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주일

2014. 1. 26. 10:00 만수리 공소 윤종관 신부


예수님의 역마살그리고 나의 팔자

회개하라! 그물을 버려라!



역마직성(驛馬直星)’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늘 멀리 돌아다니는 사람의 운명을 일컫는 말이랍니다. 속된 말로, 한 곳에 붙어살지 않고 떠돌이 생활을 하는 팔자를 뜻합니다. ‘역마살이 낀 신세를 그렇게 일컫는답니다. 저 같은 사제들이 그런 것 같습니다. 한 성당에서 평생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이 한 곳에 머물러 살지 않고 미지의 땅을 향하여 떠날 때는 누구나 불안에 휩싸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불안이란 떠남으로써 마주쳐야 할 미지의 앞날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한 불안과 두려움을 마다하지 않고 한 곳에 머물지 않는 예수님을 오늘의 복음서에서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예수님을 따라 떠나는 사람들을 오늘 복음서에서 보게 됩니다.


오늘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당신의 고향인 나자렛에 머물지 않고 이방인의 땅으로 가서 사셨습니다(마태 4, 1315 참조). 그리고 그러한 예수님께서 명령하시자 시몬과 안드레아와 야고보와 요한이 생업도구인 그물과 배를 버리고 가족을 떠나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마태 4, 1822 참조). 당신의 사명수행을 시작하시는 예수님도 그리고 그분의 첫 제자들도 그야말로 운명적 역마직성의 길에 들어선 것입니다. 즉 역마살이 낀 신세처럼 떠남으로써 불안한 삶의 행보를 시작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고향 나자렛에 머물지 않으시고 가파르나움으로 가서 사셨다는 것에 대하여 복음서는 이사야의 예언이 성취된 것으로 확인하면서, 그럼으로써 그 이방인의 땅에서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살던 사람들이 새로운 삶의 빛을 보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마태 4, 1316 참조). 거기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명수행을 시작하시어 첫 말씀으로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셨습니다(마태 4, 17). 그러한 예수님께서 첫 번째로 만난 사람들은 고기를 잡아 근근이 연명하던 어부 네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어부 네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자기들의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면서 그분과의 삶에 운명을 걸었습니다(마태 4, 1822 참조).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오늘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간단명료하게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회개입니다.


회개하라라는 말은 통상적으로 죄를 뉘우치라는 뜻으로 들리게 됩니다. 그래서 회개하라는 화두는 마음을 움츠러들게 합니다. 마치 죄인을 꾸짖는 말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잘못하던 것을 청산하고 새로운 삶의 길을 걸어가라는 뜻이 되어 그 회개라는 말은 마음을 어둡게 하고 부담스럽게까지 합니다.


그러나 오늘의 복음서는 회개의 의미를 더욱 근본적인 것에서부터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회개란 다만 죄의 뉘우침 정도가 아닌 것입니다. 인생의 길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이 회개인 것입니다. 그러한 회개를 오늘 복음서는 예수님과 그분의 첫 제자들의 태도에서 진정 찾아 읽게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떠남인 것입니다. 지금까지 지니고 있던 것과 누리고 있던 처지를 버리고 떠나 미지의 길로 새로운 출발을 하는 것입니다. 떠남과 새로운 행로, 그것이 진정 회개입니다.


그러한 회개를 촉구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말씀하십니다(마태 4, 17). 예수님 당신 자신이 먼저 고향을 떠나 이방인의 땅으로 가셨듯이, 그리고 그분의 첫 제자들이 그물과 배를 버리고 가족까지 떠나 그분을 따라갔듯이,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남에 있어서는 그 까닭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기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회개란 지금까지 걸어온 세상의 길을 떠나 하늘나라의 길로 향방을 바꾸는 것을 뜻하게 됩니다.


그렇듯이 예수님을 따라 하늘나라를 향한 삶으로 인생길을 바꾼 네 사람의 어부들이 그러한 회개를 보여준 것입니다. 예수님의 첫 제자들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리고 정든 사이를 떠나는 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는 첫걸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소유와 자기 집착에서부터 떠나는 회개에로의 길인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본능적으로 강한 소유욕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어야 인간은 마음에 안정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만, 사실은 가지고 있는 것 때문에 마음에 불안을 또한 지니게 됩니다. 안정을 주는 것 같으면서도 불안을 안겨주는 소유욕의 이중성이란, 그 까닭이 사람의 마음 자체가 그 가지고 있는 것에 종속당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가지고 있는 것에 종속당하는 마음의 병적인 상태를 집착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지고 있던 어떤 물건을 도둑맞거나 잃어버리게 되면 괴롭습니다.


저는 신학생 때부터 좋아하는 오르간 명곡들을 입수할 때마다 직접 손으로 오선지에 그려서 모아두었습니다. 거의 50년 전 그 시절에는 지금처럼 편리한 복사기를 만날 수가 없었지요. 그래서 잉크를 찍어서 쓰는 펜촉 혹은 만년필로 오선지에 그려 넣은 수백 곡의 악보집은 저의 특급보물입니다. 수십 년 동안 제가 수집하고 사본을 만들어오며 간간히 오르간을 혼자 연습하여 즐기곤 하던 것입니다.


제가 안면도 성당에서 살던 시절에는 저의 가장 아끼는 보물이었던 그 악보집을 평소 성당 제단의 파이프 오르간 연주석 의자서랍에 넣어두고 가끔 저 혼자 그 악보의 곡들을 연주하는 시간은 적적한 저의 일상을 행복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시절 주교 성품을 받으신 광주 대교구의 당시 보좌 주교님께서 저를 찾아보러 오신 일이 있었습니다


저의 친구이기도 하신 그 주교님(지금은 대주교님)께서 봄 부활 대축일 다음날 순전히 개인 자격으로 우정 어린 방문을 하셨습니다. 오신 주교님께서 저에게 잠깐 오르간 소리를 들려 달라 하시기에 한 곡 연주해드리기 위해 오르간 연주석 서랍의 그 악보집을 찾아보았더니 그게 없는 것입니다. 당황한 제가 즉흥적으로 악보 없이 연주를 하고 오르간에 맞추어 성가 한 곡을 주교님과 함께 불렀지요. 그리고 주교님 떠나신 후에 저는 저의 처소 구석구석 그 악보집을 찾아보았으나 허사였습니다. 참으로 괴로웠지요. 부모가 자식 죽었을 때의 심정이 아마 그럴 것이라는 참담그 자체였습니다.


없어진 저의 그 보물을 누가 가져갔을까! 저는 괴로운 마음으로 짐작을 해보았지요. 저의 그 안면도 성당에 작은 파이프 오르간이 있다하여 가끔 탐방 오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분들 가운데는 천주교 신자도 있고 신자 아닌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런 분들이 오르간을 시험 연주하는 동안에 그 자리를 계속 지킬 수가 없으므로 저는 사제관에 내려와서 있다가 그 연주 끝내고 돌아가는 사람으로부터 열쇠만 건네받곤 했었지요. 어디 사는 사람인지도 모르는 그런 사람들 가운데 누가 그 악보집을 가져갔는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인 것입니다. 저는 그래서 오르간 앞에 안게 되면 늘 그 없어진 악보집 생각이 나서 마음이 괴로웠습니다.


그 당시 40년 동안이나 간직해온 저의 그 보물이 없어진 사실을 회상할 때마다 참담한 심정이었습니다. 혹 그것을 가져간 분이 복사해 놓고 다시 보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보지만 아무런 소식이 없으니 정말 미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혼자 중얼거리는 말로 괴로운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해보기도 했습니다. “여기 안면도에서는 그 곡들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없으므로 나대신 그 사람이 그 아름다운 곡들을 어디에선가 연주해서 많은 사람들을 즐겁게 하려고 가져갔는가보다.” 하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저의 마음에 괴로움은 계속 남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다 못해, 그 당시 제가 직접 운영하던 안면도 성당 홈페이지 게시판에 글을 올렸습니다. 그 악보집을 혹 소지하신 분이 세상 어디선가 그 아름다운 곡들을 잘 연주해서 사람들을 즐겁게 하시기 바라면서, 복사하신 후 되돌려주시면 저의 행복을 되찾게 되겠노라는 간절한 호소의 글을 올렸었지요.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몇 달 후에 발신 주소 없는 소포가 저에게 온 것입니다. 그 악보집이 되돌아 온 것입니다. “하느님께 감사!” 그리고 익명으로 되돌려 주신 분이지만, “보내주신 그분께 감사 또 감사 만 번 감사!” 이렇게 감사의 기도를 올렸습니다. 저의 그 50년 된 악보집, 페이지 갈피가 누렇게 되고 귀퉁이가 흐물흐물 삭아가는 그 악보집이 지금 저의 거실 오르간 의자 서랍에서 가끔 보면대 위로 올라와 저의 행복한 독주 시간을 만들어주곤 합니다. 그리고 가끔 그 되돌려 주신 분이야말로 오르간 음악을 지극히 사랑하시는 분으로서 주변 사람들에게 저의 그 악보 복사본으로 아름다운 연주를 선사하시라라 추측하면서 저의 마음 더욱 행복해집니다. 그리고 가끔 생각합니다. 그걸 가져다 복사하셨을 그분을 얼마 동안 미워했던 제가 소견머리 좁은 마음이었다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그분께서 저에게 그걸 빌려 달라 했으면 저의 생김새로 보아 도무지 들어줄 것 같지 않아서 그리 하신 것으로 미루어 생각되어 저 자신에게 부끄럽습니다.


그리고 그 악보집 자체보다도, 그렇듯 다른 사람들에게 필요한 경우, 선의로 나도 모르게 저 자신의 삶이 이용(?) 당하는 것을 행복으로 여겨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나 자신의 것으로부터 떨쳐버릴 수 없는 집착이 나를 괴롭게 하며 더불어 다른 사람들과의 사이를 괴롭히는 것이라는 반성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불교계의 선사이셨던 법정(法頂) 스님의 다음과 같은 글을 읽은 일이 있습니다.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라는 화두의 수필 가운데 소개된 이야기가 있습니다.


울타리가 없는 산골의 절에서는 가끔 도둑을 맞는답니다. 외딴 암자에서 어느 날 밤잠이 없는 노스님이 해우소를 다녀오다가 뒤꼍에서 인기척을 들었답니다. 웬 사람이 지게에 짐을 지워 놓고 일어나려다가 말고 일어나려다 말고 하면서 끙끙거리더랍니다. 뒤주에서 쌀을 한 가마 잔뜩 퍼내긴 했지만 힘이 부쳐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노스님은 지게 뒤로 돌아가 그 도둑이 다시 일어나려고 할 때 지그시 밀어주었습니다. 겨우 일어난 지게가 힐끗 돌아보았습니다. 그러자 노스님은 그 밤손님에게 나직이 타일렀습니다. “아무 소리 말고 지고 내려가게.”


이튿날 아침, 다른 스님들은 간밤에 도둑이 들었다고 야단이었습니다. 그러나 노스님은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잃어버린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려주는 법정 스님은 여기서 내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온 물건이 아닌 바에야 내 것이란 없다.”하고 말하면서, 본래부터 한 물건도 없다는 뜻의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라는 화두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날 밤의 밤손님은 나중에 독실한 불교신자가 되었다 합니다.


저는 여기서 그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라는 깨우침을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첫걸음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고향을 떠나 이방인들의 땅으로 가신 것이 곧 구세주로서의 첫걸음이었는데, 그렇게 그 제자들도 가진 것 다 버리고 미지의 앞길을 향하여 그분과 함께 떠나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역마살의 팔자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새로운 출발은 가진 것 없이 떠나는 것입니다. 진정 새로움이라는 것은 이전의 소유가 없음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새로움의 출발이 곧 회개인 것입니다. 그러한 새로움, 그러한 회개로부터 일은 시작 됩니다. 그렇게 본래적 소유가 없는 시작에서부터 사람은 진정 바뀝니다. 그것이 곧 미지의 땅과 같은 이방인의 땅에서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빛이 되신 구원사업인 것입니다. 그분이 이방인의 땅에서 두루 다니시며 전하는 복음을 듣게 된 사람들이 그래서 모두 치유 받았던 것입니다(마태 4, 23 참조). 복음을 들은 사람들이 집착을 벗어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 을 앓고 있습니다. 몸에서 떨어지지 않는 집착이라는 병을 앓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득 한 목소리 들려옵니다. 나를 따라오너라!”(마태 4, 19)


그러자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따라나선 사람들이 있습니다(마태 4, 20).

그물은 무엇인가요? 이즈음에 권력에 매달리는 사람들이 놓지 못하는 그물이 있습니다. ‘박정희 그물이지요. 그걸로 대한민국의 운명을 몽땅 걸어놓듯이 말이죠! 오로지 박정희 덕분에잘 먹고 살게 되었노라고 말하면서! 박정희 덕분에라는 그물에 국민 모두를 포획하려는 정치세력은 그래서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을 더 흉악한 그물 속(북한?)으로 가라고 윽박지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 갇혀 헤어 나오지 못하는 그물이 있습니다.


먹고 살겠다고 매달리는 그물! 그물이 상징하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을 가두어 놓은 집착아니겠습니까! 재물을 모으는 그물, 그래서 나아가 사람들 사이의 그물(인간관계=인맥)도 곧 내가 차지할 것에 대한 집착을 뜻하지요. 그런 그물을 버리고(마태 4, 20), 당신을 따라오라 하시는 분의 음성을 듣고 선뜻 일어나 그 그물을 버리고, 더욱 사람들 사이의 그물 즉 아버지를 버려두고’(마태 4, 21), 지난 주간에 우리 교구의 많은 신부님들이 새로운 임지로 떠나갔습니다. 저도 본당 주임신부 노릇 하던 시절에 그렇게 어떤 땐 갑자기 주교님의 명에 따라 미지로 떠나가는 길을 나서면서 살았었지요


잘 사귀던 교우들의 끈끈한 인정들을 버려두고’(마태 4, 21) 떠나던 괴로운 순간들은 저 이민족들의 갈릴래아”(마태 4, 15)와 같은 곳을 향하는 마음이었지만, 돌이켜 생각하면 저를 포함한 모든 사제들이 어둠 속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곳에 떠오르는 빛(마태 4, 16)을 향하는 행복의 역마직성(驛馬直星)’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역마살을 따라야 할 나의 팔자(운명)이지요. 나에게 갑자기 부당한(?) 인사 조치를 하시는 주교님은 그렇게 집착의 ’(마태 4, 23)을 나에게서 떼어내어 고쳐주시곤 했었습니다.


우리의 옛 치명선조들께서는 세상이라는 큰 그물에서 초연히 헤어날 수 있었던 분들이었지요. 자신들의 모든 (집착)’을 벗을 수 있었던 분들이었지요!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70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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