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0주일, 2013년 10월 27일 10시
만수리 공소 윤종관 신부
겸손한 사람의 기도는 구름을 꿰뚫는다
<집회 35,21> 제 말만 하는 건 기도가 아니다
우리나라가 휴대전화 보급률에 있어서 세계 1위라 합니다. 그렇게 통신수단 보급이 최고 수준이라 해서 선진국이라 할 수 있을까요?
오늘 저는 뜬금없이 전화 예절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하고 싶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전화 예절에 있어서 군대 병영이 가장 모범적 수준이라고 저는 말하고 싶습니다. 군대에서는 전화를 걸거나 받을 때 우선 자기가 어디 근무하는 누구라고 말하는 훈련을 받습니다. 저도 군복무 시 그런 훈련을 받은 대로 전화를 사용했습니다. 신학생 시절에 사병으로 육군 3년 복무를 한 일이 있는데, 전화를 걸든지 받든지 수화기를 들면 무조건 “통신보안! 인사과 병장 윤종관 입니다.”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사제가 되어서는 5년 동안 군종 신부 생활을 했습니다. 장교이든 사제이든 부대에서는 그런 식으로 통화를 해야 했습니다. 전화벨이 울리면 수화기를 들면서 우선 “군종 신부 윤종관입니다.” 하고 말하는 것이었지요. 그러면 통화 상대방도 “00과 대위 홍길동입니다.”라는 식으로 말하지요. 그런 식으로 상대에게 자신을 밝히고 상대를 확인하여 용건을 말하는 것이지요.
군종 사목을 마치고 유학 차 독일에 가서 살 때에도 그런 식으로 통화하는 습관을 계속 지니게 되었습니다. 독일 사람들은 전화를 걸면 우선 “여기 홍길동입니다.”라는 식으로 말합니다. “여보세요”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통화자 간에 서로 자기 자신이 누군가를 알리는 말부터 하는 것이지요.
그런 식으로 길들여진 제가 귀국하여 시골의 본당 신부로 부임하여 지낼 때의 일입니다. 전화벨이 울려서 “00성당 윤종관 신부입니다.”하고 말하면 “여보세요. 거기 뭐라구요?” 하는 응답이 오기도 하고, 아무 말도 없이 전화를 뚝 끊어버리는 사람, 또는 “뭐 이런 게 나와?” 하면서 끊어버리는 사람, 아니면 무조건 “000 있어요?” 하는 사람 등등 천태만상이었습니다. “아! 전화 잘못 걸린 것 같네요. 죄송합니다.” 하고 사과하면서 끊는 사람도 있지만, 어떤 경우에는 심야에 상스런 욕지거리를 하고 끊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저 자신의 전화 받는 태도도 변하게 되었습니다. “여보세요” 라고만 말하고 성당의 신부라는 말을 먼저 말하지 않게 되는 것이었지요.
그런데 우스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전화벨이 울려서 “여보세요” 하며 수화기를 든 저에게 수화기 저편에서 어떤 아주머니가 따발총 발사하듯이 무조건 자기 말만 쏟아놓는 거였습니다.
“삼촌, 맨날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거여! 지금 빨리 가져와요! 돈을 제때제때 넣어줘야 나도 욕먹지 않지! 거기 애들 시켜서라도 지금 빨리 갖다 줘요. 내가 뭐 매달 대신 넣어주고 두어 달씩 늦게 받고 그러니 이거 뭐 괜시리 삼촌하고 계하자 해놓고 나만 피마르잖어…!” 이렇게 따발총을 퍼붓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형수님, 알었슈! 지금은 바쁘구요, 내일 갔다 드리면 안되나유?” 하고 제가 대답했지요.
“삼촌! 맨날 그런 거짓말이나 허구, 워째 그러유? 내가 믿을 줄 알어유? 지금 당장 가져오란 말여!” 이렇게 다시 퍼붓는 따발총…, 그래서 제가 뭐라 했는지 아십니까?
“아니, 형수님! 형수님 아니면 내 처지 누가 알어줘유…? 그런디 형수님은 왜 저에게 따발총만 쏴유…?”
이런 저의 응수에 다시 따발총, “또 그 소리…! 듣기 싫어요! 사람이 돈 셈은 깔끔해야 혀!”
다시 저의 응수, “저는요, 형수님 그 따발총 소리가 재미있어서 그려유!”
그러자 그 쪽에서 이상하게 느낀 듯…, 멈칫 하는 겁니다.
“아니, 삼촌 맞어유…? 이상허네…! 삼촌 아닌가…!”
이렇게 전화 받는 사람이 다른 사람 아닌가 하는 의아심을 표명하는 그 쪽에 대고 제가 다시 응수했지요.
“형수님, 저 맞어유! 저유…!”
그러자 그 따발총이 “어라? 이상허네…! 삼촌 아닌가부네…!” 그러더니 뚝 전화를 끊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너무 엉큼하게 응수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아마 그 아주머니는 자기가 무조건 따발총 쏘아댄 것이 잘못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고 제가 변명할 수는 있겠지요.
그 외에 다른 경우가 있었습니다. 제가 전에 있던 다른 본당에서의 일입니다. 저의 사제관 전화번호가 ‘르네상스’라는 야간 업소와 앞자리 국번만 다르고 뒤의 가입자 번호가 같은 것이었습니다. 심야를 가리지 않고 전화벨이 울리는 것입니다. 수화기를 들면 무조건 “거기 김양 바꿔주쇼.” 하는 전화, 또는 “호출하신 분 계슈?” 하는 전화, “거기 손님 중에 000씨 계슈?” 등등 저를 괴롭히는 것입니다. 견디다 못해 결국 사제관 전화번호를 바꾸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엉뚱한 사단이 났습니다. 제가 전화국에 반납한 사제관 전화번호가 새로 개업한 미장원으로 간 것입니다. 저를 찾는 분들의 전화벨이 미장원에 울리는 것이었지요. 화가 난 미장원 주인아주머니께서 수소문하여 저의 사제관 새 전화번호를 알아내어 저에게 전화를 하신 것입니다.
“거기가 성당이지요? 거기 윤종관 신부님이라고 있어요?” 매우 격앙된 음성이었습니다.
“예, 그렇습니다. 제가 윤종관입니다.” 하는 저에게 그 미장원 아주머니께서 따발총을 쏘시는 것입니다.
“아니, 허구 헌 날 신부님 찾는 전화가 대전에서 논산에서 서울에서 미국에서 와쌌는데 못살겠단 말입니다. 여기가 미장원이지 성당 아니라는데도 자꾸 여기저기서 전화 와싸서 도무지 일을 못하겠단 말입니다. 아니, 신부님 찾는 사람들이 교양머리도 없이 전화 받자마자 무조건 신부님 바꾸라고만 해대니 말입니다.”
이런 따발총을 얻어맞은 제가 얼떨결에 할 말을 잃고 질문했습니다.
“거기 원장님이세요?”
그러자 그 따발총 아주머니께서 좀 쑥스러워 하는 어투로 “원장은 무슨 원장…”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엉큼하게 말을 붙였지요.
“미장원 주인이시면 미장원장님이시지요…! 원장님! 제가요 머리 깎으러 한번 가고 싶은데요…, 머리도 깎을 겸 원장님께 사과도 드릴 겸 찾아가겠습니다. 거기 위치가 어디예요?”
그러자 그 아주머니께서 깔깔깔 웃으시며 위치를 설명하시지 않겠습니까! 며칠 후 저희 성당 캘린더 한 질을 가지고 그 미장원엘 찾아가서 문을 열고 기웃거리는 저를 그 미장원장 아주머니께서 알아보시며 반가운 얼굴로 “신부님이시지요?” 하시는 겁니다.
앞으로 저를 찾는 전화가 오면 저희 성당 캘린더 밑에 적혀있는 전화번호를 알려주시라고 부탁하며 그 캘린더를 미장원 벽에 걸어드리고는 머리를 깎아달라고 능청 떠는 저에게 그 아주머니께서는 음료수를 권하면서 “성당 다니려면 처음에 어떻게 해야 하나요?” 하시는 거였습니다.
얼른 제가 “일요일에 그냥 놀러 오세요.”하고 대답했는데, 그 미장원장님께서는 사뭇 진지하게 “그래도 뭔가 준비해서 가야하잖아요? 교회 사람들은 자기 교회 오라고 쫓아 다니면서 졸라대는데 성당에서는 오거나 말거나 하나 봐요! 기왕 다니려면 성당 다니고 싶은데요.” 하시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지요. “다음 일요일에 우리 성당에서 먹고 노는 잔치가 있으니까 그냥 오세요, 돼지고기 실컷 먹고 술도 마실 수 있습니다.”
미장원장님은 놀란 표정으로 “어머머… 성당선 술도 먹어요?” 하셨는데, 그렇게 사귄 그분이 실제로 그 다음 주일에 우리 성당에 오셨습니다. 그날 우리 성당에선 추수감사 미사를 올리고 돼지 잡아 술잔치를 했습니다. 거기 끼어들어 즐거워하던 그 미장원장님이 예비자 교리반에 나오기로 했는데 제가 그만 갑자기 다른 본당으로 발령 받아서 그분의 영세준비를 해드리지 못하고 떠나버렸습니다. 그 후로 그 미장원장님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전화 때문에 얻은 에피소드가 많습니다만, 우리나라에서 그렇듯 전화 예절 수준에 대하여 요청되는 반성은 우리 모두의 과제인 듯합니다. 자신의 말만 하는 목적으로 전화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반성이 요청됩니다. 나의 말을 전하는 송화기만이 아니라 상대방의 말을 듣는 수화기가 함께 장착된 것이 전화기라는 것쯤은 우리가 새삼 인식할 필요가 있지요.
우리가 기도하는 것도 하느님과 전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대화이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이 성전에 올라가 기도하는 모습을 이번 주간 루카 복음서 18장 9-14절에서 봅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 같습니다. 바리사이이지요. 자기 말만 하는 사람입니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대화라는 사실을 망각한 듯, 그 바리사이는 사실상 하느님과 대화하는 자세가 아닙니다. 하느님께 감사드린답시고 하는 말이 자기 자랑 따발총만 쏘아댑니다. 이건 대화라기보다 자기주장일 뿐입니다. 그러한 자기 자랑과 주장만 일삼는 그 바리사이는 하느님과 대화를 하려는 의지가 없습니다. 그 사람의 말끝에 하느님께서 대답하실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 자랑과 주장을 들어야만 하시는 하느님의 처지가 딱할 뿐입니다. 하느님께서 대답하실 겨를도 없고, 이야기를 들으신 하느님께서 하실 일도 없는 것입니다. 어이없는 일이지요. 하느님께서 뭐라 대답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서 바리사이는 거기 와있는 다른 사람을 경멸하는 말을 거침없이 내뱉고 있습니다. 그런 것을 기도라 할 수는 없지요. 듣고 있기가 짜증날 일입니다.
그런데 다른 한 사람은 기도를 어떻게 하는 것인지 잘 아는 사람 같습니다. 세리이지요. 그 사람에게는 하느님께서 대답하실 수가 있으시지요. 그래서 하느님께서 그 세리에게 해주신 것이 있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루카 19, 14)
그렇습니다. 하느님과 대화하는 사람은 그분께 말씀드리고 나서 그분께서 무엇인가 하실 수 있게 해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하느님께서 주실 것을 받을 수가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바리사이는 하느님께 얻을 무엇인가가 없습니다. 자기가 모든 것을 스스로 다 잘 하는 사람이니까요. 하느님께로부터 아무 것도 바랄 게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자기 잘 났다는 것을 강제로 인정하셔야만 하는 하느님의 처지가 당혹스럽기만 합니다. 따발총 발사하듯이 자기주장만 늘어놓고 전화 끊어버리는 꼴입니다. 하느님과의 통화가 이루어진 것이 아니지요. 그 오만한 마음으로, 대화를 거부하는 주장 일변도의 돌멩이를 던지는 불손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능멸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자기와 같지 않은 사람을 또한 경멸하여 상대적으로 자기를 하느님 앞에서 들어 높이지요.
그렇지만 세리는 하느님께서 무엇인가 하실 수 있는 자리를 자기 처지에서 열어드립니다. 그것은 하느님 자비의 권능이 자기에게 닿도록 자신을 열어드리는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과의 대화가 그에게서 이루어집니다. 그것은 곧 겸손으로 여는 하느님 만남의 자리입니다.
대화란 보자기를 아래로 깔아 펼치듯 자기 마음을 겸손하게 열어서 상대방의 마음을 담아 소중하게 묶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겸손한 마음을 가진 사람의 말이라야 상대방 마음의 빗장을 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집회서의 저자는 이번 주일의 말씀으로 하느님과의 성공적 대화 방식을 제시합니다. 겸손한 이의 기도는 구름에까지 올라 구름을 거쳐서 하느님께 도달한다고 집회서는 말하고 있습니다(집회 35, 20-21참조).
나의 겸손한 기도는 하느님께서 나와 뭔가 하실 수 있는 기회를 갖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나의 요구만 늘어놓으면 하느님께서 나에게 뭔가 하실 일을 찾으실 수 없게 됩니다. ‘요구’란 무엇입니까? ‘주장’이지요. 요구사항이 많은 기도는 진짜 기도가 아닙니다. 하느님을 피곤하게 해드리는 것이지요. 하느님께서 당신 뜻대로 나에게 뭔가를 하실 수 있도록 내 마음의 겸손한 보자기를 펼쳐드리면 하느님과 나 사이에 뭔가가 이루어집니다. 그런 겸손의 기도를 오늘 세리는 바쳤던 것입니다. 기도는 제 말만 하는 게 아닙니다.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54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년 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년 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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