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 제2주일, 인권주일: 사회교리주간. 2013년 12월 8일 10시30분@온양온천동 성당

만수리 공소 윤종관 신부


마음 속에 꽂히는 말씀 

이웃 사람에 대한 관심을 실천하라! 


대림절을 지내는 우리는 오늘 회개하라.”(마태 3, 2)는 요한 세례자의 매우 다급한 외침을 듣습니다.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3, 2)는 절박성을 깨우치며 회개를 촉구하는 요한의 충고란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마태 3, 3)라고 이사야가 예언하였음(이사 40, 3 참조)을 오늘 복음서는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다가오고 있는 하늘나라를 맞이하기 위하여 회개하라는 그 절박한 외침을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라고 하는 까닭이란 무엇일까요?


광야란 무엇입니까?


사람이 살지 않는 곳입니다. 거기는 살아 움직이는 것을 찾아보기 힘든 곳입니다. 생명을 잉태하고 키우는 물이 없는 곳이지요. 무서운 계곡에 어둠이 채워지는 밤이면 고독과 두려움이 가득한 곳입니다. 매서운 바람이 칼 소리로 바위를 할퀴고 흙모래를 날리는 곳입니다. 그래서 휘영청 밝은 달빛 아래에서도 바위 사이에 음험한 그림자의 미소가 드리워지고, 작열하는 태양 아래 대낮의 산야에는 생명의 미동(微動)도 눈에 잡히지 않고 무거운 적막(寂寞)만이 군림합니다.


그러한 광야를 자기 발견의 자리이자 하느님과의 대화의 장소로 선호하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백성에게 드리워진 절망의 구름을 걷어내고자 했던 옛 예언자들이 그러했고, 자신에 대한 시험으로 깨달음을 얻고자 했던 고대 그리스도교 은수자들이 또한 그러했으며, 그렇듯이 오늘날도 자신과 세상의 죄악에 대한 속죄와 참회로 하느님께 나아가는 구도의 길을 걷고자 하는 신앙인들이 찾아가는 곳이 광야입니다. 그러한 사람의 모습을 우리는 세례자 요한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요한의 외침이 오늘 대림절의 여정에서 들려옵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로 말입니다.


마음 속의 광야를 들여다보라


그 요한의 음성을 광야의 외침이라 하는 까닭, 그것은 사실상 외진 곳에서 들려오는 메시지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서가 지적하는 광야라는 곳은 요한 세례자가 요르단 강 부근 지방에 나타나 회개를 부르짖기 전까지 자신의 시험기를 지내던 저 황량한 사막을 일컫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이 대림의 시기에 삶을 되돌아보며 회개를 촉구하는 부르짖음이 들려오는 우리 자신들의 마음속의 광야를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사실상의 광야와 같지 않으냐 하는 날카로운 외침이 우리 마음속 저 깊은 곳에서부터 들려오지 않습니까? 해서, 그 외침은 황량한 벌판에서 메아리 없이 흩어지고 있지나 않은지,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것이 광야의 소리라 함은 외침만 들려올 뿐 응답이 없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저는 어제 오후에 여기 온양온천 성당에 전화를 걸은 일이 있습니다. 오늘 여기 올 준비를 하면서 주임신부님께 여쭐 것이 있어서 전화를 드렸더니 사제관에 계시는 자매님께서 받으셨습니다. 신부님 어디 계시느냐고 물었더니 온양 역전에 밥 퍼주는 일 하러 가셨다고 하셨습니다. 그게 무슨 일이냐고 되물었더니, ‘사랑의 밥 차를 운영하여 토요일에 역전의 노숙자들과 가난한 분들을 위해 밥을 장만하여 식사 제공을 하는 일이라 했습니다.


저는 전화 통화로 여기 박종우 주임신부님의 아름다운 사랑의 행각(?)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 후에 저 자신을 박 신부님과 비교해보는 생각을 했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을 위해 밥을 지어 퍼주는 일을 해본 일이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러면서 문득 저 자신의 마음이 바로 저 광야와 같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의 마음 한 구석은 아차하는 꼬챙이로 찔리는 듯 했습니다. 광야와도 같은 저의 마음속에서 들려오는 외침에 놀란 때문이었습니다.


온양성당 박종우 신부의 아름다운 '밥퍼' 행각


사실, 밥 한 그릇은 별 게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밥 한 그릇은 눈에 보이는 마음의 따뜻한 형상입니다. 따끈한 밥 한 그릇을 퍼주는 손은 그렇듯 마음의 따뜻함을 건네는 손입니다. 저는 사제생활 하면서 상당 기간을 밥 해주는 분 없이 혼자 밥해먹고 지냈습니다. 그러면서 늘 저의 전기밥솥은 저 혼자 먹기 위한 것으로 작동되곤 했습니다. 그 전기밥솥에서 밥 한 공기라도 다른 사람에게 퍼 준 기억이 없습니다. 저는 그렇게 광야에서 살아왔습니다. ‘인정을 베풀어 본 일이 없는 저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저는 어제 오후 그런 생각을 하면서 저 자신에게 질문해보았습니다. ‘대림절은 나에게 무엇인가? ‘대림절이란 판공성사를 보아야 하는 때라고 사제로서 교우님들에게 가르치며 정작 저 자신과는 상관없이 매년 그렇게 지내왔지요. 대림절이란 저에게 있어서 그저 성탄절이라는 축제를 준비하기 위해서 판공성사 보고 교우들과 벌일 행사 준비하는 것 정도인양 매년 그렇게 지내왔지요. 그러나 어제 오후 박 신부님의 그 사랑의 밥 차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후 나도 성탄절 되기 전까지 적어도 다른 사람 위해 밥 한 그릇이라도 지어서 퍼주는 일을 해야겠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밥 한 그릇의 의미는 참으로 위대한 의미를 간직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밥 한 그릇때문에 세상의 모든 일이 벌어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며칠 전에는 집안의 어른 한 분이 선종하셔서 그분 장례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장례 절차 가운데 염습(殮襲)에 관한 이야기를 친지들과 나눈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장례식장에서 그 염습을 하는 전문가들이 따로 있어서 능숙한 솜씨로 고인의 몸에 대한 마지막 정성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전 같으면 성당의 연령회원(위령봉사회원)들이 그런 일에 봉사를 했는데, 요즘에는 연령회원들의 그런 봉사를 필요로 하지 않을뿐더러, 그런 일을 자격증없이 해서는 아니 된다는 것입니다


달라진 '봉사'의 의미


이른 바 염사(殮士)’ 자격증을 획득한 사람이라야 그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당의 연령회원들이 자격증 없이 봉사의 뜻으로 그런 일을 하다간 염사 자격증 소지자들에게 고발당할 위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까닭은, 염사들의 밥그릇을 가로챈 빌미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듯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을 경제활동(이익창출 행위)으로 보아야 하는 우리의 이 시대는 의 의미가 달라진 것입니다. 그래서 이른 바 서비스 업계에서 봉사료()’라는 것도 이제는 사실상 엄밀한 의미의 봉사가 아닌 노동의 대가(對價)로 인식된 것이라 해야겠지요. 우리의 이 시대는 그래서 모든 것이 돈벌이에 관련되어 인식됩니다. 돈벌이의 자리를 속된 말로 밥 그릇이라 합니다. 그러한 밥 그릇을 찾지 못한 노숙자들에게 어제 박 신부님께서 따뜻한 밥 한 그릇을 퍼주는 봉사를 하시러(돈 받지 않고, 오히려 돈 써서 퍼주기 위해) 추운 길에 나섰다는 이야기를 듣고 저는 이런 생각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밥 퍼준다'는 것의 의미


밥 퍼준다는 것, 그것은 사실상 늘 우리 가정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엄마가 자녀들에게 매일 세 번씩 밥을 퍼줍니다. 그런 끼니때마다 식탁에 다가온 자녀들이 엄마의 손 때문에 밥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이 그래서 예삿일이 아닙니다. 엄마의 손에 밥을 먹는 일이란, 사랑을 먹고 사는 일’,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언젠가 나에게 밥을 먹게 해 준 분이 계시다면, 그분의 따뜻한 손은 엄마의 손과 같습니다. 그러니 제가 다른 사람에게 밥 한 그릇이라도 퍼준 기억이 없다면 저의 이 손은 얼마나 차가운 손이겠습니까! 그렇다면 저는 그렇게 인정머리 찾아볼 수 없는광야에서 사는 인간일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사랑)을 기우려본 일이 없는 광야의 삶을 살아오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저의 마음 한 구석을 찌릅니다.


인정(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을 베풀어 본 일이 없는 저에게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형제자매들의 죽음에 누가 애통해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어떻게 울어야 할지, 어떻게 연민을 경험해야 할지를 잊었습니다. 무관심의 세계화가 우리에게서 슬퍼하는 능력을 제거해 버렸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무관심을 습성화 한 우리 자신들의 모습을 이렇게 교황님께서 지적하십니다. ‘슬퍼하는 능력을 상실한 이 시대의 대표적인 사람이 나 자신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의 이 시대는 밥 한 그릇을 퍼주기는 고사하고, 다른 사람의 밥그릇을 서로 노려보며 차지하려 다투는 세상입니다. 엄마가 퍼주는 밥, 그것은 한 밥솥에서 퍼주는 밥이지요. 그래서 사랑의 밥이란 함께하는 한 밥그릇이라는 뜻이겠지요. 이 세상을 그렇듯 한 밥그릇으로 보자는 것이 세상의 우리 인간과 같이 되고자 강생하신 그리스도의 성탄절을 준비하는 대림절의 깨달음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러한 대림절 메시지로 오늘 요한 세례자는 회개를 역설하면서 그 회개의 열매를 보이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마태 3, 78). 그것은 구체적으로 이루어져야 회개의 실천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실천이 곧 회개의 열매이겠습니까?


오늘의 마태오복음서가 전하는 대목에서는 생략되어 있습니다만, 그 병행 단락으로 루카복음서가 전하는 요한의 외침은 다음과 같이 이어집니다. 옷 두 벌을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3, 11)하고 말입니다. 여기서 옷과 먹을 것이란 한 몸의 목숨을 유지할 최소한의 그리고 최후의 것을 뜻합니다. 그러한 최후의 최소한의 내 것을 이웃과 함께 할 수 있는 삶으로의 전환을 진정 회개라 한다면서 요한 세례자는 오시는 주님을 그런 식으로 맞이하라고 깨우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최후의 최소한의 것으로 이웃과 함께 하는 삶이란 진정 자신을 송두리째 바꾼 회개의 삶이라 할 것이기에, 그렇듯이 아무 것도 없는 광야에서처럼 자신의 것을 모두 벗어버린 사람의 마음속에서 울려나오는 소리가 곧 광야에서 들려오는 소리라 할 것입니다.


요한 세례자의 광야의 외침을 듣는 오늘을 그래서 교회는 인권주일이라 부릅니다. 마침 1210일의 세계인권선언기념일을 앞둔 오늘이기 때문입니다. 인권주일에 우리는 인간 모두가 서로에게 최후의 최소한의 것과 같이 존중해야 할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것은 곧 인권입니다. 나의 존재가 귀중한 만큼 또한 다른 사람 모두가 그렇게 귀중한 존재임을 뜻하는 것이 우리의 인권입니다. 인간 존엄성을 바탕으로 하는 그러한 인권을 말하면서 언뜻 우리는 정의(正義)’를 떠올리게 됩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 그리고 인간들의 집단과 하나의 인간 사이에 어느 누구 하나 억울함이 없어야 하는 관계를 상정하여 올바름의 실천정의의 구현을 논하곤 합니다. 그 올바름의 실천은 사랑을 바탕으로 하는 평화의 실현을 그 목표로 합니다. 그래서 이 인권주일의 한 주간을 우리 한국교회는 사회교리주간으로 정했습니다. 교회의 그 사회교리를 잘 이해하기 위하여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사회교리 영상]을 배포했습니다. 그 영상에서 정의평화위원장 이용훈 주교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변, 사회 안에 있는 아픔에 동참하지 않고 주님을 고백한다는 것은 거짓이고 위장된 행위일 수 있다.”



그렇습니다. 세상에서 함께 사는 이웃사람들의 아픔을 동참해서라야 진정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께 다가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할 자세란 이웃에 대한 관심의 실천입니다.


이웃에 대하여 써보지 않는 각박한 마음이 곧 광야입니다그것은 부정적 의미의 광야일 것입니다하지만 오늘 광야에서 들려오는 소리란 그 각박한 마음들의 광야에 울려 퍼질 마음 바꾸기의 외침인 것입니다. 그 바뀐 마음은 곧 구체적 실천을 낳습니다. 그래서 곧 이웃에 대한 관심의 실천그 자체가 각박한 광야 같은 이 세상의 한 복판에서 살아있는 외침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웃에게 진정 관심을 가져라!”하는 외침을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와 같이 울려 퍼지는 내 마음속의 외침으로 듣고 이웃에게 다가가는 이 대림절의 길을 가면서 성탄절을 맞이해야겠습니다. 그리하여 맞이할 성탄절에 진정 우리에게 오신 주님을 만날 것입니다.


저는 요한 세례자의 다음 말씀이 저의 마음에 꽂히는 것을 느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를 만드실 수 있다.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았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마태 3, 910)


그렇습니다. 요한 세례자의 이 말씀은 광야같은 내 마음에 겨울철 칼바람처럼 꽂힙니다. 이 대림절, 곧 주님 오시고 계시는 지금 우물쭈물할 겨를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분 맞이하는 행실을 열매로써 맺어야 합니다. 나 자신이 어느 이웃에게라도 어서 다가가는 마음 바꾸기의 실천을 당장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실천의 촉구로써 교회는 다음 주일 즉 대림절 중반의 제3주일을 '자선주일'이라 일컬어서 우리 실천의 기회를 마련하고 있습니다.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61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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