교회의 신자라는 분들이 이른바 ‘대수천’이라는 모임으로 활동을 합니다. ‘대한민국 수호 천주교 신자 모임’이라는 활동입니다. 그분들이 정의구현 사제단이나 기타 사회운동하는 신자들을 비난하면서 주장하는 논거는 대충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듣는 복음과 우리가 하는 기도는 교회 안에서만 영위되는 것이어야 하지, 사회를 향하여 혹은 정치권을 향하여 하는 것이어서는 아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의구현 사제단이나 일부 사회참여운동하는 신자들이 복음을 왜곡하고 나라를 위태롭게 하기 때문에 그들을 규탄하자고 나선 분들이 ‘대수천’이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해괴한 주장입니다. 복음을 교회 울타리 안에 가두어두자는 주장이지요. 그래서 길거리에 나가 기도하거나 약한 사람들 편드는 말을 하는 성직자나 신자는 모두 가짜이고 더 나아가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종북 빨갱이라는 것입니다. 복음 실천의 현장을 교회 울타리 안으로만 삼지 않고 세상 전체로 삼는 노력을 그렇게 규탄하는 ‘대수천’의 주장대로라면, ‘하느님 나라’보다는 오로지 ‘대한민국’만을 수호(?)하자는 해괴망측한 억지인 것입니다. 대한민국을 수호하기 위해서 복음을 울타리 안에 가두어두자는 것입니다. 아니 더더욱 복음을 교회 밖 세상에 퍼뜨리는 행위는 대한민국 망칠 종북 빨갱이짓이라는 것입니다.
사실상 복음적 권유의 말에 대해서 딱딱한 길바닥처럼, 돌밭처럼, 가시덤불처럼 세상은 반응을 보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세상에 그래도 귀를 기우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의 마음이 곧 좋은 땅이지요.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씨 뿌리는 사람처럼 미련하게(?) 이곳저곳 가리지 않고 세상에 천지에 복음을 설파해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세상에 하늘나라의 씨앗이 자라게 될 것입니다. 아무리 씨를 뿌려도 길바닥처럼 (보수꼴통?)완고한 마음이나, 돌밭처럼 귀를 기우릴 줄 모르는 마음이나, 가시덤불처럼 갖은 이유로 얽어매려 드는 마음에서는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좋은 땅과 같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마음이 우리의 세상 우리의 대한민국에 훨씬 많습니다. 이러한 마음이란, 예를 들어, 지난 4월의 ‘세월호’ 침몰 사건이후 함께 슬퍼하고 또는 분노할 줄 아는 ‘국민감성’이 그런 마음입니다. 이웃의 불행을 보고 함께 울면서 땅을 치는 사람들이 길바닥이나 돌밭이나 가시덤불 같은 마음의 사람들보다 훨씬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 대한민국이 희망 있는 나라입니다. ‘대수천’만이 대한민국을 지키고 세상을 향상시키는 게 아닙니다. 함께 울 수 있는 여린 마음의 국민이 진정 나라를 수호하는 것이지, 자기들 기득권으로 힘을 써야 나라가 지켜지는 게 아닙니다. 북한이나 남한이나 체제 싸움으로 이기자는 힘의 논리로 사람 사는 세상을 보아서는 아니 됩니다. 오히려 사람 사는 세상이어야 한다면서 보잘 것 없고 약한 사람 하나에게 성실하고자 하는 여린 마음에 복음의 씨앗이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거둘 수 있습니다. 좋은 땅과 같은 그 여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우리 대한민국과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에 가득하기를 바라시는 분이 오늘 씨를 뿌리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렇다면, 나도 그러한 여린 마음의 사람인가? 그래야 예수님의 말씀을 즉 하늘나라의 신비를 알아듣는 제자일 터인데…!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99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년 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년 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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