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1주일, 2013 11월 3일

만수리 공소 윤종관 신부


사람이 저렇게 달라질 수 있나? 

그 분 만나면 그렇게 변해야지!



키가 작은 자캐오, 나무 위에 올라가서 예수님과 눈이 마주치는 행운을 얻은 사람, 그 사람은 예리고 라는 그 도시에서 부도덕하기로 이름난 세관장이었습니다. 이 난쟁이 세관장은 악독한 부자랍니다. 그는 자신의 직무를 악용하여 부도덕하게 치부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어떤 식으로 그렇게 돈을 많이 긁어모았을까요?


예리고 라는 곳은 요르단 강 서쪽, 사해 근처 유다 지방 사막의 오아시스 지대였기에 아주 오래 전부터 도시를 형성한 곳입니다.


요르단 강 건너편의 베레아 지방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사람들은 이 예리고를 거쳐 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중이었지요. 그런데 요르단 강 건너편 지방과 유다 지방 사이에는 이 예리고를 거쳐서 교역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것을 감시하는 세관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난쟁이 자캐오는 그 세관의 책임자였지요.


세관이란 국가기관이지요. 물건을 가지고 들어오고 나가는 사람들에게 관세를 받는 기관이지요. 그런데 당시 유다 지방에서는 민간인에게 임차료를 받고 징수권을 일정 기간 빌려주었답니다. 말하자면 관세 징수 용역을 임대하는 것이었지요. 임대차 계약에 따라 관세를 징수하는 사람이 세관원이었지요. 그런 세관원은 임차료를 갚아나가면서 많은 이익을 차지하기 위해 터무니없이 관세를 많이 매겨서 사람들에게서 돈을 부당하게 갈취하는 것이었지요. 자캐오는 그런 식으로 많은 돈을 갈취하기 위해 자기 직원들을 닦달하였겠지요. 그래서 인정머리도 없고 탐욕이 가득 찬 악덕 세관장으로 소문 나 있었겠지요. 사람들은 그런 자캐오를 혐오하였지요. 키도 작은 것이 탐욕으로 징그럽게 이글거리는 눈망울을 굴려대며 거드름을 떠는 꼴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요.


그런데 그 예리고에 들어오시던 예수님께서 길가에서 구걸하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하여주셨다는 소문을 듣고(루카 18, 35-43 참조) 시민들이 서로 예수님을 보려고 떠들썩하게 몰려가는 것입니다. 자캐오도 예수님을 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 난쟁이 세관장은 사람들 틈 속에 끼어서는 도무지 예수님의 얼굴을 볼 수가 없는 것이지요. 아니, 사람들은 위대한 예언자를 환영하는 대열에 그 추악한 세관장을 끼워주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래서 자캐오는 사람들에게서 돈을 뜯어내느라고 잔머리를 잘 굴리던 솜씨로 꾀를 쓰게 됩니다. 앞질러 달려가서 나무 위에 올라간 것입니다. 그러자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잘 볼 수가 있었습니다. 저 위대한 예언자를 어렵사리 나무 위에 올라가서야 바라볼 수가 있었지요. 사람들은 아마 비웃었을 것입니다. “돈 먹는 꾀만 잘 쓰는 줄 알았더니 저 난쟁이가 그 꼴로 잔머리 굴려 나무 위에 올라갔구나.” 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비웃거나 말거나 실속 차리는 것으로 익숙해진 자캐오는 그 비웃음쯤 아랑곳하지 않고, 그런 잽싼 행동으로 예수님과 눈이 딱 마주치는 행운을 얻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그 행운의 순간을 얻은 그에게 더 큰 행운이 겹치게 되었습니다. 위대한 예언자께서 그 추악한 세관장과 눈이 딱 마주치자 그의 친구가 되어주시겠다는 겁니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루카 19, 5) 하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의외의 말씀을 듣고 자캐오의 가슴이 뜁니다. “저 위대한 예언자님을 내 집에 모시는 영광을 얻게 되다니!” 상상치도 못한 행운인 것입니다.


그때 사람들은 아마 예수님에게도 조소를 보냈을 것입니다. 저런 날강도 같은 놈의 집에 가서 어울리다니! 예언자라면서 실은 별 게 아니로군!” 이렇게 비웃는 것입니다(루카 19, 7 참조).


이러한 비웃음을 뚫고 엄청난 변혁의 소식이 들려옵니다.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루카 19, 8) 이렇게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의 변신을 표명한 자캐오의 말입니다. 참으로 귀를 의심해야 할 자기 고백입니다. 사람이 저렇게 달라질 수 있다니 말입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루카 19, 9) 고 선언하십니다. 경천동지(驚天動地)의 뉴스인 것입니다.


이러한 자캐오의 회심 사건을 잘 이해하려면, 먼저 예리고 라는 도시가 어떤 곳인지 알아야 합니다. 여호수아기 6장을 읽어봐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무혈 입성한 도시입니다. 무력을 쓰지 않고 오로지 신앙의 힘으로 그 도시의 성벽을 무너뜨렸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신앙의 힘으로 그럴 수 있기까지는 또한 라합 이라는 창녀의 협조가 있었지요. 죄인이라 하더라도 하느님의 하시는 일에 참여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지요. 신앙이 있다면, 죄인이라 하더라도 하느님께서는 문제 삼지 않으신다는 것을 그 이스라엘 백성의 여정에서 볼 수 있는 것이지요.


이러한 사정은 예리고의 소경이 예수님을 만나서 눈을 뜨고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건과 맥락을 같이 합니다(루카 18, 35-43 참조). 그렇듯이 똑 같은 사건으로 자캐오의 회두는 새 삶을 얻게 된 구체적인 실천 방향을 제시하는 내용이 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알아볼 줄 안 소경은 이미 신앙의 눈을 떴던 것이지요.(예수님을다윗의 자손이라고 칭한 소경의 고백은 예수님을 실제로 구세주로 알아본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눈을 떴지요.) 그것은 예리고의 성벽이 무너져 내려서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길을 결정적으로 열게 된 사건처럼 신앙의 엄청난 힘인 것입니다. 성벽이 무너져 내려서 길이 열리고, 눈을 뜨게 되어 새 삶의 길을 갈 수 있듯이, 그렇게 자캐오는 이제 예수님을 주님으로 불러 신앙을 고백하는(루카 19, 8) 신앙의 눈을 뜨고 삶을 개혁하게 된 것입니다.


신앙의 힘은 그렇듯 위대한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으로 새 삶을 살아가기 시작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대열에 참가하여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 예수님과 함께 가야 할 것입니다. 잘못한 일이 많은 사람일수록, 즉 죄인일수록 신앙의 힘을 더욱 잘 체험할 것입니다. 그래서 비록 죄인일지라도 신앙의 눈으로 만나 뵈올 주님은 사람들이 회개하도록 그들의 죄를 보아 넘겨주시는 분임을(지혜 11, 23) 알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타인의 죄악상에 얽매이지 말고 사람 자체를 귀히 여기면서 나 자신의 죄악을 먼저 인정할 줄 알아야 우리 주위를 새 세상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이즈음에 우리나라의 정치 상황은 여야 간이나 또는 일컬어 좌우 사이의 사람들이나 서로 상대방의 잘못을 물고 뜯기만 하여 국민들의 마음이 심히 혼란스러워 지는 상황입니다. 그러한 여야와 좌우 사이에서 중재할 화해의 사신(使臣) 역할을 해줄 너그러운 지도자도 없습니다. 그와는 달리 국정의 책임자로서 국민을 편안하게 해야 할 최고 책임자로서의 대통령이나 정치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정치당파 간 싸움의 주인공 노릇이나 일삼고 있습니다. 걸핏하면 여론의 편 가르기로 나라를 시끄럽게 하는 데 앞서고 있는 정치 지도자들의 작태는 심히 실망스런 모습입니다. 사람들이 서로간의 잘못만을 물고 뜯는다면 끝없는 불안만을 조성할 뿐입니다.


그러나 각자가 겸허히 자신의 과오를 반성할 수 있는 최소한의 선성(善性)을 지닌 인간들이라면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져주어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 그런 인간의 선성을 엿볼 수 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이루어지던 프랑스의 시골에서 있었던 실화입니다. 194465일 밤의 일입니다. 그날 밤의 일을 그 시골의 한 처녀가 회상하며 다음과 같이 전해주고 있습니다.


천지를 뒤흔드는 전투기 소리에 불안하기만 한 식구들이 부엌에 모여서 떨고 있는데 갑자기 문을 박차고 군인 한 사람이 뛰어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공포에 휩싸인 가족들에게 그 군인은 낙하산으로 투입된 연합군이라고 설명하며 안심시키더니, 함께 낙하하다가 다리가 부러진 전우를 잠시 그 집에 피신시켜달라고 요청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부상병을 방안에 데려다 눕히고 군인이 나간 다음 가족들은 전투기와 폭격 소리로 공포의 밤을 지새우게 되었습니다.


이른 새벽에 웬 군인들이 문을 요란하게 두드리는 것입니다. 문틈으로 내다보니 독일군이었습니다. 문을 두드리는 독일군은 제 전우가 피를 너무 많이 흘렸습니다. 도와주세요!”하고 외치는 것이었습니다. 부상당한 연합군을 숨겨두고 있는 가족들로서는 공포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어머니가 부상병이라면 도와주어야지요.” 하면서 기꺼이 그 독일 부상병을 맞이하여 부엌 옆방에 자리를 마련하고 성심껏 응급처치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부상병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커피를 타서 갖다 주었습니다.


그때 방에 누워있던 연합군 부상병이 물을 마시려고 절뚝거리면서 부엌에 들어왔습니다. 부상당한 연합군 병사와 독일군 병사는 서로 노려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상병들이기 때문에 서로 무기는 갖고 있지 않습니다. 서로를 살펴보다가 놀랍게도 독일군이 먼저 손을 내밀어 연합군에게 악수를 청했습니다. 그러자 연합군 부상병도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걸 바라보다가 심장이 멈춘 듯하던 가족들의 가슴에서 안도의 숨이 흘러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이 작은 농가의 부엌에서는 더 이상 적이 없었습니다. 단지 부상당한 사람들뿐이었습니다. 연합군과 독일군은 서로 친구가 되었습니다. 밖에서는 서로 총질을 해야 할 사람들이 말입니다. 그러나 그 외딴 곳의 농가에서는 상황이 전혀 달랐습니다. 그 집 가족들과 함께 커피를 마시는 그들은 그 외딴 집 부엌의 식탁에 둘러앉아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일뿐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 부상병들처럼 서로 상처를 입은 인생입니다. 상처 입은 사람들끼리 싸울 일이 없습니다. 상처 입은 우리들 사이에 그 농가의 어머니처럼 우리를 함께 맞아주시는 주님이 계십니다. 그러한 주님을 만나면 이제 서로가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며 새로운 삶을 함께 일구게 될 수 있습니다.


그 주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고 계십니다. 회심으로 신앙의 눈을 뜨고 그분의 제자로 합류하는 사람들을 데리고 말입니다. 예루살렘, 거기는 그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한없는 용서로써 구원을 이루시는 곳이기에 그분께서 우리를 데리고 함께 가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분의 한없는 용서는 그분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회심할 때 우리가 서로에게 나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캐오에게 구원을 선언하여 주신 그분께서 사실은 예루살렘 가까이 가시는 중이었다고 오늘의 루카복음서는 이 예리고 사건에 이어서 예수님의 여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번주간의 이 복음 내용에 이어지는 루카복음서의 19장을 읽어보셔야 예리고의 사건을 이해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 만난 우리는 그렇게 달라져야 합니다.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55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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