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9 7일 평화를 위한 밤기도 모임 때 하신 말씀


힘과 폭력의 논리

이 세상은 본래 하느님의 아름답고 귀한 작품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세상은 우리 자신 안에, 다른 사람과의 관계 안에, 가정 안에, 도시 안에, 국가 안에는 물론이고 국가들 사이에도 조화와 평화가 자리한 세상이 아닐까요? 이 세상에서 저마다 가고싶은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는 사실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두의 선()을 위한 선택의 자유이고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자유가 아닐까요?

 

이 세상은 본래 우리를 놀라게 할 정도로 아름답고, 여전히 하느님의 귀한 작품입니다. 그런데 이런 세상에서 폭력, 분열, 충돌, 그리고 전쟁이 빈번히 벌어집니다. 창조의 최정점인 인간이 아름다움과 선의의 시간으로 모든 바라보지 않고, 오로지 자기만을 위한 이기주의에 갇혀 있기 때문에 벌어지는 결과입니다.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며 스스로를 모든 것의 중심에 놓을 때, 권력과 세력이라는 우상에 매료될 때, 스스로 하느님의 자리를 차지하려 할 때 인간은 모든 관계를 파괴하고 모든 것을 허물어뜨리며 폭력과 무관심과 싸움을 향한 문을 열게 됩니다.

 

인간 존재의 본질적인 죄에 대해 창세기가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메시지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하느님처럼 되고 싶어하는 최초의 인간은 그분의 명령을 어깁니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따먹습니다. 인간은 결국 자신과의 충돌을 겪습니다. 자신의 알몸을 알고 두려워 몸을 숨깁니다(창세 3,10). 하느님의 눈길이 두려워 몸을 숨긴 것입니다. 아담은 자신의 살에서 나온 여자를 고발합니다(3,12). 죄로 인해 인간과 다른 피조물 사이의 조화가 파괴된 것입니다. 또한 형제는 서로 맞서서 죽이기까지 합니다. 이런 현실은 조화가 부조화로 바뀐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부조화란 무엇입니까? ‘부조화는 존재하는 것일까요? 아니, 조화가 있거나 혼돈이 있을 뿐입니다. 조화가 사라지면 폭력, 분쟁, 다툼, 공포 등이 난무하는 혼돈이 자리를 차지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혼돈 속에서 하느님은 카인의 양심에 대고 묻습니다.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4,9) 그러자 카인은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4,9) 우리도 이런 자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나는 형제를 지키는 사람인가?’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서로가 서로를 지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조화가 깨지면 관계가 변형됩니다. 지켜주고 사랑해야 할 형제가 맞서 서로 싸우고 제거해야 할 원수가 되고 맙니다. 이때부터 상상할 수 없이 많은 폭력이 난무합니다. 그렇게 우리 역사에서 수없이 많은 분쟁과 전쟁이 벌어집니다.

 

우리 주변에서 많은 형제와 자매들이 고통 중에 슬퍼합니다. 우리는 온갖 폭력과 전쟁 속에서 카인을 부활시키고 있습니다. 이것은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장기간 지속되어온 현실이고, 외면할 수 없는 진실입니다. 오늘날 우리 형제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분쟁의 역사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형제들은 대립하고, 우상과 이기주의를 앞세워서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합니다. 그런 삶의 태도가 지속되는 것은 결국 우리 자신을 방어하는 데에만 힘을 쏟게 만듭니다. 다른 이를 공격하는 무기를 철저히 갖추는 데 노력하게 합니다. 그러한 곳에 양심은 잠을 잘 것이고, 자신을 정당화시키는 궤변만이 난무하게 됩니다. 그것이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적으로 활보하면서 파괴와 고통과 죽음의 씨가 뿌려집니다. 그것은 결국 죽음의 대화입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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