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공현대축일 2014년 1월 5일 10시
만수리 공소 윤종관 신부
태양은 밤에 도 뜬다!
태양의 시간은 우리의 역사이므로 ... !
‘주님 공현 대축일’은 본래 1월 6일에 올리게 되어 있는 축제입니다. 그러나 우리 한국에서는 1월 6일을 공휴일로 할 수 없으므로 신자들의 편의를 위하여 1월 2~8일 사이의 주일(일요일)에 이 축제를 올립니다. 저의 학생시절 때까지는 주님의 성탄 대축일로부터 13일 만에 ‘삼왕래조(三王來朝)’라는 축일 명칭으로 지냈습니다. 그 13일만의 이 축일을 동방교회에서는 주님의 성탄 축일로 지냅니다. 동방 사람들이 예수 아기를 찾아온 사실이야말로 진정 강생의 신비가 인류에게 알려진 것으로 더 큰 의의를 갖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루카 복음서 2장에 의하면 베들레헴 인근의 가난한 목동들이 마구간에 찾아옴으로써 강생의 신비가 전해진 것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만, 마태오 복음서 2장에 의하면 멀리서부터 동방 박사들 즉 이방인들이 찾아옴으로써 강생의 신비가 드러나게 된 것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루카 복음서는 소외된 사람들에게서 즉 인간 사회의 변두리에서 주님의 오심이 알려지기 시작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고, 마태오 복음서는 세계의 변방에서부터 인류가 주님 계신 곳으로 모여오게 함으로써 강생의 신비가 알려지기 시작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루카 복음서에 의하여 강생의 신비가 우리 인간 삶의 밑바닥에까지 구현되는 것을 보는 한편, 마태오 복음서에 의하여 강생의 신비가 세계만방의 온 인류 즉 모든 이방인에게 미치게 되었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루카 복음서에 의한 12월 25일의 축제에서부터 마태오 복음서에 의한 1월 6일 축제에 이르는 과정으로 교회는 주님 강생의 신비에 대한 전례를 올립니다. 이러한 12월 25일로부터 1월 6일에 이르는 성탄절의 축제는 강생 신비의 입체성과 역동성과 역사성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첫째로, 강생 신비의 입체성을 성탄 대축일에서 공현 대축일 간에 우리는 체험합니다. 성탄의 밤에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일어난 사건은 저 높은 하늘로부터 어두운 인간의 삶 속으로 주님께서 내려 오셨음을 말해주는 것임을 루카 복음 식의 강생 신비에 대한 수직적 구현으로 12월 25일에 체험했습니다. 주님께서 인류의 역사 속으로 들어오셨음을 말해주기 위하여 로마 제국의 황제와 그 총독의 통치 체제하에 아기가 탄생하였음을 소개하고(루카 2, 1∼7 참조), 그 세속 권세영역의 변두리에 소외된 상황 속에서 어두운 밤중에 가난한 사람들에게 영광의 빛을 두르고 전해지는 강생의 메시지를 알려주는 것이 루카 복음서가 지닌 강생 신비의 수직적 분위기입니다(루카 2, 8∼20 참조).
그러한 반면, 마태오 복음서에서는 요셉이라는 의인의 마음속에서부터 변화가 일어나는 과정을 통하여 동정녀가 무사히 아기를 낳아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예언된 ‘임마누엘’의 신비가 이루어짐이 강생이었음을 소개하고(마태 1, 18∼25 참조), 이어서 예루살렘이라는 중심부에 멀리 동방이라는 주변부(변방)의 인류가 모여오게 된 사건으로써 이 강생 신비의 수평적 분위기를 엮어주고 있습니다(마태 2, 1∼12 참조). 이렇게 루카 복음 식의 수직적 강생 신비의 구현과 마태오 복음 식의 수평적 강생 신비의 구현이 성탄절로부터 공현 대축일에 이르는 강생 신비에 대한 교회의 입체적 고백이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구원 메시지를 우리 사회 곳곳에 그리고 세계만방에 전해야 함을 깨우쳐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강생 신비의 역동성을 우리는 성탄절로부터 공현 대축일에 이르는 축제로 체험합니다. 성탄절에 우리는 루카 복음서에 따라서 무엇을 보았습니까? 하느님이신 분께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잠든 밤에 이 세상의 가장 후미진 베들레헴 동리 밖 마구간에서 어린 아기로 태어나셨음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 세계에서 가장 알려지지 않은 베들레헴이라는 작은 마을 밖 그것도 어느 누구 상상할 수조차 없는 마구간에서 태어난 아기를 향하여 하늘의 광명이 쏟아져 내리기에 세계의 극변으로부터 이방인들이 몰려오게 되었음을 또한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소외된 작은 장소에 가득 차 퍼져나가는 천상의 합창은 버림받은 사람들의 가슴속을 기쁨으로 채워주던 것임을 보았습니다. 작은아기의 알려지지 않은 탄생이 이 세상의 가장 낮은 곳에 묻혀 있던 사람들과 이 세상의 제일 먼 곳에 있던 사람들을 몰려오게 하는 위대한 힘을 발휘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아기의 탄생 소식은 세상의 지배자에게 직접 전해지지 않지만, 세력가들의 마음을 온통 뒤흔들 만큼 강렬한 힘을 발휘하는 뉴스로써 멀리서 찾아온 사람들의 열정으로 말미암아 알려지게 됩니다.
이 소식을 갑자기 듣게 된 사람들의 처지가 불안해질 만큼 이 소식은 예사로운 것이 아니지요. 세상을 바꿀 소식이었던 것입니다. 이 사실은 구세주 강생이란 이제 다른 세상을 만들 분이 오셨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제 한 번 있었던 사건이 아니라 이 사건으로 오늘도 이 세상이 바뀌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하실 일을, 곧 그 분께서 세우셨던 심오한 계획을 이제 실행하시게 되었다는 것입니다(에페 3, 3∼5 참조). 그러므로 이 강생 소식은 그저 들려오는 한 소식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큰 변혁을 일으키는 중대사건인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 강생 신비는 저 외진 마을 어귀에서부터 세계 방방곡곡에 미치는 사건이 되고, 저 버림 받은 변두리 사람들에게서 일어난 보잘것없는 일거리가 예루살렘 당국 중심부를 흔들어 놓는 사건을 일으키는 위력으로서의 역동성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강생 신비의 역사성을 우리는 특별히 이 공현 대축일에 깨닫게 됩니다.
주님의 공현(公現 : Epiphania : splendid appearance)이라 함은, 그 말의 뜻이 그렇듯이, 주님께서 우리의 역사에, 그래서 우리의 세상에 출현하셨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시대를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며칠 전에 계사년에서 갑오년으로 넘어오는 새해맞이를 했습니다. 이러한 새해를 2014년이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구세주)께서 우리 역사에 오셨음을 연대로 표기하여 ‘A.D.2014’라 합니다. ‘A’는 라틴어로 ‘해(年)’를 뜻하는 Annus의 첫 자입니다. ‘D’는 ‘주님’을 뜻하는 ‘Dominus’의 첫 자입니다. 그래서 Anno Domini 2014, ‘주님 오신 해로부터 2014년 째’ 라는 것이 ‘A.D.2014’입니다.
이런 의미에 따라서 저는 ‘천주강생2014년’이라는 우리 한국 천주교회의 연대표기 전통을 교우님들께 상기시키고 싶습니다. 우리 인류의 삶이 주님 오심으로 그 의미가 부여되어 왔음을 뜻하는 것이 이러한 전통 아니겠습니까? 묵은 한해가 가고 새해를 맞이하면 사람들이 요란스런 행사들을 합니다. 동해안 정동진이다 지리산 천왕봉이다 또는 지방 따라 어느 산봉우리다 하는 1월1일 새벽의 해맞이 행사를 합니다.
새해의 첫 번 뜨는 일출보기라는 법석으로 무엇이 새로워지고 좋아지는지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그냥 기분 풀이인가요? 2014년도 1월1일 아침의 일출이 보통 날들의 일출과 다른 점이 무엇이며, 그것으로써 사람들의 운명과 삶에 무엇이 이루어진다는 것일까요? 그 1월1일 아침 햇발이 무슨 신(神)의 능력과 같은 것인가요? 과연 그 새해의 첫 아침 떠오르는 해가 무슨 신(神)과 같은 존재인가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캘린더로 한 해를 넘기면서 얻는 의미란, 우리 인류의 역사에 들어오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인류와 함께 가주시고 계심을 겸허하게 그리고 감사하게 깨닫는 것으로 새해맞이를 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걸어온 길이 혹여 그리스도 함께 하는 삶인 것을 잊고 있었다면, 이제 다시 새삼스럽게 그리스도의 시대와 우리의 시대가 하나임을 깨달아 그 새삼스러움으로 우리의 삶을 재출발하는 다짐을 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다짐으로 우리가 구세사의 여정을 가는 발걸음을 내딛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는 곧 우리 인류 역사의 중심이자 주인공이신 분이 강생하신 구세주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구세주께서 우리 세상에 오셔 계심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예루살렘 당국자들처럼,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파묻힌 혼란의 암흑 속에 휘말려 들어가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동방 박사들이 혹 나를 찾아와서 다음과 같이 물어볼지도 모릅니다.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마태 2, 2)
이렇게 동방 박사들이 말하였을 때 예루살렘 당국자들은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당황하고 예루살렘이 온통 술렁거렸다고 성서 기자가 전하고 있습니다(마태 2, 3 참조). 이 세계가 변혁을 이루게 될 하느님의 위대한 사건이 일어났음을 저 멀리 세상의 동쪽 변두리 이방인들이 알아차리고 수 천리 길을 찾아왔는데도, 예로부터 하느님의 도성이었던 그 예루살렘 중심부의 당국 사람들은 깜깜하게 모르고 있었음은 무슨 연고이겠습니까? 저 멀리서부터 진리의 별빛 따라 천리 길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이방인들이 찾아오는 동안에 헤로데의 궁전과 예루살렘 성전에서는 무엇을 했단 말입니까? 세상의 이러한 중심부인 예루살렘 당국자들에게 있어 베들레헴 그 버려진 동리 밖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난 하느님의 조용한 그러나 위대한 사건 소식이 전해지지 않은 까닭은 무엇이겠습니까?
해가 지고 밤이 되어 깊어진 겨울밤의 하늘은 도시의 하늘이건 시골의 하늘이건 같은 별들이 반짝이는 하늘이겠지요. 동지섣달 긴긴 밤 쓸쓸한 산동네의 가난한 지붕들 위에서 밤하늘이 매섭게 얼어붙을수록 그 밤하늘 별들은 처연한 산등을 알아볼 수 있게 더욱 반짝이겠지요. 이러한 산동네 베들레헴 마을 밖 사람들에게 추운 겨울날 하루를 또 다른 하루로 건너게 하여주는 한 밤의 하늘은, 그 목동들의 하루의 삶을 보석 같은 사랑의 이야기로 수놓아 이불처럼 덮어주는, 그야말로 유일한 삶의 보호막과 같이 반짝이는 별들의 밤하늘이었겠지요.
그러나 사람의 힘만이 위대함으로 칭송 받는 곳! 그래서 잘난 사람들의 위세 등등한 이름들이 곧 하늘을 뒤덮어 반짝거려야 하는 그 곳! 권세자랑으로 떼져 모여 힘겨루기를 한다는 그 곳! 그곳을 일컬어 ‘사람들의 도시’라 합니다. 그곳은 본래 하느님께서 무엇인가 하시고자 하셨던 예루살렘이었지요. 허나, 이제 하느님의 도성이 아니라 오로지 사람들의 도시로 변한 그 곳에서는 그 하늘을 사람들의 권세 좋은 이름으로만 수놓아 그 위대한 이름들의 빛깔아래 하느님의 별빛은 그 반짝임을 잃었던 것이지요.
그 도성의 하늘 아래 천사들이 합창을 한들 그 힘 좋은 사람들 이름으로 지붕 삼은 예루살렘 사람들의 호사로운 잠자리에 무슨 구원의 메시지로 들려올 수 있었겠습니까? 오늘날도 구세주 오시고 우리들의 역사 2014년이라는 인류 구원의 세계사에 그 분이 함께 계심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쾌락과 물질 만능의 흥청거림 속에서 그리고 허울 좋은 세계경제주의의 약육강식 그물 망 속에서 우리의 하늘은 구원의 소식을 접수할 여지가 없는 듯 캄캄하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이라는 우리가 새로운 한 해 2014년을 맞이함에 있어서 우리에게 그것이 예사로운 일이 아닌 까닭은, 우리 구세주 그리스도 강생하신 때를 기원으로 삼는다는 것 아니겠어요? 이는 곧 하느님의 인류 구원 역사 가운데에 우리가 살고 있음을 알아차려야 함을 말해주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하느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신다’는, 곧 ‘임마누엘’의 사건이 우리 역사에서 펼쳐지고 있다고 함을 알려주는 것이 오늘 ‘주님 공현’입니다. 즉 주님께서 우리에게 나타나셨음을 경축하는 날의 전례로 자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오늘의 축제로 새해 일 년의 전례력과 각 성당 공동체의 주요 사목계획을 발표합니다.
이렇듯 하느님께서 우리의 세상에 들어오셔서 우리 인류의 시간 한 가운데에 계심을 동방 박사들이 찾아와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들이 멀리서 알아보고 찾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깨닫지 못하고 당황해 했던 예루살렘 당국자들이 부끄럽게도 먼지 묻은 성경책을 꺼내들고 주님 오셔 계심에 대한 예언을 뒤늦게 확인하려 했던 것처럼, 우리 자신 또한 구원 소식을 깨닫지 못하고 살지는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미 와 계심을 새삼 깨우쳐 주는 이 축제의 날에 결심합시다. 주님의 구원의 역사에서 탈락자와 같이 되지 않도록 주님의 오신 징후를 항상 성경 말씀과 우리 생활의 연관점 속에서 찾아가며 살기로 합시다. 그리고 세상의 주변에 아직 이방인의 처지에서 구원의 빛을 찾으려 하는 외교인들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모습 가운데 주님 구원의 사건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아 볼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먼저 얻은 신앙의 빛을 교회 밖 사람들도 볼 수 있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제1독서의 다음과 같은 이사야의 외침을 듣고 깨달아야 합니다.
“예루살렘아,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 주님의 영광이 네 위에 떠올랐다. 자 보라, 어둠이 땅을 덮고, 암흑이 겨레들을 덮으리라. 그러나 네 위에는 주님께서 떠오르시고, 그분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라. 그들이 모두 모여 네게로 온다.”(이사 60, 1∼ 3)
주님 오심을 깨달은 우리의 삶을 통하여 그 주님을 세상 사람들이 알아보게 하라는 예언자의 외침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은 어둡습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 덕분에 세상 사람들이 빛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즈음 우리 사회에서는 속임수가 진실을 덮어 “안녕하지들 못하다”고 하는 탄식이 자괴처럼 퍼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실을 찾아나서자고 외치면 이른 바 ‘종북딱지’를 뒤통수에 붙여 손가락질을 해댑니다. 흡사 예루살렘 하늘인 것처럼 딴 데서 보이던 별빛이 우리나라 하늘에서도 사라진 것 같습니다. 그러한 우리의 새해는 아직도 밤이 지나지 않은 듯 어두운 하늘입니다. 그러나 그 예루살렘을 벗어나 베들레헴 마구간을 향하는 사람들의 길에서는 밤하늘에 그 별이 빛나고 있었습니다(마태 2, 9 참조).
우리는 ‘사람들의 도시’가 아닌 ‘마구간’을 향하여 갈 때 거기 위에서 찬란한 빛이 비추고 있음을 발견할 것입니다. 거기 찾아가는 사람들의 둘레를 주님의 영광이 비추었다고 했듯이(루카 2, 9 참조), 후미진 곳에 감추어진 광명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세상에서 감추어져 있듯, 어둠 속에서라도 깨달음의 광채를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진실이 들어납니다.
그렇습니다. 자성이 먼저 있어야 빛을 찾을 수 있습니다. 모두가 미몽일지라도 스스로 깨닫고자 하는 사람의 눈에는 빛이 보입니다. 그 사실을 우리는 성탄절과 공현절의 축제를 통하여 체험하게 됩니다. 위에서 낮음에로(수직으로) 내려오신 분, 그분을 멀리서(수평으로) 찾아오게 하신 그분 자신의 광채를 우리는 체험합니다. 그러한 광채는 곧 태양 자체이신 그분이시기에 어둠 속에서도 찬란하게 비추는 빛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체험을 저는 역설적 표현으로 말하고 싶습니다.
“태양은 밤에도 뜬다.”
‘밤에 뜨는 태양!’
어찌 그럴 수 있는가?
저는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란 어느 한 곳에 머무는 삶이 아닙니다. 비록 어느 주소지에 살고 있다 하더라도 늘 이동하며 살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동하고 있는가? 시간과 시간을 따라 이동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이란 시간을 여행하는 삶이지 않습니까? 늘 ‘이동 중’입니다. 그렇듯이 우리의 삶은 장소를 일컫는 평면에 머문 것이 아니고, 시간을 일컫는 흐름을 따르고 있습니다. 머무는 것이 아닌 역동의 것이 우리의 삶이요, 그러므로 그 삶에 우주적 입체성을 부여하는 것이 시간인 것입니다. 삶이 그래서 역사성을 지닌 것이며, 그 역사에 우리의 구세주가 함께 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이동 중’ 속에 함께 하려 오신 그분이 곧 강생하신 하느님이십니다. 그래서 그분이 ‘임마누엘(우리와 함께 계신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그분과 함께라면 세상이 아무리 어둡더라도 우리의 걸어가는 길 위에는 찬란한 빛이 비추이고 있습니다. 그분은 진리 자체이신 분이시기에 어둠을 비추는 빛이십니다. 그래서 그분을 우리는 ‘태양’이라고 부릅니다. 하여, 세상은 아직 밤일지라도 우리의 하늘은 밝습니다. 왜냐? 태양은 우주에서 여전히 빛나고 있으니까요. 우리의 하늘이 어두운 까닭은 내 몸이(지구가) 태양을 등진 쪽에서 아직 숨 쉬고 있으니 그렇지요. 그러나 태양은 하늘에 여전히 존재합니다. 그 태양의 시간이 우리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마구간에 강생한 그분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발견되고 있지 않지만, 깨달음의 눈을 뜬 몇 명의 사람들에게만(후미진 곳에만) 찬란한 광채로 발견되는 분입니다. 그렇듯 우리의 오늘에 거짓이 세력을 떨치고 있는 암흑의 천지간에 그럴수록 진실의 광채는 빛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빛을 따르는 우리의 삶은 결코 절망적 어둠이 지배하지 못할 것입니다. 해서, ‘주님 공현’은 우리에게 희망뿐이라는 기쁜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67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년 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년 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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