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6주일

2014년 2월 16일  만수리 공소 윤종관 신부


개한테서도 배울 줄 알아야지! 

面色心狀



제가 데리고 사는 애견이 지난 주간에 새끼 다섯 마리를 낳았습니다. 그 녀석이 만삭이 되어 추운 곳에서 분만할까 걱정되어 지난 주간에 그 녀석의 집을 사제관 베란다에 옮겨주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집에 없는 사이에 그 녀석이 새끼를 낳았습니다. 외출했다가 돌아와서 그 녀석의 집을 들여다보니 처참했습니다. 제가 미리 깔아 놓았던 방석을 발기발기 찢어서 걸레 솜처럼 엉기성기 뭉쳐 놓고 분만한 현장의 실상이었습니다. 그 녀석의 아기들이 엉켜있고 온통 젖어있는 바닥 밑으로는 핏물이 흥건했습니다. 그 녀석 혼자 분만하느라고 얼마나 고생했을까! 그 고생의 시간에 제가 밖에 나가 있었던 것에 대해서 너무너무 미안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녀석의 분만했던 자리를 깨끗이 세척하고 드라이어(건조기)로 말려서 뽀송뽀송한 포대기와 수건을 넣어 주었습니다. 그런 후에 그 녀석이 자기의 그 다섯 아기들을 품에 끌어안고 계속적으로 핥아주고 나서는 저의 눈치를 슬슬 보면서 구석으로 몰아 놓고 자기 몸으로 감싸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꼼짝 하지 않고 아기들을 품고 나오질 않습니다. 눈도 뜨지 못한 아기들이 엄마의 젖을 서로 경쟁적으로 찾느라고 낑낑 소리를 내면서 꿈지럭댑니다. 분만 시 얼마나 고생했는지 어미 녀석의 두 눈이 퀭합니다. 그런데도 제가 집 앞에 갖다 준 음식을 먹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새끼들을 끊임없이 혀로 핥아 몸을 지속적으로 닦아줍니다. 그리고 가끔 일어나 아기들을 한 동안 숫자 세어보듯이 살펴보다가 다시 엎드려 끌어안고 핥아주기를 계속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아기들을 품고 행복한 표정으로 눈을 지긋 감고 머리를 바닥에 내려놓는 것입니다. 제가 다가가면 깜짝 놀라듯이 눈을 뜨고 저를 주시합니다. 자기 아기들에게 손을 댈까 하여 경계하는 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그 녀석의 모습이 더욱 안쓰럽습니다. 그리고 저는 또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도 모든 엄마들은 저럴 것이다하고요! 그래서, “세상 모든 엄마들의 자기 자식 사랑은 다른 사람이 제어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하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사제관의 식구인 그 녀석이 저에게 그런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저는 참 신기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처음으로 임신하고 분만했는데 어떻게 저토록 엄마 노릇을 잘 하는가?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그 어미 녀석은 제가 잠든 사이에 그 집 앞에 놓여 있던 음식 그릇을 비웠더라고요! 자기 아기들에게 접근할 사람이 없는 틈을 이용해서 살짝 나와서 먹은 것입니다. 그리고는 계속 아기들에게 자기 젖을 물리고 끌어안아 품고 있습니다. 그 모습, 마음 찡하게 합니다. 그 녀석이 자기 아기들 찬 공기에 노출 될까봐 주변에 있는 천 조각을 물어다가 덮어주고 자기의 네 발로 성벽 쌓듯이 가로 막아 엎드려 잠을 잡니다. 그런 가운데 쪼끄만 애기들이 엄마의 젖을 물고 늘어져 서로 엉켜 잠을 잡니다. 애틋한 사랑의 모습입니다.


저는 이 애견의 이번 분만 후 그 녀석 행보를 보면서 생각했습니다. “나의 어머니도 나를 저렇게 낳아 키우셨겠지!” 하고요.


제가 저의 애견이 새끼를 낳은 이야기를 너무 장황하게 오늘 주일미사의 강론 서두에 늘어놓은 것은 주책이지요! 제가 이 이야기를 통하여 오늘 주일의 복음 성경에 대한 묵상의 제목을 개한테서도 배울 줄 알아야지!’라고 쓴 까닭이 있습니다. 그 까닭이란, 오늘 주일 복음 성경의 예수님 말씀을 저는 사람은 사람 노릇을 해야 사람이다.’라는 식으로 묵상하고 싶은 때문입니다. 이런 까닭은, 제가 저의 애견이 보여준 행보를 관찰하고서 나의 어머니도 나를 그렇게 낳아 키우셨겠지!”라며 혼자 뇌까린 깨달음 때문입니다. 그 깨달음이란, ‘본성(本性)이 법()보다 먼저다.’라는 뜻으로 오늘 예수님 말씀을 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저의 묵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오늘의 예수님 말씀은 당신께서 법을 존중한다.’는 전제하에서(마태 5, 1720 참조), 그 법의 바탕은 인간의 양심에 근거한다.’는 것을 천명하시는 내용입니다(마태 5, 2737 참조). 예수님의 오늘 말씀은, 제가 지난 주간에 설명한 바대로, ‘하늘나라 헌법에 따른 실천규범조항입니다. 인간의 행위는 양심의 명령에 따라 발로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법률의 바탕은 양심입니다. 양심이란 인간의 본성에 박혀있습니다. 그렇다면 법()보다 본성(本性)이 우선 존중되어야 함을 오늘 예수님께서 교시하시고 계심을 깨달아야 합니다. ‘법치주의라는 것을 앞세워 국민을 겁박하는 자들이 소위 그게 민주주의라고들 우겨대는 현실이 우리나라의 오늘 시국입니다.


사람을 죽이지 마라.’는 법에 대해서(마태 5, 2122 참조), 예수님께서는 미움을 발산하지 마라.’고 말씀하십니다(마태 5, 2326 참조). 그리고 간음하지 마라.’는 법에 대해서(마태 5, 27 참조), 예수님께서는 몸에 앞서 마음을 먼저 다스려라.’고 말씀하십니다(마태 5, 2832 참조). 그 다음에 말로 비겁한 처신을 위장하는 속임수를 쓰지 마라.’는 법에 대해서(마태 5, 3336 참조), 예수님께서는 ‘YesNo는 양심이 먼저 말하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마태 5, 37 참조).

이와 같은 예수님의 하늘나라 헌법의 기조는 인간세상의 성문법(成文法)에 앞서 양심계의 불문법(不文法)에 있습니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자면, ‘다른 누가 뭐라 해서가 아니라, 내가 뭐라 하는지 그걸 알아들어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뭐라 하는지’, 그것은 내 안에서 들어야 하는 소리입니다. 그게 양심입니다. 그건 법()보다 먼저입니다. 이러한 점을 대한민국 헌법도 천명하고 있습니다.모든 국민은 양심의 자유를 가진다.”(대한민국헌법 제19)라고요! 이런 대한민국헌법은 사법이행에 있어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고 그 제103조에 천명하고 있습니다. ()을 보는 기본이 양심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법관이 자신의 양심 보다는 권력자의 눈치를 먼저 보는 황당한 일이 지금 흔히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렇듯이 우리 모든 사람들이 나 자신의 안쪽에서 들려오는 소리 보다는 나의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전전긍긍 하고 있지 않느냐?’고 오늘 복음 성경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런 오늘의 말씀 가운데 저는, 우리 자신들의 양심이 이 시대에 얼마나 비뚤어져 있는지, 또는 우리의 양심이 소리를 내고나 있는지 점검하라는 뜻을 감지합니다. 그래서 제가 언젠가 책에서 읽은 우화(偶話) 한 가지가 생각납니다.


어느 선사(禪師)가 길을 가는데 두 사람이 따라오면서 자기들을 위해서 복을 빌어달라고 간청을 했습니다. 그 한 사람은 매우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고 또 한 사람은 아주 시기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욕심 많은 사람은 무엇이든지 많이만 차지하려고 하는 사람이고, 시기심이 많은 사람은 누구든지 다른 사람 잘 되는 걸 보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간청을 들은 선사는 그 두 사람에게 되물었습니다. “그대들이 원하는 것을 나에게 말하기만 하면 무엇이든지 그대로 이루어진다오. 하지만 먼저 말하는 사람보다 나중 사람은 그 두 배로 얻을 수 있다오. 그러니 그대들 중 누가 먼저 말해보시오. 원하는 게 무엇이요?”


이렇게 선사가 묻자 그 두 사람은 서로 먼저 소원을 말하기를 머뭇거리는 것이었습니다. 욕심 많은 사람은 시기심 많은 사람보다 자기가 더 많은 복을 얻고 싶어서 먼저 말하지 못하고, 시기심 많은 사람은 욕심 많은 사람이 더 많은 복을 받는 게 싫어서 먼저 말하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시기심 많은 사람이 선사께 소원을 말했습니다. “저의 두 눈 중에 하나를 멀게 해 주십시오.” 그러자 그 시기심 많은 사람의 눈 한쪽이 즉시 멀어버렸는데, 동시에 욕심 많은 사람은 양쪽 눈이 멀어버렸습니다. 결국 그 두 사람의 소원은 그렇게 이루어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자기보다 잘되는 것을 볼 수 없어 시기심을 부린 사람의 소원, 그리고 무엇이든지 다른 사람보다 많이 차지하기를 원하여 욕심을 부린 사람의 소원이 그렇게 이루어진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야 어찌 되든 말든 나만을 위한 생각에 그 두 사람은 매어있지요. 더 나아가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딛고 올라서 나만 잘 되려고 하는 인간이야말로 앞서 소개한 욕심쟁이와 시기심 많은 사람들처럼 결국 자신의 마음속에서부터 나 자신과 다른 사람 모두에게 불행을 자초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래 인간은 본성적으로 그렇지 않습니다. 본성적으로 사랑을 할 줄 아는 것이 곧 인간의 참 모습입니다. 나를 희생하는 것이 사랑임을 인간 누구나 태어남의 시초에 덕으로 입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는 사실이 그 까닭입니다.


저희 집 애견에게서 태어난 신생아 강아지들이 지금 누리는 세상이란 엄마의 품속이 그 전부이듯이, 본래적으로 인간 누구나 사랑속에서 살고자 합니다. 그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저희 집 개만 그런 게 아닙니다. 인간 모두도 그렇습니다. 본성은 사랑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 인간은 본래 다른 사람을 해코지하는 사이에서 삶을 출발하지 않았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를 만들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그 까닭은 이렇습니다. ‘본성을 잃어가기 때문에요! 본성은 차라리 동물들이 더 잘 보전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이 강론의 제목을 개한테서도 배울 줄 알아야지!’라고 써봤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마음먹은 것은 얼굴에 그대로 나타납니다. 사람의 얼굴에서 미움이 엿보인다면 그게 불행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마음을 진정 이해하려고 애쓰는 사람의 얼굴에서는 사랑이 엿보입面色心狀니다. 그것이 서로를 행복하게 합니다. ‘面色心狀, 나의 얼굴은 나의 마음이라는 뜻에서 우리 서로 행복하게 하는 얼굴을 보이고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한 얼굴을 저는 지난 주간에 저희 집 애견의 분만 후 그 녀석의 태도에서 보았습니다. ‘본성은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기에 그런 것이라는 생각에서 그렇게 보았습니다. 본성으로 돌아가야 우리는 행복할 것 같습니다.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74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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