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봉헌축일
2014년 2월 2일 10시 만수리 공소 윤종관 신부
2인칭을 부르며 살자!
"외로운 그대들, 바쁜 사람들아!"
오늘 2월 2일은 ‘주님 봉헌 축일’입니다. 주일(일요일)로는 ‘연중 제4주일’입니다만, 연중 주일의 복음 대신 ‘주님 봉헌 축일’의 복음으로 오늘의 메시지를 듣게 됩니다.
오늘은 ‘예수 성탄 대축일’로부터 딱 40일째 되는 날입니다. 이날을 옛 전례력에 의하면 ‘성모 취결례 축일’이라 했습니다. 구약의 유다교 율법에 따라 아기를 낳게 되면 1주일 지난 다음에 할례를 하고, 그로부터 산모는 33일간 집안에 있다가 속죄의 예물을 바치게 되어 있었습니다. 낳은 아기가 만일 여자 아이라면 산모는 66일간 집안에 있어야 했습니다. 레위기 12장에 있는 이러한 율법에 따라 성모님께서 40일 만에 성전에 가서 예식을 올리게 되었다고 복음서가 오늘 보도하고 있습니다(루카 2, 22∼24 참조).
오늘의 이 복음서 보도 내용에 있어서, 옛 전례력은 그 주안점을 신생아 예수님께 관련한 율법을 그 부모가 처지에 맞게 준수한 것으로 보고, 산모인 성모 마리아의 정결례(취결례)에 맞추어 축일을 정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취결례의 의미상 우리 역시 그 의의를 잘 알아들어야겠습니다만,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 개혁 정신에 따라 오늘 축일을 ‘주님 봉헌 축일’로 지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 됩니다.
출산 과정을 통하여 산모의 몸이 더럽혀졌다고 본 구약의 율법은 산후조리의 상당 기간을 통하여 산모로 하여금 정상적 컨디션에 이르도록 배려한 규정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반면에 신약 성경으로써 복음서는 40일 만의 이 예식 가운데 그 주인공을 예수님으로 보고 있다는 점을 저는 오늘 주목하고 싶습니다.
성경에서 40년 혹 40일이라는 숫자로 표현하는 어느 기간이란, 어떤 거사(巨事 great project)를 도모하는 기간을 뜻합니다. 그 ‘거사’란 하느님의 일이지요. 이스라엘 백성의 40년 유랑의 광야와, 예언자들의 40일 산중 기도와, 예수님의 40일간 광야 단식기도는 그 다음에 이루어지는 ‘거사’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위대한 일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에 있어서는 약속의 땅으로 가는 해방의 ‘40년 길’이었고, 모세나 엘리야 같은 예언자들에 있어서는 하느님 계약의 성취와 계시를 얻기 위한 ‘산중 40일’이었고, 예수님께 있어서는 하늘을 열게 되는 세례에 이르러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기 위한 ‘광야의 40일’이었습니다. 이 모든 성서적 ‘40’은 구원 즉 해방을 잉태하는 기간을 상징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민족의 40년 일제 강점기를 연상할 수 있는데, 그 40년 후의 우리는 그 혹독한 시련의 값을 어떻게 우리 자신 안에 거두어들였는가에 대한 역사적 질문에 아직도 답을 얻지 못하고 있음을 우리의 분단현실에서 남북 간 서로를 불행한 관계로 얽매어 사는 현실 앞에 부끄럽기만 하지요.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는 40년을 거의 두 배 가까이 지나면서 오히려 날이 갈수록 증오를 부추기는 세력한테 말꼬리 잡혀 ‘종북’이라는 해괴한 규탄을 들을까 겁이 나는 실정입니다. 아직도 우리 민족은 어떤 ‘거사’ 즉 진정한 의미에서의 ‘해방’이 그 참혹한 40년의 굴레한테 갇혀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40’의 기간을 벗어나 산모(마리아)가 집을 나서서 성전에 올라갈 수 있었듯이, 구세주 오셨다는 성탄(강생)의 메시지가 들려온 지 40일 만에 문득 그 구세주를 직접 만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성전에서 말입니다. 그 사람들은 이 순간을 맞이하기 위하여 성전에서 평생 기다렸다는 시메온과 한나라는 노인들이었습니다. 이 순간에 시메온은 감사의 찬미가를 부릅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루카 2, 29∼30)
시골에서 올라온 초라한 산모의 품에 안겨 출생의 값으로 고작 비둘기 한 쌍으로 예물을 바치게 된 아기를 보고, 드디어 ‘구원’을 보았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그 이상한 노인의 찬미가는 오늘도 사실상 교회의 성직자들이 매일 밤 잠자리에 들기 전에 바치는 만송(晩頌)입니다. 성무일도 종과경(끝기도)의 ‘끝노래’입니다. 저는 이 만송을 외우는 순간의 어느 밤에는 ‘오늘 밤의 잠자리에서 다시 일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될지라도 오늘 하루 살았음을 진정 하느님께 감사하고 있는 나 자신인가?’ 하는 반문을 저에게 해보곤 합니다. 시메온처럼 평생을 기다린 삶으로 나의 하루하루가 그 ‘구원’을 보기 위한 것이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세상을 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고단한 하루하루가 그 어떤 ‘구원’ 같은 것을 얻는 날들인가?
어제는 인터넷 신문에서 가슴 한 구석을 찡하게 하는 글을 읽었습니다. ‘나만 좀비가 아니었구나, 너도 외롭구나.’라는 제목의 기사입니다. 그런데 이 제목보다도 그 부제로 단 머리글이 저의 시선을 꽂히게 하는 ‘낚시말’이었습니다. ‘진정한 개인을 찾기 힘든 한국’이라는 말이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살기가 힘든 나라 한국’이라는 뜻으로 읽혀졌습니다. 젊은이는 젊은 대로, 늙은이는 늙은 대로, 각자들이 모두 자기들 처지에서 ‘외로운 나 자신’과의 대결에 진정 ‘만날 수 있는 너’를 찾지 못하고 있다는 토로가 나열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사실상 각자 자기 자신들을 조금 깊이 관찰해보면 ‘너’가 되어줄 줄을 모르는 ‘나’들만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나’들이 허둥지둥 하루를 고단하게 오가는 군상, 그것이 혹 젊은이들이라면, 또 한편 ‘나’와 다른 ‘너’와 소통하기를 시도하기보다는 ‘나’와 같은 이들을 만나려는 ‘자기복제’의 신기루를 SNS에서 찾아 헤매는 군상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을 ‘로맨틱 코메디’라고 글쓴이가 평하고 있습니다.
그 반면 늙은이들에게라면 달콤한 옛이야기로 쓸쓸한 오늘을 위로 받게 하려고 역사를 후퇴시키는 역주행의 판에서 그것을 어떤 중독에 걸린 정치로 깨닫지 못하고, 희미한 옛일을 아름다운 추억이라 포장한 속에 오늘 현실을 집어넣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회집단심리학적 진단을 내리는 이런 류의 논객들은 나름대로 이 시대의 ‘고독’과 ‘친교’에 대한 성찰을 화두로 던지고 있습니다. 한 인문학자는 “고독을 누리는 능력도, 친교를 나누는 소통도 점점 어려워졌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공감을 주는 지적입니다. 모두가 ‘나’와 같은 ‘너’만을 기대한다면 ‘확장된 나’만 존재해야할 것 아니냐는 반문을 또한 던집니다. 그래서 “사회가 구성원을 섭섭함과 배신감에 몸을 떠는 존재로, 경쟁적이고 적대적인 존재로, 좀비로 만들어버렸다.”는 진단을 내리는 학자도 있습니다.
그래서 ‘안녕들 하십니까?’와 ‘응답하라!’는 이즈음의 질문과 요청에 대해서 답하기 어렵습니다. 이런 판국에 저는 오늘의 성전에 봉헌된 아기의 모습을 우리 눈으로 다시 보자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 아기는 누구입니까! 단순히 율법 규정을 채우기 위해서 성전에 봉헌된 어느 가정의 맏아들입니까? 그래서 봉헌되었다가 물려내기 위해서 알량하게 비둘기 한 쌍으로 대속예물 바치고 다시 부모가 집으로 데려갈 어느 집안의 아들입니까?
여기서 시메온 노인이 평생 기다렸다가 실토한 말을 되새겨 들어야 합니다. “이 아기는 많은 사람들의 실패를 통한 성공의 원인자가 될 것이고, 그래서 반대의 표적이 될 존재올시다. 그러니 이 아기를 낳아 키운 엄마의 가슴에 칼이 꽂힐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사람들 속마음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 2, 34∼35 참조)
참으로 불길한 예언입니다. 낳은 지 달포도 안 된 아들을 두고 이런 흉측한 운명을 점친 늙은이의 재수 없는 말을 듣고 집으로 돌아간 마리아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오늘의 복음 성경 보도는 부모가 데리고 집으로 돌아간 그 아기는 그 후 은혜롭게 잘 성장하였다고 합니다(루카 2, 40 참조). 그러나 같은 성경 기자는 이어서 그 아기가 성장하여 일어나게 된 일들의 보도를 통하여 그 시메온 노인의 예언이 정확히 실현됨을 우리에게 전할 것입니다. 그 후 성경 기자가 전한 예수님의 삶과 죽음을 통하여 벌어지는 일들이 오늘날도 우리에게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쓰러진 사람들이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 그것입니다. 그래서 쓰러진 사람들을 일어나게 해야 된다고 말하면 그 말 자체가 많은 사람들로부터 규탄(반대)받는 표적이 됩니다. 정의의 구현을 외치면 ‘종북’의 구현이라면서 내몰립니다.
그래서 이즈음 ‘한 사람 한 사람이 살기가 힘든 나라 한국’이라는 뜻에서 던진 화두에서 ‘나’와 같지 않은 다른 이들을 진정 ‘너’로 부르면서 ‘살기 좋은 나라’의 실현을 꿈꾸려면 어찌 해야 할까요? 1인칭만 확대하려는 ‘나’들의 정글 속에서 외로운 그대들, 그렇게들 여유 없이 바쁘신가요? 한 번쯤이라도 각자 ‘너’가 되어 보시면 어떨는지요? 그리고 그 2인칭 ‘너’를 불러봅시다! 지난 설 명절에 오랜 만에 만난 가족들 사이에 그 2인칭 ‘너’를 많이 불러들 보았는지요?
“축복받고 사랑받고 위로받는 관계를 경험해야 비로소 홀로서기도 가능하다”고 한 정신과 전문의가 말했다는데, 우리 사회엔 홀로서지 못하는 이들의 고통 소리가 넘친답니다. 이에 대해서 한 사회학자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 고통만 넘쳐난다. 대통령부터 걸인까지 내 고통을 들어달라 호소하지만, 서로 얼굴을 보며 고통의 소리를 들어주는 너가 되지는 않는다.”고…
문득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이 다시 들려옵니다. 돈만 아는 자본주의 세상에서 “주식이 한두 포인트 떨어졌다고 아우성이 대문짝 보도되지만, 노숙자가 얼어 죽었는데도 뉴스 깜이 되지 않는 세상…”
그리고 오늘 봉헌된 아기는 성전에 봉헌된 아기라기보다는 세상에 봉헌된 아기였지요. 그 점을 시메온 노인이 정확이 짚었습니다. 그 아기는 ‘세상의 너’가 되었던 것입니다.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71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년 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년 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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