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4주일, 한국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순교자 대축일 이동 경축
2013년 7월 7일 10시 만수리 공소 윤종관 신부
속아 살아도...!
허탕 친 삶
7월 5일은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입니다. 지난 금요일이었지요. 그러나 교우들과 함께 이 축일을 지내기 위해서 본당마다 오늘 주일을 겸하여 이동 축일로 지내기도 합니다. 저는 공소에서 평일미사를 혼자 지내기 때문에 지난 금요일(7월 5일 본 축일의 날)에 저의 대선배이자 맏형이신 김대건 신부님을 기억하며 나름 의미 있게 묵상하여 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교우님들과 함께 하는 이동 축일의 미사에 저의 묵상 내용을 말할 자신이 있을까요! 솔직히 말씀드려, 자신이 없습니다. 김대건 대선배님 앞에 저는 부끄러울 뿐입니다.
그런데 사실상, 김대건 신부님에 대해서는 제가 눈으로 직접 본 것이 없습니다. 신학교 성당에 모셔진 그분의 유해 일부가 가림 보에 싸여 있는 것을 본 것 외에는 그분을 본 일이 없지요. 다만 그분의 삶에 대해서 문헌이나 여러 강론을 통해서 들었지요. 그러면서 후배인 제가 그분과 똑같은 삶을 산다는 것은 도무지 불가능하게 여겨집니다. 제가 사는 이 시대에는 신앙의 이유로 직접적인 박해나 죽음을 그분처럼 당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고, 저 같은 연약한 인간이 감히 그분과 같이 영웅다운 길을 걸을 엄두가 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7월 5일 본 축일의 복음 성경은 마태오 복음 10장 17∼22절입니다. 그 날의 복음은 제자들에게 ‘박해를 각오하라’ 하신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그런데 이 명령은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저 자신에게 내려진 것으로 받들기가 너무 벅차기 때문에, 오늘은 공소 교우님들과 함께 오늘의 연중 제14주일 미사의 복음 말씀으로 미사를 봉헌하면서 저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자 합니다.
이렇게 오늘 주일의 복음으로 저의 삶을 뒤돌아보려 하다가, 문득 10년 전의 오늘과 같은 연중 제14주일에 교우들 앞에 제가 드렸던 강론의 원고를 찾아보게 되었습니다. 2004년 7월 4일의 원고인데, 그건 그 며칠 전 6월 30일에 저의 선배 신부님 장례식을 치른 주말에 쓴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아래와 같습니다.
2004년 7월 4일의 강론 원고
지난 주 수요일에 우리 대전 교구는 원로 사제 한 분의 장례식을 거행했습니다. 프랑스 출신 선교 사제로서 우리 한국에 오셔서 우리 대전 교구에서 만 50년 동안 선교하시다가 지난 월요일(6월 28일) 선종하신 오 요한 신부님의 장례식이었습니다. 그분이 ‘파리 외방 선교회’ 소속의 젊은 나이 25세의 선교사로 이역만리 우리 한국에 오시던 때는 6,25 전쟁 직후였습니다. 전쟁의 참화로 당시 우리나라 국민의 마음과 삶의 터는 그야말로 황폐 그 자체였던 그 시절의 가난과 질병을 우리와 함께 하면서 그분은 자신의 청춘을 바치고 우리 애환의 역사에 75세의 생을 바치신 분입니다. 본래 프랑스인으로서의 그분의 성함은 Jean Olivier 입니다만, 그분은 우리 한국 사람들과 동화되기 위해서 스스로 한국식으로 ‘오 일복’이라는 이름을 쓰시면서 한 생을 마치고 그 몸을 이 땅에 묻으신 분입니다.
그 오일복 신부님은 생전에 자신의 이름을 일컬어 일복이 많은 사람이라는 뜻이라고 농담 삼아 말씀하시곤 했는데, 사실 그 ‘일복’이라는 이름은 한자로 ‘향기 馥’자를 써서 하나의 향기 즉 ‘그리스도의 향기’ 만을 좇아서 살겠다는 그분의 삶의 지표를 뜻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렇듯이 그분은 사제로서 자신의 한 생을 오로지 주님 뜻을 따르는 삶으로 사신 분이었습니다.
오로지 ‘그리스도의 향기’ 만을 좇아서 사셨던 그분의 오롯한 마음은, 지나온 우리나라의 전쟁 후 50년간에 그분이 우리 한국 사람들을 위해 바치며 살다가 이 땅에서 세상을 마친 삶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젊은 나이에 고향을 떠나 이역만리에서 일생을 마친 그 50년이라는 삶이란 말이 50년일 뿐이지, 그 반 백년간의 외로운 투신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알기로는 ‘파리 외방 선교회’의 내규에 의하면 대략 8년에 한번 꼴로 본국에 몇 개월간 휴가를 갈 수 있답니다. 그렇다면 그분은 고국 떠나 한국에서 선교하면서 50년 동안 여섯 번 정도 고국의 부모형제를 만나보러 갈 수가 있었을 뿐입니다. 장남이었던 그분은 그 50년 동안에 부모님 세상 떠나실 때도, 그리고 형제들 중 몇 명이 세상을 떠났을 때에도 뒤늦게 소식만 들었을 뿐, 그 아픈 마음을 이역만리에서 홀로 달래며 기도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던 것입니다. 그분은 무엇 때문에 그러한 고독 가운데 인간적 정리(情理)마저 가슴 깊이 묻어가며 살았던 것일까요? 귀양살이 아닌 귀양살이처럼 그렇게 살다가 간 한 삶의 뜻은 무엇일까요?
저는 그분의 관을 앞에 두고 그분의 장례미사를 사제단 공동 집전으로 봉헌 하는 가운데 그분의 영정을 바라보면서 한 후배로서 저 자신 걸어온 사제로서의 지나온 삶이 부끄러워졌습니다. 정해진 기간을 두고 또는 한시적인 약조 하에서, 군종 사제의 길로, 혹은 외국으로의 파견 명령을 받고 떠나던 때에 저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기가 어찌 그리도 힘들었던지, 그러한 저의 연약한 의지로 저의 소명 수행이란 어쩌면 피동적인 태도였던 것이지요. 그러면서 한 교구 내에서도 지낼 만 하던 곳에서 다른 곳으로 떠나야만 하던 때마다 짐을 싸면서 왜 그리 많은 미련까지도 함께 짐에 넣어 싸곤 했던가, 그러한 저의 발자취에는 세속적 현실의 때를 무쳐놓았던 것이지요. 그러한 저의 피동적인 태도와 때 묻은 발자취는 오롯이 추구할 그리스도의 향기보다는 현세의 악취로 휘감겨 있는 것이었지요.
오 요한 신부님, 그분은 자기 자신에게 매우 엄격한 사제였다고 그 장례미사에서 주교님께서는 강론 중에 회고하셨습니다. 세속적인 욕구와 인간적 본능을 억제하여 자신을 그렇게 채찍질 하지 않고서는 언제 어디에라도 자신의 몸을 내놓을 수 있는 선교사로서의 소명을 다하지 못할 것입니다. “마치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루카 10, 3)과 같은 심정으로 제자들을 파견하시는 주님의 명령을 따른다는 것은 그렇듯 자신을 돌보지 않는 투신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돌보지 않는 투신, 그것은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루카 10, 4) 하시는 그리스도의 제자다운 삶인 것입니다. 그렇듯 그리스도의 제자답게 나아가는 삶의 길은 우리가 오늘 기억하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일생을 통해서도 극명하게 제시 됩니다. 15세의 어린 소년으로서 주님의 제자가 되는 길에 들어섰던 그분은 이역만리 떠나가 10년 동안 쌓은 수행의 덕을 천신만고 끝에 가지고 고국에 돌아와서 그 쌓은 덕의 빛을 펴볼 겨를도 없이 1년 만에 형장의 이슬로 스러진 것이었습니다. 김대건 신부님, 그분은 그렇게 우리 현세적 안목에서는 그 투신이 순간 무위로 끝나버리는 찰나에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형리의 칼날에 지금 곧 내 목이 끊어지면 나에게는 이제 영원한 삶이 시작됩니다.”하고 말입니다. 이러한 김대건 신부님의 처형 직전 선언은 오늘 복음서에서 말씀하신 예수님의 선언과 같은 것입니다.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루카 10, 20)하시는 예수님의 선언을 따라 기꺼이 삶을 바치는 것이 그리스도 제자의 길인 것입니다.
우리 한국 모든 성직자들의 최고의 모범(수호자)이시자 맏형인 김대건 신부님처럼, 저의 기억 속의 오 요한 신부님께서는 50년 한국 선교의 삶 동안 또한 저 같은 후배 사제들을 오롯이 주님 뜻에 따르도록 그 모범을 보여준 대선배였습니다. 젊음을 지니고 이역만리 찾아왔던 한 생애가 남겨준 것은 오로지 그 늙어 스러질 때까지의 투신을 보여준 몸 하나 이 땅에 묻히고 마는 그것이었습니다. 그분이 한평생 지녔던 것은 오로지 25세 청춘으로 이 땅에 던졌다가 75세로 이 땅에 묻힌 그 몸 하나 뿐이었습니다. 그분에게서 이 땅에 남겨진 것은 그 어떤 명예도, 그 어떤 재물도, 그 어떤 자손도,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오로지 이 땅에 던져서 쓰다가 소진된 그 보잘것없는 몸 하나 이 땅에 묻은 그것뿐입니다. 그러나 비록 이 땅에 썩어 없어질 그 몸 하나로써 그분이 남겨 놓은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향기’ 그것 한 가지 뿐입니다.
‘그리스도의 향기’, 즉 오 요한 신부님께서 자신의 한국식 이름을 ‘오직 하나의 향기’라는 뜻으로 ‘일복(一馥)’이라 하였던 그것처럼 저 자신도 그 분의 후배답게 오직 주님의 뜻을 따라서만 걸어가고자 하였던가 하는 반성으로 저의 걸어온 발자취를 그분의 장례미사에서 짚어보면서 저의 부끄러운 마음은 그분의 영정에서 건너오는 미소에 눈길을 마주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한 부끄러움으로는 감히 김대건 맏형님의 생애를 저 자신의 입으로 소개하기조차 두려울 뿐입니다.
그렇듯 부끄러운 심정인 저의 귀에 오늘 위대한 사도 바오로는 자신의 삶에 대한 다음과 같은 말씀을 들려주면서 저를 더욱 부끄럽게 하십니다.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내 쪽에서 보면 세상이 십자가에 못 박혔고 세상 쪽에서 보면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갈라 6, 14) 이러한 바오로 사도의 말씀의 뜻은 곧, 그리스도 제자라면 이 세상을 이미 건너간 사람의 삶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써 세상을 이기셨듯이 그리스도 제자의 삶이란 세상으로부터 해방된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진정 김대건 신부님의 후배다운 사제의 길이라 할 것입니다. 그분이 십년공부 도로아미타불 되더라도 그것을 아무 미련 없이 떨쳐버리고 죽을 수 있었던, 그렇듯 초연한 발걸음으로 세상을 건너갈 수 있는 태도가 그것입니다. 자신의 삶 전부가 무위로 끝나더라도 후회 없는 길을 가는 사람의 신앙이 그것입니다. 속된 말로 허탕을 치더라도 후회 없는 삶이 우리의 신앙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청춘으로 이역만리 찾아와 50년 세월을 고독으로 투신하면서 오로지 그리스도의 향기만을 추구하다가 홀연히 세상을 떠날 수 있었던 오 요한 신부님의 삶이 그것이었던 것입니다. 일생을 살아도 남길 것 없이 세상을 떠날 수 있는 그리스도 제자의 삶이 그것입니다. 속된 말로 속아 살았어도 그리스도 때문에 행복한 일생을 사는 삶이 그것입니다.
이러한 반성과 더불어 저는 예수님의 오늘 말씀을 다시 저 자신의 뇌리에 새겨둡니다. 어디를 가든지 거기 머무르면서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이집 저집으로 옮겨 다니지 마라.”(루카 10, 7)고 하신 예수님 말씀이 그것입니다. 내가 이 세상 어디로 파견 받아 가든지 거기가 곧 나의 몸을 묻을 땅으로 알고 투신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어디에 가서 어떤 사람들을 만나더라도 거기 사는 신자들 가운데서 그 처지에 맞게 행복한 마음으로 주님의 참다운 제자답게 투신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투신이라면 오늘 이 순간의 나의 삶이 곧 “하늘에 기록될”(루카 10, 20) 나의 삶인 것입니다. 즉 세상으로부터 해방된 그리스도인의 삶인 것입니다. 그것은 곧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이 걸어가야 할 신앙의 길입니다.
위와 같은 저의 10년 전 강론 원고를 되읽으면서 오늘 저 자신을 더욱 부끄럽게 하는 사연을 접하고 있습니다. 10년 전에 선종하신 오일복 선배 신부님과 동향 동기 동창으로 우리 한국에 함께 파견되어 사목하신 또 한분의 프랑스 신부님의 사연을 최근에 대하면서 저의 마음은 부끄러움과 착잡함에 휩싸입니다. 오일복 신부님과 한 마을에서 출생하시고 함께 성장하여 한날한시에 사제되어 함께 한국에 오셔서 아직 생존하여 계시니 친구 사이에 10년을 더 살고 계시는 분이시죠. 그러니 그분은 사제생활 60년이 되신 분이십니다. 일컬어 올해가 그분의 ‘회경축(回慶祝)의 해’ 이지요.
그런데 그분의 한국생활 60년을 맞이한 이즈음에 한국에서 지내실 수 없는 딱한 사정이 생겼습니다. 열흘 후에 프랑스로 돌아가셔야 할 입장이신데, 그분 스스로 항공권을 마련할 돈도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용돈이 생기면 일하시던 교회기관에 몽땅 바치고 버스 탈 돈을 타서 쓰시던 분입니다. 가진 것이라고는 수십 년 유행에 뒤진 헌옷 몇 가지와 책 몇 권, 그리고 한국에 오실 때 들고 온 골동품 같은 가방뿐입니다.
그분은 저의 소신학교 입학을 추천하신 신부님이십니다. 저의 어렸을 적 시골 본당 신부님이셨지요. 본당에서 20리 떨어진 공소의 촌 꼬마인 저를 눈여겨보시고는 신학교 가라고 부추기시더니, 추운 겨울날 20리길 찾아오셔서 원서마감이 임박하다면서 서류에 저의 부모님 도장을 받아 가셨던 분입니다. 그러고는 즉시 머나먼 대전의 교구청에 그 서류를 가지고 가셔서 주교님 승인을 받아 서울로 발송해주셨지요. 그분은 소위 그렇게 저의 ‘아버지 신부’ 노릇을 하셨습니다. 제가 막상 소신학교 입학할 때는 그 당시 지참물이었던 이불을 원조구호물품에서 좋은 것으로 골라서 마련해주셨습니다.
제가 신학생 생활을 하던 15년 동안에 그분께서는 다른 여러 교구에서 일하셨고, 제가 사제가 될 때에는 저에게 와보시지도 못했습니다. 그 후로 그분은 소위 은퇴 사제로서 드러나지 않는 일을 맡아 끊임없이 마치 보조자처럼 사셨습니다. 60년 세월에 공소 건물을 수없이 지으셨고, 도시 교구에서는 변두리 빈민가 본당들을 창설하셨습니다. 병들고 노쇠하신 입장에서는 우리 한국교회의 박해시대 선교사들의 문헌을 번역하시면서 교회사 연구의 밑바탕 역할을 하셨습니다.
그러한 분의 쓸쓸한 귀향길에 비행기표 마련마저 어려운 사연 앞에, 일컬어 ‘아들 신부’라는 저의 마음이 부끄럽고 착잡합니다. 그 부끄러운 저의 마음이란, 그분처럼 제가 빈 털털이로 살아왔던가 하는 반성에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 신부님과 오일복 신부님은 그렇게 빈 털털이로 사셨습니다. 일생을 살고 남은 것이 없습니다. 허탕 친 삶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하신 말씀,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주는 것이 있으면 그것이나 먹어라.”하신 당부를 그렇게 이역만리 프랑스에서 오셔서 50∼60년 동안 철저하게 실천하신 그 선배 신부님들 앞에 저는 부끄럽습니다.
그리고 십년공부 도로아미타불 되더라도 그것을 아무 미련 없이 떨쳐버리고 죽을 수 있었던, 그렇듯 초연한 발걸음으로 세상을 건너가신 김대건 대선배님 앞에 오늘의 후배로서 저는 할 말이 없습니다.
철저히 허탕 치신 저의 선배님들 앞에 저는 그렇습니다. 할 말 없습니다!
“내 쪽에서 보면 세상이 십자가에 못 박혔고 세상 쪽에서 보면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하신 바오로 사도 앞에 저는 뭐라 대답할 수 있을까요!
“속아 살아도… 그게 행복이지! 십자가가 그런 것이니까…”
우리 하부내포 지역의 성지 '삽티' 그리고 '서짓골'에 묻히신 안토니오 다블뤼 성인 주교님과 두 분 성인 선배 신부님, 그리고 황석두 성인 회장님과 장주기 성인 회장님께서 도로아미타불 처럼 된 분들이랄까…!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36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년 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년 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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