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주일 2014년 1월 19일 10시

만수리 공소 윤종관 신부


'희생양', 그것은 정치판 호칭이 아니다!

'희생양', 그것은 면피용이 아니다


지난주일의 [주님 세례 축일]예수님의 세례란 그분이 걸어가실 고난의 길목에 들어서는 출사표와 같은 것이라고 제가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수난에로 향하는 예수님의 발걸음이 어디서부터 시작 되었는가를 말해주는 것이 복음서의 예수님 세례 기사라는 설명을 곁들여 말씀드렸었지요. 그러한 예수님의 세례 사건은 그래서 예수님은 과연 어떤 분으로 우리에게 오시는가?” 하는 질문의 답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지난주일의 [주님 세례 축일]에 읽었던 마태오복음서와 더불어 공관복음서인 마르코복음서와 루카복음서는 물론이고 독특하게 저술된 요한복음서도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시러 오실 때 요한 세례자가 그분을 소개하여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분이라 하였다고 보도합니다(마태 3, 11 : 마르 1, 8 : 루카 3, 16 : 요한 1, 33 참조). 그리고 예수님을 두고 자기보다 앞서 계신 분”(요한 1, 30) 혹은 자기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을 정도로 훌륭하신 분”(마태 3, 11 : 마르 1, 7 : 루카 3, 16 참조) 등으로 소개하는 점은 요한복음서와 공관복음서의 흡사한 내용입니다만, 요한복음서에서만 독특하게 그분을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요한 1, 29)이라고 요한 세례자가 소개하고 있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예수님에 대한 요한복음서의 이 독특한 소개 내용을 주목해야 합니다.


오늘 요한복음서가 소개하는 하느님의 어린양을 일컬어서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라고 우리는 미사 때마다 우리의 신앙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대영광송과 영성체전 환호 참조).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란 무슨 뜻인가요? “세상의 죄를 대신하여 가엽게도 희생당하는 무고한 존재라는 뜻일까요?


희생양이라는 명칭은 가끔 정치인들의 입에서도 사용됩니다. 언젠가 정부에서 대통령이 장관을 마지못해 바꾸면서 희생양운운하여 그 개각의 변()을 늘어놓는 것을 본 일이 있습니다. “부득이 희생양으로써 국민정서를 달래야 할 필요가 있다는 식입니다. 이 말에 따르자면 국민들이 무엇엔가 기분 상해 있을 때에 그러한 분통을 삭여주려면 가엽게도 아무 죄도 없는 양이 희생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억울하다는 표현이지요.


그런 식의 억울함 토로는 그 한 마디로 책임을 덮으려는 의도를 엿보게도 됩니다. 어찌 보면 국정 책임자들이 희생양운운하여 억울한 양보(?)를 한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희생양이란 글자 그대로 억울한 사람을 뜻합니다그렇지만, 희생양운운하여 스스로의 억울함을 자기주장의 바닥에 깔고 여론 마당에 안개를 덮으려는(호도하려는) 꼼수는 진정 희생양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는 짓입니다. ‘희생양’, 그것은 정치판 호칭이 아닙니다.


희생양이란 그렇듯 들끓는 민심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권력자가 손에 쥐었다가 일회용품과 같이 불쑥 처치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욱이 그 희생양이란 권력자가 자기 권좌 유지를 위한 책임면피용으로 준비해둔 소모품은 결코 아닙니다. 사실상 그러한 식으로 들끓는 선동분위기의 악의적 민심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권력자 빌라도가 면피용으로 십자가형에 처해서 희생되는 최후를 맞이하신 분이 예수님이었지요. 어이없게도 말입니다. 정치인이 아닌 예수님께서 정치적 선동 속에 희생되셨지요. 오늘날도 그런 비슷한 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권력자들이란 파리 죽이듯이 무고한 사람을 아무렇게나 희생시키면서까지 자기 권좌를 지키기에 급급합니다. 이즈음의 정국 형상이 그렇습니다. 권좌에 도전적이라 여겨지는 사람들에 대해서 가차 없이 누명을 씌웁니다. 우리 남한에서 해방이후 지금까지 마음에 안 드는 사람들을 빨갱이로 곧잘 몰아세우고 처치하여 온 것이 이른바 조국을 지키는 주요 방책이었지요. 그래서 빨간 희생양들이 많았지요.


물론 하얀 희생양들도 많았지요. 이른바 호국 영령들입니다. 조국을 지키는 전쟁터에서 희생된 이들을 일컬어 저 나름 호칭하자면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 하얀 희생양들덕분에 국민들 삶의 터가 그나마 보존되었다 할 수 있습니다만, 하얀 희생양들의 명분을 앞세워 행세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반면에 앞의 빨간 희생양들에 연좌된 사람들은 늘 주눅 들어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 세력가들은 이른바 빨간 희생양들을 타도해야 한다고 부르짖음으로써 자기들의 딛고 있는 발판을 공고히 합니다. 이러한 형국에서 정치-경제적으로 약체에 속하는 사람들이 자존을 부르짖게 되면 공고한 발판의 세력가들로부터 빨간 희생양들과 한 무리인 것으로 낙인찍히게 됩니다. 그 세력가들의 눈에는 그래서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빨간 색깔이 들어있다고 보아야만 자신들의 하얀 색깔이 더욱 선명해진다고 여겨집니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에서는 되도록 많은 희생양들이 있어야만 세력가들(기득권자들)의 입지를 더욱 공고히 할 수 있는 정황이 됩니다. 그래서 결국 더욱 많은 희생양들을 요구하게 되고, 나아가 그 희생양들은 빨간 색깔이어야만 됩니다. 이러한 형국이 이른바 신공안정국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즈음 정세는 그렇듯이 어느 누군가들을 없애버려야 할 존재로 부각시킴으로써 권력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전근대적 상황입니다. 우리의 전근대적 상황은 그 누군가들을 희생양들로 만들기를 갈망하는 야수들의 정글이라고 저는 진단하고 있습니다. 비겁한 세상의 권력은 그렇게 야만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권력에 방해되는 존재라면 무참히 희생되어야 하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앙으로 일컫는 희생양은 그렇게 세상의 권력 앞에 아무런 값어치도 없는 것처럼 희생되는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 신앙으로 말하는 희생양이란 온 백성을 살리기 위해서 제물이 되는 존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숭배의 노예생활에서 오로지 하느님을 섬기는 백성으로 해방되어 나아가는 길을 열기 위해서 희생 된 과월절(파스카)의 양이 곧 우리가 일컫는 희생양입니다(탈출 12, 114 참조). 희생양의 피로 식별되는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죽음의 밤을 지나 구원의 새로운 날을 맞이하였던 것입니다.


그렇게 당신 백성에게 구원을 베푸시기 위해서 하느님께서 몸소 마련하신 어린 양으로 오신 분이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러하기 때문에 그 어린 양은 오늘 이사야 예언자가 일컬은 주님의 종으로서 구원이 땅 끝까지 다다르도록하는 민족들의 빛과 같은 존재입니다(오늘의 제1독서 중 이사 49, 6 참조). 그러한 주님의 종은 나 자신 살기 위해서 타인을 희생시키는 존재가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희생시키는 존재입니다. 세상의 권력자들이 자기 자신 말고 다른 사람들인 백성을 희생시켜 자신의 힘을 공고히 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모습이 주님의 종입니다. 주님의 종을 하느님 친히 빚어 만드셔서” “민족들의 빛으로 세우신분이(이사 49, 56 참조) ‘희생양이신 하느님의 어린양입니다.


그러므로 희생양이란 하느님의 어린 양으로서 세상의 죄를 없애시기 위해서하느님께서 친히 보내신 당신의 아드님을 일컫는 칭호인 것입니다.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은 그분이 곧 그러한 하느님의 아드님이었음을 요한 세례자가 직접 증언하고 있음을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읽고 있습니다(요한 1, 34 참조).


그렇다면 희생양이란 민심 수습용으로 또는 권력기반의 정치적 공고성을 위한 용도로 어느 희생자들을 지목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와는 반대로 오히려 백성을 살리기 위해서 최고의 권능자로서 스스로 희생하는 존재가 희생양인 것입니다. 우리 구세주이신 하느님의 아드님이 그렇듯이 당신의 최고 권능을 포기하신 그 모습이 희생양’, 세상의 죄를 없이하시는 어린 양의 모습인 것입니다.


저는 그래서 진정 희생양이란 최고 권력자의 자기희생의 태도에서 볼 수 있는 모습이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민초들을 위한 권력자의 희생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교회 안에서도 이른바 교회지도자의 모습에서 그 희생양을 볼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저 역시 사목자로서 교우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한 교회유지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 저 스스로의 희생을 통하여 그 모습을 보여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를 들자면, 제가 본당 주임신부로 일하던 때에 매년 본당의 예산을 편성하면서 저의 마음을 괴롭히는 것이 있었습니다. 교구의 예산편성지침을 하달 받아서 예산안을 짜다보면 늘 교구와 본당의 조직 운영 때문에 거개예산이 인상되고 그에 따라 신자들의 부담을 가중시켜나가게 되는 현실이 그렇습니다. 교구의 방만한 상부조직을 유지하기 위해서 일선 본당의 운영은 늘 쪼들리고, 그럼으로써 더욱 신자들을 위한 재투자의 폭이 좁아지게 되는 현실을 보면서 결국 민초들만 희생당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세상의 죄를 없이하는 어린 양으로서의 희생양의 모습은 하느님의 아드님처럼 위에서 먼저 희생하는 거기에 발견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을 라틴어로 일컬어 ‘Agnus Dei, qui tollit peccata mundi’라 하는데, 여기서 세상의 죄를 없이하다라는 ‘tollit peccata mundi’‘tollit’짊어지다라는 뜻도 있습니다. 세상의 죄를 업보처럼 짊어진 백성의 고통을 대신 짊어지는 사람, 그분이 하느님의 어린 양이었음을 오늘 국가의 지도자도 교회의 지도자도 진정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함께 사는 교우들과의 교회 공동체에서는 제가 가장 먼저 저 자신의 과제로 깨우쳐 갖추어야 할 모습이 곧 희생양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69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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