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모승천대축일. 광복절, 2013년 8월15일
대학생들과의 미사@만수리 공소 윤종관 신부
개벽의 메시지
가장 큰 영토의 삶
오늘 이 축제의 미사는 묵시록으로 시작합니다(입당송 참조). 그리고 제1독서는 그 대목을 잇는 내용으로서 다음과 같은 묵시입니다.
“하늘에 있는 하느님의 성전이 열리고 성전 안에 있는 하느님의 계약의 궤가 나타나면서, 번개와 요란한 소리와 천둥과 지진이 일어나고 큰 우박이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하늘에 큰 표징이 나타났습니다. 태양을 입고 발밑에 달을 두고 머리에 열두 개 별로 된 관을 쓴 여인이 나타난 것입니다.”(묵시 11,19∼12,1)
이는 개벽(開闢)을 알리는 묵시입니다.
“하늘에 있는 하느님의 성전이 열리고, 하느님의 계약의 궤가 나타났다.”
이 메시지는 하느님의 뜻이 세상에 펼쳐진다는 소식입니다. 그래서 “하늘에 큰 표징이 나타났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 표징이란 하느님의 뜻으로 하늘아래 새로워지는 질서입니다. 그 새로운 질서는 태양을 걸치고 달을 발판으로 삼아 하늘의 별들을 머리의 월계관으로 삼은 한 여인 안에 감춰져 있습니다(묵시 12, 1). 그 여인은 새 질서의 주인공을 잉태하여 인간계에 해산할 것입니다(묵시 12, 2 참조). 그래서 새로운 시대가 도래 합니다. 그러한 새 시대의 도래란 세상이 바뀐다는 뜻이지요.
그러나 세상이 바뀌기까지는 시련과의 대결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래서 “하늘에 또 다른 표징이 나타난다.”는 묵시가 이어집니다. 큰 붉은 용이 나타나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을 휩쓸어 땅으로 내던지고 새 시대의 주인공을 잉태한 여인을 위협한다는 묵시가 그것입니다(묵시 12,3∼4 참조). 그러한 시련을 극복하고 여인이 낳아준 아들은 강렬한 하늘의 권세로 세상을 평정하여 모든 고뇌를 이긴 사람들을 하늘로 이끌어 올릴 것입니다(묵시 12,5~10 참조). 그 여인의 아들로 말미암아 개벽의 새 시대가 열린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 여인과 그 아들이란 성모 마리아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러한 새 시대에 펼쳐지는 역사를 바오로 사도가 해설해주고 있습니다. 죽음의 세력을 물리치고 부활한 첫 사람이신 그리스도께서 모두 죽게 되었던 인간들을 살게 하여 주실 것이라는 바오로 사도의 해설이 오늘 우리가 읽는 제2독서 고린토 1서의 내용입니다.
그러한 새 시대를 그 여인 마리아는 오늘 노래하고 있습니다. 루카복음서가 전해주는 [마리아의 노래](마니피캇), 그것은 개벽의 노래입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합니다(Magnificat anima mea Dominum).”라면서 시작되는 이 노래는 구원을 얻은 백성의 노래입니다. 예루살렘의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그리스도의 부활체험으로 구원의 실재를 자신들의 삶 속에 확신하여 부르기 시작한 노래입니다. 해서 이 노래는 구원의 백성 즉 교회의 노래입니다.
이러한 [마리아의 노래]와 흡사한 노래를 우리는 오늘 광복절에 부릅니다. “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하고 첫 구절을 시작하는 [광복절 노래]가 그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날은 사십 년 뜨거운 피 엉킨 자취니, 길이길이 지키세.” 하며 우리는 오늘 노래합니다. 그렇듯이 [마리아의 노래]와 [광복절 노래]는 구원 즉 해방이라는 동일한 실재를 기쁜 감회로 외치는 노래입니다. 개벽을 외치는 노래입니다.
구원과 해방, 그것은 실제적인 개벽인 것입니다.
그 개벽이란, 마리아라는 연약한 여인의 처지가 오로지 하느님 덕분에 위대한 삶의 처지로 바뀌게 되었듯이, 죄악으로 죽게 된 처지에서 구원을 얻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오로지 하느님 때문에만 살아갈 수 있는 새 세상을 구가하는 것처럼, 억압받던 우리 민족이 해방을 맞이하여 자유의 새 시대를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개벽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새 시대를 어떻게 엮어나가야 되겠습니까? 그러한 새 시대란 도도히 흐르는 역사의 현 시점에서 이제 달라진 마음가짐으로 내딛는 우리 스스로의 발걸음으로 시작됩니다. 그래서 역사의 도정(道程)에 대한 깨달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을 역사의식의 삶이라 합니다. 역사의식이란 내가 어떠한 길을 걸어왔으며 지금에 처한 위치의 길목에서 어느 방향의 새로운 길로 나아갈 것인가를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는 작금의 정치적 용어로 ‘역사청산’ 또는 ‘역사 바로 세우기’ 등에 대해서 국민들의 심사가 여러 갈래로 찢어지는 것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요즈음에는 7년 전의 남북정상회담 내용에 대해서 치졸한 정치 게임으로 국민들이 헷갈리고 피곤합니다. 그리 오래 전의 일이 아니고, 불과 대통령 두 번 바뀌는 짧은 과거사에 대해서 그러하니, 백 년 전이나 천 년 전의 역사에 대해서 전해지는 이야기는 오죽이나 각색이 심하고 믿을 수 없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일제 침탈의 쓰라린 과거에 대해서 분개하면서도 정작 친일인물들에 대한 역사적 처단문제로는 갈등이 격화되는 우리의 모습은 참으로 못난이들 행렬을 연출하고 있는 듯합니다. 우리의 그런 부끄러운 자화상은 더욱 중국의 이른바 ‘동북공정’이라는 계략에 ‘역사전쟁’에 잠깐 흥분하고 나서 정작 그 계략에 의한 남북 갈등 조장은 깨닫지 못한 채 집안싸움만 하는 꼴입니다.
이러한 우리 자신들에게 저는 말하고 싶습니다. “역사란 무엇인가?” 라고 심각하게 우리 자신을 향하여 질문하자고 말하고 싶습니다.
역사란 과거만을 일컫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란 미래의 지평으로 향하여 볼 때 그것은 ‘살아있는 역사’인 것입니다. 그것 즉 역사는 과거의 지평에서 보더라도 현재를 볼 수 있는 시각에서 과거인 것입니다. 또한 과거와 현재를 송두리째 싹둑 잘라내듯이 미래만을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역사는 늘 생물(生物)처럼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생물의 뿌리나 순을 잘라내는 몸통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사회에 진정 ‘역사철학’ 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역사는 책으로 읽히고 박물관에서 구경하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란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삶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른바 ‘역사 바로 세우기’나 ‘친일청산’이란, 과거를 잘라내 버리는 것이어서는 아니 됩니다. 과거를 사실대로 생생히 의식 속에 지닌 자만이 지금 내가 어느 모습으로 서 있는가를 자각하여 새로운 발걸음으로 미래를 향한 올바른 모색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역사’란 정치적으로 농단되는 것이 아닙니다. 7년 전의 남북정상회담 내용이 그 녹취록을 놓고 정치적 싸움질을 할 대상은 아닙니다. NLL을 가지고 선거에 악용하고 거짓으로 도배하여 국민의 시야를 회오리 속에 흔들어 놓는 것은 남북분단의 수치스런 민족사를 더욱 수치스럽게 하는 극악 범죄인 것입니다. 더구나 그것을 악용하여 민주주의를 역행하는 집권층의 행태는 민족사에 대한 용서할 수 없는 배신인 것입니다. 속아서 압제 받아온 민족을 더욱 짓밟는 죄악인 것입니다. 그래서 백성은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어찌 이렇듯 농락을 당하고 있는가?” 하면서 분연히 우리 자신을 책망해야 합니다. 그래야 역사적 불행의 사슬을 한 매듭이라도 끊어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 말하지요. “기록된 역사는 항상 승자의 편이다. 왜냐? 힘으로 이긴 사람이 기록한 것이 역사이니까!” 라고 말입니다. 이러한 말은 사실 못난이들의 패배적 변명만을 대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성모승천 대축일’과 ‘광복절’을 동시에 맞는 우리 한민족으로서는 번뜩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 ‘성모승천 대축일’의 복음말씀이 그 깨달음을 줍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마리아의 노래]입니다. “주님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습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루카 1, 48∼49)
저는 그래서 이 [마리아의 노래]를 다음과 같이 바꿔서 오늘 광복절 노래인양 부르고 싶습니다. “역사는 깨어있는 백성의 편이라네. 이제부터는 그 백성이 복되다 일컬어지리니 역사를 바로 알면 떳떳한 삶이 되는 까닭이라네. 하늘은 언제나 역사를 두려워하는 사람에게 밝은 세상 허락한다네.”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마리아가 하늘로 불려 올라갔듯이, 우리 또한 그렇게 하늘아래 참 삶을 통하여 하늘이 늘 우리 편임을 깨닫고, 우리를 속이는 세력에 당당한 모습을 보여야만 우리 삶을 스스로 향상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한 깨달음의 삶은 하늘을 영토로 삼는 영원한 자유의 그날을 향하여, 즉 구원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가장 큰 영토의 삶이 그것입니다. 하늘 아래 가장 큰 나라는 정의로운 나라입니다. 땅 덩어리가 넓고, 물질적으로(경제적으로) 덩치가 크고, 힘으로(군사력으로) 강대하다 해서 큰 나라가 아닙니다. 땅 덩어리는 어쩌다 빼앗길 수 있고, 경제적으로 어쩌다 망할 수 있고, 힘으로(군사력으로) 서로 겨누다가 함께 죽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억울함이 없는 정의로운 세상은 망하지 않고 계속 넓어져 갑니다. 왜냐? ‘정의로움’이란 쉬운 말로, 저울대가 기우러지지 않고 수평을 이루듯, 세상사는 모든 사람이 공정한 삶을 영위하는 그 땅은 기울어짐도 울타리도 업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곧 ‘평화’입니다. 그리고 그런 ‘평화’의 실현이 곧 ‘참 사랑’입니다.
그렇듯 정의롭기 때문에 가장 큰 나라, 즉 ‘하느님 나라’가 현실로 다가올 것임을 오늘 [마리아의 노래]는 선언합니다. 억울함을 당할 사람이 이제는 없는 그러한 세상을 우리말로 ‘하늘 아래 함께 사는 세상’이라 합니다. 그러한 나라를 찬양하는 마리아는 그래서 그러한 ‘하느님 나라’에 올라갈 수 있는 우리의 표상이 되셨습니다. 그 마리아가 하늘로 불려 올림을 받으신 사실은 그렇게 우리의 표상으로 지금 아직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의 희망을 확증해 줍니다. 그것은 어둡던 우리의 과거가 오늘의 현재를 통하여 새로운 미래로 펼쳐 나가도록 보증해 줍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과거를 솔직히 정리하고서 오늘을 떳떳이 살아가면서 밝은 내일을 내다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성모승천과 우리 민족 광복의 뜻은 그래서 하나의 메시지를 오늘 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개벽의 메시지’입니다. 역사가 새롭게 펼쳐진다는 것입니다.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42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년 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년 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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