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1주일, 2013 8월 25일 10시

만수리 공소 윤종관 신부


우리는 미련한 사람들! 

주님께서 나를 알아보실까...?



연일 폭염이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지난 금요일은 절후표에 의한 처서(處暑)’였습니다. 이때쯤이면 더위가 한풀 꺾여야 하는데도 무더위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처서라는 것은 더위가 가시고 신선한 가을을 맞이하게 된다는 의미로, 더위가 그치게 된다는 뜻에서 붙여진 절후의 이름입니다. 바로 그 처서인 지난 금요일엔 새벽에 요란한 천둥번개로 폭우가 쏟아지고 낮에도 많은 비가 내렸습니다. 그래서 저는 무더위를 씻어내기 위해서 처서에 딱 들어맞게 고마운 비가 내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처서에 비가 내리면 농부들은 걱정을 합니다. 옛적부터 처서의 날씨는 풍작이나 혹은 흉작을 점치게 한다는 속설이 있습니다. 처서의 절기에는 햇살이 왕성하고 쾌청해야 벼의 이삭이 튼실하게 익어간답니다. 그래서 만일 이 시기에 날씨가 궂고 비가 자주 내리면 수확이 줄어들 수밖에 없지요. 그런 까닭에 처서의 날씨로 가을 농사의 점(農占)을 치기도 한답니다. 처서에 비가 내리면 처서비(處暑雨)’라 하는데, 그런 처서비는 십리에 천석 감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러한 농민들의 걱정과는 반대로 제가 지난 금요일의 처서 당일에 비가 내리는 걸 고맙게 여긴 것은 주책이지요. 처서비를 꺼리고 이날 비가 오지 않기를 바라는 농민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심사를 제가 드러낸 것이지요.


우리 만수리의 농촌 사람들은 뙤약볕 아래의 고추 밭에서 붉어가는 고추를 지금 부지런히 따서 햇볕에 말려야 합니다. 붉은 고추를 제때에 따서 말리지 않으면 가꾼 고추가 골아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따가운 햇볕을 두려워하지 않고 땀으로 범벅이 되어 고추밭에 매달려야 이른바 태양초를 잘 거두어 주요한 농가 수입을 올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고추 따기를 하루 종일 하던 농촌 아줌마들 가운데는 얼굴과 손이 퉁퉁 부어오른 분들도 있습니다. 그야말로 매일 햇볕과의 전쟁을 치르는 농촌 아줌마들의 그러한 고생에 비하면 고추 값이 너무 헐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밭에서 일하는 분들 앞에 무더위에 대한 원망을 삼가야 합니다. 농사일로 고생하시는 그분들의 처지를 보면서 문득 오늘의 복음 말씀을 연관 지어 생각해 봅니다. 농촌 사람들의 그런 모습이란 가히 무더위와의 전쟁을 치르는 입장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전쟁하듯이 노력하라는 말씀을 우리는 오늘 복음서의 예수님께로부터 듣습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루카 13, 24)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계시는데, 여기서 힘써라는 말씀은 성경의 원문에서 볼 때 전투하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전투하듯이혼신을 다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죽을 각오로써 노력하라는 뜻이지요. 만사를 제쳐두고 달성해야하는 것이 구원이라는 말씀입니다. 농작물이 성숙하는 이 절기를 소홀히 할 수 없듯이 제 때에 맞는 최선의 노력을 해야 한다는 예수님 말씀을 잘 새겨야 합니다.


문이 닫혀버린 뒤에 아무리 문을 두드려 보아야 소용없다는 예화(루카 13, 25-30 참조)를 들어 설명하시는 예수님께서는 구원을 얻기 위한 노력은 최우선적이어야 함을 강조하십니다. “힘써라는 말씀을 그래서 영어성서는 “Do your best!(최선을 다해라)”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어중간하게 해서는 아니 된다는 뜻이지요. 그래서 이 말씀은, 우리가 가야하는 길에 중도적인 삶보다는 아니요중에서 하나를 택하라는, 결단의 강력한 요구이기도 합니다. 만사를 제쳐두고 달성해야 할일에 있어서는 태도가 분명해야 합니다. 확실하게 선택한 진로에 혼신의 노력을 기우려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 신자들은 스스로 신자임을 인식할 때 살아가는 길에 최선의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치 대학의 좁은 문을 통과하여 들어가려고 수험생들이 노력하듯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하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시험에 합격하려면 어정쩡하게 공부할 수가 없지요. 그리고 이 더위의 햇볕 아래에서 일하는 농촌 사람들처럼 지금 해야 할 일을 게을리 할 수 없다는 깨달음이 있다면, 우리가 걸어가는 신앙의 길도 그러한 것임을 깨우쳐 주시기 위해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듯 최선을 다하라고 오늘 예수님께서 강조하시고 계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진정 구원에 이르는 좁은 문이란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알아들어야 합니다. 그것을 저는 저지난주간의 성무일도 중에 읽은 미카 예언서에서 알아채고 싶습니다. 다음과 같은 말씀이었습니다.

사람아, 무엇이 착한 일이고, 주님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그분께서 너에게 말씀하셨다. 공정을 실천하고 선의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느님과 함께 걷는 것이 아니냐?”(미카 6, 8)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잘 알고 사는 사람에게 구원에로 이르는 문이 열립니다.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의 첫 번째 덕목으로 공정을 실천하는 일이라 했습니다. 그것은 정의로운 삶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인 척 하면서도 세상의 불의에 가담하였다면 주님께서는 불의를 일삼은 자들아, 내게서 물러가라.”(루카 13, 27) 하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정의로운 길에 들어서는 문을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좁은 문이라 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살이를 하는 가운데 그 정의로운 길은 진정 좁은 문으로 향한 길입니다. 현세적 욕망추구로 인하여 너도나도 불의와 타협하는 세상에서 나 홀로 타협을 거부하며 옳은 길을 가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세상에서 승자가 되기 위한 일이라면 양심의 저 깊은 곳에서 울려나오는 깨우침을 애써 묵살하면서 자신을 속이듯이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더러운 일에 손을 잡는 것이 영악한 세상살이입니다. 양심이 말하는 아니요를 굳이 거부하면서 세상이 손짓하는 에 길의 방향을 바꾸며 비굴해져야 하는 것이 세상살이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좁은 문으로 향한 혹은 아니요중에서 무엇을 택할 것인지 결단해야만 하는 매순간의 발걸음을 걸어야 합니다.


아니다싶은 것에서는 기꺼이 마음을 떼어버리는 사람이 걸어가는 세상길은 고독하기만 합니다. 비웃음을 사는 길이기에 그렇습니다. 정의로운 길을 가기란 그렇듯 외로운 길입니다. 이즈음에 국정원이 저지른 불의에 대해서 걱정하면서 이 나라에 정의로움을 찾자고 외치는 우리 교회내의 발언(시국선언)에 대해서 비웃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올바른 길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하면 거부감을 드러내는 신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거부하는 그 길을 가는 사람들은 곧 외로운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도 그렇게 외로운 길을 갈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고독한 길을 걸어갈 각오로 그분을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는 길에 당신 제자들에게 그러한 각오를 다지도록 오늘의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다음 말씀은 그렇듯 분명합니다.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라고 애걸하더라도 이미 문을 닫아버린 주님께서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루카 13, 2627)하실 것이라는 예수님의 경고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우리 가운데 신자로서 살아가기가 힘들다고 말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주말의 레저 생활을 즐기려면 주일미사에 꼬박 참례하기가 매우 번거로울 뿐만 아니라, 더더욱 어려운 것은 신자다운 양심을 지키며 살기가 세상살이에 참으로 어렵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 이렇게 힘들어서야하는 신앙인들의 자조 섞인 푸념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자라는 이름으로 교회의 형식적인 모임에 출석한다면서 주님의 문 앞에 섰을 때 주님께서 알아봐 주실 것이라고 착각해서는 아니 됩니다. 살아온 길이 어떠했는가에 따라서 주님의 집 문 앞에서 우리를 주님께서 알아보시리라고 기대해야 합니다. 그 살아온 길이 어떠했는가, 그것이 관건입니다. 좋은 학교에 다니는 학생이라 해서가 아니라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성실하게 공부한 학생이어야 수학능력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듯이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정의로운 길을 힘들여 걸어야만 그분이 마련하신 나라의 관문에 통과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구원에 들어가는 문은 있는 힘을 다해야, 즉 전쟁을 치르듯이 혼신을 다해야, 들어갈 수 있는 좁은 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의 반대를 받아 죽으실 수밖에 없는 당신의 예루살렘 상경 길을 함께 올라가는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곧 주님과 함께 세상의 비웃음을 받으며 고독하게 걸어가야 하는 길입니다. 그래서 구원에 이르는 문은 좁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 자신에게 물어봅시다. “주님께서 나를 알아보실까?” 하고 말입니다.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루카 13, 25)고 주님께서 말씀하신다면 큰일이겠기에 말입니다. 세상길을 약삭빠르게 처신하여 걸어와서 주님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부정한 권력에 빌붙어 낯 뜨거운 벼슬을 꿰차고 천주교 신자랍시고 명함 돌리는 신자정치인들, 불의와 타협하면서 많은 사람 억울하게 하여 자신의 이익만 챙기고는 이름 밝혀 성당에 기부금 내는 사업가 신자들, 부도덕한 행실을 일삼으면서도 세상의 명망가로 자처하여 성당에서 신자들 앞에 나서기 좋아하는 사람들, 그러한 사람들을 주님께서 아신다고 말씀 하실까요?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우선 물어봐야 합니다. “내가 어떻게 살아온 모습이어야 주님께서 나를 알아보실까?” 하고 말입니다. 그리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비웃음의 먼지를 뒤집어쓰고 도착한 나의 모습, 고독의 사막을 건너오는 동안 고목같이 마른 나의 모습, 가시밭길을 헤쳐 오느라고 상처투성이인 나의 모습, 그러나 좁은 미로를 잘도 찾아온 나의 반짝이는 눈동자를 보시고 당신의 진짜 제자가 찾아왔음을 선뜻 알아보실 주님께서 당신의 집 문 앞에서 기다리고 계심을 확신하면서 걸어가는 중이라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적당히 어정쩡하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참으로 걸어가기 힘든 것이 신앙의 길입니다. 세상을 미련하게도 어렵게 사는 사람들, 그들의 이름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미련한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44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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