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7주일, 2013년 7월 28일 10시
만수리 공소 윤종관 신부
누에는 뽕잎을 먹어야...
기도는 신앙인의 본질적 특성
마산교구의 십여 년 전 총대리 직에 계셨던 유영봉 신부님께서 오래 전에 ‘평화신문’에 강론 글을 연재하여 올리신 일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오늘의 연중 제17주일 주제로 ‘기도하는 습관이 가장 큰 유산’이라는 제목의 강론 글이 있었는데, 그 내용의 일부를 다음과 같이 소개합니다.
“교세통계를 보면 주일미사에 참례하는 신자는 교적신자의 28∼33%이고, 매일 가정기도를 하는 가정은 5%도 안 된다. 첫 영성체교리를 하고 기도를 잘 익힌 주일학교 학생이 5∼6개월 지나면 기도문을 다 잊어버리고 만다. 이유를 물어보면 집에서 함께 기도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부모들이 자녀의 기도생활에 전혀 관심이 없고, 있다 해도 부모들은 하지 않으면서 ‘너 혼자 기도하고 자라’는 정도가 고작이다. 주일학교에만 내보내면 신앙생활은 다 된 것으로 생각하거나, 학원 보내기에 바빠서 아예 주일학교엔 보내지도 않는 부모들도 수두룩하다.
미국의 경우 평균 부부 열 쌍 중에 대략 네 쌍이 이혼을 한다. 그러나 정기적으로 교회에 가는(주일을 지키는) 사람은 50쌍 중에 한 쌍이 이혼을 하고, 매일 가정에서 기도를 하는 사람은 1,011쌍 중에 한 쌍이 이혼을 한다고 한다. 같은 사회 환경에서 같은 어려움과 유혹을 겪고 살면서도 기도를 하는 가정과 그렇지 못한 가정은 엄청난 차이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유영봉 신부님의 위와 같은 지적이 있듯이, 신자라 해서 다 같을 수가 없습니다. 같은 신앙이라도 그것이 삶에 영향을 주는 것은 그 신앙인의 기도 여부에 따라 다르게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 마태오복음 13장에 말씀하신 ‘씨 뿌리는 비유’에서 볼 수 있듯이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드려도 길바닥이나 돌밭이나 가시덤불이나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들과 같이 다른 결과를 내는 것처럼, 신앙인 각자의 그 믿음이라는 것은 각자 나름대로 그 삶에 천차만별의 효력을 나타냅니다. 동일한 가톨릭교회의 신앙생활을 하는 신자들에게서 그 수준 정도가 아주 다른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어떤 신자는 비신자들로부터 칭송을 들을 정도로 그 믿음 생활의 향기를 발산하는가 하면, 어떤 신자는 신앙인으로서 부끄러울 정도로 세간의 비난을 듣기도 합니다. 어떤 신자의 삶을 보고는 세상 사람들이 가톨릭 신앙에 대한 호감을 갖게 되어 성당에 나오고 싶어 하게 되지만, 어떤 신자를 보고서는 다른 사람들이 실망하게 되어 그 때문에 교회의 선교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기도 합니다.
그렇듯이 동일한 가톨릭신앙인이라 하더라도 그 삶의 모습이 전혀 다르게 나타나는 그 근본적인 이유는 한 마디로 ‘기도’에 달려 있습니다. 즉 그 사람이 진정 기도하며 사는 사람인가 아닌가에 따라 신자의 모습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 여부에 따라 그 신앙심의 진위가 밝혀진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속된 표현에 ‘누에는 뽕잎을 먹고 살고,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산다’는 말이 있듯이, 기도를 하고 사는 사람이라야 진정 신앙인이겠지만, 기도는 하지 않고 세속 일만 좇는 사람이라면 세례를 받았어도 그 삶에 있어는 비신앙인인 것입니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기도를 하지 않는 사람은 신앙인이 아닙니다. 기도야말로 신앙의 본질적 특성입니다.
헌데, 신앙 상태가 엉터리인 사람이라도 기도를 하게 되면 참 신앙을 회복하게 됩니다. 수년 전에 우리 대전교구의 ‘청소년 사목국’에서 발행하던 ‘Agnus’라는 ‘청소년 주보’에 실린 이득규 신부님의 짤막한 글은 기도의 위력에 대하여 되새길 수 있는 내용이기에 다음과 같이 소개해봅니다.
“미국 클리블랜드에 사는 제임스라는 사람은 자신이 범한 사기죄 때문에 형을 받고 교도소에 수감되었습니다. 교도소에 수감된 그는 하루라도 빨리 교도소를 나갈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하고 궁리하던 끝에 그리스도인이 된 것처럼 가장하면 모범수로 인정을 받아 자연히 교도소를 빨리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인으로 가장하기 위해서 성경을 열심히 읽고 기도 모임에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석했습니다. 그렇게 위장된 그리스도인 행세를 하고 있는데…, 그는 이제 더 이상 그리스도인으로 위장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즉,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자연히 신앙의 기쁨을 알게 되었고, 신앙의 기쁨을 알게 된 후에는 빨리 석방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자연히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몇 달 후 가석방으로 교도소를 나오자 그는 즉시 성당에 나가기 시작했고, 지금 그는 교도소에 있는 죄수들에게 종교적인 지도를 하기 위해서 정기적으로 그곳을 방문하고 있습니다. 제임스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거짓으로 그리스도인이 되었지만 다행히도 하느님께서는 제임스를 진정한 하느님의 자녀가 되도록 이끌어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그리스도인이 기도를 바친다는 것은 바로 내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위해서, 내 자신이 변하도록 청하는 것입니다. 바로 ‘하느님, 저에게 무엇을 주십시오.’라는 식의 자기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제가 당신을 위해서 무엇을 하도록 변하게 해주십시오.’하고 간절히 바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참 신앙인의 기도란 자신의 욕구를 성취시키려는 부르짖음이 결코 아닙니다. 참 기도란 하느님의 뜻을 우리 삶에 실현토록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참 제자답게 바치는 기도와 그 방법에 대하여 오늘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가르쳐주십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참 기도는 아주 단순하게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주님 기도’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 이것은 진정 사랑과 신뢰로 하느님께 말씀드리는 자녀의 태도인 것입니다. 그분을 진정 ‘아버지’라 부른다는 것은 그 하느님께서 우리를 아끼고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깨우쳐 발설하는 호칭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루카 11, 2)하고 간구한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하느님을 한 아버지로 모시고 아버지의 사랑을 함께 받고 살게 하여 주시기를 비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이라면 세상 모든 사람들을 ‘형제자매’로 보는 마음으로 그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사랑을 함께 배우고 나누고자 하는 참 신앙의 경지에 들어가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진정 그렇게 하느님을 아버지로 알아 뵙는 신앙인이라면 자신의 삶을 세상의 기준으로 내세우지 않습니다. 자신의 위치를 늘 하느님의 자녀로 의식하면서 삶을 일굴 것입니다. 옛적에 프랑스의 왕 루이 15세에게는 매우 오만방자한 공주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왕의 딸이라는 것을 내세워서 다른 사람들을 늘 깔보고 괴롭혔습니다. 그 공주에게 괴롭힘을 당하던 시녀 한 사람이 하루는 공주를 깨우쳐 주려는 결심으로 용기를 내어 한 마디 했습니다. “공주님, 공주님은 저에게 매우 큰 잘못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공주는 그 못된 성격에 화를 벌컥 내면서 소리쳤습니다. “아니, 시녀 주제에 감히 나에게 그런 말을 하다니! 너는 내가 왕의 딸인 줄 모르느냐?” 그러자 시녀가 점잖게 대답했습니다. “공주님은 기껏 왕의 딸이지만, 나는 하느님의 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알아 뵙는 신앙인이라면 세상의 기준으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눈에 비치는 같은 자녀로 알아보고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만나는 우리 주변의 모든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하느님께서는 아버지로서의 마음으로 대하신다고 믿어야 합니다.
어떤 사제가 자동차를 운전하여 시내에 나갔다가 주차할 곳을 찾아 헤매던 중 급한 김에 주차금지구역에 차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꾀를 내어 쪽지에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저는 천주교 신부입니다. 급한 일이 있어 잠깐 여기에 주차를 합니다. ‘하느님 아버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가 용서하듯이 우리 죄를 용서하소서!’” 하고 ‘주님 기도’의 한 구절까지 곁들여 적은 그 쪽지를 차창에 꽂아놓고 일을 본 다음에 돌아와 보니, 그 쪽지의 글귀 밑에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저는 양심대로 법을 지키는 단속반원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기도 합니다.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소서!’” 그리고는 쪽지 옆에 벌금 딱지가 꽂혀있었습니다. 이 우스개는 마산교구 구병진 신부님의 ‘웃으면 천당 가요’라는 책에 재미로 실려 있는 이야기입니다만,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바대로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뜻을 살펴서 자녀로서 자신의 행동거지를 되돌아보는 마음을 갖게 하는 우스갯소리 이지요.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우리의 일상에 늘 그렇게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시기를 바라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청하여라… 찾아라… 두드려라”(루카 11, 9)고 가르치신 것은 아버지이신 하느님에 대해 끊임없는 신뢰심을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루카 11, 13)하신 오늘 복음서의 예수님 말씀은 아버지이신 하느님께 늘 그렇게 자녀답게 기도하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 신앙의 척도는 그렇듯 아버지이신 하느님께 늘 그러한 자녀다운 관계를 유지하는 기도에 달려있습니다. 기도는 곧 자녀로서 아버지의 뜻을 살펴 살고자 하는 삶 그 자체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신앙의 숨소리입니다. 숨을 쉬지 않는다면 그게 곧 죽음이듯이, 우리가 기도하지 않으면 진정 신앙으로 사는 생명이라 할 수 없습니다.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뜻으로 사는 생명이어야 진정 신앙생활입니다. 기도는 그렇듯이 참 신앙의 삶을 유지하고 성장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치 누에가 뽕잎을 먹음으로써 비단실을 뽑아내는 존재가 될 수 있듯이 우리는 기도로써 아버지 하느님의 생명을 늘 이어 살 수가 있습니다. 솔잎을 먹는 송충이는 비단 실을 뽑아낼 수 없듯이, 기도 없이 세상일에만 골몰한다면 인생의 참 삶을 영위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뽕잎을 먹음으로써 비단실을 뿜어낼 수 있는 누에처럼 늘 기도로 삶으로써 값진 참 인생의 길을 가는 존재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라 할 것입니다. 신앙인의 본질적 특성은 딱 하나 ‘기도할 줄 아는 삶’인 것입니다. 비단실 뽑아내는 누에의 입은 본래 뽕잎을 먹는 입이듯이 말입니다.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39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년 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년 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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