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5주일
2014년 2월 9일 9시 @ 도화담 공소
만수리 공소 윤종관 신부
헌법을 준수하라!
나는 혹 오염된 소금 아닌지 . . . !
마태오 복음서 5∼7장에 수록 된 예수님의 ‘산상 설교’를 교우님들에게 소개할 때 저는 ‘하늘나라의 헌법’이라면서 설명하곤 합니다.
지난 1월 26일의 연중 제3주일에 우리가 전해들은 예수님의 복음전파 개시의 첫 말씀을 오늘 다시 새겨들어야 합니다. 회개를 촉구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4, 17)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그 ‘하늘나라’란 어떤 나라일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산 위에서 그 ‘하늘나라의 정강’을 공포하십니다. 옛적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의 계약을 공포했듯이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건국하시는 새로운 나라의 헌법을 공포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마태오 복음서 5∼7장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첫 8개 구절이 이 헌법의 전문(前文)입니다. 우리가 이를 일컬어 ‘진복팔단’이라 합니다. 마태오 복음서 5장 3∼7절의 내용입니다. 이 하늘나라 헌법 전문(Prologue)을 먼저 듣고 나서 그 다음의 내용을 들어야 하는 게 순서입니다. 그래야 본문(本文)을 잘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대한민국 헌법은 ‘전문 → 본문 130개 조 → 부칙 6개 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본문의 제1조는 국민이라면 모두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저도 대한민국의 한 국민으로서 다음과 같이 외우고 삽니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 제1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제2항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대한민국의 헌법 제1조는 그 앞의 전문(前文)을 또한 압축적으로 확인 선언합니다. 우리나라를 왜 건국하였으며 어떤 바탕위에 세운 나라인가를 선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이름은 잘 기억하면서도 ‘민주공화-국’라는 말과 ‘국민-주권’이라는 말을 왜 헌법 제1조에서 읽게 되는지를 깨닫지 못하면서 우리나라의 대통령 노릇 또는 각료나 국회의원 노릇과 공직자 노릇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현재 활개를 치며 거꾸로 국민들을 속이고 위협합니다.
북한이라는 나라의 주인이 김정은 개인 한 사람인 듯, 거기서는 그 사람이 이른바 ‘지존’이랍니다. 그렇듯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주인이 과거엔 박정희였고 지금은 박근혜인 듯, 그런 ‘지존’ 밑의 졸개들이 남북한의 국민들에게 공갈협박을 일삼습니다.
여기서 저는 오늘 정치에 개입하기 위해서 ‘헌법’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 대한민국의 헌법 전문이나 본문 제1조에 오늘 복음의 예수님 선언하신 ‘하늘나라’의 ‘전문’을 그대로 옮겨 놓아야 스스로 ‘지존’인 듯 하는 사람들과 그 졸개들이 깨달음을 얻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헌법’ 운운하는 말로 오늘의 복음 말씀을 설명하고픈 것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 3)고 하늘나라 헌법 첫 구절을 선언하신 예수님의 그 다음 말씀을 더 자세히 읽어보고 나서 오늘의 ‘소금과 빛’에 관한 말씀(마태 5, 13∼16)을 묵상해야 합니다.
‘진복팔단’이라 일컬어지는 하늘나라 헌법 전문에 거명된 그 나라의 국민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 ‘슬퍼하는 사람들’, ‘온유한 사람들’, ‘정의를 바라는 사람들’, ‘자비로운 사람들’, ‘마음 깨끗한 사람들’,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정의를 추구하다가 박해 받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여덟 가지 특징을 가진 사람들이 하늘나라의 국민입니다.
그런데 우리 대한민국에서도 이 여덟 가지 특징을 가진 사람들이 바로 ‘국민들’의 모습에서 보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대통령이나 각료들이나 국회의원들이나 힘 있는 공직자들이나 재벌 가운데에서는 이 여덟 가지 특징을 모두 갖춘 사람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국민들’ 위에 군림하고 위협적 속임수를 씁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 여덟 가지 특징을 지닌 국민들을 대변하여 무슨 말을 하면 ‘종북’이라면서 김정은 지배하의 북쪽으로 가서 살라고 밀어붙입니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과 제1조도 기억하지 못하는 그들인가 싶습니다.
하긴, 권력자들이란 대한민국의 주권자 국민이 누구인가 알지 못하는 자들인데 하물며 ‘하늘나라 헌법’ 쯤은 안중에 있을 리야 없지요.
그래서 저는 오늘 ‘세상의 소금과 빛’에 해당된 사람들로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존재는 누구인가를 생각해봅니다. 대한민국 헌법은 전문과 총강 및 국민 기본권 등을 선언한 제1∼2장(제1∼39조)에 이어서 국가 운영 3권 분립 체제를 선언하여 그에 책임 맡을 직분들의 구성요건을 규정하는 조항들을 나열합니다. 그렇듯이 하늘나라 헌법의 전문을 선언하신 예수님께서는 그 나라의 일꾼들을 지목하시면서 ‘소금과 빛’이어야 한다고 당부하십니다. 전문(진복팔단)에 지칭된 하늘나라의 백성(국민)들에게 몸 바쳐야 할 예수님 당신 자신과 그 제자들은 필연적으로 그 백성들과 같이 여덟 가지 특성으로 말미암아 결국 박해를 당한다고 말씀하시고 나서(마태 5, 11∼12 참조),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 노릇을 해야 한다.’고 당부하십니다(마태 5, 13∼16 참조). 국민에게 봉사해야 할 사람들에게 그에 맞는 직위 규정이 대한민국 헌법의 나머지 조항에 따라오듯이 말입니다.
그러면 하늘나라 일꾼의 ‘소금과 빛’ 노릇은 과연 어떤 것일까요? 그것은 한 마디로 ‘스며드는 노릇’입니다. 소금과 빛이 그렇잖습니까!
소금과 빛은 어떤 위력적 힘을 내세워 노릇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 ‘스며드는’ 노릇은 소리 없이 ‘번지는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소금과 빛은 그 ‘번짐’으로 투여되는 그 범위를 변화시킵니다. 소금은 음식을 맛나게 하고 썩지 않게 보존시켜 주는 노릇을 합니다. 그리고 빛은 사방을 볼 수 있게 만들고 생동을 선사합니다. 소금과 빛의 역할은 한 마디로 다른 것들의 ‘존재’를 드러내어주는 노릇을 합니다. 그리고 한편 자신의 존재는 그 다른 것들 가운데 스스로 삭아지고 맙니다. 이런 노릇을 굳이 문자화 하자면 ‘이타자멸(利他自滅)’이라 할까요…!
저는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세상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이라고 예수님으로부터 일컬음을 받은 사람들은 곧 제자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산상설교를 듣기 위해 거기 산위에 모여온 무리의 전체를 소금이요 빛이라 하시지 않고, 예수님께서는 그 무리 앞에서 당신 가까이 다가온 제자들을 그렇게 일컬으셨던 것입니다. 소금과 빛이란 그 실체적 양태로는 아주 적은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러하기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을 일컬어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이라 하신 것입니다. 세상 전체가 소금일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죽은 바다(死海)’가 됩니다. 바다가 썩지 않고 거기 생물이 사는 까닭은 그 전체가 소금이 아니고 거기 3% 미만 함량의 염분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상 전체가 빛을 발산하는 불덩어리일 수는 없습니다. 불덩이 속에서는 모두 타죽고 맙니다. 생명은 불덩어리 속에서가 아니라 소리 없이 비추어 오는 따듯한 기운과 빛에 의하여 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생각합니다. 오늘날에도 예수님께서는 신자들과 이 세상의 사람들에게 성직자 수도자들로 하여금 그렇게 적은 소금이면서 그리고 소리 없이 비추이는 빛이 되라고 특별히 당부하시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소금은 그 분량이 아주 적으면서도 음식을 신선하게하고 부패 없이 보존되어 맛을 내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의 식습관에 소금 섭취량이 너무 많아 건강에 지장을 초래한다는 지적이 있듯이, 소금의 량이 너무 지나치지 않아야 적절한 맛을 내어 유익한 음식이 되는 이치와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세상 사람들 사이에 신선함과 삶의 가치를 유지해주는 모범된 존재로 별도의 적은 무리를 일컬어 지칭하신 ‘세상의 소금’은 선별된 제자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빛은 소리 없이 생명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제가 열대식물을 큰 화분에 심어서 겨울나기를 하려고 거실에 놓아두었습니다만, 햇볕을 제대로 받지 못해서인지 이파리들이 자꾸만 말라 떨어집니다. 그래서 거실의 햇볕 들어오는 창가에 놓아두고 저녁에는 전등불빛을 좀 더 받으라고 오랜 시간 천장의 전등을 켜둡니다. 그런데 낮의 햇볕 쪽 가지의 잎들이 더욱 건강해보입니다. 그렇습니다. 빛은 그렇듯 만물에게 생명력을 선사합니다. 그런 식으로 세상 사람들의 삶을 하느님 나라로 이끄는 힘이 되라는 뜻으로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에게 ‘세상의 빛’이 되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 사람들을 하느님 나라의 삶에로 이끌고 그러한 삶이 세상의 악으로 말미암아 부패하지 않고 그 참됨을 유지하도록 소금 역할을 하라고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에게 ‘세상의 소금’이 되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소금 중에는 해로운 소금도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보건 당국에서 조사하여 그 사용을 금지시킨 일도 있습니다. 그 까닭은 오염된 바닷물을 끌어들여 생산한 천일염 속에 매우 해로운 중금속이 함유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보도를 들으면서 저는 문득 저 자신이 그러한 오염된 천일염 아닌가 하여 찔끔 반성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오염된 바닷물에서 생산된 소금처럼 저 자신도 세속의 풍조에 오염된 성직자로서 교우들을 사목하고 있지 않는가 하는 반성인 것입니다.
세상의 현실이 아무리 암울하다 하더라도 세상 사람들은 지도자들의 선명한 삶을 바라보고 싶어 합니다. 그러면서 세상 사람들은 지도자들의 그러한 순수에 대한 신뢰로써 절망을 딛고 일어서고자 합니다. 세상은 어둠 속에서 빛이 비추이기를 그렇듯 갈망합니다. 진실이 왜곡 되는 정치 현실을 역겨워 하는 민심일수록 한편 종교 지도자들을 향하여 시선을 돌리는 까닭이 그러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민심의 시선이 정작 교회 내부의 현실을 목격하고는 더욱 큰 실망을 하는 경우가 다반사이기도 합니다. 세상을 비추는 빛이라면서 세상과는 동떨어지게 까마득한 높이로 홀로 타고 있는 촛불이라면 어두운 발길을 밝혀줄 수가 없습니다. 그렇듯이 높은 권위로 세상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성직자의 삶이라면 등잔 밑이 어둡듯이 그 권위의 빛은 그 그림자로 말미암아 세상 사람들의 현실을 더욱 어둡게 짓누르는 권좌일 뿐입니다. 그리고 더욱 바람이 두려워 장막 속에 감춰두는 등불이 성직자의 삶이라면 비겁한 현실도피라 할 것입니다. 거기다 더 나아가서 타인의 일조권을 침해하는 건물이나 일반인들의 통행로에 햇볕을 차단하는 건물처럼 성직자의 삶을 교계제도적 위상으로만 내세운다면, 그것은 태양 같은 하느님의 은총 자체를 가림으로써 마치 이면도로의 빙판에 애꿎은 통행인들이 사고를 당하는 것처럼 해악을 끼칠 뿐인 것입니다.
여기서 저는 산위에 오르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모여온 세상 사람들 앞에서 그분 가까이 다가와 앉은 제자들을 ‘세상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이라 지칭하신 사실을 상기하면서, 오늘도 세상 사람들 앞에 소금으로서의 삶과 빛으로서의 역할을 다짐하고자 합니다.
자신을 녹여 없애고 스며듦으로써 음식을 맛나게 하고 썩지 않게 하는 소금처럼, 스스로를 없애는 가난과, 스스로를 녹이는 헌신으로써, 세상의 고뇌에 참여하는 길을 가야할 것입니다. 그리고 권위와 현실도피가 아닌, 나 스스로를 투명하게 내보일 수 있는 진실한 삶으로써 신자들과 함께 향하여 나아가야 할 하느님 나라의 길을 앞서 가는 등불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중금속에 오염되지 않은 소금, 그리고 권위와 도피의 장막을 걷어낸 신뢰의 등불이 되어, 그럼으로써 교우들 또한 자기들 각자의 처지에서 신선한 세상을 그리고 밝은 세상을 주변에 이루어가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노력이 곧 ‘헌법’을 지키는 최소한의 길, 그러나 가장 자기다운 중요한 길이기도 합니다. 지켜야 할 대한민국 헌법과 하늘나라 헌법 준수의 길!
그래서 나 자신에게 외쳐봅니다. “헌법을 준수하라!”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73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년 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년 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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