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학자, 악의 드라마화(극화)(Dramatization of Evil)라는 개념 

프랭크 탄넨바움

 Frank Tannenbaum (3 March 1893 - 1 June 1969)


프랭크 탄넨바움(1893.3.4~1969.6.1)은 오스트리아계 미국인 역사학자, 사회학자, 그리고 범죄학자이다. 콜롬비아(Columbia) 대학 재직 당시 근대 멕시코 역사학에 큰 업적을 남겼다. 


초기 생애 Early life


그는 1893년 3월 4일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났고, 가족은 동유럽 유태인 가정 출신으로. 1905년 미국으로 이민을 왔다. 청소년 시절 가출을 한 뒤로 고교를 제대로 졸업하지 못한 그는 밑바닥 일을 전전하면서, 당대의 급직적인 노동정치의 세계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청년시절 그는 식당에서 버스보이(busboy, 빈그릇, 식탁 치우는 알바)로 일했다. 국가 경제가 매우 어렵던 1913년부터 1915년 사이, 20세부터 22세 시절에 그는 세계 산업 노동자 조합(IWW, Industrial Workers of the World, 1905년 Chicago에서 조직된 국제적 급진적 사회주의 단체, 1920년 해산)의 지도자가 되었다. 1914년 1월, IWW 부설 식당종업원 산별노조(Waiter's Industrial Union)의 회원이던 21세의 탄넨바움은 뉴욕시 교회들에 구호를 요청하는 캠페인을 제안했다. 같은 해 2월, 그는 많은 노조원들을 교회로 데리고 가서, 예배를 방해하고, 음식과 피난처를 제공하라고 요구했다. 대부분의 교회들은 그 요구에 응했지만, 뉴욕의 언론매체들, 특히 뉴욕타임즈(The New York Times)는 탄넨바움과 노조원들(Wobblies*)을 비난했다. 3월 4일에 탄넨바움은 일단의 실업자들을 럿거스 광장(Rutgers Square)에서 웨스트브로드웨이(West Broadway)에 자리한 성 알폰소 성당(Catholic St. Alphonsus Church**)으로 데리고 갔다. 

Wobblies는 우울증(병)이란 뜻 외에, (구어체) 세계산업노동자조합(IWW) 조합원, 노조의 조직책을 뜻하기도 함.

** 1847년 설립되었다가 1981년에 없어짐. 그 자리에 소호그랜드호텔이 생김.


그곳에 도착했을 때 그들이 만난 것은 경찰병력과 요구를 거절한 주임신부였다. 그래서 탄넨바움과 190명의 시위대는 체포되었고, 탄넨바움은 폭동을 선동한 혐의와 5천 달러의 보석금을 내야만 했다. 


재판 결과, 시위대 중 1명은 60일 구류, 4명은 30일, 그리고 3명은 15일, 나머지는 훈방조치되었다. 탄넨바움은 1년간 구속되었으며 벌금 500달러에 처해졌다. 그가 1년간 지낸 곳은 블랙스웰 아일랜드(Blackwell's Island)였다. 그리고 교도소에서 석방되어서도 탄넨바움은 IWW에서 노동운동을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 1915~1916년 뉴저지(New Jersey)의 베이욘에 위치한 베이욘 정유공장 파업 당시 엘리자벳 거를리(Elizabeth Gurley Flynn), 알렉산더 버크만(Alexander Berkman)과 함께 체포되었다. 


아나키스트 정치운동가 엠마 골드먼(Emma Goldman, 1869~1940)은 자신의 회고록 [나의 삶을 살아가며(Living My Life)](1931)에서 그의 체포와 투옥에 대해 이렇게 남기고 있다.


우리는 모두 프랭크의 열렬하게 깨어있으면서도 잘난 체 하지 않는 태도(wide-awakeness and his unassuming way)를 사랑했다. 그는 굉장히 많은 자유로운 시간들을 우리 사무실에서 보내면서, 마더 어쓰(Mother Earth, 미국 아나키스트 잡지)와 관련하여 글을 읽고 또 도움을 주었다. 그의 훌륭한 자질(fine qualities)은 언젠가 그가 노동투쟁의 현장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는 기대로 이어지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중 어느 누구도 그가 그렇게 빠르게 그런 기대에 부응하게 될 것이라는 예상을 하지는 못했다. 


베이욘 사건 이후, 탄넨바움은 청년시절의 급진주의(Radicalism)을 포기했다.



학자로서의 삶 Academic career


몇몇 독지가의 도움을 받은 그는 컬럼비아 대학에 다녔고, 같은 수업을 듣는 학생 중에 새뮤얼 로스(Samuel Roth)이 있었다. 1921년, 28세의 탄넨바움은 학사학위를 받았고, 브루킹스 연구소(the Brookings Institution)에서 경제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그는 남부 지역에 주둔한 미 육군에 입대해서 군생활을 했다. 이후 멕시코로 건너가 농촌교육에 관한 연구를 실시하고, 라자로 카르데나스 대통령(President Lázaro Cárdenas)의 자문역을 맡았다.


1931년, 38세의 그는 허버트 후버(Herbert Hoover) 대통령이 설립한 법률준수 및 집행 위원회(일명 위커스햄 위원회)에 교정시설, 보호관찰, 가석방(Penal Institutions, Probation and Parole) 에 관한 연구실적을 보고했다. 

  • The National Commission on Law Observance and Enforcement (also known unofficially as the Wickersham Commission) was a committee established by the U.S. President, Herbert Hoover, on May 20, 1929. Former attorney general George W. Wickersham (1858–1936) chaired the 11-member group, which was charged with surveying the U.S. criminal justice system under Prohibition and making recommendations for public policy.


1932년, 39세에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코넬(Cornell) 대학교에서 범죄학을 가르쳤다. 

1935년, 42세에 그는 컬럼비아 대학 교수가 되었고, 라틴 아메리카 역사 관련 교수가 되었다. 주목할 만한 관련 학생으로는 후에 럿거스(Rutgers) 대학 역사학 교수가 되었으며, 라틴 아메리카의 노조에 대한 연구와 반체제 공산주의 정당 연구로 유명한 알렉산더Robert J. Alexander)를 들 수 있다.


1944년, 51세가 되었을 때, 탄넨바움은 컬럼비아 대학의 세미나 형식을 제안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한 그룹의 컬럼비아 대학 교수들과 다른 교수진, 그리고 학생들이 함께 모여 평화와 전쟁 또는 당시의 주요한 주제들에 대한 토론을 하는 형식이었다. 그는 1945년 2월부터 5월까지, 랜들(J.H.Randall Jr.), 슈나이더(Herbert W. Schneider) 등과 함께 정부에 대해 토론하는 세미나에 참석하였고, 그의 논문을 소개했다. 제목은 [협력하는 주(州), (The Coordinate State)]와 [사회 권력의 균형(The Balance of Power in Society)]이었고, 이후 같은 이름의 책으로 출간하기도 했다.


20년이 지난 1965년, 컬럼비아 세미나(the Columbia Seminars)에 대한 그의 책 [학자 공동체(A Community of Scholars)]이 출간되었고, 그때까지 39회의 세미나가 진행되었다. 1965년, 72세의 그는 컬럼비아 대학에서 은퇴했고, 1969년 76세의 나이로 뉴욕시에서 사망했다. 


유산 Legacy


탄텐바움은 농업보존 행정청(Farm Security Administration)의 설치에 필요한 법률제정을 도았다. 

그가 제안한 악의 드라마화(극화)(Dramatization of Evil)라는 개념은 상징적 상호작용주의자들의 낙인이론을 발전으로 이어져서 이후 사회학과 사회심리학의 주요개념으로 널리 활용되었다. 이 이론의 영향력에 대해서 케리 타운센드(Kerry Townsend)는 이렇게 말했다.


"프랑크 탄넨바움의 이론인 악의 드라마화라는 개념은 범죄자의 형성과 범죄행위의 꾀임에 빠지는 과정을 설명한다." 타운센트는 탄넨바움의 사상(theoretical thought)을 상징적 상호작용주의(Symbolic Interactionism)에 포함시켰다. 상징적 상호작용주의자들의 관점은 개인적 수준의 상호작용을 강조하는데, 이는 조지 허버트 미드(George Herbert Mead)와 찰스 후튼 쿨리(Charles Horton Cooley)의 저작들을 통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개념이다. 그들은 탄넨바움이 주장한 이론에 들어있는 사회적 반응이론의 기초를 닦은 인물들이다. 


탄넨바움의 이론은 여전히 대학의 범죄학 교육에 포함되어 있으며, 특히 플로리다 주립대학교나 메릴랜드 대학에서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다.



이상 2020년 4월 1일(수) 정리

출처: 영어 위키피다아 '탄넨바움'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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