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7주일, 군인주일, 2013 10월 6일

만수리 공소 윤종관 신부


공치사, 功致辭? 空致辭?

참 희생은?



저는 오늘 연중 제27주일의 복음말씀을 읽으면서 그 내용과 부합하게 오늘이 마침 군인주일임을 연관 지어 어느 철학자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그 철학자의 다음과 같은 말입니다.


세상에는 세 종류의 성직자가 있다. 우선 일반적으로 말하는 종교의 성직자들이 있다. 가톨릭의 사제나 개신교의 목사를 그렇게 부른다. 그런데 공식적으로 성직자라 일컫지는 않지만, 진짜 성직자가 있다. 어머니와 군인이 그렇다.”


이와 같이 어머니와 군인의 모습에서 진정 성직자의 모습을 읽으면서 그 철학자는 내심 참 성직자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 참 성직자의 모습이란 희생을 그 삶의 본질로 삼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철학자가 진정 성직자의 참 모습을 희생의 삶에서 찾았다고 하는 것은 군인주일과 더불어 저 자신의 사제생활에 대한 성찰을 하게 합니다. 진정 성직자라 일컬어지는 그 근본적인 이유가 곧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기꺼이 희생의 삶을 바치기 때문이어야 한다는 성찰인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하신 말씀이 그러한 성찰의 터무니를 제시합니다.종이 분부를 받은 대로 하였다고 해서 주인이 그에게 고마워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루카 17, 10)


예수님의 이 말씀처럼 주님의 부르심 따라 봉사하는 것은 상급을 얻으려고 수고하는 것이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그저 그 수고 자체로 주님의 뜻을 채워드리면 그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진정 삶이 그러 할 때 곧 성직자다운 길을 가는 것입니다. 대가없는 수고로써 진정 삶의 의의를 다 채우는 그것이 곧 희생의 삶이자 진정 성직자의 삶인 것입니다.


그러한 희생의 삶은 어머니와 군인에게서 그 진면목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어머니의 희생이란 어떤 것입니까? 그에 대하여 굳이 여러 말 할 것 없이 부처님이 말했다는 부모은중경의 다음과 같은 한 구절이 감동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 “어머니는 열 달 동안 배속에 품은 아이를 낳을 때 서 말 서 되나 되는 피를 흘리며, 그 아이를 기를 때 여덟 섬 너 말의 젖을 먹이고, 열손가락 손톱에 묻은 자식의 더러운 것을 먹는다.”는 것입니다. 어머니는 자식에게서 무슨 보답을 얻고자 그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가장 진한 희생을 하는 사람이 곧 어머니라 할 것입니다. 참 희생이란 그러한 어머니의 희생입니다. 여기 진정 거룩한 삶이 그러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하듯이 또한 군인들이 대가없는 희생을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군복을 입고 지낸 청춘세월이 8년입니다. 신학생 때 병역의무로 육군 졸병 3년을 지냈고, 사제가 되어 군종신부로 해군 장교직의 5년을 지냈습니다. 의무복무 3년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대한민국의 한 남성으로서 복무한 것이었기에 그에 대해서는 오늘 복음서의 예수님 말씀처럼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고 말할 수밖에 없지요. 한데 사제가 되어 다시 군복을 입고 지낸 5년에 대해서는 의무복무가 아니었기에 그에 대하여 저 스스로 무슨 대단한 일을 한 것처럼 자랑스럽게 말하곤 합니다.


그러나 앞서 예를 든 그 철학자의 말을 오늘 예수님의 말씀과 연관 지어 성찰하자면 저의 군종신부 생활을 공치사(功致辭) 할 일이 아닌 것입니다. 대가없는 희생을 그 본질로 하는 성직 즉 사제직이어야 한다면 그게 공치사 할 일이 아니지요. 공치사 한다면 그야말로 자신에 대한 부끄러운 공치사(空致辭)일뿐이지요. 제 자랑하기 위해 공()을 쌓았다면 그건 아무 쓸모없는 공염불(空念佛)일뿐이지요.


한데 제가 군종신부로 해군장교 임관을 위하여 해군사관학교에서 4개월 동안 고된 교육훈련을 받던 그 초기에 식사시간마다 식사 전에 교관이 불러주는 대로 복창하던 구호가 생각납니다. 군인으로서 밥 한 끼를 먹더라도 그것은 국민이 세금 내어 먹여주는 것임을 잘 기억하라는 뜻으로 나는 국민의 돼지다.”라고 외치는 구호였습니다. 이 구호의 내용인즉, 국민들이 군인을 잘 먹여주는 까닭이란 한번 필요할 때 목숨을 내놓으라는 뜻이랍니다. 그래서 밥을 먹더라도 국민을 위하여 언제라도 죽어주기 위해서 밥을 먹으라는 것입니다. 군인이 된다는 것은 그 몸을 국민을 위해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희생물로 내놓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군인은 앞서 한 철학자가 말한 바대로 거룩한 희생의 성직자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가 군종신부로 복무한 것에 대하여 스스로 어떤 칭송을 그 대가로 바란다면 우스꽝스런 것이지요. 오히려 진정 희생을 그 목표로 하는 사제로서의 삶과 언제라도 목숨을 내놓을 수 있는 군인으로서의 희생적 삶을 한 몸에 이중적으로 실현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하여 감사해야 할 일인 것입니다.


그렇듯이 어머니와 군인의 처지처럼 진정 대가없이 희생의 삶을 바치는 길을 가기 위해서는 오늘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당부하신 믿음으로 살아가야 할 것임을 저 자신에게 다짐해야겠습니다. 참 희생이란 그 대가(對價)를 계산하는 것이 아니듯이 그건 무조건적인 자기양도(自己讓渡)인 것입니다. 그 무조건적인 자기양도가 곧 믿음입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던지는 것입니다. 이를 일컬어 어려운 철학적 용어로 투기’(投企 : M. Heidegger의 실존철학적 표현의 ‘Entwurf’라는 존재론 용어)와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만, 그러한 자기 던짐은 죽음에의 선구적 각오(先驅的覺悟)에 의하여 가능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 저 나름으로 해석하자면, 자식을 위해 그러한 희생을, 그리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 그러한 희생을, 죽음에 이르기까지 함으로써 그 존재가 곧 어머니일 수 있고 군인일 수 있듯이, 진정 여기에 자신을 던지는 희생이 있고서야 사제가 참 성직자일 수 있다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제자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희생을 가능하게 해주는 밑바탕이 곧 믿음입니다. 그러한 믿음을 일컬어서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겨자씨 한 알만 한 것이라 할지라도 나무를 뿌리째 뽑아 바다에 심을 수 있는 힘을 지닌 믿음이라 하신 것입니다(루카 17, 6 참조).


그러한 믿음은뿌리째 뽑혀서 바다에 그대로 심어지듯’, 즉 나의 삶이 송두리째 바뀌어 지는 상전벽해(桑田碧海)의 역설적 처지에도, 사실상 나 자신이 하느님의 종으로서 나 자신의 주인이 되게 만듭니다. 그것은 진정 역설적으로 종이되 주인처럼 사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회사의 사장은 회사의 종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회사의 직원은 그저 봉급만 잘 받는 조건으로 일을 한다면 그저 종 같은 처지에 머무는 것이겠습니다만, 사장은 그렇지 않습니다. 직원들이 회사가 잘되건 못되건 임금인상과 근로복지개선 등만을 이슈로 내걸고 데모를 일삼는다면 그건 못된 종들일 뿐입니다. 허지만 그 직원들이 진정 회사의 주인노릇을 하고 싶으면 회사가 잘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처신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듯이 역설적으로 주인의 위치와 종의 위치를 곡해하는 경우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가 안면도 성당에서 지낼 때의 일입니다. 본당의 가난한 살림에 식복사나 사무장을 두고 살 수 없어서 모든 것을 저 혼자 해야 하는 처지였습니다. 출타 중에 도둑을 몇 번 맞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관광이나 휴가로 지나가던 타지의 교우 분들이 와서 제가 성당 문을 닫아놓고 출타한 것에 대하여 비난하는 분들이 간혹 계셨습니다. 그런 분들 가운데 하시는 말씀이 천주교 신자라면 어디 가든 성당은 내 집이요, 신자가 성당의 주인으로서 아무 때나 조배하러 들어갈 수 있어야 하는데 성당 문을 누가 그렇게 잠거 놓았느냐?”고 하십니다. 맞는 말씀이지요. 그러나 그 교우 분은 비바람 불 때 우리 성당에 별일 없는지 걱정해본 일 있는 주인인가요? 이 성당을 지키는 종과 같은 사제가 혼자 지키다가 우체국이나 시장의 볼 일로 또는 다른 일로 출타해야 할 때 이 성당을 대신 지켜주는 종노릇을 그 교우 분이 와서 해주시는가요? 그에 대한 대답을 뭐라 하실 건가요?


제가 도시의 다른 큰 본당에 있을 때에 경험한 바로는, 성당 지붕이 빗물로 새더라도 또는 누가 전등을 켜놓고 가버려서 밤새도록 불이 켜져 있어도 수녀님이나 보좌신부님은 걱정하거나 그 전등불을 끄러 밤중에 한 바퀴 돌지 않지만 오로지 주임신부로서 저는 그렇게 하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정 그 성당의 종노릇과 주인노릇을 한 몸으로 하게 되는 사람은 주임신부 한 사람뿐이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 종이라면 참 주인처럼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해야 될 일은 하지 않고 찾을 권리만 찾는 것이 주인의 위치가 아닙니다. 권리가 있다면 진정 해야 될 일을 해야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종 같으면서도 주인 같이 생각해야 할 것이 각자의 자기 처지인 것입니다. 그 역설적 원리가 곧 자기 자신을 버림으로써 자기 자신을 지키는 투기(投企) 자기 던짐입니다. 그래서 뿌리째 뽑혀서 다른 데 심어져도 되는 자세로”(루카 17, 6 참조), “해야 할 일을 다 할 뿐”(루카 17, 10 참조)인 삶이 잔정 믿음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종이 명령대로 했다 해서 주인의 고마워해하는 말을 들어야 할 까닭이 없듯이, 우리는 참 믿음이 있다면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희생하여야 할 일을 두고 공치사 할 일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한 공치사(功致辭 self-praise) 즉 스스로 생색내기에 연연하는 것이라면, 쓸모없는 공치사(空致辭 formal praise) 즉 남으로부터 빈말로 듣기나 할 칭송을 기대하는 어리석은 짓일 뿐입니다. 그런 식으로 껍데기뿐인 희생이란 아무런 값어치도 없으려니와 자신의 삶을 종노릇처럼 추하게 만들 뿐입니다.


우리는 그저 하느님께서 다 아실 그런 희생으로써 삶의 길을 가는 믿음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만 희생은 참 희생이 됩니다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51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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