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8주일, 2013 8월4일 10시

만수리 공소 윤종관 신부


삶의 안전망은?

소유와 포기, 그 엄청난 행복지수의 차이!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자기 형이 아버지의 유산을 독차지한다는 고자질이지요(루카 12, 13 참조). 그러자 예수님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루카 12, 15 참조)


저는 이러한 오늘 복음서를 읽으면서 그와 대조적으로 우애 좋은 어느 형제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이미 많이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탐욕(貪慾)을 버리고 형제지간의 우애를 소중하게 간직한 어느 형제의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의좋은 형제가 서울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금덩어리 한 개를 주었답니다. 그 금덩어리를 형은 아우에게 아우는 형에게 가지라고 서로 사양하면서 걷다 보니 한강(漢江)을 건너야 하는 나루터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나루터에서 또 다른 금덩어리 한 개를 줍게 되었습니다. 서로 한 개씩 가질 수가 있어서 즐거운 마음으로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데 아우가 갑자기 자기의 금덩어리를 강물에 던져버리는 게 아니겠어요!


그걸 본 형이 깜짝 놀라서 왜 그러느냐고 아우에게 물었습니다. 아우는 형에게 대답했습니다. “형님, 금 덩어리를 갖게 되고부터 형님이 안 계셨더라면 금 덩어리 두 개를 제가 다 가질 수 있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자꾸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의 이 금덩어리를 마저 없애버려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이러한 아우의 말을 듣고 형도 즉시 자기의 금 덩어리를 강물에 던져버렸습니다. 그리고는 행복한 마음으로 강을 건너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래서 그 형제가 금덩어리를 버리고 건너간 곳이라 해서 그곳을 투금단(投金壇)’이라 일컫게 되었는데, 그 후 그곳의 이름이 금덩어리의 포구라는 뜻으로 김포(金浦)’라 하게 되었답니다. 요즈음 신도시로 각광을 받아 부동산 투기 열기가 치솟아서 그 옛적의 아름다운 형제의 이야기와는 달리 땅을 금덩어리로 알고 서로 튀겨먹는 경쟁이 거기서 벌어지고 있답니다. 그냥 웃고 지나치기엔 너무나도 아이러니컬하게 그 지명의 유래가 훼손되고 있지요.


그렇듯이 저 아름다운 형제의 우애와 같은 서로의 자기 탐욕 포기를 통한 이른바 상생(相生) 추구는 우리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전설에 지나지 않는가 싶습니다. 세상의 것을 모두가 나의 차지로 하고자 혈안이 되어 탐욕의 전쟁터가 되고 있으니, 우리 시대는 천민자본주의의 세상입니다. ‘자본주의라는 말에다가 천민이라는 말을 붙여 쓰는 우리 자신들의 자괴감은, 오늘 읽는 루카복음서에서 자기 형을 예수님께 고자질한 사람의 태도에서 곧 우리 자신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갖게 합니다. 그야말로 모든 것이 돈에 달려있는 이 더러운 세상이 곧 오늘날 우리가 사는 천민자본주의의 세상입니다. 거기에는 형제간의 또는 친구간의 의리도 냉소적으로 팽개쳐집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니다 싶은 것에서는 서슴없이 마음을 떼어놓을 줄 아는 태도를 의리(義理)’라 말할 수 있는데, 그런 의리를 입에 담아 발음하기에는 우리 모두 자신이 없습니다. 부끄러운 우리 모습이지요.


사실, ‘아니다 싶은 것에서 서슴없이 마음을 떼어놓는 의리의 첫걸음은 진정 더러운 탐욕에서 벗어나는 자기해방인 것입니다. 탐욕에서 벗어남으로써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동시에 행복하게 하는 것이 참다운 사람 사이의 당당한 의리라 할 수 있습니다. 어느 우화에 나오는 수탉 같이 말입니다. 암탉이 병아리들과 함께 먹이를 찾느라고 고생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 수탉이, 남편이자 아빠로서, 덤불더미를 부지런히 발로 헤치면서 낟알을 골라주었습니다. 그리 하던 중에 반짝하고 햇빛에 반사하는 유리조각 같은 것이 튀어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수탉이 자세히 보니 그건 비싼 다이아몬드가 아니겠어요! 수탉은 혼자 뇌까렸습니다.: “우리 같은 닭에게 다이아몬드가 무슨 소용이야?! 괜스레 어린 병아리의 목구멍에 걸리기만 할 걸그리고는 수탉은 얼른 그걸 두엄 속으로 걷어차 버리고 낟알들만 골라냈습니다. 그러자 암탉과 병아리들은 먹고 싶은 낟 알갱이들을 행복하게 쪼아 먹는 것이었지요. 그걸 쳐다보고 있는 수탉의 모습은 어느 때보다도 그 벼슬이 멋있게 곧추서있는 것입니다. 자기 가족들에게 진정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는 수탉이었기에 허울 좋은 다이아몬드보다 가족을 지키는 가장의 자존심으로 빛나는 지도자였던 것입니다. 수탉의 벼슬은 그렇게 당당한 의리를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일국의 대통령도, 작은 교회 공동체의 사목자도, 진정 당당한 지도자라면 허울 좋은 정치적 명분보다도, 자신의 알량한 자존심보다도 진정 국가 민족에게 필요한 것을, 그리고 신자들에게 필요한 것을 챙길 줄 알아야 그 마음이 개인적 욕망에 얽매이지 않는 지도자로서 당당해질 수 있는 것이지요. 저 곧추선 벼슬의 수탉처럼 의리 있게 말입니다. 진정 모든 이에게 필요하고 크게 이루어야 할 일을 맡아서 앞에 나서는 사람이란 실상 모든 탐욕에서 해방된 사람이어야 그 권위가 서는 것입니다. 나의 생각만이 옳다고 우겨대면서 다른 많은 사람들의 생각을 내 판단의 테두리 안에 가둬놓으려 하는 것이야말로 그것이 물리적 무력(武力)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비인격적 권위로써 다른 사람들의 존재 자체를 내 욕망성취의 대상쯤으로 격하시켜 침해하는 비인간적 무력인 것입니다. 자고로 그러한 비인간적 권위란 사람에게서 사람을 보려하지 않고 유형무형의 힘으로써 사람을 업신여기는 야만성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렇듯이 사람을 업신여기는 야만적 사고방식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보다 물질적 관계의 힘에 의존하는 비굴함을 그 바탕으로 하는 것입니다. 오늘 어떤 사람이 유산상속의 문제로만 형제지간의 관계를 설정한 것이라든가(루카 12, 13 참조),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루카 12, 1621)에서 창고를 물질로써 가득 채우고 영혼의 행복을 추구한 착각이란, 인간성을 물질적 저차원에 매몰시키는 짓인 것입니다. 그 물질적 관계의 힘이란 곧 자기 자신이 지니고 있는 어떤 것들을 내세워서 인간을 그 밑에 두는 것이지요. 물리적 힘의 논리로 인간성을 저버리는 것이란 말입니다. 인간을 인간 아니게 하는 그 물질적 관계의 힘은 필경 인간을 물질보다 못한 것으로 여기게 합니다. 그 물질적 힘의 논리에 의존하는 사람은 결국 자신이 물질의 노예로 전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인간타락의 길은 결국 물질에 대한 탐욕으로 말미암아 인간 스스로 물질의 노예가 되는 과정으로 치닫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사람은 물질을 많이 소유하면 할수록 사람다움을 상실하게 됩니다. 물질은 그것이 적으면 적을수록 사람의 마음이 그것의 값어치를 제대로 알아차리게 됩니다만, 그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와 반대로 그 값어치를 사람의 마음으로 하여금 깨닫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물질이란 언뜻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할 것 같지만, 물질이 풍요로울수록 인간의 정신은 빈곤하게 됩니다. 물질은 그렇듯이 이중적 본성을 지니면서 인간과의 관계에서 역설적 소유형태를 낳게 합니다.


이러한 점에 대하여 미국의 풀톤 쉰 대주교(Fulton J. Sheen)께서 적절하게도 인간의 물질에 대한 역설적이자 두 가지 형태의 소유 태도를 예로 제시하면서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풀톤 J. , 행복에 이르는 7가지 비결, 조성식 역 5458쪽 참조).


장남감이 하나 밖에 없는 아이는 그 것을 소중하게 간수하지만, 많은 장난감을 가지고 있는 아이는 곧 싫증을 내고 어느 한 가지에 대해서도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소유하고자 하는 사물의 숫자가 늘수록 그 값어치 즉 그 질()은 감소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강물의 깊이가 얕아질수록 들판 위로 더욱 넓게 스며드는 것과 같습니다.


한편 그와 다르게 물질은 인간에게 역설적으로 작용합니다. 예를 들어, 어마어마하게 큰 집에 사는 부자는 그 가족에 비하여 소유하고 있는 그 너무나 큰 규모의 저택에 인간적인 사랑으로 따뜻한 가정의 체온이 아닌 싸늘하고 텅 빈 이 방 저 방의 공간만 소유할 뿐입니다.


그러면서 인간은 누구나 자기가 누릴 수 있는 범위를 훨씬 넘어설 만큼 소유를 증가시키려고 끊임없이 애를 씁니다. 그리 함으로써 삶의 안전망을 얻게 되리라는 욕망으로 인간은 발버둥 칩니다. 그러나 재물을 무한히 긁어모을수록 그 갈증 같은 욕망은 해소되지 않고 인간성 자체를 상실하는 껍데기 인간이 됩니다. 물질은 그 소유로써 인간을 안전하게 혹은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인간을 불안하고 허()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풀톤 쉰 주교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기고 있습니다.


재산이 부여하는 안전한 보호막에 대한 희망마저 포기한 사람은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부자이다. 그는 아무 것도 원하지 않으니 그 누구보다도 안전하다. 포기할 수 있는 힘이 소유할 수 있는 힘보다 더 크다. 아무도 온 세상을 혼자 소유할 수는 없다. 그러나 누구든지 온 세상을 포기할 수는 있다.”


이러한 풀톤 쉰 주교의 말씀은 오늘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루카 12, 1621)를 잘 알아듣게 합니다. 이 비유의 결론으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그 부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실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어리석은 자야, 바로 오늘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루카 12, 20)


그렇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제1독서에서 전도서의 저자 코헬렛은 고백하고 있습니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지혜와 지식과 재주를 가지고 애쓰고서는, 애쓰지 않은 다른 사람에게 제 몫을 넘겨주는 사람이 있는데, 이 또한 허무요 커다란 불행이다.”(코헬 1, 2 ; 2, 21)


정말 그렇지요. 이 세상에서 나의 것이라고 여기는 것들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실상 나의 것이 아니라 결국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는 것일 뿐입니다. 그것들은 따지고 보면 내가 돈을 벌어 차지한 것일 뿐이지요. 허나 돈을 잃으면 그것들을 내놓아야 할 헛된 것들입니다. 그렇다면 돈이라는 것은 물표(物標)일 뿐입니다. 헌데 그 물표가 나의 행복을 확실하고 영원하게 담보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상 돈이라는 그 물표는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물건을 서로 주고받고 돌려쓰도록 매개해주는 것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 돈 자체를 행복 자체인양 여기는 때문에 사람들이 그걸 차지하려고 싸우면서 서로를 해치곤 합니다. 그 매체일 뿐인 돈 때문에 불행이 사람들 사이에 들어오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한 인간들, 즉 재산을 쌓아둠으로써 영혼이 행복해지리라 착각하는 우리에게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자야, 바로 오늘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루카 12, 20) 이 말씀은 즉, 재물에 행복을 거는 순간에 우리에게서 이미 인간성은 사라진다는 뜻입니다. 진정 행복지수는 소유와 포기 사이에서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물질이 결코 우리의 삶을 보장할 수 있는 안전망은 아님을 분명히 깨닫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진정한 삶의 안전망을 예수님께서 제시하십니다. 삶의 안전망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제시하시는 말씀을 우리는 다음주일에 듣게 될 것입니다. 너희는 가진 것을 팔아 자선을 베풀어, 너희 자신을 위하여 해지지 않는, 축나지 않는 보물을 하늘에 마련하여라.”는 말씀입니다(다음주일의 루카복음서 12, 33 참조).


축나지 않는 보물을 하늘에 마련하여라.” 하신 예수님 말씀을 되새기면서 문득 다음과 같은 강우일 주교님(제주교구장)의 최근 말씀을 가슴에 담아봅니다.


도시를 여행해 보면 사방에, 도대체 저 정도면 건축비가 얼마나 들었을까 싶을 정도의 웅장하고 거대한 교회 건축물이 나날이 늘어가고 있다. 사회의 건축물들이 멋스러워지고 화려해지는 데 비례하여 천주교 성당도, 교육관도, 사제관도 따라서 커지고 화려해진다.


교우가 늘어나니 어쩔 수 없이 본당도 새롭게 세우게 된다 하여도 교회도 땅을 늘려가고, 부동산을 증식해 가는 경쟁 대열에 합류하지 않기를 바란다. 사제들의 거룩한 사목적 열정을 땅 사고 건물 짓는 데 다 낭비하고 탈진해 버린다면 그것은 우리 주교들이 감독직을 올바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자책감이 든다.


이스라엘은 몇 십 년씩 걸려서 건설한 거대한 예루살렘 석조 성전보다 광야의 보잘것없는 먼지투성이 천막 앞에 엎드렸을 때 훨씬 더 하느님을 전심전력으로 섬기고 예배하였다. 땅도, 거기에 사람이 손으로 지어 올린 건물도 우상이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복은 인간의 손으로 새긴 우상과는 비교도 안 되게 훨씬 더 놀랍고도 숨 막히는 아름다움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새 하늘과 새 땅이다.”


위의 글은 강우일 주교님께서 한국 주교회의 홈페이지에 기고한신 글의 끝 부분입니다. 강 주교님께서는 그 기고문의 중간에 다음과 같은 말씀을 쓰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을 부르셨을 때) 그들을 땅에 대한 집착과 소유욕을 초월한 자유로운 삶, 하느님께 모든 것을 의존하는 믿음의 삶으로 초대하신 것이 아니었을까?”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제시하신 삶의 안전망’, 그것은 하늘에 마련해야 할 축나지 않는 보물”(루카 12, 33)입니다.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40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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