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2주일
2014년 3월 16일 10시 만수리공소 윤종관 신부
세상살이 가운데 부활을!
그래서 우리의 삶은 늘 사순절이다
우리가 따르는 예수님은 누구이신가?
오늘 사순 제2주일의 말씀 전례는 당신의 측근 제자 세 사람을 데리고 산에 올라가셔서 당신의 영광스런 모습을 보여주신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화를 주제로 하여 주님을 따르는 사순절의 여정을 안내합니다.
우리 또한 사실상의 예수님의 제자로서 그분을 따라 걷는 이 세상의 험난한 길에서 수시로 제기되는 질문에 대하여 얻어야 할 해답을 오늘 ‘거룩한 변모 사화’는 암시하는 것입니다. 그 질문은 “우리가 따르는 예수님은 누구이신가?”라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오늘의 ‘거룩한 변모 사화’ 이전에 베드로의 입에서 실토되었었지요. “예수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하고 말입니다(마태 16, 16 참조).
그렇다면, 오늘 ‘거룩한 변모 사화’를 체험한 나 자신이라면,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로서, 그분이 본래 너무나도 엄청난 분이심을 알게 된 그 현장에서 베드로처럼 나도 “주님, 저희가 여기서 지내면 좋겠습니다.”(마태 17, 4) 하고 대답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베드로의 간청을 묵살하다시피 하시고는, 산에서 내려올 때에 “내가 죽었다가 되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고 하십니다(마태 17, 9 참조). 오늘의 이 감동에 대해서 부활절이 오기까지 표현하지 마라는 당부이십니다.
우리도 베드로처럼 말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그런 당부에도 불구하고 “주님, 저희가 여기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하고 말한 베드로처럼 저도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 한국어 번역문으로는 ‘여기서 지내면’ 좋겠다고 되어있습니다만, 성경 원문의 표현대로 하자면 ‘여기 있는 게’ 좋다는 베드로의 실토였습니다. 라틴어와 영어의 번역문에는 “주님, 우리 여기 있는 게 좋습니다.” 라고 되어있습니다. [라틴어 : “Domine, bonum est nos hic esse” / 영어 : “Lord, it is good for us to be here”] 베드로의 요청은 거기서 일시적으로 지내자는 게 아닙니다. ‘여기서 눌러 살고 싶습니다.’라는 뜻이었습니다. 그 산에서 내려가지 말자는 요청이지요.
베드로와 함께 그렇게 말하고 싶은 심정에 대해서 저는 오늘 빌 그림 신부님의 복음묵상을 인용하여 말해볼까 합니다.
거룩한 변모의 현장은 종교적 기본체험이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란, 그 현장에 있던 제자 세 사람이 종교적 기본체험을 한 것이라고 빌 그림 신부님은 설명합니다. 어떤 ‘거룩함’에 대한 체험이 종교의 바탕이라는 루돌프 오토(Rudolf Otto)의 주장에 따라, 그것은 ‘두렵고 매혹적인 신비(mysterium tremendum et fascinans)’에 대한 체험이라는 것입니다. 경외(敬畏)와 황홀(恍惚)의 동시적 신비체험이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의 측근 제자 세 사람이 그러한 체험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제자들은 ‘황홀체험’을 먼저 합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여기서 눌러 살고 싶습니다.” 하고 말했던 것입니다(마태 17, 4 참조). 그러나 제자들은 그 다음으로 ‘경외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린 채 몹시 두려워하였습니다.”(마태 17, 6 참조)
황홀 체험, 경외 체험
여기서 저는 ‘경외체험’을 하게 된 그 제자들의 그 순간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하는 점을 먼저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베드로의 ‘황홀체험’을 미처 다 실토하기도 전에 제자들을 덮던 구름 속에서 소리가 들립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고 말입니다(마태 17, 5). 이 순간이 오늘 ‘거룩한 변모’의 현장에서 클라이맥스입니다.
이 순간에 대한 설명에 있어서 빌 그림 신부님은 ‘경외체험’이란 곧 ‘하느님 현존에 대한 체험’이라 합니다. 하느님께서 여기 계시다는 현장의 두려움이 그것입니다. 하느님을 대하면서 갖게 되는 ‘두려움’은 어떤 공포(恐怖·fright·terror)가 아닙니다. 하느님 앞에서의 두려움은 나 자신의 연약함과 보잘 것 없음에서 갖는 경외심(敬畏心)의 발로입니다. 그것은 마치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선 느낌 같은 것(C.S. Lewis의 표현)이라는 예를 들면서, 우리가 영성체하기 전에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하고 고백하는 신앙이라고 빌 그림 신부님은 설명합니다.
그런 처지에서 우리는 동시에 예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이 누구인가를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분은 우리와 같이 평범한 사람입니다. 제자들이 그분을 따라다니기 시작했을 때 그분은 보잘 것 없는 시골의 ‘목수’였습니다. 그런데 그분과 함께 ‘높은 산에 올랐을 때’(마태 17, 1 참조), 그분에게서 엄청난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위대한 예언자들(모세와 엘리야)의 숭배를 받는 분입니다(마태 17, 2∼3 참조). 그분은 곧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제자들이 깨닫게 됩니다(마태 17, 5 참조). 우리 자신들과 별반 다를 게 없는 ‘목수’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니…!
경외심과 매혹을 느끼는 마음으로 상경하는 동행길
이러한 깨달음 가운데 제자들은 아무 말도 못합니다. 그리고는 그 ‘두려움(경외심)’과 더불어 그분에 대한 ‘매혹’을 느끼면서 제자들은 그분의 예루살렘 상경 행에 동행합니다. 그러나 그 길은 결국 그분의 비참한 죽음을 체험하는 행로였고, 훗날 그분의 부활을 확신하는 체험에 이르기까지는 그 제자들의 삶 속에서 많은 고뇌의 시간이 지나서야 가능할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점에 대하여 오늘의 우리 자신들에게 주어진 과제에서 그 실현을 보아야 한다고 빌 그림 신부님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현재 우리의 삶 가운데 신앙으로 하느님을 늘 만나는 경외심으로 살아가면서,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인 것처럼 우리 자신들도 ‘하느님의 아들’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예수님의 그 황홀한 모습을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에게서 그분이 하느님의 아들이시면서 동시에 우리와 같은 인간이신 점을 볼 수 있듯이, 인간인 우리도 우리 자신에게서 하느님의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매혹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고 빌 그림 신부님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우리는 이미 세례성사로 그런 존재가 되었고, 그렇다는 사실을 세례서약 갱신으로 다짐할 부활절을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
참 모습이란 삶이 다하고 나서야 드러나는 것
그렇다면,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제자들로 하여금 그분이 ‘사람의 아들’로서 죽고 부활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하신 뜻을 우리가 오늘 되새겨야 합니다. 그러한 예수님의 제자로서 그분을 따라 걷는 이 세상의 험난한(두려운) 길을 걷고 있는 우리는 인간이면서도 하느님의 자녀로서 아름다운(매혹적인)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인(연약한)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는(황홀한)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현재 모습은 어떤 말로써 보다는 우리 자신의 삶으로써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아날 때까지는…” 이라고 예수님께서 당부하십니다. 이 당부말씀이 다음과 같이 들리고 있습니다.
“너희의 참 모습은 너희의 삶이 다하고 나서야 드러나는 것이어야 한다. 그것은 너희가 하느님 자녀로 살았다는 훗날의 사실 증명이 이 험난한 세상에서 지금 살아가고 있는 중에 이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오늘의 말로써가 아니니라.”
우리의 삶이 늘 사순절이어야 한다는 메시지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서 외로움과 고뇌의 길을 가면서 그분을 따라 끊임없이 걸어야 하는 우리가 그분의 제자답게 결코 좌절하지 않아야 함을 오늘 그분은 당신의 영광스런 변모 체험에서 당신이 가실 고난의 길로 암시하십니다. 우리는 그 영광스런 부활의 새 삶을 향하여 그렇듯이 묵묵한 우리의 한 인생길을 끊임없는 사순절처럼 걸어가 하느님 나라를 성취할 것입니다. 부활과 같은 황홀체험은 베드로의 고백처럼 그 어느 한 곳의 한 순간을 붙잡아서 이루어지는 게 아닙니다. 연약한 우리의 험난한(두려운) 세상살이 가운데 영광의(황홀한) 부활을 품고 살라는 예수님의 사순절 메시지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늘 사순절이어야 한다는 메시지입니다. 우리의 치명 선조들이 그런 사순절의 삶으로 부활을 얻은 분들이었습니다.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79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년 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년 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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