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3주일

2014년 3월 23일 10시 만수리 공소 윤종관 신부


예수님은 봉이 김선달인가? 

‘물’은 ‘H2O’만이 아닙니다. ‘생명’입니다!



오늘 우리는 광야에서 목말라 죽게 된 백성이 모세의 지팡이로 바위가 열려 물을 마시게 된 기적 보도를 오늘의 제1독서로 읽습니다(탈출기 17, 3∼7 참조). 그리고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 사이의 대화를 오늘의 복음으로 읽습니다(요한 4, 5∼42 참조). 그래서 오늘 물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물은 지구 표면의 73%이고, 사람 뇌의 90%


과학적 시각으로 물을 말할 때 H2O라고 일컫고, 지구에 생명체가 존재할 수 있는 까닭은 물이 있기 때문이라고 하며, 지구 표면의 73%가 물(바다)이므로 그만큼 물이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 몸의 적어도 반절 이상은 물입니다. 더욱이 사람 몸의 중추인 뇌는 약 90%가 물이랍니다. 갓 태어난 신생아의 몸은 80%가 물이고 장성한 사람의 몸은 그 75%가 물인데, 노인의 경우에는 50% 이하가 된답니다. 사람이 늙어갈수록 몸에서 물이 말라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화는 곧 건조의 과정이라 합니다. 말하자면 체세포의 수분 함량의 감소현상이 죽음에 가까워지는 것을 뜻한다고 할 수 있지요. 그렇다면 물을 많이 섭취할수록 늙는 속도가 더디게 될 수 있고, 죽지 않으려면 물을 계속 마셔야 한다고 말 할 수도 있겠지요.


저는 평소에 실제로 물을 많이 마시는 습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등산할 때에는 물을 아주 많이 가지고 출발합니다. 높은 산에 오를수록 그리고 장시간 산행을 할수록 물이 떨어지고 샘을 발견할 수 없을 경우를 대비해서 물병을 여러 개 채워 배낭에 넣어서 짊어지고 산에 오릅니다. 제가 워낙 땀을 많이 흘리고 물을 많이 마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산할 때 결국 집으로 되가지고 올지언정 저의 배낭이 물병으로 묵직해야만 마음이 놓일 정도로 산행 중 저는 물을 가장 귀중하게 챙깁니다.



물과 관련된 월출산 산행의 추억


한 마디로 저는 물 욕심이 많습니다. 그렇듯 지독한 물 욕심 때문에 저는 이웃 사랑을 거부한 일도 있습니다. 이십년 정도 세월 지난 과거의 일입니다. 전라도 월출산 산행을 하면서 그렇게 이웃 사랑을 거부한 일이 있습니다. 


월출산 동쪽의 천황사에서부터 서남쪽 무위사까지의 6∼7 시간을 예상하는 종주 산행을 시작하여 첫 구간인 천황봉을 오르는 가파른 길에서 어느 중년의 두 부부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저를 만난 그 두 부부 중 한 분이 저에게 말을 건넸습니다. “아저씨, 예수 믿고 구원 받으세요.”하고 말입니다. “예, 그렇게 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하고 대답한 제가 지나쳐 바위 길을 오르는데, 그 부부들은 바위 위에 서서 산 아래를 향하여 고함을 지르는 것이었습니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하고 계속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 끼리 서로를 호칭하여 ‘목사님, 사모님’이라 하는 말이 저의 귀에 들려왔습니다. 저는 그때 생각하였습니다. 그날 제가 전날의 주일을 지내고 월요일을 휴일 삼아 아침 일찍 차를 몰아 그 월출산 산행을 하게 되었는데, 그 두 쌍의 남녀도 주일을 지낸 교회의 목사 부부로서 월요일을 그렇게 휴일 삼아 산에 왔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들과의 동료 의식으로 마음속에 호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저 혼자 앞질러 산길을 올라 구름다리를 지나 첫 쉼터 자리로 사자봉 바위에 걸터앉아 산 아래 전경을 감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배낭에서 물병을 꺼내어 물 한 모금을 마시는데 그 목사 부부가 뒤따라 올라와서는 옆의 바위에 걸터앉으면서 또 다시 “아저씨, 예수 믿고 구원 받으세요.”하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더니 그들 중 한 목사님이 저에게 “거 물 좀 얻어 마십시다.”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반문하기를 “목사님은 어디까지 산행하실 건데 물을 가지고 오시지 않으셨나요?” 했더니, “우린 요 위 봉우리까지 올랐다가 내려갈 거라서 물을 가지고 오지 않았습니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제가 다시 반문 겸 거부하는 말로 “저는 무위사까지 앞으로 여섯 시간도 넘게 산을 가야 하는데요.” 하고 말했습니다. 저의 그 말을 듣고는 그들 중 목사 사모님이 “아저씨, 그 물 한 모금 나눠 마실 수 없으세요? 좋은 일 한번 하세요.”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제가 톡 쏘는 말로 “이보세요. 댁네들은 곧 내려가서 물 마실 수 있지만, 저는 이 물병 아니면 6시간 넘게 물을 만나지 못합니다. 이 산의 지도를 보면 종주 코스에 물 나오는 샘이 없습니다. 저의 이 물병은 그야말로 생명의 물입니다.” 하고 핀잔을 하고는 물병을 배낭에 쿡 찔러 넣어버렸지요. 그리고 일어서는 저의 뒤통수에 대고 그 사모님이 말했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 받으세요. 예수가 생명숩니다.” 저는 대꾸하지 않고 그냥 저의 길을 갔습니다만, 입속의 혼잣말로 “당신들 말대로 예수 믿고 내 생명수나 빼앗지 마시오.”하고 뇌까렸습니다.


많은 시간 산행을 하면 땀을 많이 흘리게 됩니다. 그런 때 적절하게 물을 섭취하지 못하면 몸에 이상을 초래하게 되고 위험한 산길을 감당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산행을 할 때 물을 가장 귀중하게 챙기느라고 그날 그렇게 이웃 사랑을 거부했습니다. 사실 물이란 산행할 때만이 아니라 사람에게 있어서 항상 생명과 직결되는 것입니다.


우리 몸이 필요한 하루 분량의 물은 2,600ml


우리 몸은 하루에 2,600㎖가량(사이다병 7∼8개 정도 분량)의 물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그 많은 양의 물을 하루 동안 우리 몸의 구석구석을 도는 혈액을 타고 돌아서 신장(콩팥)을 통하여 소변으로, 그리고 호흡을 통하여, 그리고 소화기를 통하여 대변으로, 그리고 순환작용을 통해서 땀으로 내보내면서 늘 새롭게 보충해야만 건강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몸의 75%가 물이라 하는데, 그 물을 이렇게 매일 2,600㎖가량 갈아주면서 대략 16일 정도에 우리 몸의 물이 전부 바뀌게 됩니다. 한번 생각해보세요. 물통에 물을 채워놓고 오랫동안 내버려두면 그 물이 썩게 되지요. 수족관에 물을 채우고 공기 방울만 계속 돌린다 해서 그 수족관의 고기가 정상적으로 살겠습니까? 정기적으로 물을 갈아 넣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 몸에 들어 있는 물이 나가지도 않고 새로 들어오지도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만일 그렇듯이 들어오고 나가는 물의 작용이 없다면 혈액과 몸의 각 기관의 체세포에 노폐물이 축적되어서 각종 질병을 일으킬 것입니다. 그럴 경우 한 마디로 몸이 썩게 되는 것입니다. 


대략 보름이 넘으면 우리 몸의 물이 전부 바뀐다


강물의 흐름을 방해하는 짓을 함으로서 강이 썩고 생태계가 파괴되는 현실을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데, 그것은 이른 바 ‘4대강 사업’이라는 것이었습니다만, 그건 이명박이 우겨대던 ‘4대강 살리기’가 아니라 ‘4대강 죽이기’였음이 통탄스럽게 확인 되고 있습니다. 


자연이 그렇고 우리 몸이 그렇습니다. 방해 없이 물이 들어오고 나가야만 자연도 몸도 죽지(썩지) 않습니다. 그래서 매일 그렇게 많은 물을 마시도록 우리 몸이 생리적으로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생리적 작용을 하지 못하는 몸이라면 그만큼 건강치 못한 것이지요. 그러므로 그 정도의 물을 마시고자 하는 우리 몸에게 물을 섭취하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에 몸에서 물이 나가기만 하고 제대로 섭취하지 못하게 되어 우리 몸의 물중에 10%가 감소하게 되면 생명이 위태롭게 되고 더욱 20% 정도가 모자라게 되면 목숨을 잃게 됩니다. 그래서 땀을 많이 흘리게 되는 산행 길에는 물이 가장 중요한 것이고, 그렇듯 우리의 생명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Taking the Water


그리고 물은 그렇듯 몸의 생리작용 때문에 중요할 뿐만 아니라 우리 인간은 물과 함께 하는 문화로 사실상의 인류 사회를 형성합니다. 미국의 터키 출신 여류 작가 알레브 라이틀 크루티어(Alev Lytle Croutier)는 그의 ‘Taking the Water’라는 책에서 물과 함께 하는 인간학적 실증 자료를 수록하면서, “사람들은 모두 다 각자의 물에 관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우주와의 관계에 대한 인간적 삶의 내용을 신화적 의미 부여와 종교적 확신과 예술적 창의성과 민족 단위적 정체성 확립에 의한 풍요한 문화 형성에 이르도록 하는 것으로, 물의 작용을 일컬어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물의 이야기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국의 소설가이자 시인인 D.H.Lawrence는 “물은 H2O, 즉 수소 두 개와 산소 하나이지만, 물을 구성하는 제3의 것이 있다. 다만 그것이 무엇인지 아무도 모를 뿐!”이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말할 수 없음은 물이 그 자신의 언어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물을 말하다 보면 자연 즉 우주를 말하지만 동시에 인간을 말하게 됩니다. 그래서 물은 단순하게 “H2O, 즉 수소 두 개와 산소 하나”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고 그 다음 뭐라 말할 수 없는 어떤 것입니다. 그래서 물은 신화적 요인이기도 하며 인간의 실생활에 가장 가까운 숙제의 영역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치수(治水)는 정치의 근간이고 신(神)이 인간과 우주에 자신의 역량을 행사하는 매체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구원의 확신적 상징(Symbol)으로써 ‘물의 세례’를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는 것으로 믿는 것임을 Alev Lytle Croutier는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런 관점으로 우리는 말할 수 있습니다. “과학적으로만 말 할 수 없는 물, 그것은 하찮은 것일 수 있지만, 생명을 그 비중으로 삼고 있으며 인간의 삶 전체를 반영하는 것이다.” 라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시대에 와서 자연수를 신뢰할 수 없어서 병에 넣어 팔아먹는 물이라야 안심하고 먹어야 할 지경이라면 병에 넣은 것을 사먹는 술처럼(술이란 곡식이나 과일을 썩혀서 거른 물이기에) 오늘날 우리가 물을 죽여서 마시듯 하는 현실은 이제 물이란 생명의 물이 아니고 의심의 관문을 통과시키는 동안 이미 죽어버린 물이 되었다고 개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소위 ‘생수’라는 라벨(Label)을 붙인, 즉 돈으로 값을 매긴 물만을 신뢰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우리의 생명이 위협을 당하고 있음을 뜻하듯이, 우리의 생명이 죽음의 세력한테 포위된 실정인 것입니다. 우리 생명을 보장할 믿음을 우리 주위에서 얻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신 말씀


여기서 우리는 오늘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신 말씀을 우리 처지에서 알아들어야 합니다. 그 사마리아 여인은 누구였습니까? 이미 남편을 다섯이나 거쳤고 여섯 번째 남자와 살고 있으면서도 그걸 남편이라 할 수 없는 그런 여인이었습니다(요한 4, 17∼18 참조). 그 가련한 여인의 처지는 곧 오늘 세상의 우물에서 물을 긷고 또 길어도 참 삶을 얻을 수 없는 우리 인간의 처지입니다. 우리의 생명이 죽음의 세력한테 포위된 실정, 즉 우리 생명을 보장할 믿음을 우리 주위에서 얻을 수가 없게 된 그 상황을 사마리아 여인의 처지로 오늘 복음 성경은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 사마리아 여인과 같은 우리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즉 세상의 우물에서 물을 긷고 또 길어도 참 삶을 얻을 수 없는 우리 인간에게 주님께서 지금 찾아 오셔서 “‘나에게 물을 좀 다오.’하고 너에게 말하는 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오히려 네가 그에게 청하고 그는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요한 4, 10) 하시고는 다음과 같이 확언하십니다. “이 물을 마시는 자는(즉 세상의 물만을 마시는 사람은) 누구나 다시 목마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요한 4, 13∼14)


진정한 생명을 보존할 수 있는 물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이 진정 생명을 얻어 보존할 수 있는 물은 세상에게서가 아니라 예수님에게서 얻어야 할 물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대동강 물을 무한정 팔아먹는 봉이 김선달 같은 분인가? 무한정 솟는 당신 샘의 물을 우리가 무엇인가 그분께 내드리면서 얻어 마시라고 말씀하시니 말입니다. 


우리가 그분께 내드려야 할 그것은 당신께 대한 믿음인 것입니다. 믿음이란 김선달에게 물 값을 치러야할 돈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절망을 체험하고 있는 우리에게서부터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믿음을 발견하시고자 먼 길을 걸어 지치신(요한 4, 6 참조) 갈증으로 우리 절망의 우물곁에 찾아오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믿음에 대한 값은 이미 예수님께서 먼저 치르셨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죽음에 이르도록 지치신 십자가상의 예수님께서 끝내 하신 말씀이 “목마르다.”였듯이.”(요한 19, 28),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자 죽으심으로써 부활에 이르신 것과 같이 우리도 그런 길을 믿음으로 따르라고 촉구하십니다.


믿음의 두레박에서 마신 물은 목마르지 않다  


여기서 우리가 다만 믿음의 두레박으로 물을 길음으로써 다시는 목마르지도 않고 물을 길으러 나오지 않아도 되도록(요한 4, 15 참조) 해주시는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의 말씀을 직접 들음으로써(요한 4, 42 참조) 우리의 믿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고 오늘 복음 성경은 우리를 깨우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생명의 ‘물’을 얻으라는 메시지인 것입니다. 그 ‘물’은 그냥 우물에서 퍼 올리는 ‘H2O’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물은 ‘생명’입니다. “그 물을 저에게 주십시오.”(요한 4, 15)하고 말하는 사마리아의 가련한 여인처럼 우리도 예수님께 믿음을 고백해야겠습니다. 그러면서 사순절의 중반에 이른 우리도 지금 그런 믿음으로 새로운 생명을 얻는 부활절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몸에 끊임없이 물이 보충되어 흘러야 하듯이 그렇게 믿음이 우리 삶을 늘 관통해야 합니다. 그런 우리 믿음의 삶이 곧 연속적인 부활의 방향입니다.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80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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