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노미-긴장 이론의 저자 

로버트 K. 머튼

 Robert King Merton (4 July 1910 - 23 February 2003)


1910년, 그가 태어날 때의 이름은 메이어 로버트 쉬콜닉(Meyer Robert Schkolnick)이었다. 

머튼은 미국 사회학자이며, 대부분의 경력은 컬럼비아 대학의 교수로 보냈다. 1994년 과학사회학(sociology of science)의 기초를 세운 공헌으로 국가과학훈장(National Medal of Science)을 받았다. 그는 현대 사회학의 아버지로 간주되기도 하며, 범죄학에도 큰 공헌을 남겼다. 


머튼은 "의도치 않은 결과(unintended consequences)", "준거집단(reference group)", 그리고 "역할긴장(role strain)"과 같은 주목할 만한 개념들을 개발했다. 그러나 가장 잘 알려진 용어들을 꼽는다면 "역할모델(role model)"과 "자기충족적 예언(self-fulfilling prophecy)"을 들 수 있다. 현대 사회학, 정치학, 그리고 경제학 이론의 중심 요소인, 자기충족적 예언이란 한 가지 유형의 과정인데, 그것은 어떤 상황의 결과 또는 개인이나 집단이 행동하는 방식에 대한 믿음이나 기대가 포함된 것이다. 머튼의 정의대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
The self-fulfilling prophecy is, in the beginning, a false definition of the situation evoking a new behavior, which makes the originally false conception come true."

자기충족적 예언이란, 애초에, 새로운 행동을 불러일으키는 상황에 대한 잘못된 정의이며, 그것은 원래의 그 잘못된 개념이 이뤄지게 만드는 것이다. 

(자기충족적 예언 = 자기실현적 예언 = 자기성취적 예언)



머튼의 '역할 모델(role model)' 개념은 컬럼비아대학교 의과대 학생들의 사회화에 관한 연구에서 처음 등장했다. 그 용어는 그의 준거집단(reference group) 개념에서 자라난 것이다. 준거집단에서 개인들은 서로를 비교하지만 반드시 그것이 소속집단일 필요는 없다. 사회적 역할이란 머튼의 사회적 집단 이론의 중심이었다. 머튼은 개인보다는 역할과 지위를 강조했는데, 개인은 사회적 구조 안에서 정해진 하나의 지위를 가지고 있기에, 그 지위에 따라서 모든 일련의 예상되는 행동들을 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Life

초기 생애 Early life


로버트 K. 머튼은 1910년 7월 4일 필라델피아에서 메이어 로버트 쉬콜닉이란 이름으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이디시어를 사용하는 러시아계 유태인이었고, 1904년 미국으로 이민 왔다. (* 이디시어는 중앙 및 동부 유럽에서 쓰이던 유대인 언어)

그의 어머니 아이다 라소프스카야(Ida Rasovskaya)는 유대교 회당에 참석치 않는(언-시너고그, un-synagogued) 사회주의자이며 급직적 자유주의자의 성향을 지녔다. 아버지 아론 쉬콜닉오프(Aaron Schkolnickoff)는 직업이 재단사인데 미국에 입항 당시에는 공식적으로 "해리 쉬콜닉(Harrie Skolnick)"이란 이름으로 등록 했다. 머튼의 가족은 남부 필라델피아에서 아버지가 운영하던 우유제품 가게가 아무런 보험도 들지 않은 상태에서 불에 타버린 후 궁핍한 환경에서 살았다. 이후 아버지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목수의 조수로 일했다. 머튼은 비록 찢어지게 가난한 성장기를 보냈지만, 그는 자신에게 많은 기회가 올 것이라고 믿었다. 


사우스 필라델피아 고교(South Philadelphia High School) 시절, 머튼은 근처의 문화 교육센터들들 자주 방문했다. 예를 들면, 앤드류 카네기 도서관(Andrew Carnegie Library), 음악 아카데미(Academy of Music), 중앙도서관(Central Library), 그리고 미술관(Museum of Arts) 등이다. 그가 사용하게 된 Robert K. Merton이란 이름은 당시 마술 공연으로 무대에 섰을 때 예명으로 처음 사용한 이름이었다. 


84세이던 1994년 머튼은 남부 필라델피아에서 자라던 시절을 회상하면서 당시 그곳은 "온갖 종류의 자본들 - 사회자본, 문화자본, 인간자본,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가 공공의 자본이라고 부를 수 있는 자본들 - 오로지 개인 금융을 제외한 온갖 종류의 자본을 젊은이들에게 제공한 곳"이라고 말했다. 


어린 머튼은 마술에 강한 흥미를 가지고 소질을 개발했는데, 그것은 전적으로 누이의 남자친구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그는 공연무대의 예명으로 처음에는 메를린(Merlin)이란 이름을 선택했다가, 나중에는 좀 더 미국화된 이민자 가족 이름을 사용하려고 성을 머튼(Merton)으로 바꿨다. 이름을 로버트(Robert)라고 정한 것은 19세기 프랑스 마술사이며, 현대식 마술(컨져링, conjuring)의 아버지로 여겨지는 인물인 장 유진 로베르-우댕(Jean Eugène Robert-Houdin, 1805~1871)을 이름을 본딴 것이다. 결국 공연무대의 예명이던 로버트 머튼(Robert Merton)은 그의 이름이 되었고, 템플 대학교에서 학위를 받을 때에도 이 이름을 사용했다.


학생 시절 Student life


머튼은 사회학자의 길을 시작한 것은 필라델피아의 템플 대학교(Temple Univ)에서 조지 심슨(George E. Simpson)의 지도를 받으면서 부터이다(1927~1931). 머튼은 심슨의 연구조교였으며 인종과 미디어에 대한 연구는 그를 사회학의 길로 들어서게 했다. 심슨의 지도를 받으면서, 머튼은 미국 사회학회 연례회에도 참석했고, 거기에서 하버드 대학교의 사회학과 설립자이자 초대 학과장인 피트림 소로킨(Pitrim A. Sorokin)을 만났다. 그리고 머튼은 하버드 대학에 응시를 했고, 소로킨의 연구조교(1931~1936)로 일했다. 많은 사람들은 머튼이 템플대학을 졸업한 후 하버드에 합격할 것인지에 대해 의심스러워했지만, 그는 그런 의혹이나 불신을 순식간에 불식시키면서 2년차에 접어들었을 때 소로킨과 함께 책을 출간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그는 1934년에 이르러 그 자신의 논문들 <프랑스 사회학의 최신 동향>(Recent French Sociology), <700~1,300년 아라비아 지식 발달의 과정>(The Course of Arabian Intellectual Development, 700–1300 A.D.), <산업 발명률의 변동>(Fluctuations in the Rate of Industrial Invention), <과학과 군사 기술>(Science and Military Technique) 등을 출간했다. 


이 일을 마친 이후에, 머튼은 하버드 대학에서 석사와 박사과정을 모두 마쳤다. 1938년 대학원을 졸업할 즈음에, 그는 그 자신을 사회학 분야의 유명학자 반열에 올리게 만든 첫번째 주요 연구 분야였으며, 이후 과학사회학(sociology of science) 분야를 세우는데 기여한 연구였던 <17세기 영국의 과학, 기술 그리고 사회>(Science, Technology, and Society in Seventeenth-Century England)에 대한 연구에 착수했다. 머튼의 연구는 막스 베버의 유명한 주장인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경제 사이의 관련성과 유사하다. 머튼은 개신교 경건주의(Protestant Pietism), 청교도주의(Puritanism), 그리고 초기 실험 과학의 긍정적 관련성을 제시했다. 


교수 시절 Teaching career


그는 1938년에 하버드 대학에서 강의를 했지만, 곧바로 툴레인 대학(Tulane Univ.)의 사회학과장 겸 교수가 되었다. 1941년에 컬림비아 대학 교수가 되었으며, 그곳에서 이후의 모든 인생을 지냈다. 무려 50년이 넘는 세월동안 그는 컬럼비아 대학에 재직하며 수없이 많은 영예로운 칭타이틀을 얻었다. 그는 1942년부터 1971년까지 대학내 응용사회학 연구단(Bureau of Applied Social Research) 부단장으로 있었고, 1963년 사회학과 기딩스 특훈교수(Giddings Professor of Sociology)가 되었다. 그리고 1974년 교수 중 최고의 영예로운 자리인 대학특훈교수(University Professor)에 임명되기도 했다. 또한 특별공로교수(Special Service Professor)라는 타이틀도 얻었는데, 이는 명예교수에게 이사회가 부여하는 자격으로 대학에 대한 특별한 공적을 남긴 자에게 주어지는 것으로, 1979년 은퇴할 당시 주어졌다. 그는 또한 록펠러 대학교(Rockefeller Univ.)의 겸직교수였으며, 러셀 세이지 재단(Russel Sage Foundation)에서 최초의 재단 특훈 학자(Foundation Scholar)가 되었다. 그는 1984년 강단에서 물러났다. 컬럼비아 대학교는 그의 학문과 대학에 대한 오랜 세월의 공적을 인정하면서, 1990년에 로버트 K. 머튼 사회과학분야 교수 공적상(Robert K. Merton Professorship in the Social Sciences)을 제정했다. 




이상 2020년 4월 8일(수) 작성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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