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공관 복음서 문제
1. '복음서'라는 유형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여러분에게도 선포합니다.” (1요한 1,3)
1-1. ‘복음’과 ‘복음서’
'에우앙겔리온'은 '기쁜 소식'
그리스어를 비롯한 다른 많은 언어들에서는 ‘복음’이란 단어와 ‘복음서’라는 단어는 구분되지 않는다. 원래 ‘복음’을 뜻했던 단어가 나중에 ‘복음서’를 지칭하게 된 것이고, 본래 하나였던 ‘복음’이 여러 ‘복음서’들에 담기게 된 것이다. 그리스어 단어 ‘에우앙겔리온’(euagnelion)은 ‘기쁜 소식’을 의미한다. 그것이 성경에서만 쓰였던 것은 아니다. 황제를 숭배하던 로마에서 이 단어는 황제의 탄생이나 통치의 시작, 황제의 칙령 등을 지칭했다. 구약성경의 그리스어 번역본인 <70인역>에서 이 명사는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기쁜 소식을 전하다’라고 번역되는 동사형은 주로 제2이사야에서 나타난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시온아 높은 산으로 올라가라. 기쁜 소식을 전하는 예루살렘아 너의 목소리를 한껏 높여라. 두려워 말고 소리를 높여라. 유다의 성읍들에게 “너희의 하느님께서 여기에 계시다.” 하고 말하여라.” (이사 40,9)
“얼마나 아름다운가, 산 위에 서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의 저 발! 평화를 선포하고 기쁜 소식을 전하며 구원을 선포하는구나. “너의 하느님은 임금님이시다.” 하고 시온에게 말하는구나.” (이사 52,7)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 하느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어 주며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갇힌 이들에게 석방을 선포하게 하셨다.” (이사 61,1)
'기쁨'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
이 본문들에서, ‘기쁜 소식’은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소식이다. 하느님의 구원과 해방을, 억압받는 당신 백성을 위한 하느님의 개입을 선포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제2이사야는 그러한 하느님의 해방(이사 61장), 하느님의 현존을(이사 40장) “너희 하느님은 임금님이시다”라는 말로 (이사 52장) 표현하고 있다. 하느님의 통치, 곧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것이 복음이고, 그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께서 가까이 와 계시고 상처들을 싸매주시는 데에서 실현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개념이 신약에서 선포되는 하느님 나라와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루카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나자렛 회당에서 이사 61,1-2를 인용하시면서 당신의 사명을 드러내시고 공생활을 시작하신다는 데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바오로가 자주 사용했던 말, '복음'
그리스도교에서는 일찍부터 ‘복음’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신약성경에서는 특히 바오로가 이 말을 매우 자주 사용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을 통해서 주어진 구원에 관한 기쁜 소식을, 그리고 그 선포를 가리켜 복음이라고 말한다. 이런 맥락에서 ‘복음’이라는 단어는 언제나 단수로 나타난다. 바오로는 흔히 ‘하느님의 복음’, ‘그리스도의 복음’ 등의 표현을 사용하는데, 그것은 복음이 하느님/그리스도로부터 오는 것이라는 의미와 하느님/그리스도에 관한 것이라는 의미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 어떤 경우에서든 ‘복음’은 말로 설교되는 것이며 기록된 책이라는 의미가 들어있었던 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복음'이란 표현을 썼을까?
예수님 자신이 당신께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신 것을 ‘복음’이라는 단어로 지칭하셨는지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의견들이 있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은 분명하게 ‘복음’이라는 단어를 그런 뜻으로 사용했다. 마르 1,14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셨다는 표현이 있다. 공관복음서들에서 마르코는 7번 ‘복음’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5번은 다른 수식어가 없고 한 번은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1,1), 다른 한 번은 “하느님의 복음”(1,14)이라고 말한다. 마태오의 경우 이 단어를 드물게 사용했다. 세 번은 “하늘 나라의 복음”이라고 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반면 루카는 이 단어의 동사형은 많이 사용하지만, 명사형은 복음서에서 사용하지 않으며, 사도행전에서는 사도들의 설교를 지칭하여 ‘복음’이라는 명사를 사용한다 (사도 15,7; 20,24). 분명한 것은 여기에서도 ‘복음’은 언제나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말로 선포하는 것을 의미한다.
2세기 성 유스티노가 퍼뜨리기 시작했다
현재 우리의 책들을 ‘복음서’라고 지칭했던 첫 번째 사례는 2세기의 성 유스티노에게서 나타난다. 이러한 용법이 확산되면서, 하나인 복음이 들어있는 여러 복음서들을 “...에 의한 복음(서)”이라고 구분하는 게 일반화된다. 그러한 책들 가운데 경전으로 인정된 것이 마태오, 마르코, 루카, 요한에 의한 복음서인데, “네 책에 각각 ‘복음’이라는 제목이 달린 것은, [...] 네 저자가 저마다 예수님의 말씀 및 행동과 이루는 고유한 관계 안에서 이 ‘기쁜 소식’을 선포함을 뜻한다.” (주석성경, 마태오복음서 입문)
위의 설명에서 “네 저자가 저마다 ...”라는 문장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네 명의 저자들이 고유하게 선포함으로써 네 권의 복음서가 있게 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이를 다르게 말하면, ‘복음서’라는 문학유형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는 뜻이 되기도 한다.
복음서는 신앙의 고백이다
신약성경에 4권의 복음서가 있다는 것은 복음서들이 사건 일지가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다. 복음서들이 예수님 말씀과 행적들을 순서대로 정확하게, 역사적 사실 그대로 기록되었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복음서는 그런 책이 아니다. 그렇게 된다면 한권의 책으로도 충분해질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러 권의 복음서들이 있다는 것은 이 책들이 그렇게 중립적이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근본적으로 복음서는 신앙의 고백이다. 나자렛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 그리고 그 분의 말씀과 가르치심에서 그분이 누구이신지를 알아보고 고백했던 이들이 기록한 책이 복음서들이다.
미처 알지 못한 걸 깨닫고 난 후에야 쓴 것이다
예수님의 돌아가심과 부활 이전에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살면서 복음서를 쓰기 시작했다고 한번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부활을 체험한 다음 제자들은 쓰고 있던 복음서를 처음부터 고쳐써야 했을 것이다. 부활을 통해 제자들은 전에는 알아듣지 못했던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게 되고, 예수님의 행적에 대해서도 그 전에는 미처 알지 못하던 의미를 깨달았던 것이다.
마르코는 "스승님", 마태오는 "주님"이라고 한 까닭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결정적으로 드러내준 사건은 그 분의 부활이었다. 그 부활을 체험한 그리스도교 각각의 공동체가 이전에 알고 있던 예수님에 대한 전승들을 보존하고 점점 더 발전시킨다. 서로 다른 표현을 예로 들면, 예수님께서 호수의 풍랑을 잔잔하게 만드시는 장면에서 마르코 복음에 등장하는 제자들은 예수님을 “스승님”이라고 부른다(4,38). 그런데 마태오 복음의 병행구절에서는 “주님”이라고 부른다(8,25). 어찌보면 “스승님”이라는 것은 더 초기의 기억이고, “주님”이라는 표현은 더욱 후대에 발전된 전승일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사셨던 때에 사람들의 눈에 그분이 여러 스승들 가운데 한 분으로 비쳐졌다면 (“라삐”, 마르 9,5; 10,51; 11,21; “스승”, 마르 10,17 등), 부활 후에 그분은 주님으로 확인되시기 때문이다. 이렇게 예수님 삶에 대한 역사적 기억에서 비롯된 그 전승에 다시 공동체의 신앙을 담아 복음서가 형성되었다.
복음서들을 쓴 목적은 무엇일까?
요한 복음서 저자는 “예수님께서는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많은 표징도 제자들 앞에서 일으키셨다. 이것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 20,30-31).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이 밖에도 많이 있다. 그래서 그것들을 낱낱이 기록하면, 온 세상이라도 그렇게 기록된 책들을 다 담아내지 못하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요한 21,25).
복음서 저자들에게 중요했던 것
복음서 저자들에게 중요했던 것은 독자들에게 예수께서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언하는 것이었다. 사실 복음서들 사이에서는 예수님의 삶에 대해 부분적으로 서로 다른 이야기들을 보게 된다. 그것은 주로 복음서의 형성과정에서 작용한 공동체와 그 공동체의 신앙에 기인한 것이다.
4개의 복음서가 조화를 이룬 하나의 판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네 개의 서로 다른 복음서는 우리에게 불완전한 역사 기록을 전해준다고 말하기 보다는, 더 풍요로운 신앙을 전해주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래서 R. 브라운은 “믿음의 견지에서 볼 때, 하느님의 섭리는 네 개의 다른 복음서를 주시는 것이었다. 조화를 이룬 하나의 판이 아니었다. 우리가 보아야 하는 것은 각각의 견해를 갖고 있는 개개의 복음서이다.”라고 말한다. 우리가 흔히 4개의 복음서들을 모아 머리 속에서 하나의 전기를 만들기도 하는데, 적어도 공관 복음서를 공부하는 동안에 복음서들을 각각 구분하여 그 저자가 전달하고자 한 고유한 부분을 파악한다면, 분명 예수님께 대한 역사적 기록을 넘어서는 무엇인가를 알아 볼 수가 있을 것이다.
1-2. 역사적 예수와 복음서의 예수
객관적 사실탐구 중에도 놓치지 말아야 할 것
복음서들이 서로 차이가 난다는 사실은 복음서에서 보여주는 예수님의 모습이 역사적 예수, 곧 실제로 하루하루 살고 움직였던 구체적인 인간 에수와 거리가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한때 학자들은 복음서의 본문에서 예수님의 공생활로부터 복음서가 형성된 때까지, 곧 30년경부터 70년경까지 덧붙여진 모든 것을 떼어내고 객관적인 그분의 일생을 찾아내고자 노력한 적이 있다. 마치 고고학 발굴과도 같은 이러한 작업은 역사적 예수를 찾아내려는 시도였던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일정부분 성과가 있었는데, 요한복음과 공관복음들에서 차이가 나는 부분들을 설명하게 된 것이 그 사례이다.
잘못된 전제에서 출발할 때 빠지는 함정
예수님의 실제 삶을 가능한 한 정확하게 알고자 하는 노력과 시도는 정당하고 그 나름의 가치가 있다. 그런데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이러한 시도의 출발이 잘못된 전제에서 비롯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전통적인 그리스도 신앙은 역사적 예수와 아무 관계없이 만들어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신약성경에 스며들어 있는 공동체의 신앙이라는 요소를 배제하고 역사적 예수만을 찾아내려고 하게 되는데, 그렇게 찾아낸 역사적 예수에 신앙의 기초를 두고자 하면서 문제는 시작된다.
예루살렘 3회 방문? 혹은 1회 편도 방문인 건가?
요한복음서에서는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적어도 세 번 가셨다고 말하고, 다른 복음들에서는 예수님의 공생활이 갈릴래아 활동기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한 번의 여정으로 엮어져 있다. 이를 비교하여 어떤 것이 역사적 사실인지를 찾는 것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겠다. 그러나 공관복음에서 말하는 것은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해서 공관복음의 진술의 무게가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런 차이가 있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몇 번 가셨는가를 전해주는 것이 복음서 저자의 목적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리고 저자가 택한 기술방법을 통해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를 우리에게 분명하게 보여주려했다는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초기 공동체 신앙의 시각을 존중해야
복음서가 순전하게 역사적인 사실 기록이 아니고, 공동체의 신앙이라는 시각이 그 바탕에 깔려있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복음서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전해주는 책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바로 그 공동체의 신앙을 전해주는 책이기 때문이다.
가톨릭교리신학원 통신신학교육부 제2단계 1학년(3학년) 봄학기
가톨릭신학연구실 편찬교재 [신약1(공관복음.사도행전)]
제2장 공관복음서 문제 ① '복음서'라는 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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