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8주일
2014년 3월 2일 10시 만수리 공소 윤종관 신부
본전 찾기 : '대 자유'
사는 세상 두 개가 아니다
오늘도 몇 주간 째 이어지는 예수님의 ‘산상수훈’(마태 5∼7장)을 주일복음으로 듣습니다. 그 가운데 오늘 듣는 부분의 첫 구절은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마태 6, 24)는 예수님 말씀입니다.
세상에 태어나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의 ‘한 생애’란 두 번 살 수 없는 삶입니다. ‘두 번 살 수 없다’는 이 분명한 사실은 ‘1회성 삶’이라는 것이지요. 그 한 생애란 그것이 1회성이듯이 한정된 어느 시간 안의 삶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른바 ‘천수’를 누려서 80년, 아니면 90년 혹은 100살이 되도록 살기도 합니다만, 어떤 사람은 꽃봉오리가 채 피기도 전에 떨어지듯이 어려서 혹은 청년기에 삶을 마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 동양적 관습에 의하면, 60년 살았을 경우에 자기 태어난 해를 다시 만난다고 해서 ‘회갑’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회갑을 지나면 두 번 사는 격이 되는 것이겠지요. 그렇게 생각하자면, 저는 그 두 번째 살기를 상당히 하고 있는 행운아입니다.
저는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하신 말씀을 들으면서 ‘두 주인 섬김’이 혹 ‘두 번 살기’와 관련성이 있는 말씀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면, 우리가 살아가면서 아등바등 하는 꼴이 ‘주인 섬기기’처럼 자유가 없는 삶인 것 같기 때문입니다. 사는 세상이란 ‘고해(苦海)’라 하듯이 늘 고통이 넘치는 곳인데,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이 세상을 오래오래, 아니 영원히, 살고 싶어서 아등바등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단적인 예로써 ‘노인들의 거짓말’이 있습니다. 연세 높으신 분들에게 좀 결례가 되는 이야기입니다만, 나이 먹어 오래 살 게 아니라면서 노인들께서 자조적으로 하시는 말씀 가운데 분명히 거짓말이 있습니다. 젊은 자식들이나 후배들 앞에서 “아이고, 나는 오래 살고 싶지 않아…” 하고 말씀하시는 것은 분명히 거짓말입니다.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게 증명된 실화가 있습니다. 다음의 이야기입니다.
며느리 하는 짓이 보기 싫어서 가끔 “아이고, 내가 빨리 죽어야지…” 하며 입버릇으로 잔소리 하던 늙으신 시어머니께서 하루는 외출해서 돌아오시며 하시는 말씀이었습니다. “얘야, 나 오늘 까딱하면 죽을 번했다. 아 글쎄 어떤 미친놈이 차를 몰다가 나를 칠 번했단다. 나 치어죽었으면 너 좋을 건데… 그렇지만 나 그렇게 쉽게 죽지 않는다. 나 지금껏 살아온 게 거저 아니다.” 이 이야기는 제가 잘 알고 있는 교우 할머니께서 들려주신 실제 이야기입니다. 자신만만하게 살아오신 할머니의 말씀입니다.
지금의 처지에서 삶의 성취를 가장 완벽하게 하라
이 할머니의 말씀이 그렇듯이, 우리 모두는 맥없이 죽고 싶지 않습니다. 남보란 듯이 당당하게 오래오래 살고 싶은 게 우리 모두의 본능입니다. 그래서 한 세상 그렇게 살지 못하고 죽게 되는 사람을 두고 ‘덕담’처럼 하는 말이 있습니다. “다시 태어날 때 부자로, 건강하게, 출세 복 타고, 여자 아닌 남자로, 등등… 못 이룬 꿈 다시 살 수 있게 다음 세상 만나라”고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그런 게 아닙니다. ‘지금의 처지에서 삶의 성취를 가장 완벽하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 뜻을 예수님께서는 다음의 말씀 속에 함축적으로 피력하십니다. “들에 핀 나리꽃들이 어떻게 자라는 지 지켜보아라.(…) 솔로몬도 그 온갖 영화 속에서 이 꽃 하나만큼 차려입지 못하였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먹을 것, 입을 것, 그런 것에 삶의 목적이 있는 듯 연연한다는 것은 하느님 백성답지 못한 것이다’라고 예수님께선 단언하십니다(마태 6, 31∼32 참조).
이런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께서는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자기 수명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느냐?”(마태 6, 37)고 반문하십니다. 그러시면서 ‘하늘의 새들’처럼 살라고 하십니다(마태 6, 25∼26 참조).
하늘의 새들처럼 사는 삶이란?
저는 여기서 ‘하늘의 새들처럼 사는 것’이란 어떤 삶일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한없이 넓은 하늘을 새들은 날아다닙니다. 먹을 것을 찾아 땅에 내려오기도 합니다만, 하늘을 마음대로 나를 수 있는 새의 날개는 ‘자유’를 상징합니다. 그 자유를 잠깐 보류할 때가 있지요. 먹을 것에 마음이 잡힐 때 날개를 접어 땅에 내려앉게 됩니다. 먹을 것 때문에 자유를 유보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래서 상징적으로 욕심(먹을 것에게 빼앗긴 마음) 때문에 사람이 사람답지 못하게 됨을 새들에게서 깨달아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람들 사이의 싸움은 ‘먹을 것 차지하기’위한 다툼입니다. 그래서 시끄러운 뉴스들의 내용은 기실 따지고 보면 모든 게 ‘밥그릇 싸움’입니다. 힘깨나 쓰는 자리, 돈 생기는 자리, 명분 세우는 자리… 이런 모든 자리싸움은 ‘내가 더 먼저 더 많이 더 크게 먹자’는 싸움입니다. 그런 싸움을 일컬어 통칭 ‘밥그릇 싸움’이라고들 합니다. 그런 싸움으로 일생을 살고 있습니다. 그 싸움에 승리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마치 일생이 영원할 듯이 아등바등 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모두들 그러다가 예기치 못한 자신의 죽음에 이릅니다. 그래서 죽는 모든 사람은 ‘한’을 남기고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그 ‘한’이란 더 못 살아 남는 ‘아쉬움’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반문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자기 수명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느냐?”(마태 6, 37)
그렇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생애의 주인은 둘이 아닙니다. 나 자신이 내 생애의 주인이어야 합니다. 나 자신은 ‘딱 하나’입니다. ‘딱 하나인 나 자신’은 하느님께서 보장해주신 가장 귀중한 존재입니다. 그 귀중한 존재를 인정하시고 ‘너 자신으로 살아라.’하신 하느님의 인준 하에 나는 마음껏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게 하느님께서 주신 나의 ‘자유’입니다. 땅위의 먹을 것 때문에 나의 자유가 얽매일 수는 없습니다. 새처럼 들꽃처럼 살아야겠습니다. 본연으로 주신 삶을 살겠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 대답할 수 있는 마음가짐으로 산다면, 그런 삶을 저는 표현하여 ‘대자유의 삶’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그 뜻은 ‘큰 삶’이라는 것입니다. 쪼잔하게 사는 게 아닙니다. 한 번 사는 삶인데 눈앞에 보이는 먹을 것 가지고 마음 빼앗겨 살아서 되겠습니까? 세상에서 뻥뻥거리겠다고 아등바등 하면서 저 세상 천당 가겠다는 식으로, 세상사는 방식 따로 있고 천당 가는 방식 따로 있는 격으로 살지 마라고 예수님께선 오늘 말씀하십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마태 6, 24)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아마 그래서 우리의 선조들 치명자들께서 이 말씀을 잘 알아들었던 분들 같습니다. 사는 세상 두 개가 아니라는 것을 그분들은 잘 아셨던 것 같습니다. 사는 세상 두 개가 아니라는 사실의 깨달음은 그래서 다음과 같은 말로 표현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한 번 사는 인생, 한 번으로 끝이라는 각오로 제대로 살아야 한다. 내 인생 시시한 걸로 빼앗기지 말고!’
그래서 나의 한 번 삶은 그것이 “‘본전 찾기’이다.” 라고 평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이번 주간에 사순절을 시작합니다. ‘재의 수요일’에 머리에 재를 얹으면서 나 자신에게 말할 것입니다. 다음과 같이 말입니다.
“사람아,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다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라.”(재의 수요일 예식 중)
이 생각에서 얻는 것이 있습니다. ‘대 자유(大 自由)’입니다. 하늘을 나는 새처럼 누리는 자유입니다. 그래서 한 인생의 ‘본전’은 ‘대 자유’입니다. 그러한 ‘본전 찾기’가 곧 우리의 신앙입니다.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76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년 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년 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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