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관복음과 사도행전 제3강의


예수님과 함께 머무는 것이 첫번째 소명


제목: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강의 3교시

일시: 2015/8/22 토 오전 10:50~11:35

장소: 가톨릭교리신학원 지하강당(서울 혜화동)


가톨릭교리신학원 통신신학교육부 연수회 시간표. 2015년 8월 22일(토)과 23일(일) 양일 중 하루를 선택해서 참여하면 된다. 서울 혜화동 가톨릭교리신학원 입구에서 3교시 시작 직전인 오전 10시49분 촬영. 


(10:50 3교시 시작, 마르코복음 계속)  「마르코 복음」역시 전통적인 견해에 따르면, '요한 마르코'라는 베드로와 함께 일하던 사람이 썼다고 합니다. 지금 학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경향도 있지만, 일단 그렇게 이해하고 넘어가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우선「마르코 복음」을 한 눈에 살펴보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습니다. 


신약성경은 다 그리스어로 쓰여졌다


가톨릭교리신학원 통신신학교육부 2단계 1학년(3학년)의 하계연수 오전 3교시 장면. 2015년 8월 22일(토) 서울 혜화동 가톨릭교리신학원 지하강당. 오전 10시52분 촬영. 강의를 맡은 신부님은 쉽고 분명하게 강의하셨기에 오전시간은 매우 유익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히브리어였죠. 그런데 특별히 예수님이 사용하신 언어는 히브리어의 방언 쯤 되는 '아람어'였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어나 아람어나 다 같은 말입니다. 분명히 예수님은 이 말을 쓰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마르코 복음」은 이 아람어나 히브리어로 표현된 것을 다 그리스어로 번역을 해 줍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신약성경은 다 그리스어로 쓰여졌습니다. 왜냐하면 신약에서 가장 빨리 쓰여진 것은「테살로니카 1서」입니다. 기원후 50년 초반에 쓰여진 것으로 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몇 년에 돌아가셨습니까? 예수님은 몇 년 사셨습니까? 33년이라고 보통 얘기하죠. 


예수님은 0년에 태어나서 33년에 돌아가셨나


통상적으로 0년에 태어나셔서 33년에 돌아가셨어야, 우리가 알고 있는 서른 세 해의 삶과 맞습니다.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신 것은 기원 전 6년에서 4년쯤으로 보고, 돌아가신 해는 기원 후 30년으로 이야기합니다. 어떤 사람은 30년 4월 17일이라고도 이야기하는데, 이 말이 근거가 있기는 하지만, 아무튼 30년에 돌아가셨을 것이란 주장은 모든 사람이 받아들이는 내용입니다.


테살로니카 1서가 최초의 신약 책


그런데 바오로 사도가 50년 초반에 가장 먼저「테살로니카 1서」를 썼다고 가정하면, 그 사이에는 얼만큼의 차이가 있습니까? 바로 20년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만약에「마르코 복음」이 가장 빨리 쓰여진 복음서라고 말하는데, 그것을 70년에 가장 먼저 쓰인 복음이라고 하면 그것에서도 40년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신약의 책들, 특히 「복음서」는 그렇게 쓰여진 책들입니다.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 누군가가 예수님 말씀을 받아적은 게 아닙니다. 예수님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활동했지만, 예수님을 이해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런 걸 잘 나타내는 게 바로 베드로 사도의 경우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 살아생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 불리움을 받은 첫번째 제자였고 그것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의 모습을 보면 썩 훌륭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복음서」를 보면, 예수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죠. 다들 '왜 저런 이야길 하시지?'하는 투였습니다. 급기야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이제 내가 예루살렘에 가면 거기서 잡혀서 죽을 것이라는 예고를 하실 때 베드로가 "절대 그런 일은 일어나선 안됩니다."라고 얘기합니다. 그러다가 예수님한테 혼납니다. "사탄아 물러가라!"라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또 예루살렘에 가서도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따가 게세마니 언덕에서 예수님이 잡혀 갑니다. 그 때 제자들이 뭐를 했습니까? 잡힐 때 자고 있었나요? 그건 바로 전에 있었던 일이고, 잡힐 때는 다 도망갔습니다. 어떤 젊은이는 속옷 바람으로 왔다가 군인들이 속옷을 잡자 속옷을 벗고 달아났다고 「마르코 복음」에 적혀있습니다. 그 사람도 예수님의 제자였을 것입니다. 


부활이란 사건이 초대 교회의 시작


이처럼 예수님과 가장 오랜 시간을 같이 했던 제자들도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했고, 예수님이 잡혀갔을 때 다 도망갔어요. 그러다가 베드로가 쓰윽 걱정이 되죠. 그래서 심문 받는 곳에 가봅니다. 그 때 사람들이 주위에서 "어? 같이 있던 사람인데요?" 아니라고 하죠. "같이 있는 거 봤는데요?" 아니라고 세번을 부인하죠. 예수님이 돌아가셨을 때에 제자들은 그 앞에 있지 못했습니다. 무덤에 묻히셨죠. 그리고 어떤 여인들이 마리아 막달레나가 와서 이상한 이야기를 합니다. 무덤에 갔는데 돌이 치워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제자들이 갑니다. 그제서야 비로소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압니다. 


복음서를 기록하게 된 까닭


부활이란 사건 이후에 제자들은 그 전에 예수님과 했던 기억들을 되돌이킵니다. 아! 그 때 예수님이 했던 이야기가 이런 거였구나?  그렇게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 이해한 것이 아니라, 부활한 이후에야 예수님 말씀과 행적들을 비로소 이해하게 되고, 그 이후에 그런 것들을 모아서「복음서」라는 것을 기록하게 됩니다. 그래서 실제로 예수님이 활동했던 시기보다는 30년이나 40년 이후에 「복음서」라는 것이 기록되었다는 겁니다. 그래서「복음서」는 실제로 당시에 있었던 사건들을 전해주는 것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 위의 신앙을 전해주는 데 목적이 있다는 겁니다. 즉 그것이 바로 역사적 사실과 신학과의 차이입니다. 어쨌거나 이렇게 복음서가 기록되었습니다. 그리고 당시에 사람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던 그리스어(헬라어)로 기록한 것입니다.


그리스어로 다 바꾸어준 마르코 복음


그런데 「마르코 복음」은 히브리어로 된 표현을 전부 다 헬라어로 바꾸어줍니다. 예를 들어 "에파타"라고 써놓고, 이 말은 그리스어로 "열려라"라는 뜻이다 라고 설명을 해준다는 겁니다. 그러면 왜「마르코 복음」은 히브리어의 표현들을 굳이 그리스어로 해설을 해줄까요? 다른 말로 하면「마르코 복음」이 처음에 생각했던 독자층은 쉽게 말해서 히브리어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히브리어를 모른다는 표현은 무엇입니까? 유다인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아마도「마르코 복음」역시「루카 복음」만큼은 아니지만, 유다교 출신이었던 사람들보다는 이방인 출신이었던 사람들을 더 먼저 대상으로 생각했을 확률이 높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골고타>라는 말도 <해골터>로 번역한다는 겁니다. 


본디 바리사이뿐만 아니라 모든 유다인은 조상들의 전통을 지켜, 한 움큼의 물로 손을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으며, 장터에서 돌아온 뒤에 몸을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는다. 이 밖에도 지켜야 할 관습이 많은데, 잔이나 단지나 놋그릇이나 침상을 씻는 일들이다. (마르코 7,3-4)


유다인의 정결례 관습을 마르코는 왜 설명해줬나


또 흥미로운 것은「마르코 복음」7장 3절에서 4절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에 어떤 이야기가 나오냐면,「마르코 복음」저자가 유다인들은 정결례라는 걸 하는데 그걸 설명합니다. 정결례라는 것은 사람들이 밖에 나갔다 들어오면 한 움큼의 물로 손을 씻거나 발을 씻지 않으면 함께 음식을 먹지 않는 것 등입니다. 이것 역시 반대로 생각해보면,「마르코 복음」이 생각했던 독자는 유다교에서 너무 많이 행하던 정결례를 독자들이 몰랐다는 증거입니다. 즉, 유다인의 전통과 멀리 떨어진 이방인들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종합적으로「마르코 복음」은 이방인 출신이 훨씬 많은 공동체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아마도 기원 후 70년 성전이 파괴된 직후에 작성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예루살렘을 향한 단 한 차례의 여정


앞서 이(二)출전설에 대해 설명을 했습니다. 출처는「마르코 복음」과「어록집」이라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마르코 복음」은 그만큼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마태오 복음」과「루카 복음」의 뼈대와 같은 복음서인데,「마르코 복음」은 장소에 따라서 복음서를 구분해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장소에 따라서 구분해 볼 수 있을까요? 아까 언급한 바와 같이【공관복음】이 가진 가장 큰 특징 중 하나가 예수님의 삶을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다시는 갈릴래아로 돌아오지 않는다


그러면 먼저 「마르코 복음」1장부터 8장 26절까지를 보면, 여기까지 나온 내용은 전부 다 갈릴래아와 그 주변 도시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이것이 첫 부분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부분을 시작하는「마르코 복음」8장 27절을 보시면 이렇게 쓰여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카이사리아 필리피 근처 마을을 향하여 길을 떠나셨다. 그리고 길에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마르코 8,27)


이제 예수님은 갈릴래아 지역을 떠나는 겁니다. 그리고 다시는, 부활 이전에는 갈릴래아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래서「마르코 복음」8장 27절부터 10장 52절까지는 예루살렘으로 향해가는 그 중간에 일어나는 일들을 전해주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11장 1절부터 마지막까지는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일들을 전해주는 것이고, 11장 1절은 '그들이 예루살렘 ...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라고 표현이 되는 것입니다.  엔 돌아오지 않는다.


그들이 예루살렘 곧 올리브 산 근처 벳파게와 베타니아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예수님께서 제자 둘을 보내며 (마르코 11,1)


마르코 구조는 마태오와 루카에서 그대로 되풀이된다


그래서 결국 갈릴래아와 그 주변,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서의 예수님 모습을 전해주는 것이「마르코 복음서」이고, 이러한「마르코 복음서」의 구조는 「마태오 복음」과「루카 복음」에서도 그대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앞서서「마태오 복음」을 다른 방식으로, 즉 예수님의 말씀을 모아놓은 구조라고 언급한 바 있지만 「마르코 복음」의 구조가「마태오 복음」에도 그대로 맞습니다. 왜냐하면 「마르코 복음」의 구조가 그대로 마태오와 루카의 근간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마르코 복음의 내용적 측면


내용적으로 본다면,「마르코 복음」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은 8장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욕먹는 상황 전후의 이야기입니다. 이제 8장 27절부터 갈릴래아를 떠나서 예루살렘으로 가면서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디?" 하니까 제자들이 "엘리야라고 하고 뭐 그럽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그러면 너희들은 날 누구라고 하느냐?" 하니까, 베드로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합니다.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 (마르코 8,28-30)


베드로는 과연 사탄인가


여기까지는 훈훈합니다. 그리고 바로 사탄이라고 욕을 먹죠. 그리고 나서 이어지는 말씀은 "누구든지 나의 제자가 되려고 한다면, 나를 따르려면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나서 타볼산에 가서 예수님이 거룩하게 변모하시는 사건을 전해줍니다. 이 부분이「마르코 복음」에서 상당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왜냐하면 아까처럼 [갈릴래아]와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장소적으로 구분할 수도 있지만, 내용적으로 보았을 때는 갈릴래아에서부터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 중에서 이 부분이 가장 중요합니다. 


8,31-33 첫번째 수난과 부활예고

8,34-38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가

9,2-10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시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이후 . . .


그리고 이 부근을 중심으로 왼쪽은 예수님의 일반적 행적을, 그리고 오른쪽은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을 전해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것과 예수님께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거룩하게 변모했다고 하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는 예수님이 지금 우리와 함께 있지만 하느님이란 걸 드러내기때문에 아주 중요합니다. 그래서 의미적으로 보았을 때, 이제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님께서 인간의 손에 죽게 된다는 것이 복음서 후반에 나오는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마르코 복음」은 이런 틀을 가지고 있고, 이 틀은【공관복음】안에서 상당히 중요한 요소이기도 합니다. 「마르코 복음」이 전해주는 내용이 마태오나 루카에서도 중요하게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신 첫번째 목적은


「마르코 복음」의 처음 3장을 보시면,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는 장면이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도를 하시고 열 두명의 제자를 당신 주위에 부르셨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여기서「마르코 복음」에 나오는 제자들을 부르신 이야기는 참 재미있습니다. 이렇게 표현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셨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3,14-15)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이것을 위해서 열두명의 제자를 뽑으신 것입니다. 여기서 가장 재미있는 것은 뽑으신 첫번째 목적입니다. 바로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는 것'입니다. 함께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을 뽑으신 첫번째 목적은「마르코 복음」에 따르면 뭘 하는 게 아니라 함께 있는 것이죠. 그리고 나서 그 다음에 복음을 선포하고, 마귀를 쫓아내는 예수님의 권한을 나누어 주는 일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따르되, 함께 지내는 것


앞서서 구조를 말하면서, 중요한 8장 후반에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라"는 하는 게 제자들의 모습이라고 했는데, 그것과 함께 열 두 사도를 뽑은 모습을 보면 「마르코 복음」이 전하는 제자의 모습을 어렴풋하게 짐작할 수 있는 겁니다. 모든 예수님의 제자들과 모든 신앙인들, 예수님을 따르려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뭘 하기 이전에 함께 머무르고 밥 먹고 여행하고 함께 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열두명을 '사도'라고 보르는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이 행동을 잘해서라기보다는 예수님과 특별한 관계로 함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부분이 많은 대목입니다. 


똑바로 걸어가는 신앙생활을 하려면


우리 교회는 활동중심입니다. 그런데 그게 나쁜 것일까요? 그런 것은 아닙니다. 다만 반대적 측면에서 보았을 때, 활동이 많은 경우 머물러있지 못한다는 측면이 있습니다. 물론 그 반대도 가능합니다. 정적이고 기도하는 교회는 좋은 모습이지만 자칫하면 활동이 빈약할 수도 있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이 두가지를 잘 할 때 잘 걸어갈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인의 신앙 생활에서도 활동과 나의 기도가 함께 있을 때에만 나의 신앙생활이 똑바로 걸어갈 수 있습니다. 어느 한쪽에 치우치면 쉽지 않습니다. 여러가지 다양한 모습이 있지만, 활동을 많이 하신 분들은 반대면도 봐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활동을 하면서도, 하느님과 개인적으로 관계를 맺는 머무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반대로 활동을 많이 못하는 분들은 무엇이 되었건 나의 신앙을 실천할 무엇인가를 찾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우리의 신앙생활이 안정적으로 되어가는 겁니다.


마르코가 말하는 첫번째 신앙인의 덕목


아무튼「마르코 복음」에서 말하는 첫번째로 요구되는 덕목은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복음을 선포하고, 마귀를 쫓는 권한을 갖는 것인데, 이것은 거꾸로 말하면, 예수님과 함께 머물러있지 못하면 복음도 선포할 수 없고 다른 일을 할 수 있는 권한도 받지 못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마르코 복음」이 전하는 짧은 이야기지만 그만큼 이러한 신앙이 중요하고 성경에서 제자들을 뽑는 이야기에서도 명시적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마르코가 전하고자 하는 핵심


그래서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베드로의 메시아 고백이라고 하는 부분이 가장 중심적인 부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의 고백 8,27-30], [첫째 수난 예고 8,31-33], [참된 제자됨 8,34-38] 바로 이 대목이 마르코가 전하고자 핵심적인 내용입니다. 


함구령의 정확한 의미는 아무도 모른다


그 다음에 「마르코 복음」에 보면, 특이한 것 중 하나가 제자들이 그리스도이며 메시아라고 고백하면 예수님이 아무한테 말하지 말라는 대목이 등장합니다. 그러면 왜 아무한테 가서 말하지 말라고 할까요? 이를테면 [함구령]이라고 하는데, 이건 참으로 궁금한 이야기지만, 사실 아직 정확한 답은 없습니다. 다만, 당신은 메시아이며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다른 이에게 하지 말라는지 명확한 답은 없지만, 아마도 당신이 십자가에 못박히고 돌아가시고 부활하실 때끼지 적어도 그것을 유보해 둔 상태라고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세번에 걸친 수난예고가 갖춘 동일한 형태


그리고「마르코 복음」안에서는 세번에 걸친 수난예고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잡혀서 부활하신 것이라는 사실을 제자들에게 알려주는 것인데, 그 세번 모두 동일한 형태로 이어집니다. 일단 예수님께서 '앞으로 이런 이런 일을 당할거다.'라고 말하면 제자들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왜 그래야 하는가에 대한 가르침을 주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이 부분을 보면, 예수님께서 왜 수난하고 왜 죽고 그런 일을 당해야 하는지 우리가 조금 더 잘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왜 '사람의 아들'이라고 했을까


우선 복음서 안에서 예수님을 나타내는 가장 자주 사용되는 표현 중 하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과 '사람의 아들'이란 표현입니다. 여기서 '하느님의 아들'이란 표현은 상당히 명확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느님으로부터 태어났다는 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어머님은 마리아이고,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초대 교회부터 쉽게 받아들인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은 어렵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은 하느님에게서 태어났다는 것인데, '사람의 아들'은 '사람'에게서 태어났다는 표현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굳이 마르코는 왜 【사람의 아들】이란 표현을 썼을까요? 그런데 이 표현은 이후 「요한 복음」에 이르기까지 두루 나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예수님의 입에서 늘 항상 3인칭으로 스스로 표현하신다는 것입니다. 


3인칭으로만 쓰인 '사람의 아들'


예를 들어서 "나는 생명의 빵이다."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나는 사람의 아들이다."라고 표현한 적은 단 한번도 없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고난을 받고, 죽음을 당한다."는 식으로 표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사람의 아들'이란 표현이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이렇게 설명할 수가 있습니다. 과연 신이 죽을 수 있을까요? 그러면 하느님의 아들은 죽을 수 있을까요? 우리가 가진 일반적 상식으로 하느님은, 신은 죽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창조주가 창조물에 의해 죽을 수 있나요? 그것도 없어야 맞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고 있는 신학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이 인간의 손에 죽었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그냥 죽은 척 한 게 아니라 죽은 겁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죽었습니다. 그것을 확증하는 표현이 무덤에 갔다는 것입니다. 완전히 죽었기 때문에 무덤에 간 것이죠. 


가장 잔인한 사형방식인 '십자가형'


예수님 죽음에 대해서 가장 잘 이야기해주는 복음서는「요한 복음서」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는데, 십자기형 죽음은 이후 기원후 5세기까지 이어지던 처벌의 형태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교수형입니다. 미국은 다양하죠. 전기나 약물을 투여하기도 합니다. 현재 우리는 교수형이죠. 그렇게 가장 질이 나쁜 범죄를 저지른 이에게 내리던 형벌이 십자가형이었습니다. 그런데【십자가형】이란 형벌은 역사상 존재하던 형벌 중 가장 잔인한 형벌 중 하나였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누군가를 사형에 처할 때 어떤 것이 가장 좋은 것이냐면 빨리 죽이는 것이죠. 그런데 십자가형은 사람을 천천히 죽이는 형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십자가형을 당한 사람은 적게는 서너시간, 심하게는 하루가 넘게 십자가에 매달려서 천천히 죽어갔다고 합니다. 


숨을 쉴 수가 없지만, 쉽게 죽어지지도 않는다


그래서 1970년대 학자들이 의사들과 연구를 했습니다. 예수님이 실제로 어떻게 죽었는지를 알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형태로 십자가에 박히셨고 사인은 무엇이었는지를 조사했습니다. 결론은 예수님의 사인은 질식사였다고 합니다. 그렇게 십자가처럼 평평한 곳에 사람을 매달아놓으면 사람이 앞으로 쳐진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상태로 몸이 기울어지면서, 숨을 쉬기 힘들어지는데, 그렇게 서너시간이 지나면 몸이 자줏빛으로 변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숨을 쉬기 위해서 자신의 있는 힘을 향해 하늘을 향해 솟구치는 행동을 계속한다는 겁니다. 한숨 쉴 때처럼 공기가 부족할 때처럼 하는 것입니다. 


'뼈가 하나도 부러지지 않을 것이다'의 출처는 어디에


그런데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은 다른 사람과 함께 십자가에 매달렸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공무원들은 퇴근해야 하고, 안식일에는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죽어야 하는 이유였어요. 그래서 몽둥이로 다리뼈를 부러뜨리면 하늘로 몸을 움직이지 못하니 곧 죽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한테 갔더니, 죽은 것처럼 보였다는 겁니다. 그래서 다리 뼈를 부러트리지 않고 창을 가지고 살았나 죽었나 옆구리를 창으로 쿡 찔러보고 간 것이죠.「요한 복음」을 보면, 19장에서 이런 표현이 담겨져 있습니다. 내 뼈는 하나도 부러지지 않으리라는 것입니다. 


“그의 뼈가 하나도 부러지지 않을 것이다.” 하신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런 일들이 일어난 것이다. (요한 19,36)


파스카와 예수님의 돌아가심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구절이 성경 어디에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학자들이 눈에 불을 켜고 '이 애는 어디서 왔나?'하고 이 구절을 찾아보려 했지만, 이것을 통해 공감하게 된 것은 이것을 탈출기의 마지막 재앙과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맏이를 죽이는 재앙이죠. 이집트에 마지막 재앙을 내리면서. 유다인들에게는 피해갈 방법을 알려줍니다. 그게 바로 파스카입니다. 히브리어로 지나가다라는 뜻이죠. 어떻게 알려주냐면, 양이나 염소처럼 작은 가축을 하나 잡으라고 하죠. 그리고 그 짐승을 통째로 구워먹으라고 합니다. 파스카 규정에 보면, 탈출기나 민수기에서 등장하는 규정인데, 통째로 먹으라고 합니다. 그래서 모세에게 물어보죠. "모세님, 저희 2인 가족이라서 그거 다 못 먹어요."라고 하니까, "가장 가까운 집과 모여서 하더라도 절대로 자르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고기를 아침에 해가 뜨기 전에 서둘러 먹으라고 하죠. 그리고 그 양을 잡을 때 흘린 피를 문설주에 바르라고 합니다. 그러면 하느님의 천사가 맏이를 죽이면서 지나가다가 그 집을 지나친다고 해서 파스카가 된 것이죠.


이집트 종살이에서 해방된 것에서 연상하라


많은 학자들이「요한 복음」에 나오는 "내 뼈는 하나도 부러지지 않으리라"는 표현을 "양을 통째로 잡아먹으라"는 표현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가 탈출기의 파스카의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즉 이 양을 통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집트 종실이에서 해방됩니다. 그리고 예수님 죽음을 통해서 우리 모두는 죄의 종살이에서 구원된다고 본 것입니다. 그리고 바오로 사도 또한 똑같이 이야기합니다. 마치 양을 통해서 구원과 해방을 성취할 수 있었던 것처럼,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그런 자유를 얻게 되었다는 것이 신약시대 거의 모든 신앙인들의 생각이었습니다. 


창조주가 창조물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는 역설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을 바로 탈출기에 나오는 마지막 재앙의 모습과 같은 것으로 받아들이고 실제로 그렇게 이해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인간의 손에, 그것도 인간이 내리는 가장 나쁜 형벌로 죽었다는 건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생긴 여러 이단들을 보면. 이것을 받아들이지 못한 겁니다. 단순한 생각에서 비롯된 것인데, '어떻게 신이 자신이 만든 창조물 손에 죽어?'라고 생각한 겁니다. 신은 죽을 수 없으니까, 죽은 척 했다고 본 것인데,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기때문에 단죄를 받았습니다. 


신의 아들이며, 사람의 아들이 수난을 받은 까닭


그런데 예수님 죽음을 쉽게 받아들이고 이해하지만, 그 죽음 자체가 쉬운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이 인간의 손에 죽었기때문이니다. 그래서 복음서나 신약의 많은 내용들은 굉장히 역설적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있을 수 없는 사건인 신이 인간의 손에 의해 죽는다는 사건을 통해서 하느님이 우릴 구원했다는 것이 복음서의 내용이고 신약성경 전체가 가진 내용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아들]이란 표현에는 그런 내용이 담겨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아들이지만, 인간의 손에 의해서 십자가에서 죽고 수난받을 것이란 의미를 담아서 복음서에서는 [사람의 아들]이라고 표현한다는 겁니다.


'사람의 아들'이란 표현에 담긴 다른 뜻


그리고 복음서에서 보면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표현하고,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있다'라고 표현됩니다. 이 두가지 표현은 모두 하느님에게만 표현되는 것입니다. 하느님만이 죄를 용서할 수 있고, 안식일의 주인인데, 복음서에서는 [사람의 아들]에 이러한 의미를 함께 담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지만, 곧 하느님이지만, 수난하고 죽으실 것이란 걸 힘 포함하는 용어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11:34 3교시 끝.)




가톨릭교리신학원 2단계 1학년(3학년) 하계연수
2015-8-22 토요일 서울 혜화동 교리신학원 지하 강당

공관복음과 사도행전(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오전 3교시(10:50~11:35)

허규 베데딕토 서울대교구 신부. 1999년 7월 7일 사제 수품, 뮌헨 루드비히 막시밀리안 대학교에서 성서신학 박사학위를 받고,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신약성서 교수로 요한 묵시록과 희랍어 등을 가르치고 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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