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 제1주일, 2013년 12월 01일 10시30분@성환성당
만수리 공소 윤종관 신부
그 분과 함께 종말의 길을!
희망의 길!
새로운 전례력을 시작하는 오늘부터 4주간의 대림절을 통하여 성탄절을 준비합니다. 성탄절을 준비한다는 것 자체가 벌써 우리의 마음을 들뜨게 합니다. 매년 그렇듯이 성탄절 준비로 가장 설쳐대는 분위기는 아마도 상가(商街)에서 만날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시작하는 대림절과는 무관하게 성탄의 분위기를 현란하게 앞당기는 것이 상술(商術)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상술에 휘말려 성탄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차분하게 대림절(待臨節)이라는 다소 어두운 기간을 통과하면서 성탄절을 맞이할 것입니다. 성당의 제단 앞에 차려놓은 대림환(待臨環)에 한 주간마다 하나씩 초를 더 밝혀가면서 우리의 어두운 대림절은 성탄절을 향하여 밝아져 갈 것입니다.
대림 첫 주간에 어두운 빛깔의 초 하나에 불을 켜고 한 주간씩 지나면서 점점 더 밝은 빛깔의 초에 불 밝히기를 계속해가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대림의 절정에 이르러 주님의 강생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듯이 이 대림환에서 밝혀져 가는 촛불의 상징은 그 참된 의미의 주님 오심에 대한 희망을 부풀려갈 것입니다. 대림절은 그야말로 희망의 절기입니다.
대림절이란 말 자체가 희망이다
우선 ‘대림절(待臨節)’이라는 말 자체가 희망을 뜻하고 있습니다. 곧 ‘오시는 분’을 만나고자 하는 희망인 것입니다. 그러한 희망으로 “주님께서 곧 오신다.”는 믿음을 우리는 이 대림절에 선포합니다. 그러나 사실상 우리의 그러한 신앙을 이 대림절뿐만이 아니라 항상 반복하여 고백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신앙고백문의 말미에 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리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실상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이 대림절의 참 의미는 종말(終末)을 향한 신앙을 고백하는 것을 그 핵심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사실상 우리의 삶 자체가 끊임없는 대림절인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다음에’ 오시는 게 아니라 ‘지금’ 오시고 계시다는 종말론적인 삶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지금 내 방의 문지방을 넘어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듯이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봉독하는 마태오 복음서 24장 37∼44절의 말씀 중 핵심은 “깨어 있어라”(마태 24, 42)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도둑이 언제 침입할지 모르니 늘 대비하라면서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 24, 43 참조). 그리고 오늘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잠에서 깨어날 시간이 이미 되었다”(로마 13, 11)면서 “대낮에 행동하듯이”(로마 13, 13) 살아가라고 충고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말씀들은 잠을 자지 말라는 말씀 같습니다. 꼬박 밤을 지새우라는 말씀 같습니다.
깨어있어라!
우리는 꼬박 밤을 지새운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불면증이라는 병 때문에 그런 일이 있었을 수 있겠지만, 억울한 일로 분을 삭이지 못해서 잠을 자지 못하는 수도 있겠지요. 그리고 혹은 어떤 기쁜 일로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해서 그럴 수도 있겠지요. 그리고 또는 다음날에 맞이하게 될 어떤 기쁜 일을 앞두고 그럴 수도 있겠지요.
다음날에 맞이할 기쁜 일을 앞두고 너무 너무 좋아서 잠을 잘 수 없다면, 그 잠 못 자는 사연이란 얼마나 행복한 일이겠습니까! 뜬눈으로 지새우는 한밤은 이미 다음날의 기쁨을 미리 앞당겨 맛보는 밤일 것입니다. 그런 사연으로 매일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것은 현실과 희망이 맞닿은 삶이지요!
그렇듯이 우리는 주님을 기다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주님 오실 때 이루어질 일을 미리 앞당겨서 맛보는 기쁨의 삶을 살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종말론적인 삶이 그것입니다. 주님께서 오실 때 벌을 받을까 두려워서 전전긍긍하는 삶이 아니라 그분이 오셔서 나를 영광스럽게 하여주실 것을 기다리는 희망으로 사는 것이 그런 종말론적인 믿음의 삶인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삶에 자기 자신을 끌려가듯 맡길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일구어 가는 능동적 삶의 자세를 요청하고 있음을 뜻하고 있습니다.
밤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던 군종신부 시절의 경험
이에 대해서 저 자신의 이야기를 한 번 해보겠습니다. 밤잠을 제대로 잘 수 없는 생활을 해본 일이 있습니다. 제가 사제 생활 초년 시절에 군종 신부로 해병대 전방 부대에서 일할 때의 일입니다. 휴전선을 지키는 병사들의 초소를 밤에 방문 격려하러 돌아다니느라고 잠을 자지 못하는 때가 많았습니다. 밤에 그런 일을 하고 나서 저의 숙소에 돌아와 낮잠을 자고 싶어도 그럴 수 없을 때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 시절에 저의 처소는 부대 밖의 성당이나 별도의 사제관이 아니었습니다. 그 부대에는 군대 성당도 없었고, 그리고 제가 따로 사제관을 마련할 재정적 능력도 없었기 때문에 부대 안의 독신장교숙소(BOQ)에서 지내던 처지였습니다. 야간초소방문을 하고 아침에 돌아와서 잠을 자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게 되곤 했습니다. 저를 만나려고 찾아오는 군인들이 있기도 하고, 부대 행사에 참석해야 할 일이 있기도 하고, 또 낮잠을 자면 부대 식당의 식사시간을 맞추지 못하여 밥을 굶을 수밖에 없기도 하여 결국 낮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침대에 누워보지 못하고 며칠을 보내기가 다반사였습니다. 낮에 사무실에서 의자에 앉아 졸다가 밤이 되면 전방 초소를 방문하는 여러 날을 지내곤 했지요. 그 시절에 저는 군종신부 생활이란 그렇게 사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모처럼 휴가를 얻어서 서울의 모 수녀원에 가서 며칠 지내게 되었는데 아침 미사를 드리고는 하루 종일 낮잠을 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수녀원의 수녀님들께서는 저를 잠꾸러기 신부라고 놀리곤 했습니다. 그 수녀님들은 제가 밤잠을 자지 못하고 살던 그 사연을 알지 못하지요. 그러나 지금 그 시절을 회상해보면 제가 군종신부로 살았던 그 때가 가장 ‘깨어있었던 때’였던 것 같습니다. ‘내가 할 일을 하기 위해서 잠을 잘 수가 없다’는 보람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야간 초소의 병사들의 친구가 되어주고 또 밤새워 그들을 지휘하던 소대장들의 친구가 되어주던 그 시간들이 저의 지난 세월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있습니다. 지금은 그런 열정으로 살지 못하는 것이 부끄럽습니다.
깨어있느냐? vs. 편의를 찾고 싶은 유혹
제가 오늘 저의 그 군종신부 시절을 자랑(?)하는 까닭은 지금 제가 그만큼 깨어있는가 하는 질문을 저 자신에게 던지기 위해서입니다. 지금은 제가 ‘하부내포성지’의 여기저기를 찾아내고 성역화 하는 일에 열중하고 있습니다만, 가끔 이러한 일을 그만 포기하고 싶어지는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노년인데 어떤 다른 본당에 가서 교우들과 즐기면서 살다가 몇 년 후 편안한 은퇴의 길로 가면 좋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저 자신의 편의를 찾고 싶어집니다. 이러한 저의 부끄러운 마음을 채찍질 하는 메시지가 오늘의 대림절 맞이하는 성경 말씀 같습니다. 그래서 저 자신에게 “깨어 있느냐?”하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렇듯 문득 오늘 주님께서는 노아의 홍수 때에 모두 “휩쓸려 간”(마태 24, 37∼39 참조) 사람들의 예를 들으시면서 “깨어 있어라”(마태 24, 42)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오늘 주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저 나름대로 잠을 잘 수 없는 사연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반성을 합니다. 잠을 잘 수 없을 만큼 그렇듯 내가 하는 일로 보람이 있어 행복해지고 싶은 것입니다.
잠을 잘 수 없을 만큼 내가 하는 일로 행복하다면, 그건 항상 희망의 구름을 타면서 둥실둥실 사는 것이 아닐까요…? 희망은 먼 훗날의 것이 아니라 지금의 삶을 싣고 사는 것이니까요! 그렇듯 우리 삶의 ‘지금’을 이끄시는 희망 자체로 ‘여기’ 오셔 계시는 분, 그분이 이 대림절로 오시는 주님 아니실까요…!
도스토예프스키의 '크리스마스'
지금도 나에게 오시고 계신 주님은 어떤 뿐이실까 하는 생각으로 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예프스키가 쓴 ‘크리스마스’라는 단편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구세주의 탄생을 준비하는 것을 보고 기뻐하시는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이 세상에 내려오십니다.
먼저 어느 집의 현관에 크리스마스 트리가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는 걸 보시고는 그 집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리고는 “내가 바로 당신들이 기다리는 구세주요.”하고 말씀했습니다. 그러자 그 집 주인은 그 구세주를 정신병자로 취급하여 쫓아내버렸습니다. 다른 집들을 방문했지만 마찬가지로 내쫓기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성당을 찾아가셨습니다. 그 성당은 아름다운 구유를 마련하고 성탄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성당에서는 나를 알아주겠지.”하는 생각으로 그 성당의 주임사제를 만났습니다.
그러자 그 성당의 주임사제는 그분을 진짜 구세주로 알아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제는 난처한 얼굴이 되면서 “주님, 죄송합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나타나시면 지금 우리가 준비한 일들이 엉망이 됩니다. 우리 신자들과 함께 즐겁게 지낼 일에 방해가 되므로 제발 다시 돌아가 주십시오.”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구세주께서는 슬픈 마음으로 하늘로 올라가버렸답니다.
우리는 진정 주님을 만나고 싶은 것인가?
여기서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진정 물어보아야 합니다. 과연 우리는 정말로 주님을 만나고 싶은 것인가? 아니면 주님을 만나기란 거북하고, 주님 때문에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에 손해를 보게 되고,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이란 세상을 살아가기엔 맞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는 이 대림절에 진정 주님과 함께하는 삶을 다시 설계하는 다짐으로 주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한 다짐 가운데 진정 우리의 희망이 성취됩니다. 그래서 이제 동지(冬至)를 향하여 밤이 길어지기만 하는 이 계절에 차분하게 우리의 삶의 깊이 속으로 마음을 가라앉혀 참 신앙을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깊은 밤이면서도 깨어있는 초병(哨兵)처럼 우리 자신 안에 악의 세력이 침입하지 못하도록 방비하는 회개의 자세로 판공성사에 임하고, 어쩌면 우리 이웃 사이에 모습을 감추고 지금 가까이 주님께서 와계시지 않은가 살피고자 눈을 뜨고 이 대림절의 길을 걸어야겠습니다. 주님께서는 매일 그리고 항상 우리에게 오시고 계십니다.
사실 우리는 그분과 함께 종말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희망이란 곧 종말을 맞이하는 자세인 것입니다.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60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년 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년 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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