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2주일, 2013년 9월 1일 10:30 @ 전민동성당

만수리 공소 윤종관 신부


우린 못난이들이라서 행복합니다

사제가 권세가를 예우하면 교우들이 싫어한다



우리 동양의 인성론으로 ‘47정론(四端七情論)’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4(四端)’이란 사람의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4가지 마음씨를 일컫는 것입니다. 이것을 퇴계 이황(退溪 李滉) 선생은 ()’에서 나오는 마음이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7(七情)’()’에서 나오는 마음이라고 퇴계 선생은 말하였습니다. 이러한 사단칠정론에 대해서 기대승(高峯 奇大升)과 철학적 논쟁이 일어나게 되고, 그 논쟁은 선비들 간의 학파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영남학파(嶺南學派)와 기호학파(畿湖學派)로 대립하여 끊임없는 논쟁이 계속되다가 결국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이라는 붕당으로 비화되고 정치 싸움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 붕당은 여러 갈래로 또 분파되어 피를 부르는 정파싸움으로 이어져갔습니다.


네 가지 단(四端)은 측은지심(惻隱之心수오지심(羞惡之心사양지심(辭讓之心시비지심(是非之心)이라 합니다. 4가지는 인의예지(仁義禮智)’를 각각의 기초로 나오는 덕행이라 합니다. ()에서 측은히 여길 줄 아는 마음이 우러나오고, ()에서 부끄러워 할 줄 아는 마음이 우러나오고, ()에서 양보 할 줄 아는 마음이 우러나오며, ()에서 옳고 그름을 분별 할 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참고적으로, 일곱 가지 정(七情)이란 인간의 일곱 가지 심리작용을 일컫는 것으로서 기쁨(), 노여움(), 슬픔(), 즐거움(), 사랑(), 미움(), 욕심()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사단칠정론에 대해서 학문적인 논쟁 또는 그로 인한 정치적 당쟁의 역사를 말하고 싶진 않습니다. 다만, 그러한 인성론으로써 인간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을 아이러니하게도 정치판 쟁투의 빌미로 삼게 된 우리 선대의 역사를 오늘의 예수님 말씀으로 반성해야겠다고 저는 말하고 싶습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 말씀에서는 겸양과 연민의 구체적으로 실천할 태도를 깨닫게 됩니다. “초대를 받거든 끝자리에 가서 앉아라,”(루카 14, 10) 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수오지심(羞惡之心)과 사양지심(辭讓之心)을 아주 구체적이고 알아듣기 쉽게 가르치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좋은 자리에 사람들을 초대하고 싶으면 친한 사람이나 잘 나가는 사람들을 모실 것이 아니라 가난하고 멸시 받는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대우하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루카 14, 1213 참조). 그래야만 진정 사람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루카 14, 14 참조). 이 말씀은 측은지심(惻隱之心)의 구체적 실천을 예시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복음에서 듣는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은 진정 옳고 그름의 기준을 사람이 사람을 보는 척도로 삼으라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진정 시비지심(是非之心)이지요. 그렇다면 7(七情)이라 일컬어지는 심정 발로는 사실상 사람이 사람답게 사람들을 대하는 데서 그 의미를 지닌다고 봐야 합니다.


그러나 위와 같은 동양의 인성론은 조선 중기의 우리 역사에서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기준으로 생각되어지지 않고 엉뚱하게도 사람들이 서로 싸우는 논거로 아이러니하게 악용되었다고 저는 판단합니다. 그런 역사가 더욱 아이러니한 까닭은, 그것이 명분을 중시하는 조선의 성리학의 병폐에서 기인했기 때문입니다. 성리학은 이른바 선비의 가장 큰 덕목이라 할 수 있는 오로지 명분이 그 바탕이었기에, 결국 사람 자체보다는 사람의 처지가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게 됩니다. 명분, 즉 처지는 허울입니다.


그러나 사람 자체를 보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말씀 속에 그 바탕을 이루고 있는 것은 인간 중시입니다. 사람을 제대로 보라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사람은 누구인가?’하고 사람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그 물음을 가지고 성경을 읽으면, ‘사람은 하느님의 모상이라는 답을 얻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물음에 대하여 실천으로 대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실천적 대답이 곧 오늘 우리가 읽는 복음 말씀입니다.


맨 끝자리에 앉아라.”(루카 14, 10)는 말씀과 잔치에 오히려 가난한 사람 등을 불러라.”(루카 14, 13)는 말씀은 사람을 그 처지에서 보지 말고 사람을 사람으로 보라는 말씀과 더불어 사람은 사람으로서 자신의 분수를 지킴으로써 사람 사이가 존중되고 사람 사이의 관계를 바르게 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오늘 복음의 가르침을 읽으면서 저는 오래 전에 읽은 작가 고 박완서 씨의 다음과 같은 글이 회상되었습니다.


[결혼이야 당사자가 하고 싶을 때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부모의 사정에 맞추어 예식을 올리는 경우가 다반삽니다. 예를 들어, 곧 정년퇴임을 앞둔 아버지는 자신이 현직에 있는 동안에 아들 결혼을 시키려 서두릅니다. 까닭이 있지요. 축의금 액수와 하객을 어떤 사람으로 모실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체면치레와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결혼비용이 너무 막대하기 때문에 상당부분을 축의금에 의존하는 우리의 실정을 감안할 때 없는 사람들이 축의금에 신경 쓰는 것을 나무랄 수는 없을 겁니다.


하나 결혼뿐 아니라 심지어는 부모의 상까지도 지위나 권세가 높을수록 오히려 더하다는 것은, 그런 기회에 여봐란듯이 자기 세력을 과시하고 자기 권세의 덕을 본 사람들로부터 몇 배로 되돌려 받고 싶은 야비한 욕심 때문이 아닐까요. 그런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을 초대할 수 있는가에 관심이 많다보니 오신 하객을 대우하는 데 있어서도 지위고하에 따라 또는 빈부에 따라 적절한 차별을 하는 데 능합니다. 그리하여 보통으로 사는 친척이나 출세는 못했지만 정으로 찾아간 그저 그런 하객들은 주인과 눈도장 한번 제대로 못 찍고 섭섭하게 돌아오는 수가 많습니다.


지위나 소유에 따라 남을 차별하는 데 능한 이일수록 자기가 초대됐을 때 상대방에게 어떤 대접을 받는가에 민감합니다. 심지어는 사전에 비서를 시켜 어떤 자리에, 누구 옆에 자리가 마련됐는지 알아보고 흡족치 않으면 더 높은 자리를 요구하고, 그게 여의찮으면 불참하겠다고 위협을 하는 명사까지도 있다고 합니다. 이런 우스갯소리도 있습니다. 무슨 준공식이나 개막식 같은 공식행사에 참석할 적마다 흰 장갑 끼고 테이프 커팅 하는 명사들 중에 낄 수 있었던 어떤 고위공직자가 그 자리를 물러난 후에도 그런 행사에 초대받기는 하는데, 테이프 커팅에는 안 끼워주더라는 겁니다. 그 어른은 테이프 커팅 하면서 사진 찍히지 않으면 참석 안 하니만 못하다고 생각하여 한 꾀를 냈다고 합니다. 그는 손수 준비한 흰 장갑과 가위를 주머니에 넣고 있다가 재빨리 명사들 사이에 끼어들어 테이프 커팅을 기어코 하고야 만다는 것이었습니다. 우습지만은 않은, 우리의 염량세태(炎凉世態)가 사실적으로 드러난 이야기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은 우리에게 초대를 받거든 끝자리에 앉고 초대를 하려거든 친척이나 잘사는 이웃보다는 가난한 사람들이나 불구자를 초대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대신 갚지 못할 사람이지만 하느님께서 대신 갚아주실 거란 말씀은, 곧 우리는 지금 부자나 권력자에게 빚을 지고 있는 게 아니라 가난한 이, 몸이 성치 못한 이들에게 빚지고 있다는 말씀이 아닐까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앉은 자리는 가장 낮은 자리, 가난뱅이 불구자와 동격의 자리였습니다.]

(박완서, 1998827[서울주보] ‘말씀의 이삭에 실린 글에서 발췌하고 약간 수정함)


사람은 누구나 다른 이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본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진정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로부터 인정받길 바라야겠습니까? 세상으로부터 되받을 것을 기대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갚아주실 것이다.”고 오늘 복음에서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그리스도인들은 잘 기억하고 있지요.


그런데 앞서 제가 이야기의 배경으로 제시한 사단칠정론에 대해서 마산교구의 이제민 신부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우리 실정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 한국 천주교회는 옛적 반상(班常)의 구별이 뚜렷했던 시절(초대교회)부터 양반 상놈 구별 없이 교우들 끼리 서로 형제자매로 불러왔습니다. 이것은 진정 교회란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자녀들의 공동체라는 깨우침에서 비롯된 것이지요. 그래서 뒤늦게 한국에 들어온 개신교회에서 집사님, 권사님, 장로님하면서 직급을 만들어 부르는 것에 비하면 우리 천주교회의 형제님, 자매님이란 칭호는 참으로 교회답고 아름다운 호칭입니다.


그런데 우리네 장유유서(長幼有序)의 관습적 정서에서 나이 적은 교우가 나이 많은 교우에게 형제님, 자매님을 부른다면 기분 좋게 들릴 리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 한국 천주교회에 새로 입교하는 신자들의 수가 급격히 상승하던 지난 2030년간에 형제님, 자매님보다는 회장님, 단장님, 구역장님등의 직책으로 부르는 풍조가 늘고 있고 더 나아가서 회장 직 임기를 마친 분에게도 늘 회장님이라 불러야지 그렇지 않으면 언짢아해 합니다. 그리고는 교회의 모임에서도 그 사람의 사회적 지위에 따라 사장님, 의원님, 부장님, 사모님등으로 불러주지 않으면 당사자들이 뒤에 가서 기분 나빠서 성당 못 다니겠다.”고 한다는 이야기도 듣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사제가 혹여 어떤 사회적 주요 인사를 기분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예우를 하면 그 사제에게 신자들의 비난이 쏟아집니다. “저 신부는 높은 놈만 좋아해.”하면서 말입니다. 그러한 신자들의 비난 심리 속에는 사실상 세상에서는 사람차별을 당하더라도 교회에서는 차별 없이 모두가 동등하기를 기대하는 마음이 들어있는 것이지요. 더욱이 힘없고 가난하여 세상에서 억울한 차별을 당하는 사람들이 교회에서는 오히려 존중 받아야 한다는 오늘의 예수님 말씀을 떠올리면서 주요인사 예우하는 사제를 비난하게 됩니다.]

(정의구현 사제단에서 발행하는 선포와 봉사’2004 여름판 262쪽 이하에서 발췌함)


그렇습니다. 사실상 세상에서 멸시받는 사람들이 그래도 교회에서만은 존중받고 싶기 때문에 교회에 나온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란 세상에서 못난이 취급당하는 사람들이 모여오는 곳이어야 합니다. 멸시받고 억울해서 교회에 나와 그 한을 보상받고 싶은 것이지요. 정말 그렇다면 교회에 나온 모든 신자들은 진정 서로가 세상에서 당하는 서러움을 서로 씻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멸시받던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를 귀하게 여기는 사이가 되는 곳이 교회여야 합니다. 마치 객지에서 고생하던 형제끼리 만나면 형 아우 사이에 더욱 사랑스럽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세상의 못난이들이 모이는 곳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이신 주님 앞에서 모두가 소중한 자녀임을 인식하고 서로가 형제자매로 엮어진 곳이 교회입니다. 아버지 앞에서 자녀 하나하나 소중하지 않은 녀석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더욱 가난하고 병들고 힘없고 억울한 처지에 있는 사람을 초대하는 잔치로 하느님 나라의 성격을 규정하시는 예수님께서 가난하고 몸이 불편한 사람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갚지 못하겠지만 그럴수록 종당에 하느님께 선택 받은 사람들의 사이에서 갚음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루카 14, 14 참조).


그래서 우리는 역설적인 표현으로 다음과 같이 아버지 앞에 모여 고백합시다. “우린 서로 못난 자녀의 처지로 아버지 앞에 모이게 되어 행복합니다.” 하고 말입니다. 이러한 고백 속에 진정 겸손과 사랑이 들어있습니다.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45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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