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위 명절을 맞이하여 만수리 공소에서 교우분들과 ‘합동위령미사’을 봉헌합니다. 이 명절미사를 위해서 강론 준비를 해야 하는데, 차분하게 그럴 시간을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 하부내포성지의 서짓골 기반공사 현장점검과 그에 따른 10월의 준공식 준비문제로 협의해야할 분들을 만나러 다니다가 문득 명절이 하루 전인 걸 깨닫게 되었습니다.
명절이 하루 전이라는 걸 깨닫게 된 건, 이웃 성당의 신부님께서 쇠고기와 과일을 싸들고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 신부님께 답례로 제가 옷장에 감춰두고 있던 양주 한 병을 드렸지요. 그런데, 오후엔 공소의 교우 서너 분이 과일 상자를 가지고 오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뒤통수를 얻어맞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부랴부랴 햇밤 수매장에 가서 밤 몇 상자 사서 몇 분에게 답례를 했습니다. 그리 하고나니 맘에 걸리는 분들이 생각났습니다. 외롭게 사시는 노인 한 분, 성지 관계로 저를 늘 도와주시는 산 너머 동네의 노인 회장님, 그리고 사십 리 거리의 동네에 과부되어 늙어 사시는 사촌 형수님을 차례로 찾아가 제가 선물로 받은 고기와 과일을 드리고 왔습니다.
그런 다음에 성무일도 바치고, 라면에 찬밥 얹어 한 술 뜨고 나서, 설거지 쓰레기를 버리려고 나갔더니 열나흘 달이 보름의 버금가는 모습으로 우리 집 앞 산마루를 훌쩍 넘어 떠올랐더군요. 급히 방에 들어가 디지털 카메라 가지고 나가서 열나흘 달을 한 번 담아봤습니다. 그런 다음에 방에 들어와 컴퓨터로 이런 저런 문서정리를 하고나서 명절미사의 강론원고를 정리하려던 참에 전화벨이 울리는 것입니다. 저와 사귀고 있는 산 너머 동네의 외교인 젊은이가 공소 정문 앞에서 문을 열어달라는 전화였습니다. 건강음료 한 박스를 들고 찾아온 것입니다. 그래서 그 친구 성의에 대한 답례로 저의 냉장고에 있는 막걸리 두 병을 꺼내서 이런저런 대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주로 시국에 관한 이야기였지요.
그 사람을 보내고 나니 열나흘 달이 어느새 한밤 중천의 대양(大洋)에서 항해 중이네요. 그 달은 이미 한가위 보름달이 되어있는 것입니다. 왜냐? 이제 날짜가 지나 벌써 보름(음 8월 15일)이니까요. 저게 '한가위 새벽달'이랄까요…! '한가위 저녁달'이 아닌…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아서 강론준비를 하려니 원고가 풀려나가질 않습니다. 왜 그럴까…? 막걸리 마신 탓도 있지만 그보다는 다른 까닭이 있는 것 같습니다. 기도의 묵상에 젖어들지 않습니다. 묵상이 아니라 감상에 더 잡혀드는 마음입니다. 그 ‘감상’이란…? 보고 싶어도, 찾아가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분들 때문인 것 같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그래서 강론원고 작성을 포기했습니다. 그리고는 저의 과거 강론원고파일을 PC에서 찾아봤습니다. 그것 가운데 2004년도 안면도 성당에서 지냈던 한가위의 강론원고를 다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저의 아버지 돌아가시고 2년 되던 해의 한가위였습니다. 그때의 원고를 읽어보니, 어쩌면 오늘의 한가위에도 같은 심정을 갖게 하는 내용입니다. 그 내용 가운데는 아버지 돌아가시고 또 얼마 후에 어머니 돌아가신 아들의 심정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저의 아버지 돌아가시고 9년 후 재작년에 어머니도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저는 찾아가 뵈올 수 있는 부모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그저 가슴 속에서만 계십니다. 이 명절에 말입니다. 그래서 여기 오늘의 한가위 강론 창에 9년 전의 글을 그대로 올립니다.
한가위. 2004년 9월 28일 10:30@안면도성당 합동미사
만수리 공소 윤종관 신부
아버지의 뼛 속에, 어머니의 가슴 속에
돌아가서 두레 밥상을!
오늘 우리 민족 최대의 고유명절 한가위를 맞이하여 미사를 봉헌하면서 교우 형제자매들께 무슨 말을 해드릴까 하고 고민하다가 인터넷 신문에서 읽은 것을 옮겨 들려드리기로 하였습니다. 먼저 제가 좋아하는 우리 충청도 출신의 가수 장사익 씨의 노랫말을 읽어봅니다.
아! 아버지
한가위라 대보름, 달 휘영청 밝습니다.
아들 딸 손목 잡고 고향 집에 갑니다.
어릴 적 내 작은 손, 아버지는 어떠셨던가요.
늘 앞서 걷던 어른 무섭기도 했는데.
몸 크고 머리 컸다, 집 떠난 지 벌써 몇 년.
아버지 두텁던 손 물기 없이 바싹 말라,
고함에도 힘이 없고 가끔은 잔 눈물 바람.
아버지, 어머니 없는 고향은
고향이라도 고향이 아니라던데….
역전에 자전거 받쳐놓고
온종일 기다리셨으련만
“왔냐” 한마디 던지시곤
애꿎은 손자 머리통만 쓰윽.
아버지, 달이 밝습니다.
손잡고 싶습니다.
이런 노래를 부르는 장사익 씨는 우리 안면도에서 건너다 뵈는 광천에서 나서 자란 분입니다. 그는 이 노래의 사연을 다음과 같이 들려주고 있습니다.
“자식 마음 다 똑 같겄지만 지는 아부지를 참 사랑혔어요. 사랑허고 존경허고, 지금도 막 보고 싶어요. 지가 충남도민이거던요. 홍성군 광천읍 광천리 삼봉마을. 아부지는 가축 장사를 허셨는데, 뭐 볼 것 없는 직업이지만 우리 7남매헌테는 둘도 없는 분이셨어요. 맏아들인 저를 무척 이뻐하셨거든요. 자전거에 태우고 다니면서 어디든 인사를 시키셨어요. 덕분에 어른 뫼시는 법, 초상 치르고 밥 먹는 예절 같은 것들은 확실허니 익힐 수 있었지요.”
이렇게 어린 시절의 고향과 아버지를 회고하는 장사익 씨는 중학교 마치고 서울로 진학한 후 40년 동안 서울서만 살아왔는데, 설이나 한가위엔 꼭 고향을 찾는다면서 그에 얽힌 아버지와의 추억을 이어서 다음과 같이 술회합니다.
“서울 역에서 밤새 줄 서 겨우 야간 완행표를 사고, 동서울터미널에서 낡은 버스에 짐짝처럼 실려 가면서도 그저 고향 가까워지는 것이 고맙고 즐거웠지요. 아부지는 또 참 재미가 있으셔 금방 왔다, 쉽게 왔다 하면 외려 싱겁다 하셨어요. 한 10시간 걸렸다, 아주 죽을 고생을 했다 해야 푸짐허다고 생각하시지.”
한가위 명절에 고향에 내려오면 아버지께서 주최하시는 마을의 작은 잔치에 함께 하곤 했답니다. 자신과 동생이 돈을 내서 공책, 연필, 빨랫비누, 플라스틱 바가지 등을 마련하면 낮에는 공회당 마당에 모래를 두 리어카쯤 쏟아놓고 동네 애들 씨름을 시키고, 저녁참이 되면 노래자랑 시간을 여는 것이었답니다. 그 때의 기분을 그는 다음과 같이 추억으로 되살립니다.
“밤늦도록 신명 나게 노는 거예요. 우리 아부지랑 이장님이 떡하니 심사위원을 맡고, 하하…! 허니, 그 어른덜이 뭘 아시겄어요. 그래도 참 재미가 있잖여요. 하늘에는 두리둥실 둥근 달이 떠오르고…. 동네 애들헌테 고향에서의 추억 한 자락씩 챙겨주고 싶었어요. 살기 힘들 때, 눈물 날 때, 죽고 싶을 때 힘 얻으라고. 꼭 지만큼만요.” 이렇게 말하고는 아버지 돌아가신 후에 대하여 이어서 회고합니다.
“98년 아부지가 돌아가셨어요. 지는 그때 2집 녹음을 하고 있었거든요. 머릿곡 제목이 ‘기침’이었는디, 아, 아버님 병명이 폐암인 거예요. ‘돌아누워도 돌아누워도 찾아오는/ 환장할 기침은 언제나 끝이 나려는지/ 삶은 언제나 가시 박힌 손톱의 아픔이라고/ 아무리 다짐을 놓고 놓아도…’ 그렇게 우리 아부지가 먼 길 가시는데, 앞이 깜깜하고 하늘이 무너지더라고. 3년 전에는 어무니도 돌아가셨어요. 추석 때 고향 집에 갔는데 늘 한결같던 음식 맛이 암만 해도 이상한 거여. 병원 가니 하는 말이 췌장암이라고…. 아부지 돌아가시고 첫 추석 때 고향 역전에서 울었어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자전거 받쳐놓고 기다리시던 아버지가 이젠 거기 없는 거여. 엄마, 아부지 없는 고향은 고향이라도 고향이 아니구나. 한 세상이 다 지났구나….”
장사익 씨의 이 회고담 마지막 말은 가슴을 한없이 애절하게 합니다.
제 세상 살겠다고 집 나가 사는 아들이 명절 쇠러 돌아오는 날에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역전에 나와 기다리시던 아버지…. 예전에는 두껍고 힘도 세시던 아버지 손이었건만, 해마다 점점 쇠약하게 말라가는 손으로 자전거 끌고 역전에 나와 기다리시던 아버지가 이제는 그 역전에 나오시지 않으니…, 그곳이 어찌 고향역이겠는가! 그래서 부모 없는 고향은 고향이 아니라던 그 말처럼 이 부모 없는 명절이 또한 명절이겠는가! 그래서 아들은 “한 세상이 다 지났구나….”하며 하늘만 쳐다보고 공허한 마음입니다. 고향의 아버지가 살아 계시다면 객지를 떠도는 아들은 번듯한 어깨와 단단한 무릎으로 세상을 활보할 수 있으련만 말입니다. 의지할 곳 없는 험한 세상에서 그래도 활개치고 걸어 다닐 수 있는 아들의 어깨와 다리란 살아계신 아버지의 뼛속을 이어받은 힘 때문이 아닐 런지요…. 해서 아들이 기활 좋게 나돌아 다니기란 언제라도 돌아갈 아버지의 집이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아버지가 계셔야 아들이 자신 있게 세상에 나갈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집나간 아들이 아버지 덕분으로 밖에서 힘을 얻는다면, 그 아들이 집에 돌아와 힘을 얻는 까닭은 또한 집에 어머니가 계시기 때문이지요. 이 한가위 명절에 그래서 또 다른 시(詩)를 읽어봅니다.
모난 밥상을 볼 때마다 어머니의 두레밥상이 그립다.
고향 하늘에 떠오르는 한가위 보름달처럼
달이 뜨면 피어나는 달맞이꽃처럼
어머니의 두레판은 어머니가 피우시는 사랑의 꽃밭.
내 꽃밭에 앉는 사람 누군들 귀하지 않겠느냐.
식구들 모이는 날이면 어머니가 펼치시던 두레밥상.
둥글게 둥글게 제비새끼처럼 앉아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밥숟가락 높이 들고
골고루 나눠주시는 고기반찬 착하게 받아먹고 싶다.
세상의 밥상은 이전투구의 아수라장
한 끼 밥을 차지하기 위해
혹은 그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이미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짐승으로 변해 버렸다.
밥상에서 밀리면 벼랑으로 밀리는 정글의 법칙 속에서
나는 오랫동안 하이에나처럼 떠돌았다.
짐승처럼 썩은 고기를 먹기도 하고, 내가 살기 위해
남의 밥상을 엎어버렸을 때도 있었다.
이제는 돌아가 어머니의 둥근 두레밥상에 앉고 싶다.
어머니에게 두레는 모두를 귀히 여기는 사랑
귀히 여기는 것이 진정한 나눔이라 가르치는
어머니의 두레밥상에 지지배배 즐거운 제비새끼로 앉아
어머니의 사랑 두레 먹고 싶다.
이것은 이번 한가위에 또한 인터넷 신문이 소개하는 정일근 시인의 ‘둥근, 어머니의 두레밥상제’라는 시(詩)입니다. 이 시를 읽고 또 다른 시인 반칠환 씨는 다음과 같은 단상을 쓰고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모난 밥상을 두레상으로 바꾸자고 할까? 예로부터 모난 자리 앉으면 미움 받는다 했거늘 어쩌면 우리들 모나고 각지고 뾰족한 마음이 모난 밥상 탓은 아닐까? 먹은 대로 살이 가고, 먹은 대로 마음 가지 않을까? 두레상은 위아래 자리 차별 없이 여럿이 둘러앉아 먹을 수 있는 둥근 밥상이다. 모난 밥상은 앉은자리 따라 반찬이 다르지만 두레상 앞에서는 누구나 숟가락 앞에 평등하다.
어느 때보다 어려운 경기 탓에 ‘한가위 한파’ 소리가 들려온다. 선물 보따리가 줄고, 제수(祭需) 걱정들을 하지만 고개 들어 하늘을 보자. 두레상처럼 둥근 한가위 달이야 변함이 있겠는가. 추석은 ‘이전투구의 밥상’으로부터 ‘두레밥상’으로의 귀환이다. 온 가족, 온 친척, 온 마을 사람들 둥글게 모여 앉아 꽃두레판을 이루자. 세상의 모든 모난 구석 일일이 나무망치로 두들겨 둥글게 펼 수는 없더라도 너와 나, 그리고 우리, 저마다 넉넉한 두레마음 가지고 돌아가면 험한 도깨비 세월쯤이야 왼씨름으로 넘기지 않겠는가.”
그렇습니다!
아버지가 뼛속의 고뇌로 자식들을 키우고, 어머니가 가슴속에 자식들을 품었듯이, 고향 거기는밥상을 차려 자식들을 맞이하는 고향, 거기 돌아온 자식들을 너른 팔로 맞이하는 아버지와 따뜻한 가슴으로 밥상을 차려주는 어머니 앞에 둘러 앉는 자리의 가운데는 등근 두렛상이 있습니다. 둥근 두렛상, 그것은 누구 따로, 특별한 것 따로, 각자 먹는 밥상이 아닙니다. 자고로 ‘모난 밥상에 먹으면 사람도 모난다.’ 하던 것과는 달리, 어머니가 자식들 함께 먹여주는 밥상은 형제 끼리 두루두루 함께 먹을 수 있는, 모가 없는 두렛상입니다. 한 부모 앞에 모이는 자식들 모두 서로에게 모가 없어야 하기에 그렇습니다. 형제들이 그렇게 모두의 마음으로 만나는 밥상이란, 어머니의 가슴속에 함께 파묻히듯 명절에 함께 만나는 자리, 곧 그 둥그런 두렛상입니다. 그러한 우리 명절의 잔칫상은, 명절이 고유명절이듯이, 그래서 고유음식으로 차려집니다. 둥근 음식으로 말입니다. 설날의 떡국이 그렇게 둥근 떡으로, 그리고 한가위의 토란국이나 송편이 또한 달을 닮은 모습으로 둥그런 모양입니다. 그러면서 마음 둥글게 삶 또한 모두에게 둥글게 넉넉함으로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향의 부모 앞에 모인 자녀들 사이에 모든 게 넉넉함으로 채워집니다. 형제들 사이의 그 넉넉함은 부요한 재산에서 나오는 게 아닙니다. 한 부모 아래 한 형제임을 다시 깨달음으로써 마음이 그렇게 넉넉해지는 것입니다. 오늘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듯이 “사람이 제아무리 부요하다 하더라도 그 재산이 생명을 보장해주지 못한다.”(루카 12, 15)는 것을 우리는 우리의 가난한 고향집 부모와 조상 앞에 모인 깨달음에서 형제자매로서 새삼 확신하게 됩니다. 그래서 앞서 시인이 말하듯이 이 명절에 우리는 ‘이전투구의 밥상’이 아니라 형제들 사이 ‘두레밥상’으로의 세상을 다짐하여 조상들과 부모의 교훈 속에 실현할 수 있기를 하느님께 빌어야겠습니다.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48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년 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년 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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