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3주일 평신도주일 2013년 11월 17일

만수리 공소 윤종관 신부


무엇이 성전인가? 

나 자신들이 성전(聖殿)이다.


한해의 전례력이 연중시기의 마지막 주간에 다가가는 이즈음입니다. 오늘 연중 제33주일의 다음주일은 그리스도 왕 대축일로써 한해의 전례력이 마쳐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연중시기를 마쳐가면서 우리는 주일 복음으로 세상의 종말에 관한 말씀을 듣게 됩니다. 그 종말에 관한 말씀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고 발설하신 내용입니다. 오늘 봉독하는 루카복음서도 바로 그러한 종말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세상의 종말에 관한 강박관념은 어느 시대에나 인간의 심정 속에 두려움의 그림자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러한 두려움은 천재지변을 접하게 될 때 두터워지기도 합니다만, 전쟁이나 반란 또는 대형사고 등의 인간들 잘못 때문에 어떤 참변을 당하면, 즉 흔히 일컬어지는 인재(人災)를 당하면 하늘이 노하여 벌을 당하게 되는 것으로, 그에 대하여 사람들이 느끼는 공포는 그 도가 더욱 진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잘못한 일이 많은 사람들일수록 종말(終末)’이라는 말을 듣기 거북해 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듣는 루카복음서의 예수님 말씀은 어떤 천재지변이나 인간들의 잘못 때문에 일어나는 참변의 상황을 설정하여 우리 인간의 마음을 공포에 사로잡히게 하려는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오늘 말씀은, 이 세상을 우리가 영원히 살 곳으로 착각하지 말도록 깨우쳐주시려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을 영원히 살 곳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이루어주시는 것 보다는 인간들의 업적에만 모든 명운을 걸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는 화려하게 꾸며진 성전을 보며 감탄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하고 말씀하십니다(루카 21, 56).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우리는 즉시 세상의 종말을 연상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두려운 마음이 들어 언제 그런 일의 징조가 나타나겠는지 예수님께 묻게 됩니다(루카 21, 7).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사실상 우리 인간사 속에 언제나 일어나고 있는 종말적 현상을 예로 들어 그러한 것에 얽매이거나 착각하지 않도록 깨우침을 주십니다. 인간들 사이의 혹세무민과 전쟁과 분규와 천재지변과 기근과 전염병의 창궐과 우주의 이변과 정치적 환란과 그리고 억울한 누명으로 박해를 당할 일들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현실을 지적하시면서, 그러나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을 믿으면서 의연하게 참고 견딤으로써 생명을 얻도록 힘쓰라고 말씀하십니다(루카 21, 819 참조).


이러한 일련의 예수님 말씀을 오늘 들으면서 우리는 평신도 주일을 지냅니다. 이러한 말씀과 더불어 우리에게 전해지는 평신도 주일의 메시지를 우리는 잘 새겨야 하겠습니다. ‘평신도라 하면 교회의 성직자와 수도자에 대비되는 별도의 신분인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만, 사실 우리 모두가 진정 그리스도의 제자이자 하느님의 백성임을 자각하자는 의미에서 오늘 평신도 주일을 지내는 것입니다. 오늘만이 평신도의 날이 아니라 사실은 일 년 365일이 평신도의 날입니다. 교회란 모든 신앙인들을 하느님 백성의 주축으로 삼는 성전(聖殿)임을 오늘 특별히 자각하라는 것이 이 평신도 주일의 메시지입니다.


그렇다면 연중시기를 마쳐가는 즈음의 오늘 이렇게 평신도 주일에 이러한 종말에 관한 말씀으로 하느님 백성이라는 우리 자신의 신원의식에 대한 자각을 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 모두 이 세상의 사람들과는 다른 삶의 목표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오늘 새삼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한 점에 있어서 사람들이 아름다운 성전을 하느님의 집으로 바라본다 하더라도, 기실 인간들이 발휘한 재주를 감탄해 하는 것이 문제였음을 예수님께서 지적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의 이 예수님 말씀은 어찌 보면 성전을 모독하신 말씀이라 할 수도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성전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열성적 신심에다가 찬물을 끼얹으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 때문에 당시의 예루살렘 당국 사람들의 분노를 자초하여 예수님 스스로 배척 받고 죽음을 당하실 빌미를 얻게 되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그렇게 빌미 잡힐 말씀을 하셨을까요?


우리는 오늘의 이 말씀에 앞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봐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과 함께 하신 긴 상경 여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자마자 당시 관행이었던 예루살렘 성전 마당의 불의한 상업행위를 규탄하심으로써(루카 19, 4546 참조) 무슨 권한으로 그러느냐는 반감을 사셨고, 이러저러한 반대자들의 시비를 당하시던 판에(루가 19, 4720, 44 참조) 그 당국자들과 부자들을 비판하시고 나서, 보잘 것 없는 과부의 가난한 헌금을 칭송하셨습니다(루가 20, 4521, 4 참조). 가난한 과부의 동전 두 닢과는 대조적으로, 성전 당국의 부패상과 지도층의 위선과 사람들 사이에 만연한 부도덕성에 의하여 포장된 성전,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꾸며진”(루카 21, 5) 성전을 두고 감탄이 넘쳐나는 그 현장에서 예수님은 오늘의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종말 현상이 무엇인가를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가난한 과부의 보잘 것 없는 그러나 지극정성의 삶이야말로 진정 하느님의 성전에서 칭송받아야 하는 것일진대, 세상의 부패와 사람들의 불의로 가득한 성전이 외관상 아름다울지라도 그것은 허물어 없어져야 마땅한 종말의 형상인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오늘 평신도 주일즉 하느님 백성의 자각을 촉구하는 주일에 깨달음을 얻습니다. 신자들의 진정 가치 있는 신심이란 교회의 외적 행사의 동원으로 혹은 돈을 내고 능력 발휘를 꾀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앞서 제가 말씀 드렸듯이 일 년 내내 평신도의 날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이 교회의 행사나 돈 내는 일로 그 신원이 확인되는 것이 아님을 오늘 특별히 깨닫자는 것입니다.


오늘날 천주교 신자라면 고작 주일(主日)에 한 시간 미사 참례하러 모이고 헌금이나 하면 신앙생활의 전부인양 착각하는 경향이 농후합니다. 제가 하부내포 지역 내의 옛 박해 시기 흔적을 더듬어가면서 성지 조성을 하고자 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순교자들의 발자취를 찾아 절절한 신앙의 계승을 후대에까지 이어가게 하고자 하는 까닭입니다. 간혹 성지순례의 명목으로 여기 찾아오시는 분들 가운데 불편한 길을 물어물어 우리 공소에까지 오셔서 주일미사에 참례하시는 분들을 보면 열심한 신자이실 것이라 생각됩니다만, 정작 순례지에 안내하여 모시고 가면 그분들의 반응이 저의 기대와는 어긋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눈에 들어오는 볼거리가 없다면서 실망스런 반응을 보이는 분들이 많습니다. 저에게는 그분들의 실망이 더욱 실망스런 세태를 반영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저는 그래서 간혹 다음과 같은 말을 합니다.


성지 순례란 무엇입니까? 봄철에는 꽃놀이, 가을철에는 단풍 관광으로, 그렇게 행락에 나서는 것일까요? 본 의미의 성지(聖地)’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곳입니다. 그래서 거길 찾아가는 행위가 본래의 순례입니다. 예수님의 무덤에 찾아가는 일이 본래 성지순례라는 것이었지요.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고 묻히신 무덤을 찾아갔을 때, 그 무덤이 무슨 볼거리를 제공하겠습니까? 금칠한 관이나 아름다운 장식물로 꾸며진 예수님 무덤이어야 할까요? 우리는 거기서 처참하게 사형 당하신 주님의 시신을 부둥켜안고 절망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의 무덤을 화려하게 꾸며서 한풀이를 해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거기서는 역설적으로 그 돌아가신 주님을 만날 수 없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거기 주님의 모습은 볼 수 없습니다. 그분은 우리 육안에 들어오는 분으로 거기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황당하게 빈 무덤만 눈에 들어와야 합니다. 그걸 막달라 마리아는 체험했습니다(요한 20, 1118 참조). 그러한 빈 무덤 체험에서라야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 하부내포 지역에서 치명자들의 신앙은 눈의 볼거리에서 체험되는 것이 아닙니다.”


위와 같은 말을 하는 저 자신도 사람들의 취향(?)을 무시할 수 없는 처지라서 비겁한 짓을 합니다. 볼거리를 제공해야 이른 바 순례자들께서 찾아오기 때문에 그런 볼거리를 만들어 세우게 됩니다. 그런 뜻에서 저는 치명 성인들의 무덤 서짓골에 눈으로 감지될 만한 구조물들을 세워놓고 지난 1031일에 사람들을 초청해서 행사를 했습니다. 동료 사제들 가운데 한 분이 그러더군요. “어딘지도 몰랐던 곳에 갑자기 대박 났군!”라고요. 많은 교우님들이 오신 것을 빗댄 모 신부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런 대박을 오늘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목격하시고 거기에 찬물 끼얹으셨지요. 그러나 저는 예루살렘 당국자들처럼 성전의 제사용품 거래의 폭리차익 챙기듯이 돈 걷어서 성지 조성 작업을 하진 않았습니다. 그 일로 인하여 엄청난 빚을 지게 된 사정을 교우님들은 모르시지만 주님께서는 아시지요.


그리고 저는 생각해봅니다. 볼거리 있어 몰려오는 구경꾼들이 아니고, 마음에 담을 어떤 것을 찾아서 먼 길 어려운 걸음으로 오시는 분들이 막달라 마리아처럼 주님을 만나고 치명 성인들을 만나고 새로운 눈을 뜨는 계기를 이른바 성지에서 얻으시면 좋겠다는 생각을 저는 합니다. 치명선조들의 신앙이 굳건히 전수되고 그 배움이 이루어지는 순례코스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면서 오늘 평신도 주일에 저 자신을 포함한 모든 교우님들께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 싶습니다. “평소에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이 비신앙인과 별로 다를 게 없이 세상의 불의한 풍조에 휩쓸리면서 교회에 헌금을 한다 해서 그것이 진정 삶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이라 할 수가 있겠는가?”


물론 교회의 모임 참여여부나 교회운영 부담 참여도로 신앙의 척도를 엿볼 수는 있겠습니다만, 진정 우리가 깨달아야 할 바는 이렇습니다. 무엇이 성전인가 하는 깨달음입니다.


아름다운 돌과 예물로 화려하게 꾸며진 성전이 진정 교회는 아닙니다. 그러한 것은 어느 하나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있을 것이 아니요 다 무너질 것입니다만, 그렇듯 무너져 사라질 세상이 아니라 진정 머리카락 하나라도 잃지 않을 인내로써 참 생명을 얻기까지”(루카 20, 1819 참조), 이 세상의 삶과는 다른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 진정 그리스도 제자들의 종말적 삶인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으로서 매일의 삶이 일 년 내내 그렇듯 세상의 일로 현혹되어 착각하지 않는 모습이어야 합니다. 무너져 사라질 건물의 아름다움을 자랑할 것이 하느님의 성전이 아니라 참 생명을 지닌 사람, 즉 진정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의 모습이 하느님의 성전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른 바 성지란 돈 발라서 조성되는 것이 아니라, 참 신앙인들의 기도하는 발걸음으로 거룩함이 다져져 가는 땅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참 신앙인인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 즉 나 자신들이 하느님의 성전이요, 다른 의미에서 성지입니다.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58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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