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성탄대축일 자정미사

2013년 12월 24일 밤11시 @서짓골성지 주산면 민가

만수리 공소 윤종관 신부


새 마음의 탄생 

2천년 전이 아닌 오늘의 성탄


저는 매년 성탄절이 되면 과거에 지낸 성탄절에 대한 추억으로 마음이 그 옛적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에 젖어들곤 합니다어렸을 때 고향 성당의 성탄 행사에는 연극 공연이 가장 흥미로운 것이었지요. 1224일 저녁 일찌감치 성당 마당에 모여서 장작으로 지핀 모닥불을 쬐면서 기다리다가 가설무대에서 공연되는 성당 청년들의 연극 구경을 한 다음에 밤 11시가 넘어 성당 안으로 들어가 자정 미사에 참례하였지요


그 시절은 밤 11시 반부터 새벽 4시까지 통행이 금지되던 시대였지요. 그러나 성탄의 밤에는 그 통행금지가 해제되곤 했지요. 그러한 성탄의 밤, 통금이 해제된 자유의 맛은 그 밤에만 얻는 큰 선물과도 같았지요. 자정미사가 끝나면 친구들과 함께 밤을 새어 떠들고 놀 수 있어서 참 즐거웠지요. 그리고는 두툼한 방한모를 뒤집어 쓴 머리로 쌩쌩 부는 겨울밤의 바람을 밀어붙이면서 캄캄한 들길을 가로질러 집에 돌아오면 어머니께서 안방 아랫목 이불 속에 넣어두었다가 주시는 따뜻한 밤참을 먹을 수가 있었지요.


신학생 시절에는 성당 청년들과 함께 성탄절을 준비하면서 대나무로 엮어 만든 커다란 별에 창호지를 붙이고 물감을 칠하고 그 속에 전구를 넣어서 성당 대문과 지붕에 걸어 놓고 전등불을 밝혀놓곤 했는데 그 별의 불빛으로 성당이 성탄 밤의 동네에 중심으로 드러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참 좋았지요.


사제가 되어 군종 신부로 해병대 전방 부대에서 지내던 성탄의 밤엔 부대 본부에서 자정미사를 봉헌한 다음에 초병들을 찾아다니며 선물을 나눠주곤 했지요. 그러다 보면 잠 한숨 자지 못하고 꼬박 새는 성탄의 밤이었지만 피곤한 줄을 몰랐습니다.


유럽에 가서 유학하던 시절에 지낸 성탄절 중에서는 이탈리아 남부의 가난한 해변마을에서 성탄 밤에 보았던 그곳 성당의 베들레헴 마구간 행사가 가장 인상 깊은 추억으로 남습니다. 성당의 신자들이 그곳 주임 사제와 함께 동네 뒷동산의 마구간을 찾아갑니다. 신자들 가운데 배역을 맡은 사람들이 성모 마리아의 모습으로 또는 요셉 성인의 모습으로 그리고 가난한 목동들의 모습으로 분장을 하고 그 마구간의 아기 예수님 탄생의 그 밤의 장면을 연출합니다. 그리고는 거기 찾아간 사제와 신자들이 그 마구간의 연출자들과 함께 성당으로 행렬하여 와서 자정미사를 봉헌하는 것이었습니다. 자정미사가 끝나면 다시 그 마구간으로 행렬하여 가서 신자들이 그 마구간의 배역을 교대하여 며칠 동안 그 마구간이 유지되고 거기 참배하는 사람들의 정성을 모으게 됩니다


그리고 그 정성을 모아서 자선기금을 조성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자선기금의 목표액을 채우기 위해서 신자들이 교대로 추위를 무릅쓰면서 며칠 동안 그 마구간 배역을 맡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러한 이태리 시골 성당 신자들의 마구간 행사를 본떠서 몇 해 전에는 제가 있던 지방의 한 성당에서 헛간에 신자들로 하여금 배역을 맡게 하여 성탄 밤의 마구간 행사를 한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곳 신자들은 그 마구간 배역을 맡으면서 장난 끼로 연출하는 바람에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의 성당에서는 성당 마당의 한 귀퉁이에 판잣집 형태의 방을 만들어놓고 도시 빈민 한 가정의 성탄절 밤을 연출하도록 하였습니다. 막노동을 하는 남편은 술에 취하여 주정을 하면서 어린 자녀들을 학대하고, 아내는 집을 나가 소식도 없고, 술 취한 아빠의 반대로 성탄의 밤 미사에 갈 수가 없는 어린 자녀들이 할머니와 함께 방구석에 꿇어 앉아 기도하는데, 먼데서 성당의 성탄 밤 미사를 올리는 성가 소리가 들리고 이어서 성당의 신자들이 성탄 잔치로 먹고 노는 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연출에 이어서 실제로 성당에서 미사를 시작하기에 앞서 예수아기의 인형을 그 판잣집 어린이들의 방에 모시는 행렬을 한 다음에 미사를 봉헌하고 전 신자들이 그곳에 참배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러자 신자들이 성탄 밤 미사 후의 잔치를 시작하기 전에 모두 그곳을 찾아가 정성껏 헌금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헌금을 모아서 성탄절의 낮에 실제로 가난한 분들의 가정들을 찾아가 그 헌금을 전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연극의 성과로 얻은 것은 두 가지였습니다. 성당의 미사와 공동체 잔치로만 끝나지 않고 신자들이 불우한 이웃을 기억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야말로 실제적인 우리 자신의 마음 변화를 얻은 그 첫 번째의 성과였습니다. 불우한 이웃을 실제로 찾아가는 마음을 모았던 것이 의미 있는 행사였습니다만, 그 후에 실제로 일어난 두 번째의 성과는 더욱 감동적이었음을 기억합니다. 그 판잣집 연극의 술주정뱅이 아빠의 배역을 맡았던 분이 평소에 실제로 술을 지나치게 마시는 신자였기에 그 연출을 아주 실감나게 하였는데, 그 후로 술을 끊은 것입니다. 그 연극으로 얻은 일거양득의 성과였습니다.


이러한 추억을 되새기면서 저는 어제 밤 동료 사제 한 분과 함께 서짓골4위 순교성인 무덤제대를 참배하고 일어나 보령호의 수면 위에 얼비치는 별빛을 바라볼 때의 마음을 성탄의 추억으로 또 하나 첨가해 둡니다. 오늘 여기 조용한 산골 마을의 교우 댁에서 성탄 밤 미사를 올릴 수 있게 된 것 또한 추억 보태기에 들어가겠지요. 동료 사제와 함께 서짓골에서 잠깐 기도하고 바라본 보령호에는 백 수십 년 전 신자들이 천상에서 노래하는 성가이듯 겨울밤 하늘에서 내려온 별빛이 물결에 고요히 흔들이고 있었습니다


첩첩 산골에 숨어살던 옛적 교우들이 혹 성탄의 밤에 올려 보았을 기도의 눈빛이 저 별들과 마주쳤겠지요. 그 별빛은 백 수십 년 전에나 오늘의 밤에나 마찬가지겠지요. 그리고 오늘의 호수에 얼비치는 별빛처럼 옛적 교우들의 마음과 오늘 우리의 마음에 작은 흔들림으로 깨우침을 성탄의 밤이 선사하고 있습니다. 어떤 작은 변화가 우리 마음에 일어나게 되는 것이 그 흔들리는 별빛과 같은 것입니다.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일어난 일이 그렇듯 고요하면서도 실제로는 엄청난 변화의 사건입니다.


앞서 이야기해드린 성당의 연극으로 얻게 된 두 가지 성과의 상징을 오늘 밤의 복음 성경(루카 2, 114)에서 함께 볼 수 있습니다. ‘엄청난 변화가 고요하게 일어난 사건, 그것은 두 가지입니다. 우리 자신의 변화와 다른 사람의 변화인 것입니다. 그러한 두 가지 변화, 즉 나 자신의 변화와 다른 사람들의 변화를 통하여 세상이 변합니다. 그러한 변화를 이루는 일이 곧 성탄의 신비입니다. 그러한 성탄의 신비를 오늘 밤 복음은 천사들의 찬양으로 선포하고 있습니다. “하늘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 14)라고 말입니다.

하늘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


그것은 차가운 겨울밤의 하늘에 퍼지는 빛과 같이 매정한 세상 사람들 사이에 퍼지는 사랑의 마음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마치 가난과 추위에 떨면서 소외된 판잣집의 어린이들을 보고 신자들의 마음이 모아져서 거기로 쏠리는 변화를 보였듯이 하늘의 영광이란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어떤 새로움을 일으키는 사랑의 힘을 뜻합니다.


자선행위를 하는 것은 불우한 사람들을 돕기 위한 것으로만 그 의미를 다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어떤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는 것으로만 그 의미를 다하는 것이란 그저 거지에게 던지는 하잘 것 없는 돈 몇 푼과 같은 적선일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탄생을 보면서 하늘의 영광을 체험한다는 것은 우리가 자선을 함으로써 나 자신이 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느님께서 직접 우리 인간의 연약한 처지에로 내려오신 강생의 사건은 그렇듯 하느님 당신 자신이 우리 인간으로 변화하셨다는 것을 뜻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느님 스스로도 그러하셨거늘 우리 인간이 내밀 수 있는 자존심이나 교만이란 이제 무색해진다는 체험이 곧 마구간의 구유에 포대기로 싸여 누워있는 하느님의 아들에게서 얻어질 체험인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은 그렇게 우리 인간들의 교만하고 매정한 마음의 그 어둠을 걷어내는 찬란한 빛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탄의 거룩한 밤을 자신들의 축제로만 여기지 않고 불우한 이웃의 것이 되도록 마음을 쓰게 된 신자들의 변화는 곧,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체험인 것입니다.


연말을 즈음하여 이른바 사랑의 열매를 가슴에 달고 다니는 분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자선금을 기탁하면 그 표시로 그 빨간 열매를 달 수 있는데, 오른 손이 한 일을 왼손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빨간 열매입니다. 그런 식이라면 하느님의 영광이 아니라 인간들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베들레헴 동리 밖 어두운 마구간에 버려지듯 소외되어 구유에 눕혀진 아기에게서 하느님의 영광을 체험한 사람들은 이 어두운 세상의 밤에 외진 곳에 소외된 목동들이었습니다. 요란한 선전을 통해서가 아니라 조용하게 알려지는 강생의 신비는 그래서 우리가 노래하듯이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을 타고 펼쳐집니다.


그렇듯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불우한 이웃을 향한 사랑의 행위란 우리 자신의 조용한 변화 즉 자신의 회개의 행위로써 실천하는 자선인 것입니다. 그것은 불우한 이웃을 행여 몰라본 나 자신이 곧 죄인이라는 자각에서 실천하는 자선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식으로 변화되는 마음을 회개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앞서 이야기해드린 연극 속의 판잣집 어린이들의 아빠 역을 맡았던 신자가 술을 딱 끊는 변화를 보이게 된 것은 곧 우리 자신의 변화로 다른 사람을 변하게 하는 강생 신비의 일면인 것입니다. 그러한 변화로 이루어지는 세상을 일컬어서 오늘 복음이 땅에서는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라고 천사들의 찬양으로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강생의 신비는 하늘의 영광과 세상의 평화를 그 주제로 오늘도 우리에게 이루어지고 있는 변화의 사건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 성탄절은 2천 년 전에 있었던 어느 아기의 탄생 기념일로 그칠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이웃들에게 심어 우리 모두의 새로운 삶을 일구는 마음의 탄생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탄은 내 속에서 고요히 이루어지는 새 마음의 탄생입니다. 그것이 2천 년 전이 아닌 오늘의 성탄입니다.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64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