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주일

2014년 7월 20일 9시 만수리공소


농부처럼 서두르지 않으시는 하느님 

우리는 겨자씨처럼, 그리고 누룩처럼...!

 



우리는 지난주일의 연중 제15주일부터 오늘과 또 다음주일인 연중 제17주일까지 3주간 동안 마태오복음서 13장에 따라 하늘나라에 관한 예수님의 그 유명한 일곱 가지 비유말씀을 주일복음으로 봉독합니다. 그 일곱 가지 비유말씀 중에 그 첫 번째인 ‘씨 뿌리는 비유’(마태 13, 3∼23)를 지난주일 봉독하였고, 오늘 연중 제16주일에는 그 두 번째에서 네 번째까지의 ‘가라지의 비유’와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등 세 가지 비유를 봉독하고(마태 13, 24∼ 43), 다음주일에는 나머지 다섯에서 여섯 일곱 번째의 ‘보물과 진주와 그물의 비유’를 봉독합니다(마태 13, 44∼52).

 

이렇게 마태오복음서 13장에 수록된 일곱 가지 비유말씀을 잘 알아듣기 위해서 이 복음서의 13장 이전에 소개된 앞의 배경을 먼저 지난 주일에 설명했었죠. 그 배경이란, 예수님께서 하늘나라 선포의 말씀을 하시고 많은 기적으로 당신의 권위를 보여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마음을 바꾸지 않고(마태 11, 16∼24 참조), 예수님을 배척하기만 하는 상황인 것입니다(마태 12장 전체 내용 참조).

 

그러한 현실을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오늘 연중 제16주일의 ‘가라지의 비유’와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등(마태 13, 24∼43) 세 가지 비유말씀으로 잘 깨닫게 하여 주십니다. ‘가라지의 비유’(마태 13, 24∼30)를 보면, 하늘나라의 좋은 씨앗이 성장 과정 중인 밭에 원수가 뿌린 가라지가 섞여 자라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나라는 아직 이 세상이라는 밭에서 성장하고 있는 중이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가라지를 뽑아버리려고 서두르시지 않습니다.

 

이것은 선의의 교회 공동체에 합세하지 않는 악의의 신자들이 섞여 있어도 그 사람들을 교회가 스스로 도려내지 못하는 현실과도 같습니다. 이에 대한 판가름은 종말에 가서나 이루어질 것입니다. 실상 교회는 종말론적 실체이면서도 아직 세상의 나그네이기 때문에 결국 주님의 시간인 종말을 향하여 점차적으로 나아가야 하는 운명에 놓여있습니다. 그런 과정 중이라 하더라도 하늘나라의 성장에 어떤 지장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점에 관하여 예수님께서는 다음의 ‘겨자씨의 비유’(마태 13, 31∼32)와 ‘누룩의 비유’(마태 13, 33)로 암시하십니다. 미세한 겨자씨처럼 연약하고, 누룩처럼 보이지 않는 것 같지만, 하늘나라는 결국 엄청난 성공을 거둘 것입니다. 그러한 성공은 지난 주일에 읽었던 ‘씨 뿌리는 비유’(마태 13, 3∼23)로써 잘 예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마침 한국교회의 ‘농민주일’입니다. 지난주일부터 오늘까지 밭에 씨를 뿌리는 비유가 이어지므로 오늘 농민주일에 어울리는 생각을 해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농부의 마음으로 우리 인간 세상을 하느님 나라로 가꾸는 분이 하느님이심을 암시하십니다.

 

농부는 서두르지 않고 기다리면서 자신의 땀을 흘리는 사람입니다. 우리네 한국 사람들의 성격에 대하여 ‘빨리빨리’ 즉 조급증에 빗대서 비웃곤 합니다만, 농부들은 그런 조급증으로 농사를 지을 수는 없습니다. 다 때가 있다는 것을 잘 아는 농부들은 결과에 대하여 서두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서두르지 않는다 해서 때를 놓치면서까지 게으름을 피운다는 뜻이 아닙니다. 농부란 사실 가장 부지런한 사람입니다. 이 뜨거운 여름철의 폭염 아래에서도 농부는 가꾸는 곡식의 성장에 맞추어서 그리고 병충해에 맞서서 구슬땀을 흘립니다. 이 더운 계절을 다른 사람들이 이른바 피서휴가철이라면서 행락 물결로 법석을 떨어도 그에 유혹을 당하지 않고 농민들은 논밭에서 부지런히 땀을 흘리며 일합니다. 그렇게 일하면서도 농부들은 그 농작물들이 공장의 생산품처럼 즉시 결실을 거두기를 기대하지 않습니다. 다 때가 있어서 가을철이 되어야 곡식을 수확하리라는 것을 잘 알면서 뜨거운 여름철의 고통을 감내합니다.

 

농부들이 그리하듯이 하느님께서도 세상에서 하늘나라에 대한 우선 당장의 어떤 결과를 기대하시지 않습니다. 지금의 여름철 생육기간처럼 이 세상은 하늘나라가 조금씩 자라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피서객들의 놀이행각에 마음 흔들리지 않고 땀을 흘리는 농민들의 여름철처럼 우리 또한 고통을 감내하면서 그 하늘나라의 성취를 내다보고 고통과 유혹을 이겨나가야 하는 것이 이 세상의 삶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그러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하느님께서 일궈나가시는 밭의 좋은 씨앗이어야 합니다. 그러한 씨앗은 뜨거운 햇볕을 받아야 잘 자랄 수 있으며, 비바람에 흔들리면서도 그 때문에 충분한 성장력을 발휘하고, 잡초가 함께 자라고 있는 땅을 원망하지 않고 묵묵히 커나가면서 결실의 때를 향해 굳건히 살아남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결실의 때에 가서 거두시는 일은 농부이신 하느님께서 하실 것입니다. 그때에 가서 그분께서는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태워 버리고 밀은 곳간에 모아들이라”(마태 13, 30)고 하실 것입니다. 이렇게 결과적으로 이루어질 하늘나라의 현상은 작은 겨자씨가 자라서 큰 나무가 되는 것(마태 13, 31∼32 참조)과 흡사합니다.

 

지난주간에 우리는 제헌절(7월17일)을 지냈습니다. 헌법이 무엇인가 하고 묻는다면, 저는 헌법이란 마치 누룩과 같은 것이라고 대답하고 싶습니다. 모든 국민의 삶이 인간의 기본권을 그 바탕으로 하여 국체를 형성하고 튼실한 국가를 이루도록 헌법이 제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헌법에서 가장 먼저 선언하는 조항들이 국민의 기본권에 관한 것들입니다. 그 기본권이란 한 마디로 ‘생명권’입니다. 한 사람의 생명, 그것은 국가 체제보다도 앞서 소중한 것입니다. 그래서 헌법은 그 기본권 선언 다음으로 정부 형태를 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권력을 위임 받은 정치권 사람들은 자기 자신들의 권력행사로써 국민의 삶을 좌지우지하려 합니다. 그런 정치권력이야말로 국가라는 공동체 삶의 밭에 엉뚱하게 설치는 가라지 같은 것이지요. 정치권의 잘못에 대하여 국민 기본권에 근거한 저항을 하면 걸핏 ‘종북 빨갱이’라고 몰아대는 사람들이 즉 우리 국가의 가라지들이지요. 어저께에는 무슨 엄마 모임이라는 여자들이 서울 시내 대로에서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을 향하여 막말로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엄마부대’의 부대표라는 직함을 가진 ‘송지현’이라는 여자가 다음과 같이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에게 막말을 퍼부어댔습니다. “듣기 좋은 노래도 세 번이면 지겨운데 석 달이나 시간을 끄니까. (삼 개월이 넘었어.) 우리가 배 타고 놀러 가라 그랬어요? 죽으라 그랬어요?”

 

이런 막말을 퍼부은 송지현 이라는 여자는 자기 아들이 학교 스쿨버스로 등교하다가 사고가 나서 죽었다면 사고 원인을 캐묻지 않겠군요!

 

그리고 엄마부대봉사단 대표 ‘주옥순’이라는 여자는 다음과 같이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을 꾸짖었습니다. “세월호 유가족들 해도 해도 너무 합니다. 유병언 특별법을 마련해서 여러분의 아픔과 고통의 몇 백배 유병언 재산을 몰수해서 여러분들한테 더 많은 이익이 돌아가게 하는 것이 유병언 특별법입니다.”

 

이에 대해서 인터넷 댓글을 올린 사람 중에 ‘사람이 먼저다’라는 필명으로 다음과 같이 항변한 글이 있습니다. “[유병언 재산을 몰수해서 여러분들한테 더 많은 이익이 돌아가게 하는 것이 유병언 특별법입니다] 그래, 니들 보수라고 하는 것들은 생각하는 게 그저 돈, 이익밖에 없지. 천박하고 천박한 것들… 그래서 천민자본주의라는 말이 있는 거다.”

 

저는 인터넷 신문에서 이런 보도를 읽으면서 공포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한국의 국가 사회적 위기에 봉착한 공포감입니다. 수학여행 가던 어린 학생들이건 나이 먹은 행락객이건 간에 대형 여객선 침몰 사고로 수백 명이 수장된 사고를 보고나서 우리들이 이런 식으로 마음을 달리 할 수 있는가? 참으로 무서운 우리 대한민국 사회인 것입니다. 여객선 침몰의 원인 규명을 해야 할 국가의 정부와 국회도 책임회피와 정략 싸움으로 죽은 목숨들에 대한 슬픔마저 상실했습니다. 너무나 확실한 현실은, 사람 목숨 하나라도 체면과 돈으로 환산할 수 없다는 인식이란 우리 한국 사회에서 읽혀지지 않는다는 비참한 우리의 자화상이라는 것입니다. 어찌 하다가 우리 한국사회가 이 지경까지 짐승만도 못한 군상들의 집단이라는 말입니까? 이른 바 ‘엄마’라는 명칭을 붙인 단체의 여자들이 그런 막말을 해댈 수 있는 나라입니까? 여객선 침몰의 희생된 목숨들을 돈으로 해결해 주는 사안이란 말입니까? 사람 목숨의 희생에 대해서 반성할 차원이 기껏 그런 것이라는 것입니까? 그런 ‘엄마부대’의 여자들은 ‘엄마’라는 호칭을 들을 수 있는 사람들입니까? 제가 데리고 사는 개가 지난겨울에 새끼를 낳았는데, 두 달 후 그 새끼 강아지들을 친지들에게 분양해 준 후, 그 엄마 개가 한 동안 정신 나간 것처럼 현관 앞에서 들어오질 못하더군요. 좌우로 이곳저곳 쳐다보다가 문 앞에서 이리저리 냄새 맡아가며 서성거리더군요. 그 엄마 개의 허락을 받지 않고 그 강아지들을 떠나보낸 것이 참으로 미안하고 그 엄마 개가 불쌍해 보이더군요. 짐승인 개에게서도 그런 교감을 갖는 처지인데, 세월호 희생자들 가족에게 어찌 그런 막말을 할 수 있는가요? 그런 ‘엄마부대’를 평가한 댓글의 진단은 정확합니다. “보수라고 하는 것들은 생각하는 게 그저 돈, 이익밖에 없지. 천박하고 천박한 것들…”

 

이러한 지경에서 공포감을 갖지 않을 수 없는 저의 느낌은 다음과 같은 까닭에서 그렇습니다. ‘우리 한국사회는 지금 사람을 볼 줄 모르는 짐승만도 못한 자들과의 싸움장이다’라는 공포감입니다. 그 짐승만도 못한 자들이 우리 사회의 힘 있는 자들이기에 더욱 공포스럽습니다. 그런 막말을 하는 여자들의 현장 발언 동영상을 보니, 그 말들이 모두 경상도 사투리의 억양들이고 그 행색들이 부유층 여자들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더욱 공포스럽습니다. 우리 사회의 이른바 ‘기득권’ 내지 ‘보수층’이라는 부류가 정서적으로 확연히 구별됩니다. 그들이 우리 대한민국사회라는 밭에서 더불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너무 공포스럽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예수님 비유말씀 가운데 밭주인에게 여쭙는 말이 제가 하고 싶은 말입니다.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낼까요?”(마태 13, 28)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마태 13, 29)

 

그렇습니다. 우리가 사는 지금의 세상은 아직 추수 때에 이르지 않았습니다. 세상 돌아가는 일은 지금 그렇지만,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태워 버리고 밀은 곳간으로 모아들이라”(마태 13, 30)고 할 때가 올 것입니다. 그 때가 곧 하늘나라의 때입니다. 아직 하늘나라의 때가 당도하지 않았지요.

 

그렇지요! 하늘나라는 지금 겨자씨와 같기(마태 13, 30) 때문입니다.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밀가루 반죽에 넣은 누룩과도 같기 때문입니다(마태 13, 33 참조).

 

그러나 그 하늘나라는 ‘어떤 풀보다도 커져’(마태 13, 32), ‘마침내 온통 부풀어’(마태 13, 33) 커질 때가 올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늘나라란 뻥튀기처럼 한 번에 빵 터져서 커지는 게 아닙니다. 갑자기 오지 않습니다. 하늘나라란 겨자씨의 나무나 밀가루 속의 누룩처럼 점점 커집니다. 눈에 보이지 않게 말입니다. 하지만 지금 커나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마태 13, 33)음을 우리 눈으로 볼 때가 올 것입니다. 이러한 하늘나라 현상은 “세상 창조 때부터 숨겨진 것을 드러내리라”(마태 13, 35)고 예정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듣고 전하는 복음입니다. 헛되지 않은 ‘희망’ 자체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희망 때문에 우리는 힘으로 판치는 가라지들의 위세를 못 본 척 하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늘나라의 성장을 체험합니다. 이 세상의 힘자랑하는 독초들에게 기죽지 않고 오히려 작은 씨앗과 누룩을 알아볼 줄 아는 처지로 우리는 힘없는 사람들의 체취 속에 우리 삶의 애환을 섞어야 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생명이 우주보다도 소중하다는 신념이 괜스레 입에서 나올 말이 아닙니다. 그 신념은 아기를 낳아본 엄마의 입에서 토로되어야 할 말입니다. 한 생명을 낳아 본 입장이 아니고서는 사람 소중한 것을 감히 표현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 사람은 누구나 가장 위대한 사랑을 본성적으로 표현하여 ‘어머니의 사랑’이라 말합니다. 그런데 ‘엄마부대’라는 사람들이 도대체 그런 막말을 하여 정권비호의 앞잡이 노릇을 하다니… 진정 우리 사회에 엄마들 중 이렇게 짐승만도 못한 자들이 있다니… 참으로 공포의 세상이로고…!

 

그러나 오늘 복음의 비유 속에 제시된 ‘희망’ 그 자체를 마침 오늘 ‘농민주일’이듯이, 때를 기다리는 농부의 수고처럼, 그리고 작은 겨자씨가 큰 나무로 자라는 것처럼, 그리고 또한 누룩이 서서히 반죽을 부풀게 하는 것처럼, 우리의 전 생애를 두고 투자하는 ‘희망’이라 말 할 수 있습니다. 하늘나라의 성취를 보시기를 하느님께서는 기다리시듯이 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악한 사람들을 지금 당장 심판하시고자 하지 않습니다. 그런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착한 사람들에게 고난을 허락하십니다. 가라지와 밀이 함께 자라기를 허락하시듯이 말입니다. 어떤 신자 분들은 신앙의 보람을 우선 당장의 현실에서 거두어야 하는 것으로 착각하기도 하지요. 어떤 냉담신자는 세례를 받고 천주교 신자가 되었지만 집안에 잘 되는 일이 없어서 성당에 그만 다니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떤 신자는 열심히 기도해보아도 소원이 성취되지 않는다면서 불평을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신앙은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세상이라는 이 거친 삶의 밭에서 여름의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땀을 흘리는 농부가 기다리는 가을처럼, 우리의 신앙이란 세상에 잘 먹혀들어가지 않는 정의로운 길과 자기 헌신의 희생으로 자기 안에서부터 조금씩 커나가는 하늘나라의 성취를 바라보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외면하지도 않고 세상을 원망하지도 않고, 그 세상의 혼란 속에서 오히려 자기 자신의 수고로움을 바치는 가운데 하느님의 뜻을 헤아려 살아감으로써 결국 이루어지고야 말 그 하늘나라를 바라보며 사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무나 황당하고 어이없는 악담이 들려와도 그리스도인은 묵묵히 누룩처럼 세상을 하느님 나라의 기운으로 부풀려 가야합니다. 농부처럼 서두르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템포로 우리도 걸어가야 합니다. 우리는 겨자씨처럼, 그리고 누룩처럼… 그렇게 살아야겠지요!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100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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