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0주일, 2013 8월 18일 10시

만수리 공소 윤종관 신부


불타는 절기에... 

불 가운데를 비장하게 걸어야...!



지난 주일에는 탐욕으로부터의 해방을 주제로 하여, ‘웰빙의 참다운 실현은 하늘의 보물을 차지하는 일이라는 말로 강론원고의 맺는말을 삼았습니다. 그에 대한 저 나름의 문학적 표현을 빌려서 포기하고 베푸는 사람들은 자신 안에 이미 하늘을 담아 넣는 사람들이라고 말해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약속하신 말씀을 제 딴에 표현한 말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그 약속은 다음과 같이 하느님 나라를 우리에게 보증해 주시는 말씀이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하늘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로 하셨다.”(루카 12, 32)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확약하신 말씀이지요.


이러한 확약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상경하시는 길에 동참하여 따라오는 제자들을 독려하여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그 길은 사실 그분 삶의 정점이자 마지막 순간인 죽음을 향하여 가시는 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그 상경 여정은 사뭇 비장한 행보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상경 행로에서 예수님께서는 오늘의 말씀을 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듣는 예수님의 그 말씀에 대해서 저는 하느님 나라의 준비라는 주제를 달아 묵상해 보고 싶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맞이하려면 그렇듯 비장한 마음가짐이 요구됩니다. 예수님의 오늘 말씀은 다음과 같이 비장한 어투로 시작 됩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루카 12, 49)


예수님의 이 말씀은 종말론적 사건을 예고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상황이란 종말에 돌입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제 더 이상 태도 결정을 미룰 여가가 없게 된 시점에 이른 것입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라고 한국어 성경에 번역 되어 있습니다만, 성경 원문의 그리스 말을 직역하자면 나는 땅 위에 불을 던지러 왔다.”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섬뜩한 생각이 듭니다


봄철에 건조한 기후가 계속 되면 전국 여기저기에서 산불이 났다는 뉴스를 자주 접하는데, 그런 산불처럼 세상이 예수님께서 던진 불로 활활 타버리게 되는 무시무시한 상상을 하게 됩니다. 이즈음 서울광장에서 촛불집회가 열리고 있는데, 점점 참가인파가 불어나는 현상도 아마 이와 비슷한 현상 같기도 합니다. 국정원의 불법적 대선개입에 분노한 국민의 뜨거운 마음이 촛불로 번져가고 있습니다. 그렇듯이 사람들 사이에 공감이 뻗어가는 현상을 '요원의 불길'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해서, 그러한 사람들의 마음이 뜨겁게 이어지는 에너지를 제공하신 분처럼 예수님은 온 세상을 불로 태우고 싶다고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모든 사람을 한 불꽃으로 모으고 싶으시다는 뜻 같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온 세상을 요원의 불길로 태우려는 방화범(?)이신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해괴한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 12, 51) 이건 정말 이해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더욱 끔찍한 패덕을 예고하십니다. 골육상쟁의 예고입니다. 가족과 혈족들이 서로 싸우고 원수지간으로 갈라지게 될 거라고 말씀하십니다(루카 12, 5253 참조). 우리민족의 부끄러운 최근사로 6·25 전쟁을 일컬어 골육상잔이라고 말하지요. 다른 나라와의 싸움이 아니라 한 동포로서 서로 헤아릴 수 없는 목숨들을 참혹하게 죽였던 그 부끄러운 싸움을 우리 민족사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달리 생각하더라도 도무지 긍정적인 이해를 할 수 없는 골육상잔이었습니다. 이걸 우리 손자들과 손자들의 손자들에게 어떻게 변명하여 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러한 골육상잔이 거대 단위의 민족 안에서가 아니라 바로 우리 가족들 사이에 벌어질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예고하십니다. 그것도 예수님 당신 친히 분열을 일으키러 오셔서 그리 되게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이런 말씀을 하시는 그분을 이제는 따를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세상에 불을 던지러 왔다면서 그분은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라고 덧붙이셨습니다. 이 말씀의 그리스어 원문을 직역하면, “그 불이 이미 붙여졌기를 내가 얼마나 바라고 있는지!”입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서 저는 예수님께 참으로 죄송한 불경의 말씀을 드리자면, “당신은 아마 정신질환을 앓고 계신 분 아니세요?” 하고 여쭙고 싶을 지경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알아듣기 어려운 내용을 많이 접하는데, 특별히 오늘의 이 대목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른바 종말론에 관련 된 성경 말씀들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 종말론적 표현들이 묵시록에는 가득합니다. 그런 묵시적 종말론의 한 편린이 오늘 예수님의 말씀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런 종말을 전하는 묵시적 표현은 극단적인 역설(逆說 · paradox)이 대부분입니다. 그러한 역설은 논리적으로 설명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오리무중으로 잡히지 않던 것을 순간 퍼뜩 깨달아 얻을 수 있는 진리를 전하는 것이 그 역설적 언설입니다. 예를 들어서, 불가(佛家)에서 부처상을 때려 부수고 나니 부처가 보이더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러한 예에서 더 나아가, “교회가 망해야 예수를 만날 수 있게 될 것이다.” 하는 말도 있습니다. 그리고 저 개인적 체험으로 다른 예를 들자면, 어머니가 살아 계시던 때 하시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던 제가 어머니 돌아가시고 안 계시니까 두고두고 세월 갈수록 그분 말씀이 더 잘 들리게 됩니다. 이게 모두 역설이지요.


부처를 때려 부수고 부처님을 보게 된다든가, 교회가 망해야 예수님을 만날 수 있을 것 같다든가, 그리고 어머니 돌아가시고 나니까 어머니 말씀이 들린다는, 이러한 역설 속에서 우리는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깨달음을 처절하게 얻습니다. 그러한 역설로 예수님께서는 평화가 아닌, 분열을 주러 오셨다면서 세상에 불을 던지고 그 불이 활활 타오르기를 바란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역설입니다.


그렇습니다. 부모 자식 사이라면서, 가족 혈연관계라면서, 한 민족이라면서, 우리는 얼마나 모순적으로 서로를 상해하고 혹은 죽이기까지 합니까! 꼭 흉기를 들어 살해해서가 아니라, 마음을 멍들게 하고 서로에게 한을 심어주는 것은 그게 죽이는 거 아닙니까? 더욱 실제로는 상대방이 죽기를 은근히 바라면서 함께 사는 게 지옥 같은 사이는 얼마나 많은지요!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가, 늙고 병들어 아무 도움도 안 되면서 유산을 미리 내놓지 않는 부모와 자식 사이가, 생존경쟁의 세상에서 동업자와 친구들 사이가 사실상은 서로 미움의 대상들 아닌가요? 그래서 보험 타먹으려고 부모 자식 사이나 부부 혹은 형제 사이에 실제로 살해 행위를 저지른 참혹한 뉴스가 우리 사회에서 별반 놀랄만한 이야기도 아닌 실정 아니던가요? 이즈음에는 어느 부모가 어린 딸을 높은 데서 떨어뜨려서 하반신 장애자를 만들어 보험금을 노렸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이 우리 시대의 종말적 현상인 것입니다.


이러한 종말적 현상을 우리 사이에서 섬뜩 깨닫게 된 그 사실이 곧 세상에 불이 붙은 상황인 것입니다. 그렇듯 섬뜩한 불의 참혹함을 우리 눈으로 직접 우리 자신의 행위에서 간파할 수 있게 하시는 분이 당신 자신이시라고 오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불은 무엇입니까? 과학적으로 답하라면, 물질이 산화하는 현상이 불이라고 말할 수 있지요. 그렇습니다. 물질이 산소를 만나서 소멸되는 과정이 불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행위가 산소를 만나서 어떻게 되는가 알아차려야 합니다.


산소란 무엇입니까? 사실상 산소란 신선한 것이지요. 산소 없이는 우리가 살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땅에 산소가 없으면 질식해서 모두 죽을 것입니다. 제가 개인적 체험으로 몇 년 전에 히말라야 에베레스트의 베이스캠프 근처 칼라파타르라는 5,500m 가량의 고산 지대에 오른 일이 있습니다. 그곳에 오르면서 고산병 증후로 고생을 하였습니다. 그 까닭은 우리가 평소에 살고 있는 곳 보다 고산지대에 산소가 부족하기 때문이랍니다. 그렇듯이 산소는 우리 생명 보전에 절대조건의 요소입니다. 그렇지만, 사실상 산소 때문에 우리 몸이 늙어간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활성산소 때문에 그렇답니다. 그래서 흔히들 항산화 물질을 섭취해야 한다면서 건강 챙기기와 젊음 유지에 블루베리나 아사이베리 등이 좋다는 TV 선전을 따라 호들갑을 떠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나 너무나도 쉽게 관찰할 수 있는 바와 같이, 반들반들한 쇠붙이가 녹슬게 되는 것이 산소 때문이듯이. 그렇게 산소를 절대 필요로 하는 우리 몸은 동시에 산소 때문에 녹슬어가는, 즉 늙어가는 건 어쩔 수가 없는 노릇이지요. 이것이 산소의 모순입니다.


그러한 산소의 모순 따라, 즉 절대적으로 필요한 산소 때문에 물질이 녹슬어 부패하는 것을 산화(酸化)라 하고 산소 때문에 불타 없어지듯이, 절대적으로 서로 함께 해야 살 수 있는 우리 인간들 끼리 서로 때문에 괴롭기도 합니다. 그것이 우리 인간 삶 속에 내재한 종말의 씨앗입니다. 그 종말을 깨닫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에게 함부로 할 수가 없습니다. 함부로 했다간 부딪쳐서 뭔가 사단이 벌어집니다. 그 벌어지는 사단이 곧 입니다. 그러나 그 은 우리가 잘 활용할 수 있는 것이지요. 실제로 잘 이용해서 모든 편이를 제공해주는 것이 에너지요 전기인 반면, 그 에너지와 전기를 잘 못 사용하다간 큰 화를 당하듯이, 우리 인간들은 서로가 유익하게 불붙을 수 있는데 그럴 경우의 을 사랑이라 한다면, 그 반대로 까딱 잘못하여 서로가 화를 자초하는 을 지르기도 하는데 그걸 싸움이라 할 것이지요. 그래서 은 매우 상징적입니다. 뭔가 확실한 결과를 내는 것이 입니다. 잘 써서 꼭 필요한 혜택을 주기도 하지만, 잘 못써서 망하게도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은 정화(淨化)를 이루는 것이라 합니다. 광석을 불붙여 태움으로써 금을 골라내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은 종말을 상징합니다. 확실한 끝장을 보게 하는 의 그러한 상징성을 환기시켜 주시는 예수님께서 그 을 세상에 던지신다고 오늘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는 어찌 해야 하나요? 그분 따라서 예루살렘까지 함께 가야겠지요. 예루살렘 상경 여정에서 이런 종말의 현상을 예견하신 그분 따라서 우리도 그분의 종말인 십자가 사건에 합류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죽음을 건너가는 새 삶을 목표로 하는 것입니다. 마치 불을 지나서 금이 정련되어 나오듯이 말입니다. 이러한 불의 상징성과 더불어 우리는 이 세상의 부패에서부터 따로 골라내어진 존재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썩은 세상 사람들과는 전혀 다르게 살아가는 게 곧 우리의 종말론적 삶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상 사람들 누구나 사는 방식대로 적당히 시류에 편승한다면 예수님께서 제시하시는 하느님 나라의 징후를 알아챌 수가 없습니다. 정치적으로 잘못 된 것이 있으면 그건 잘못이다 하고 우리 자신들 사이에 지적할 수 있어야 하고, 속임수로라도 돈만 잘 벌어 윤택한 물질 풍요를 구가하는 졸부들의 세태 속에서 이건 아니다 하고 시선을 바꿔야하고, 손해를 감수하여 정의로움에 충실함이 인간 사이의 참 사랑 실천임을 깨달아, 자신은 외롭더라도 갈등의 세상에서 참 평화를 몸으로 실천하는 것! 이러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곧 에 정련 된 종말론적 삶인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십자가 사건의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 불을 지르러 오셨다는 그분 따라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는 신앙의 길은 불이 활활 타오르는 종말의 길입니다. 지저분한 부패의 시대를 마감하고 새롭게 맞이하는 우리의 시대는 그야말로 불타는 계절을 맞이한 때입니다. 이즈음 뜨거운 불볕더위의 막바지 절기를 거쳐서 결실의 가을이 오듯이, 그렇게 우리는 자신을 정련하는 불타는 절기 즉 종말의 시대를 건너가야 합니다. 종말이 시작되었음을 선언하여 불을 던지신 그분과 함께 말입니다. 그분과 함께 비장한 태도로 불 가운데를 지나서 우리는 가고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향하여!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43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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