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7주일

2014년 2월 23일 @ 인천 만수6동 성당

만수리 공소 윤종관 신부


사랑은 지랄 같은 거여, 미치면 안 보여 

"사랑? 그게 뭡니까?"


오늘도 지난 주일까지 들었던 예수님의 산상 설교를 이어서 봉독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특별히 당부하신 말씀을 연이어 우리가 듣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말씀은 그대로 실천하기가 정말 어려운 내용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마태 5, 44)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도대체 가능하기나 한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더욱, 나를 못살게 괴롭히는(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까지 하라니, 도무지 할 수 있는 걸 하라고 하셔야지!


예수님의 이런 말씀에 따라 내가 만일 북한 김정은을 사랑합시다.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합시다.’고 말한다면 사람들이 나를 보고 뭐라 할까요? 요즘 걸핏하면 빨갱이로 몰리는 판인데, ‘진짜 빨갱이라고 몰매 맞아 죽든지, 아니면 미친 놈이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사랑해서는 아니 되는 사람도 있다는 말이 되지요.


그런데 북한 김정은이가 아니더라도 저는 개인적으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제가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옛적에 제가 군종신부로서 추운 겨울 오토바이로 전방을 돌아다니다가 너무 고생스러워서 고물 자동차라도 구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쥐꼬리 만 한 월급을 쓰지 않고 모아서 중고 자동차를 알선하는 교우 한 분에게 알아봐 달라고 부탁하며 그 돈을 맡겼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적당한 차를 알아보려면 좀 시간이 필요하다면서 몇 달 동안 미루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 분의 사무실을 찾아갔는데, 아 글쎄 간판도 없애고 사라진 것이에요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모두 모른다고만 하는 거예요. 그 분을 찾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돈만 떼이고 만 것입니다. 그 후로 그 분을 다신 만날 수 없었고, 수십 년 지난 지금까지도 그 분이 어디 사는지 모릅니다. 돈 없는 군종신부로서 그 후 더 고생만 하였지요. 지금도 그 일이 회상되면 그 분에 대해서 미움이 앞섭니다. 그 일 말고도 다른 사람들에게 속임(배신)을 당한 일들도 여럿 있습니다. 생각나면 괴롭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선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한 뺨을 치면 다른 뺨도 내주어라. 속옷 달라면 겉옷까지 내주어라.”(마태 5, 3940)


이거 참으로 어이없는 말씀입니다. 당최 할 수 있는 걸 하라고 하셔야지요! 도대체가 예수님의 사랑이라는 게 무엇을 뜻하는 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 반문하고 싶습니다. “사랑? 그게 뭡니까?”하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 그게 뭔지 모르겠습니다. 나에게 해코지 하는 자를 사랑할 수 있단 말인가? 참 어렵습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그렇게 사랑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것 같습니다.

제가 앞서 군종신부 시절의 그 씁쓸한 기억을 말하면서 아직까지도 미움을 떨쳐내지 못하는 게 사실 부끄러운 일이지요. 사제로서 수시로 강론에 사랑을 말하는 게 위선이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이 강론을 준비면서 더 이상 원고를 써내려갈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의 복음 말씀을 들어서 저의 위선을 또 말하게 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강론 원고 작성을 중단했다가 이틀 만인 어제(토요일) 인터넷 신문 여기저기를 검색하여 읽던 중에 눈에 확 들어오는 기사 제목을 클릭했습니다. 그 기사 제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사랑은 지랄 같은 거여, 미치면 안 보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기사는 사랑은 뭐길래라는 제하로 공모된 글이었습니다. 제가 오늘의 강론 제목으로 사랑? 그게 뭡니까?’라는 머리글을 달고 원고 작성을 이어가지 못하던 중에, 모 신문에서 동일한 제목으로 공모하여 소개한 글을 읽게 되어 그 내용을 이렇게 옮겨 볼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일종의 표절이지요. 그 신문이 채택하여 게재한 그 글을 쓴 분은 여성이라서 그런지 사랑에 대해서 자신의 체험을 섬세하고 애절한 표현으로 독자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글 쓴 분 자신의 체험과 주변 친구들의 체험 이야기를 엮어서 그분은 자신의 심정을 절절하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자식과 부모 사이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입니다. 그분 자신과 주변의 그 사랑하며 사는 사연을 여기서 다 소개할 수는 없습니다만, 그 내용을 한 마디로 제가 옮기자면, 사랑이 뭔지 그건 하면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말로 하는 게 사랑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 글에 나오는 사랑 이야기는 그 전부가 사랑 설명이 아니고, ‘하는 사랑입니다. 본인 스스로 하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그 하는 사랑의 주인공들은 한 결 같이 사랑하느라고 자신의 삶은 큰 손해를 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자신의 삶이 망가지면서 사랑을 하는 사람들을 글 쓴 분이 소개한 기사였습니다. 제가 여기서 표현상 자신의 삶이 망가지면서 사랑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평한 말 자체가 그 분들에게는 모욕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분들은 망가지는 삶을 살아온 게 아니라, 사실상 사랑 하는 게 삶 자체인 분들입니다. 그렇다면 그분들의 삶이 망가진 게 아니고, ‘성공적인 삶을 사는 분들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 글 쓴 분은 끝에 자기 친구 세 사람에게 다음과 같은 격려를 보내고 있습니다. “참 잘하고 있어! 존경스러울 정도로넌 최고의 사랑을 하고 있어!”


글 쓴 분으로부터 이런 격려를 받은 분들 중에는 어머니의 중병을 15년 동안 돌보느라고 나이 50이 넘도록 결혼도 포기한 채 살아온 남매가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 분은 알츠하이머와 폐암으로 12년째 투병하시는 어머니를 간병하며 하루에 십만 원하는 약을 구해드리기 위해 매일 힘든 일을 하러 다니는 분입니다. 그리고 글 쓴 분 자신은 혈액암으로 투병하시는 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분입니다. 이런 분들은 그러한 힘든 처지에서 어머니라는 분을 몸의 눈과 손길로 직접 보고 대하는 것 자체를 자녀로서 가장 큰 행복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고생을 고생이라고 누가 말하는 것을 오히려 이상하다고 여긴답니다. 50살이 넘도록 결혼도 하지 않고 어머니를 모시던 그 남매는 정작 어머니의 장례식을 하던 날 주변 사람들이 호상이라며 위로하는 말에 대하여 섭섭해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글 쓴 분은 그들에게 참 잘하고 있어! 존경스러울 정도로넌 최고의 사랑을 하고 있어!”라는 격려를 보내는 것입니다.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다음과 같이 부끄러운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군종신부로 어렵게 살 때 자동차 소개해준다면서 내 돈을 갖고 종적을 감춘 사람에 대한 미움을 아직도 삭이지 못하는데, 그 까닭이 뭘까? 나 손해 본 것 때문에 그런 것 아닌가! 그것 때문에 내 인생 망가진 것도 없는데저 글에서 읽은 사랑하는 사람들의 삶은 누가 볼 때 삶이 망가지기도 했다는 말을 들을 만도 한데도 저렇듯 애절한 사랑하기를 말로써가 아니라 몸으로 하고 있는데

손해 본 것 때문에사랑할 수 없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네요.너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고 부르짖으며 살고 있느냐? 이쪽 뺨 맞으면 저쪽 뺨마저 내놓아라. 속옷 달라면 겉옷도 내놔라. 천리를 가자면 이 천리를 함께 가라.”(마태 5, 3841 참조)


예수님께선 더 나아가 너를 사랑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려느냐? 나의 제자는 그런 식이 아닌데, 원수를 사랑해야 나와 함께 한 아버지를 모실 수 있는데!”(마태 5, 4445 참조) 하시면서 나를 나무라십니다. 그러시면서 너나 너의 원수까지 모두 한 아버지의 자식들인데!”(마태 5, 45 참조)라며 나를 깨우쳐주십니다. 그래서 생각하는 게 있습니다


내가 성지 성역화의 일을 하는 입장에서, 옛 신앙선조들이 가신 순교의 길이 곧 나를 해코지 하는 사람들을 미워하지 않고 사랑하는 길이었음을 말할 자격이 있는가?”


저는 대답할 말이 없습니다. 그런 저는 아마도 진정 사랑을 해본 일이 없어서인 것 같습니다. 앞에 소개한 글을 쓴 분은 자기 체험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분이 돌보는 치매 어르신들에게 한 번은 사랑은 무엇일까요? 괄호 안에 그림으로 또는 글로 써 봐주세요.” 했답니다. 그러자 어르신들 중 한 분이 대답했습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정직한 것!” 그러자 다른 분이 맞대답을 하더랍니다. “사랑? 거머리여! 한 번 붙으면 안 떨어징께.” 또 다른 분이 말했습니다. “지랄 같은 거다. 한 번 미치면 아무것도 안 보여!”, 그리고 다른 분은 손주의 웃음”, 또 다른 분은 그리움이라 대답하시더랍니다.


글 쓴 분은 이런 어르신들의 대답을 듣고 다음과 같은 진단을 합니다. : ‘콩 심은 데 콩 나는 것이라고 말한 어르신은 농사를 지었으며, ‘거머리라고 하신 어르신은 남편의 집착과 의처증으로 힘든 삶을 사셨다. ‘지랄이라고 하신 어르신은 동네에서 바람난 사랑을 보았다며 자세히 말하지 않으셨다. ‘손주의 웃음이라고 하신 어르신은 손주를 생각하면서 해맑게 아이처럼 웃는다. ‘그리움이라고 하신 어르신은 20대에 남편과 사별하셨다.


이런 내용의 글을 읽고 저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사랑에 대한 은 한 사람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거울 같이 보여준다.”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나도 더 나이 먹어서 사랑에 대한 표현을 하게 된다면 어떤 식일까 하는 생각을 해보니, 두려운 생각이 듭니다. “‘사랑을 진정 해보긴 했나?”하고 저 자신에게 질문해서 이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저는 사랑에 대해서 근사한 설명은 할 줄 압니다. 최근에 시국 현안 때문에 우리 교회 안에서 분란의 이야기가 들려오기에 어느 분과 글로써 대화를 한 일이 있습니다. ‘정의를 말하다가 증오의 언어가 튀어나온다면 그건 그리스도인다운 게 아니라는 뜻에서 제가 쓴 글 중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정의의 척도로 다른 사람을 평할 때) 아주 중요한 것으로는 사랑의 눈으로 판단해야 그것이 이른 바 복음적인 것이라는 점입니다. 사안은 바로 잡되, 사람은 상하지 않게 즉, 정의의 저울에 달아보되, 사랑의 눈금으로 판단하고 처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사랑이 뭘까요? 말로 대답하기 참으로 어려운 것이 사랑에 대한 질문일 것 같습니다. 그건 말로 대답할 것이 아니라, 실제 사랑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말없이 그냥 사랑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걸 말로 어떻게 대답할 수 있느냐?’라는 반문이 오히려 대답을 대신할 것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진정 실천한 사랑은 그 사실 증명을 굳이 사람들 앞에 보이려 하지 않습니다. 그저 사랑할 뿐이기 때문이지요.”


저는 사랑에 대해서 위와 같이 말은 할 줄 압니다. 그러나 저의 그러한 말과 일치하게 하는 사랑을 과연 보여주고 있는가 저 자신에게 물어보면 대답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시고 실제로 당신을 죽이는 사람들을 위해서 그들의 죄를 용서해주시라고 하느님 아버지께 간절히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루카23, 34 참조) 저는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어찌 하겠습니까! 그러한 예수님의 제자라고 자처하는 저 자신이니, 이렇듯 어려운 사랑 실천을 하기 위해 몸부림치듯노력은 해야겠지요! 앞서 인용한 어느 분의 글 제목이 사랑은 지랄 같은 거여, 미치면 안 보여라는 것이었듯이!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75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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