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 만능주의의 시대


18세기는 이성을 높이 평가하던 시절이었다. 게다가 유럽의 주도권은 남부유럽에서 북중 유럽으로 판세가 옮겨간 시절이었다. 유럽 세계의 중심이 중세의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프랑스와 영국으로 바뀐 시절이 18세기 무렵이었다. 그리고 유럽 대륙과 섬나라 영국은 늘 반대편에 섰다. 


양분되어 있던 근대철학


철학에서도 대륙의 합리론과 영국의 경험론으로 유럽의 근대철학은 양분되어 있었다. 서양철학에서 근대철학은 곧 합리주의와 경험주의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를 종합한 이가 바로 칸트다. 칸트는 1724년에 태어나서 1804년에 죽었다. 80세를 살았던 인물이었고, 서양의 철학은 칸트를 중심으로 그 이전과 그 이후로 구분된다. 칸트가 죽었던 시기는 근대철학이 끝나고 현대철학의 여명이 밝아오던 때였다. 19세기가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독일에서는 신칸트주의가 1870년부터 1920년까지 주름잡았고, 니체, 프로이트, 야스퍼스, 비트겐슈타인, 그리고 오늘날의 롤스에 이르기까지 칸트는 전대미문의 영향력을 끼친 대 철학자였다. 


간단히 훑어보는 유럽 근대사


유럽의 근대 역사에서 굵직하게 기억해야 할 것들이 있다. 16세기 중에는 1517년 루터의 반박문으로 종교개혁이 촉발되었고, 1598년 앙리 4세의 낭트칙령으로 프랑스에서 신교의 자유가 잠시 허용되기도 했다. 17세기 중에 대표적인 사건은 바로 30년 전쟁과 그 결과인 베스트팔렌 조약이다. 30년 전쟁은마지막 종교전쟁인 동시에 최초의 근대적 영토전쟁이었다. 천년 이상을 국가처럼 군림하던 가톨릭은 그 역할이 끝나버린 것이다. 국가와 권력과 행정의 컨트럴타워였던 교회를 대신해서 국가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도 베스트팔렌 조약이 갖는 의미다. 다시 말하면 하나의 로마 가톨릭이 지배하던 서유럽의 영토를 우후죽순처럼 세력을 넓혀가던 국가들이 권력으로 등장하면서 본격적인 '국제화'의 시대를 열게 된 것이다. 그것은 유럽의 새로운 '근대적 질서'라는 판짜기였다. 그리고 유럽인들 '그들만의 리그'였던 이른바 '근대적 질서'는 20세기 2차대전으로 사망선고를 받는다.  


칸트가 활동하던 18세기의 역사


18세기의 중요한 서양 역사는 미국의 독립과 프랑스혁명의 발발이다. 미국은 1776년, 유럽 세계의 시민혁명에 해당하는 독립을 선언했다. 이후 13년이 흐른 1789년, 앙시앙 레짐(구체제)의 몰락을 상징하는 프랑스 혁명이 터졌다. 터질 게 터진 것이고, 앙시앙레짐의 몰락은 프랑스 만의 일이 아니다. 유럽의 모든 국가에서 구체제는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한 시점으로 프랑스 혁명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18세기에는 미국의 독립이나 프랑스 혁명에 앞서서 1756년부터 이후 1763년까지 7년전쟁이 벌어진다. 대규모 국제전이었다. 1751년에는 프랑스에서 최초의 백과사전이 간행된다. <앙시클로페디>라 불리우는 이 백과사전은 계몽주의 시대를 상징한다. 


한편, 당시 중국은 만주족의 청나라 지배기간 중 최대 번영기였다. 4대 황제 강희제와, 5대 옹정제, 6대 건륭제가 1661년부터 1799년까지 3명의 황제가 군림하면서, 오랜 세월동안 태평성대를 구가하던 시절이었고, 조선에서는 영정조의 시대로 비교적 순탄한 시절이었다. 


칸트 나이 57세의 순수함


오늘날 역사의 밑그림이 그려지던 18세기 유럽에서, 칸트가 세상을 뒤흔들어놓기 시작한 것은 그의 나이 만 57세 무렵인 1781년에 출판한 <순수이성비판>때문이었다. 그것은 프랑스에서 최초의 백과사전 <앙시클레페디>가 간행된 1751년에서 30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7년 전쟁(1756~63)과 미국의 독립선언(1776) 이후에 1781년 순수이성비판이 등장했다.  


이성이 곧 빛이었다


그 당시는 계몽주의가 판치던 시대였다. 그래서 이성은 '빛'이었다. '신앙의 밝은 빛'은 흐려지고 '이성의 빛'의 조명을 세게 밝혀놓던 시절이었다. 그것을 상징적으로 말한 이는 헤겔이었다. 그의 책 <법철학>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미네르바의 부엉이(올빼미)는 황혼에 날개를 편다."


근대의 사상가들은 그리스도 신앙 이전으로 돌아갔다. 미네르바(Minerva)는 고대 로마신화에 등장하는 지혜의 여신이다. 여신이 아끼면서 상징처럼 함께 다니는 부엉이(올빼미)는 지혜를 상징한다. 어둠속에서도 길을 잃지 않는 지혜를 상징하는 게 곧 부엉이이다. (미네르바는 그리스 신화의 전쟁과 지혜의 여신 아테나와 동격). 물론 부엉이에 대한 비유는 헤겔의 철학에 대한 정의이기때문에 선배 철학자인 칸트의 개념과는 많이 다르다. 


신앙의 빛은 필요없다


이성의 빛으로 조명을 비추면서, 부자연스럽고 불합리한 것들은 이성의 이름으로 제거되었다. 신앙의 빛으로 비출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근본적으로 이성의 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던 시절이었다. 이성은 지상에서 완전한 행복을 이루게 하는 힘으로 믿었기에, 신의 현존은 커녕 저 너머에 존재하던 신의 존재에 대해서도 무감각해지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18세기는 <이성의 시대>였지만 그 현실 세계는 오히려 '이성적' 대화로 풀어내기 보다는 전쟁과 투쟁에 몰두하던 시절이었다. 


18세기의 갈등


그것은 구체제와 신체제의 갈등이었고, 신교와 구교의 갈등이었으며, 식민자와 피식민자의 싸움이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이성의 힘을 믿던 이율배반의 시대였다. 특히 신앙에 대해서도 '이성적'으로 신을 믿으려는 볼테르가 있었다면, 무신론을 주장하던 '디드로'같은 이도 있었다. 다만 같은 점이 있다면 교회는 대체로 다들 싫어했다는 것이다. 교회에 대한 반감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1724년~1804년. 칸트.


이성의 끝판왕, 칸트


이마누엘 칸트가 태어난 시대는 그런 시대였던 것이다. 이성의 이름을 가면으로 쓴 채 펼쳐진 사회의 폭발적 현상을 직접 보고 겪었다. 그러면서 그런 시대의 철학을 완성했다. 이성에 대한 종합점검을 시도했던 것이다. 이른바 이성의 끝판왕이 되었고, 계몽철학의 끝판왕이 되었으며 근대철학의 끝판왕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끝판왕이 된 이유


칸트가 끝판왕이 될 수 있던 배경에는 그의 의지력과 엄격함을 꼽을 수 있다. 이를테면 그의 별명 중에 '세시 반'(3시30분)이란 게 있다. 당시 그에게 '세시 반'이란 별명이 실제로 불리워졌는지 필자는 모르겠지만, 그는 늘 '세시 반'에 산책을 나섰다. 모든 일과가 정해진 대로 움직였기 때문에, 이웃 사람들은 산책길에 나선 칸트를 보면서 '세시 반'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한다. 

 

볼품없이 키가 작고 등은 구부러진 이 작은 거인은 다른 비슷한 왜소한 체구를 가진 나폴레옹이나 베토벤과 함께 '작은 거인 삼형제'로 불리우기도 한다. 혹은 '키작은 세 거인'이라고도 한다. 서양인치고 이 세사람은 다 키가 작았다. 


작은 거인 3형제


1724년생 칸트는 키가 159cm였고, 1770년생으로 손주뻘인 베토벤은 161cm였다고 한다. 나폴레옹도 손주뻘인데, 1769년생으로 그 중 키가 훨씬 컸다. 168cm였다고 한다. 이처럼 '작은 거인 삼형제' 중에서도 제일 작은 키의 칸트의 또한 머리통은 무거웠다고 한다. 그래서 등이 굽고 가슴은 밋밋하고 좁았던 건지 모르겠지만, 한마디로 그는 병약하기 그지 없었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그의 신체적 조건이 그를 신중하게 만들었고, 독신으로 살면서도 놀라운 의지력과 엄격한 건강관리로 1804년까지 80년동안 생을 이어갔던 것이다. 이러한 신중함은 그의 엄청난 학문적 업적이란 결실로 이어졌고 그의 강의는 탁월했으며 철학적 업적은 시대를 초월하는 것이 된 것이다. 


철학 혁명


그래서 칸트에게는 다양한 별명이 붙어있다. 이성 시대의 최종 완결작업을 시도했기 때문에, '이성(理性)의 '혁명'을 일으켰으며, 따라서 그것은 '이성의 지동설'이기때문에,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바꾼 계기가 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에 비견되기도 한다. 또 프랑스혁명(1789)에 빗대어서 '철학의 혁명'이라고도 부른다. 


그러면 칸트를 이성의 끝판왕이라고 부른다고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이성의 혁명이요 철학의 혁명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칸트가 '이성의 본가'에서 자식 셋을 분가 독립시켰기 때문이다. 그 분가한 집의 이름은 '순수이성', '실천이성', 그리고 '판단력'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진, 선, 미'라고도 부른다. 또 다르게는 인식론, 윤리학, 미학으로 구분할 수도 있다. 예전에는 진선미가 한 집에 살았다. 순수한 진이와 실천적인 선이와 판단하는 미자가 함께 모여 엉켜서 살았던 것이다. 


삼남매, 진·선·미의 분가독립


그런데 이성의 본가에서 이들을 데리고 살기에 시대는 급변하고 있었고, 이성은 신앙을 뛰어넘어 스스로 '빛'으로 존재하고자 했다. 그렇게 자아를 확장하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묻게 된 것이 '도대체 인간의 이성이란 무엇인가?'였다. 칸트는 그의 저서 <순수이성비판>(1781)에서 이렇게 말한다.


"순수이성 자체의 과제는 신, 자유, 그리고 영혼불멸(죽지 않음, 불사)이다." 


그러니까 이성이 풀어야 할 숙제는 인간의 이성이 도대체 무엇을 알아낼 것이고, 그것을 어떻게 알아낼 것이며, 그 알아내려는 탐구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를 묻고 있는 것이었다. 신의 존재, 인간의 자유, 그리고 영혼불멸의 사상 등이 인간 영혼이 탐구하고자 하는 것들인데이러한 탐구에 앞서서 작동하는 인간 이성이란 게 과연 무엇인지 우선적으로 밝히는 것이 '철학의 급선무'라고 본 것이다.  철학의 근본과제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내린 것이다. 


어떻게 인식론의 끝판왕이 되었나


그동안 인식론은 합리주의(합리론)와 경험주의(경험론)으로 주장이 대립되어 있었다. 대륙의 합리론이란 데카르트가 라이프니츠가 대표되고, 영국의 경험론에서는 베이컨, 로크, 흄이란 이들이 대표될 수 있는 있었다. 이들은 모두 칸트보다 선배들이다. 할아버지 뻘에서부터 형님 정도 되는 이들이다. 경험론의 비조 베이컨은 1561년생이니까 1724년생인 칸트보다 160년 가량 앞선 인물이다. 로크가 1632년생이고, 흄이 1711년생이다. 데카르트도 1596년생이다. 라이프니쯔는 1646년생이다. 이 중에서 칸트가 태어난 1724년에도 살아있던 이는 흄 한 사람 뿐이다. 칸트보다 13살이 많았던 흄은 1776년에 65세의 나이로 죽었다. 아무튼 칸트의 철학은 이들의 철학을 명쾌하게 비판하면서 우뚝 서게 되었다. 이런 유명한 말로 '인식론'의 끝판왕이 된 것이다. 


직관(直觀없는 개념은 공허하고, 개념없는 직관은 맹목(盲目)이다.:


그러니까 직관은 감각을 통한 경험이고, 개념이란 인간 정신이 일궈낸 순수한 생각이다. 그런데 인식의 대상은 반드시 시간과 공간의 울타리 안에서 주어진다. 그래서 시간과 공간은 직관의 형식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관으로 바라보는 대상에는 통일과 질서가 없다. 바로 이 대목에서 '개념화 작업'이 필요하다. 


개념화란 무엇인가


개념화라는 말은 무엇인가? 구분하고 다시 통일시키는 것이다. 일종의 헤쳐모여를 한다. 어떻게 헤쳤다가 다시 모이는가? 12명의 아이들에게 "너희들 입고 있는 옷 색깔대로 4열 종대로 헤쳐 모엿!"이라고 명령을 내리는 것과 똑같다. 여기서 4열 종대로 헤쳐모이게 만드는 것이 바로 '범주'의 개념이다. 범주는 카테고리다. 


간과 공간 안에 주어진 다양한 것들은 현실적 대상들이고, 인간은 그 대상들에게 개념을 정립한다. '개념의 정립'은 '통일과 질서'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부여'하려면 '부여'하는 능력이 필요한데, 그 능력을 칸트는 오성(悟性)이라고 불렀다. 오성(悟性)'의 사전적 정의는 '사물에 대해서 논리적으로 이해하고 판단하는 능력'을 말한다.


'순수'는 선천적이란 뜻


그런데 오성의 작동과 현실의 대상은 연결된 것이 아니다. 오성이 작동한다는 것은, 오성의 존재있음을 인정하는 것인데, 바로 이 존재하는 오성은 현실적 대상물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이다. 무관한 존재이므로 작동 이전의 것이다.이렇게 작동에 앞서 존재하기 때문에 선천적(先天的)이다.칸트가 말하는 ‘순수하다’는 뜻은 바로 이 ‘선천적’이란 말과 똑같다.


그것을 아 프리오리(a priori)라고도 부른다.선천적이기 때문에 경험하지 않은 선험적인 것.첫 경험 이전의 순수한 것이다.이러한 것을 카테고리(Kategorie)라는 한 단어로 정리할 수 있다. 좀 더 풀어서 쓰면, 순수오성개념(純粹悟性槪念)이라고 할 수 있겠다. 


순수오성개념(純粹悟性槪念), 곧 카테고리(범주)


시간과 공간 안에 존재하는 대상에게 통일과 질서를 부여하는 능력은 이미 인간의 이성 안에서 '선천적'으로 존재한다. '선험적'으로, '본래적'으로 존재한다. 이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대상에게 통일과 질서를 부여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는데, 그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능력을 12개로 나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12개의 범주(카테고리)이고 그것은 3개씩 4종 세트로 묶여져 있다. 


개념의 4종세트 내 12가지 범주


일단 4종 세트란 무엇인가? 그것은 다음과 같다.


⑴ 양

⑵ 질

⑶ 관계

⑷ 양태


이 4종 세트 안에는 각기 다른 3가지 씩의 개념이 탑재되어 있다. 그걸 다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⑴ 양   ① 단일성, ② 수다성(數多性), ③ 전체성

⑵ 질   ① 실재성, ② 부정성(否定性) , ③ 제한성

⑶ 관계 ① 실체성, ② 인과성, ③ 상호작용성

⑷ 양태 ① 가능성(불가능성), ② 현실성(비존재) , ③ 필연성(우연성)


이렇게 4종 세트별 3개 범주 씩 총 12개의 범주가 곧 개념이고 카테고리다. 개념이 선험적으로 인간에게 탑재되어 있다는 것은 바로 순수오성개념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에 대해서 '나무'를 비유하여 한가지 예를 들 수 있다. 우리는 나무 한그루를 보면서 '하나'의 나무로 파악한다. 그것이 바로 '하나'로 파악하는 통일과 질서를 부여하는 능력이다. 그 능력이 곧 선천적인 것이라는 걸 칸트는 꼭 집어서 말한 것이다. 나무에게는 여러가지 속성이 존재하지만, 그 '나무'를 한 그루의 나무로 정의내리는 것이 바로 인간 정신의 추상적 능력이다. 카테고리를 적용한 결과이다. 그런데 이처럼 선험적인 개념을 적용하려면 '나무'라는 현상이 존재해야 한다. 시간과 공간 안에 '나무'라는 현실적 대상이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내 눈 앞에 서있는 한 그루의 나무를 경험적으로 인식한다. 그런데 그것을 모든 사람들이 '한 그루의 나무'로 아무런 이의없이 보편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선천적인 능력과 경험적인 판단이 더해지는 것이기때문에, 이것은 개인별 판단과 시각의 차이를 뛰어 넘어서 보편적인 인식이 이루어진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경험과 합리가 만나고 서로 결혼하게 된다. 한 지붕 안에서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감각적 경험과 능동적 사유가 힘을 합쳐야 올바른 인식이 가능한 것이고, 외부의 감각을 받아들이는 감각적 경험은 능동적인 사유능력의 작동과 종합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그것이 '인식'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칸트가 인식의 주관적 측면을 강조했다는 점이다. 인식의 객관적 측면을 강조하는 경험론에 대하여 인식의 주관적 측면에 해당하는 질서를 주고 통일을 주는 통각(統覺)의 역할을 강조했다고 볼 수 있다여기서 통각(統覺)이란 생소한 철학용어는 경험이나 인식을 자기의 의식 속에서 종합하고 통일하는 작용을 말한다. 바로 이 대목에서 그의 인식론을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부른다. 철학의 지동설이 된 것이다. 프랑스 혁명에도 비견되어 '철학 혁명'이라고도 평가한다. 


'이 세상은 도대체 무엇인가?'는 멍청한 질문


이 세상은 도대체 무엇인가? 이것은 바로 칸트 이전의 철학자들이 탐구해온 주제였다. 그 세상을 설명하려고 땀을 뻘뻘 흘렸다. 이 탐구의 문제점은 세상이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데 소용된 '대상들'이 바뀔 때마다 세상을 설명하는 그 내용도 함께 달라졌다는 데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대상을 정가운데 놓았다. 탐구하는 우리는 그 대상을 알기 위해 주변을 빙빙 돌아다녔다는 뜻이다.


그것을 천동설에 비유한 것이다.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돌 듯이 인간이 대상 주위를 돌아다닌 것이었다. 그런데 칸트는 달랐다. 그는 생각하는 능력인 오성을 정 중앙에 놓았다. 어떤 대상이 등장하더라도 범위 안에 있어야 인식이 가능하다는 뜻이었다. 눈 밖에 나면 아무리 대단한 것일지라도 소용이 없는 것이었다. 인식 능력 범위 안에 들어와야 인식이 가능하다는 뜻인 거다. 그렇게 우리의 인식이 중심에 있고 대상은 내 눈에 띄어야 한다. 세상의 중심에는 나의 생각하는 능력이 있는 것이고, 철학의 중심도 나의 생각하는 능력인 것이다. 그것이 바로 순수이성이다. 경험 이전에 존재하는 것이기때문에 선험적이고 태어나면서 이미 갖고 있는 것이기에 선천적이며 본래적으로 주어진 이성이기때문에 그것은 '순수이성'이라는 것이다.


칸트가 '신이 없다'라고 말했나?


그래서 '순수이성'적인 입장에서 보았을 때, 칸트는 신의 현존도 증명될 수 없다고 보았다. 그가 가진 인식론적 입장의 필연적 귀결이다. 순수이성적 인식의 입장에서 신이란 눈 밖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인 것이다. 그래서 신의 현존, 인간의 의지, 영혼의 불멸은 증명될 수가 없다. 인간의 이성이 인식할 수가 없는 것이다. 신의 완전성과 영원함의 개념은 존재하기 때문에 의심할 수가 없겠지만, 그것을 우리의 이성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판단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자칫 잘못 오해하면 "칸트는 '신은 없다'고 말하더라!"라는 유언비어가 퍼질 수 없다. 칸트는 신의 존재를 '순수이성의 입장에서' 증명할 수 없다고 한 것 뿐이다. 


증명할 수 없을 뿐


칸트는 신의 존재에 대한 개념은 있다고 보았다. 다만 증명할 수 없을 뿐... 그게 뭐야? 끝없는 이율배반은 아닌가? 모순의 평행선을 끊임없이 달리는 것은 아닌가? 최종결론을 유보하는 속셈은 무엇이었을까? 그 해답은 바로 칸트의 <실천이성>에서 찾을 수 있다. 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신의 현존을 부정한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실천이성>의 요청을 불러 세운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칸트는 이론의 세계와 실천(행동)의 세계를 완전히 구분했따. 그는 대륙의 합리론과 영국의 경험론을 결혼시킨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런 종합세트 선물 안에서 그는 인간의 이성 안에 자식처럼 존재하는 세 명의 진이와 선이와 미자를 각기 분가시켰다. 각자 독립된 가정을 꾸리게 한 것이다. 칸트는 이성을 진·선·미로 분가 독립시키고 구분했다. 이성의 삼국지가 각자의 비판진영을 꾸린 것이다.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이 바로 그것이다. 그들의 통합은 쉬운 게 아닐 뿐만 아니라 서로 독립된 것들이었다. 


분가독립한 3남매는 서로의 불완전성을 인정해


통합이 쉽지 않은 3남매는 서로의 불완전성을 인정해야만 했다. '신의 존재'를 완벽하게 증명할 수 없다는 고백은 3남매를 분가시킨 3국지의 본가 '이성'의 불완전성을 역설적으로 증명하는 것으로 칸트는 보았다. 바로 이 대목에서 '신의 처형'을 주장한 니체와 완전히 다른 입장인 것이다. 이성이 판을 치던 절대이성의 시대로 가는 길에서 칸트는 그런 이성의 불완전성을 지적질한 것이다. 그래서 독일의 시인 하이네는 칸트를 '철학의 로베스피에르'라고 불렀다고 한다. 정신 혁명이 칸트로부터 일어났는데, 그것이 정치 혁명보다 앞섰다는 말이라고 한다.


이제 칸트는 진이네 집에서 <순수이성비판>을 들여다보던 본가부모님 '이성'을 옆집 선이네로 보낸다. 그곳에서 <실천이성비판>의 행동규율을 손질해야 했던 것이다. 행위하는 존재인 인간에게 필요한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를 다루려고 했던 것이다. <실천이성비판>에서 칸트는 신의 현존을 '실천이성의 요청'이라고 말한다. 실천이성비판에서 가장 유명한 말이 있다. 그의 지상명령이라고도 하고, 정언명령 혹은 정언명법(定言命法)이라고 부르는 것이 있다. 이런 말이다.


"네 의지의 격율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로서 타당할 수 있도록 행위하라." 그리고 또 하나는 "너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인격에 있어서의 인간성을 언제나 목적으로 대우하고결코 한갓 수단으로 사용하지 말라."



미자 씨의 희망은?


마지막으로 미(美)자씨에 집에서 칸트는 분가독립을 완성시킨다. <판단력 비판>은 바로 비판철학자인 칸트의 그 유명한 3대 비판서의 최종완결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희망할 수 있는가를 다룬 것이 그의 <판단력 비판>이다.즉 <판단력비판>은 아름다움에 대한 분석이다.미추(美醜)의 개념을 다루고 있다. 이쁘다와 이쁘지 않다를  것을 판단한다는 것인데 그것을 칸트는 느낀다의 작용으로 보았다.'안다','의욕한다'의 중간에 느낀다 있다고  것이다진선미의 미에 해당하는 것이다


심성의 3분설


다른 말로 심성(心性)의분설(三分設)을 확립했다고도 본다앞서 언급한 것처럼,'이성'이란 부모는 '진'이와 '선'이와 '미'자를 분가독립시켰다. 그래서 미자가 하는 예술은 진이가 탐구하는 학문이나 선이가 실천하는 도덕과 완전 별개의 자율성을 갖고 살림을 꾸려나간다는 뜻이 된다예속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미자는 느끼고, 진이는 알고, 선이는 행동한다. 미자는 느끼려고 미학을 공부하고, 진이는 알려고 인식록을 공부하고, 선이는 올바를 행동을 위해 윤리학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그래서 칸트는 미자에게 <취미>에 관한 하나의 독자적 방을 꾸미라고 말한다. 취미는 '감정의 판단'인 동시에 '판단의 감정'이다. 정서적인 동시에 보편타당하다는 말이다. 그래서 보편타당한 논리에 해당되는 범주(카테고리)를 갖다 쓸 수 있다. 그 카테고리에는 아름다움이란 우리에게 만족을 주며누구에게나 개념적으로가 아니라 감정의 쾌적함을 주는 것이며무슨 목적을 의식하지 않으면서도 합목적적이며필연적으로 만족을 준다는 것이다.그것은 애인은 없는 사람도 '사랑'의 개념을 안다고 가정했을 때, 좀 더 이해할 수 있다. 애인은 없어도 '사랑'은 존재하는 것이니까. 


아! 좋다


칸트는 1804년, '아! 좋다'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뇌졸중(腦卒中)으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그의 묘미병은 또한 그의 철학을 이해하는 한가지 단서다. 


"우리가 더 자주 그리고 더욱 꾸준히 반성하면 할 수록 저 하늘의 빛나는 별들과 내 마음 안의 도덕법칙에 대한 항상 새롭고도 점점 커져가는 감탄과 경외를 느끼게 된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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